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29
Chapter. 19. 술래잡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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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는 혼란스러웠다.
눈은 과거를 더듬는 노인과 그의 집을 살피고,
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머리는 ‘워로드’로 추정되는 이의 영상을 마치 그의 기억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억처럼. 기억처럼이라….
‘이건, 그의 기억인가?’
‘그렇다면,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알 수 없는 충동과 꿈에 시달려온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릿한 동시에 선명한 듯, 순간에 대한 강렬한 기억.
왜 그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만 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하이드는 낡은 탁상을 두고 마주앉은 노인에게 신중히 말을 골라 질문했다.
“두 번 찾아왔으며, 한번은 살려주고 한번은 모두 죽였다. 맞습니까?”
“그래.”
“각각 어느 시점이었죠?”
“첫 번째는 12년쯤 전이었지. 다시 찾아왔을 때는 4년 전 이었고.”
“12년 전과 4년 전이라. 만나게 된 계기는?”
“….내가 쓰러져있던 그를 구했네.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참상속에, 살아있던건 그 혼자 뿐이었지.”
[구했다]는 말과 함께 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마디가 툭 불거져 나왔다.“그때 그 살인마를 데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늙어서 흐릿해진 눈에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후회.
노인이 과거를 곱씹는 사이, 하이드는 그의 침묵 뒤에 남겨진 일들을 보고있었다.
선로의 교차로에 세워져 서로 쏴갈긴 듯 탄흔이 가득한 열차가 여섯 대.
넝마가 된 열차들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방법으로 터지고 찢겨진 사람들.
그리고 그 전투의 흔적속을 누비며 부서지지 않은 무기와 장비, 열차 부품등을 뒤지고 있는 10여년 전의 노인과,
『흐어어억!』
참상 속에서 기어나오는, 그 남자.
‘열차 여섯 대. 기관사와 오러, 샤드나이트를 포함한 정예 전력만 최소 80 이상에, 각종 뮤트 사체도 다수 섞여있군.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아.’
‘교차로. 부서진 대형 채굴 장비. 저건 마정석을 캐는데 사용하는 장비로군. 규모로 보아 채산성에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마정석 광산이야.’
‘두 인간 집단이 마정석 광산을 두고 싸웠으며, 전투가 길어지며 소란을 듣고온 뮤트까지 달려들어 삼파전이 벌어졌다. 대형 던전을 둔 최전방에서 가끔 일어나는 바보 짓거리로군.’
땅이 제일 귀중한 자원이라지만, 그 땅을 지키는데 도시의 뿌리가 뽑혀나갈 정도라면 아무리 귀한 땅이라도 포기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아마도 영상 속 두 집단도 그런 식으로 후방의 지원이 끊어진 최전방 전초기지의 사람들일 터. 매일 마력 포대가 녹아내릴 정도로 쏴대야 하는 최전방인 만큼 도시에 인접한 마정석 광산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이 가느다란 생명줄을 둘로 나눌수는 없으니 인접한 두 전초기지 사이에 쟁탈전이 일어난 것이다.
끼익- 끼익-
그렇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지는 두 집단 사이로, 남자가 끼어들었다.
치지이이—-익!!!!
“윽!”
순간, 끔찍한 잡음과 함께 손톱으로 쇠를 긁어대는 것 같은 감각이 머릿속을 뒤덮어버렸다.
기억을 덮어버릴 정도의 강렬한 감각. 총성, 파육음, 인간과 뮤트의 것이 한데 섞인 비명소리.
‘이 자식, 진짜 괴물이잖아?’
처음으로 봤던 영상은 무른 땅에 나아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의 것은 긁어낸 듯 마구 갈라진 영상이나마 흐릿하게 그의 전투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 저 미친….. 이 파고들…. 못하게 해!’
‘아아아악!’
‘빌어먹게 빨ㄹ…. 사선이 겹-’
‘….게 이용당하고 있다!’
버림받은 작은 전초기지라곤 해도, 열차라는 한정된 이동수단 덕분에 일반 병력이 없다고는 해도, 뮤트를 상대로 암반지대를 지켜낸 전초기지 둘의 총력이다. 거기에 대형 던전에서 몰려온 뮤트의 군세까지 더해진 난전.
그 발디딜 곳 없는 포화 속을 마음껏 누비는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거치용 화기로도 오버스펙인 대형 아케인슈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실력.
압도적인 화력과 폭압으로 만들어낸 공백을 터널처럼 이용하며 자신에게 집중된 화력을 서로다른 세 집단을 향하는 칼처럼 휘두르는 그 실력은 개인의 전투력을 넘어 전장 전체를 그의 눈 아래 두고 주무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그러한 경지에 이른 움직임으로도 열차의 범위 포격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 했는지 그 또한 그 자리에 얽혀 죽어간 다른 이들 위에 쓰러지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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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긴….”
“누워계시지요. 기사님이 쓰러져 있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두고 올 것을.”
“이 늙은이가 마냥 이유없이 모신 것은 아니니 겸양 떠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몸을 추스르신 다음에 저희의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사,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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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침대 위에서 일어난 남자의 모습과 함께 침묵에 잠겨있던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도시에서도, 선로에서도 꽤 떨어진 곳에 살았네. 텔드랏은 완전한 평원이라 그런 곳이 잘 없지만, 로드릭 지방은 여기저기 작은 암반지대가 꽤 있거든.”
“….은퇴한 샤드나이트였습니까?”
“내가 아니라 아들이. 운이 좋은 경우였거든. 벌 만큼 벌 었고, 기억도 제법 온전한 상태에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도 찾았고. 덕분에 아들은 샤드나이트의 삶을 그만두고 싶어했는데, 그러려면 세상을 등지는 수밖에 없었지.”
샤드나이트의 말년은 대부분 비참했다. 그간 흡수한 파편을 탐낸 파편사냥꾼에게 사냥당하거나, 그들에게서 살아남기위해 강해진 끝에 기억을 먹혀 괴물이 되거나, 아님 전투중에 죽거나.
그래서 ‘은퇴’를 결심한 샤드나이트는 지금 노인이 말한 것처럼 아예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바위 위, 아니면 도저히 못 쓸 정도로 작은 암반지대에 작은 집을 짓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서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사는 것.
하이드도 그런 은퇴한 샤드나이트만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파편사냥꾼을 본 적이 있어서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다.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그렇기 가끔씩 먼 도시로 나가 기사생활하며 벌어둔 돈을 물과 식량으로 바꿔줄 사람과 함께 사는게 보통이며, 그렇기에 주로 가족과 함께 칩거하곤 한다고.
노인의 아들은 그와 비슷한 마음인 늙은 샤드나이트 둘을 포함해, 총 세 가족이 함께 은퇴하여 칩거하게 되었다고 했다. 빗물과 이슬을 수집하는 장비를 사고, 맛은 없어도 불모지에서도 자라는 버섯 종자를 구하고, 유적지를 탐사한다고 하며 조금씩 사들인 보존식량을 아무도 모르는 바위 위에 숨기고, 집을 짓고.
그렇게 가까스로 이루어낸 평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숨어사는 사람들이 전투지에서 고물을 줍는 것도 모자라서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은거지를 노출해야 할 정도로 돈이 떨어졌나보군요.”
“그것도 있지만, 아들 내외가 아이를 가지게 되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아들 녀석은 자기가 샤드나이트라는 이유로 녀석의 아들이 이 불모지에 갇혀 사는 것을 슬퍼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워로드를 살려서 데려온겁니까?”
“….무장이 굉장한 기사였으니까. 매번 쪼들리는 전초기지에 매인 녀석들은 그런 값비싼 파편무구를 장비할 수 없지. 인근 대도시에서 파견된 샤드나이트일테니, 은혜를 입혀놓으면 손자와 며느리를 위한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만 안 하던 짓을 하고 만거야…..”
그렇게, 워로드는 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그들의 집에서 몸을 추슬렀다.
‘….갈등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갈등인지 모르지만, 12년 전의 워로드가 뭔가 심히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하이드는 알 수 있었다. 기대에 찬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 속에 담긴 초조함. 초조한 시선속에 반복되는 것은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한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아직 피도 닦지 못한 그의 무구들. 순간 희미하게 부드러워지는 표정과, 순식간에 그것을 뒤덮어 가라앉혀 버리는 끔찍하게 무거운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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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날 아이와, 아이의 보호자가 될 어른 한 명분 시민권.”
“무,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기사님도 샤드나이트인 만큼 제 아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으십니까?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 모난 땅에서 평생 살아야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는 길에 부인을 도시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아니, 적어도 아이가 태어날 때 까지는 기다려 주시면…. 하다못해 몇 년 지나서 돌아오셔도 좋으니….”
“제가 다시 돌아올 일이 없는 편이 좋으실겁니다.”
“이런….”
“싫다면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신, 약속 만큼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안전한 대도시에, 아이와 어른 한 명분의 자리를 마련해주셔야 합니다.”
“….약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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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12년 전의 워로드는 노인과 세상에 지친 샤드나이트의 마을을 떠났다. 노인이 꾸려준 약간의 식량과 물, 그리고 만삭의 여인과 함께.
3개월 뒤, 누군가 바위 주변에 놓고간 꾸러미 속에 마른 탯줄과 아이 엄마의 편지, 그리고 주소 한 장이 적혀있었다. 그날밤 노인의 아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 노인은 아들의 빈 침대를 맞이해야 했다.
넉달만에 돌아온 아들은 그 누구보다 환한 표정이었다. 태어난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것과 아이의 발자국을 찍은 작은 점토 조각을 들고 돌아왔으며, 오랜만에 본 세상의 즐거움을 입에 담았다. 그날 이후로 아들은 반년에 한 번씩 은신처를 떠나 아내와 아들이 있는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몇 번이고 말렸으며, 그저 잘 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목에 피멍이 들도록 아들을 설득했지만 노인의 부성은 아들의 부성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노인은 몇 년이고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 4년 전.
‘서, 설마 당신은 그때 그….’
‘….인근에 일이 있어서.’
혹시나 아들 내외의 소식을 알고 있을까 싶어 반갑게 맞이한 노인에게, 워로드는 그렇게 말했다.
“12년 전에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네. 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 흉터가 없는 곳이 없었어.”
전보다 말수가 더 적어진 그는, 단 한마디 말 없이 작은 꾸러미를 노인에게 건넸다. 천금보다 더 비싼 열차 표와, 전에 노인이 들려줬던 것처럼 마른 버섯 한 줌, 물 한 병을 담은 꾸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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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들은 눈이 좋으니, 정해진 시간에 선로 옆에서 그 표를 들고 서있기만 하면 알아서 체어 갈겁니다.”
“이, 이게 그럼…. 진짜 열차표란 말입니까! 세상에…. 어찌, 어찌 이리도 이 늙은이에게 마음을 써주시는지….”
“….아직 제가 모시기엔, 살려둘 구실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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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얼마 없는 그의 짐을 꾸리고, 이제 두 집밖에 남지 않은 그의 작은 이웃 주민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기쁜 마음으로 바위 마을에서 내려왔을 때 그 남자는 이미 사라져있었네. 이해했지. 처음만났을땐 꽤 대화를 나눴었는데, 그때 사정이 있어서 마도열차를 타는걸 꺼려하신다고 했으니 말이야. 저번처럼 삐걱거리는 핸드카를 타고 떠나셨겠거니, 했지. 사실 너무 흥분해서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어.”
하이드는 노인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냥, 그렇게 떠났어야 했는데…. 그만 손자의 탯줄과 며늘아이 편지가 든 상자를 놓고 온 걸 떠올려버린 것이야….”
혼자서 하루하루 버섯을 심고, 이슬을 긁어모으며 살던 노인의 삶에서 유일 낙은 어딘가 먼 도시에서 살고있을 아들 내외와 손자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의 흔적이 담긴 상자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그걸 놓고오다니.
기차 시간이 꽤 남았기에, 노인은 별 생각없이 익숙한 바위 마을의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겨우 반 시간 전에 그를 배웅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잠든 것처럼 하나같이 쓰러진 사람들과,
노인의 가족에게 크나큰 은혜를 배푼 기사님.
그리고, 집을 뜯어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려지는 이웃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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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사람들이 왜, 어,어어떤 이유로, 아니, 이게 대체….”
“….”
“주, 죽었습니까?”
“….”
“기사님께서 그러셨습니까?”
“….”
“네, 네놈이 그랬냐고 묻고있지 않느냐! 이, 이 사람들을 다, 다 죽이고, 불태우려 하고 있는 게냐!!!”
“….예.”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다면 왜 나는 이렇게 살려두었느냐! 왜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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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을 잊었다. 놈은, 그렇게 말하며 장작에 불을 붙이더군. 악을 쓰는 내 옆에서 시체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보고있던 놈은, 끝내 왜 나를 살렸는지는 말해주지 않고 떠났다네.”
“당신만 살려두고…. 아무 연고없는 바위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단 말입니까?”
“그래. 그것도 잠깐 내가 내려간 사이에.”
“그곳에 있던 나머지 두 가구 모두, 당신 아들과 같이 은퇴한 샤드나이트와 그의 가족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벤터와 가레스, 둘 다 유색파편까지는 아니라도 꽤 괜찮은 무색파편을 여러개 흡수한 샤드나이트였지.”
“죽은 사람들은 잠든 것처럼 외상하나 없이 쓰러져 있었고, 마을에는 전투의 흔적 하나 없었고요?”
“자네가 무슨 의심을 하는지 알아. 나도 물어봤지. 제 입으로 실토하더군. 내가 죽였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는다고 말이야. 워로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살해한 살인마가 맞다네.”
찌이이잉-!
『그럴 리 없어!』
“그럴-”
“음?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속이 많이 안좋네요. 하하하하….”
노인의 말에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역정을 꿀꺽 삼켰다.
이유는 모르지만, 가슴 어딘가에서 워로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마구 소리치는 누군가가 있었다. 생각 이전에 가슴 속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온 생각.
정말 그럴 리 없을까?
‘….이상하긴 해.’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를 종합해보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노인 이전에 만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워로드는 던전 세 개를 홀로 토벌하고 그냥 떠났을 뿐 인근 전초기지에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12년 전의 그는 심각한 갈등과 초조함, 불안과 중압감 속에 표류하고 있는 모습과, 다소 품이 드는 선행을 행하는 모습마저 보여줬다. 정황상 바위 마을에 꾸러미를 던져준 것은 그가 분명하니까. 영상속에서 느낀 것이 확실하다면 ‘아이와 보호자 하나’ 라는 약속을 할 때 제법 안도감 같은 것마저 느꼈다. 멀지 않은 곳의 광산에서 열차 여섯 대 분의 기사를 참살한 주제에.
그리고 4년 전, 그는 냉혹한 살인자가 되어 노인의 이웃을 살해했다.
‘어느 게 진짜 그의 모습이지? 사람을 죽이는데 어떤 선별 기준이 있나? 아니면, 사건과 사건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를 극적으로 바꿔버린 것일까?’
사람을 읽어내는데 숙달된 하이드로서도, 이 워로드라는 인간이 도대체 뭐하는 새끼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온갖 지역을 핸드카 하나로 돌아다닐 정도로 마도열차 타는 것을 꺼린다는 것.
무시무시한 전투력과 그 못지않은 전투지능을 갖췄다는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하이드 자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
“….워로드, 그놈이 떠나고 난 뒤 나는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놈이 준비해준 열차에 올랐네. 열차를 타고나서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듣게 되었지. 내가 살던 구 로드릭 지역의 요새도시가 몇 개나 함락되었다는 것. 지역 전체의 귀족들이 연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를 불신하게 된 상태라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에 휩싸인 이 지역을 떠나 텔드랏 제국령에 속한 요새도시로 피난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탄 열차도, 로드릭 지역에 유일한 대도시인 킹스랜드가 아닌 이곳 위겐으로 가는 열차였지.”
“나와 함께 열차에 탄 부호들이 워로드의 괴담에 대해 마구 떠들어대더군. 로드릭 령에 뿌리를 둔 대귀족 브라스톨 가문이 사라질 지경이라느니, 브라스톨 가문에 고용된 수 백명의 영혼술사가 일제히 배반해 요새도시를 통째로 워로드에게 넘겼다느니, 이미 그의 군세를 막을 수 있는 집단은 이 대륙안에 없다느니 하는 소문을 말이야.”
브라스톨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옆에서 기록하던 파블로 녀석이 움찔하는게 느껴졌다. 대귀족의 이름이 들어간 정보. 경우에 따라서는, 듣는 것 만으로도 그들에게 쫓길 수 있는 위험한 것.
“그렇게, 내 이웃을 모두 죽인 놈의 인도에 따라 도착한 곳이 이곳 위겐이라네. 아들도, 며느리도 없었어. 내게 남은거라곤 미어터지게 몰려드는 로드릭 령의 난민이라는 꼬리표 뿐. 내 얘기는 여기까지라네. 어떻게, 너무 길지 않았는지는 모르겠군.”
“긴 만큼 가치있는 정보가 가득했지요. 정말 감사하고,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어르신. 파블로, 그만 일어나라.”
“예? 아, 잠시만요. 아직 다 못 적어서- 우와악!”
“내가 다 기억해놨으니까 대충 끝내. 어르신 말대로 너무 긴 이야기라 위험한 수준까지 시간을 끌어버렸으니까.”
대충 인사를 주워넘긴 다음 밍기적 거리는 파블로 녀석을 옆구리에 끼워올렸다.
“시간이 끌려요?”
“그래. 시간. 중간부터 눈치채긴 했는데, 도저히 다 안 듣고는 넘어갈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얘기라 남아있었지.”
콰앙!
서둘러 문을 박차고 나가자, 들어올 때와는 달리 사람의 흔적하나 없는 로드릭령 피난민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미리 알고 대피한듯한 광경 속에, 반쯤 떨어진 문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여서 미안하네.”
“됐습니다. 중간에 눈치채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하셨고.”
“저어, 하이드님? 뭐가 뭔지 좀 알려 주시면….”
“아까 영감님이 그랬잖아. 이미 구 로드릭 지역 전체가 전쟁터고, 워로드는 개인이 아니라 군대를 이끌기 시작했으며, 무려 브라스톨이라는 대가문을 조져버렸다고. 지금도 아니고, 무려 4년 전부터 이쪽으로 피난민이 오고 있다고 말이야.”
“어, 그런데요?”
“그런데요~가 아니라, 4년 전부터 그지랄이 났는데 왜 아직도 위겐을 비롯한 이쪽 지방에서는 워로드가 도시전설따위로 취급받고 있냐는거다. 말이 안되지 않아? 그건 ‘도시전설’이 아니라, 그냥 살아 움직이는 전설이라고. 그것도 현재 진행형의.”
“어…. 어? 그렇네?”
“그런 놈의 행보가 위겐같은 대도시에서 무려 4년이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도시 귀족 차원에서 이 악물고 발설하는 놈을 다 때려잡았다는 뜻이지. 그냥 귀족도 아니고 대가문씩이나 되는 놈들이 개인세력에게 썰렸다는 소문이 돌면 통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은 그 ‘로드릭 령’에서 넘어온 피난민 촌이다.
“과연, 그렇게나 저쪽 소식을 차단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귀족가문이 그들 영역에 숨어든 피난민 몇 명을 놓쳤을까? 들어올 길이 열차 하나 뿐인데? 여기 말고도 비슷한 피난민 촌이 몇 개 더 있다고 했지?”
“어, 어어어어?!”
“피난민 촌이 아니라 ‘집단 관리구역’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양지로 못 나가게 가둬놓고,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든 끝에 워로드와 저쪽 소식에 닿은 놈들이 필히 찾아오게 되는, 함정으로?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하나 더 있다네. 이 인근 귀족들 모두가 워로드의 군세를 두려워하고 있지. 그래서 나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놈이 놓아준 사람들이 더 있을거라 생각하고 모조리 잡아서 살려두고 있다네. 일종의 인질이지. 뭔진 몰라도 저 학살자가 살려놓은 이유가 있을거라 여기더군.”
아, 거기까진 몰랐는데, 그럴수도 있겠네.
“그럼….”
“처음부터 이 난민촌 놈들은 우릴 쫓아낼 생각이 없었던 거다. 내가 바보같은 연기를 하지 않았어도, 마을사람들은 무슨 이유든 가져다 붙여서 우릴 끌어들였겠지. 그리고 정보를 찾아온 우리가 마을 사람들의 일장 연설을 듣는 동안, 나머지는 귀족가문에 연락을 넣는거지. 워로드의 소식을 찾아 여기까지 온 녀석이 있다, 잡아가라~ 하고는, 보시다시피. 쌩-하니 마을을 비워놓고 튀는거야.”
“하, 하지만 하이드님이 그러셨잖아요!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수입원 얘기라면 이곳 사람들도-”
“귀족 딸랑이 노릇하면 버섯 한 줌이 안 나오겠냐. 내 말대로, 우릴 붙잡아 두는 게 이곳 사람들의 먹고사는 방법이었겠지. 좀 흥분해서 급하게 움직였더니, 아주 바보같이 당해버렸어.”
척. 척. 척. 척.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금속 부츠의 소리.
설명하는 동안 쉬지않고 주위를 살폈지만 개미굴 같은 이곳에서 어디로 빠져나가야 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들어온 길은…. 생각이 있으면 제일 먼저 차단했겠지. 이거 통발이 따로 없구만.’
로드릭 출신의 난민을 한곳에 몰아넣고, 제대로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놈을 유인한다. 덤으로 워로드가 들이닥쳤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인질이기도 하고.
“하, 저놈을 보냈어?”
“어어, 저, 저 사람은….”
“그래, 우리 모두가 아는 그놈이지 싶다.”
들어올때와는 바뀐 입장으로 난민촌 안에서 우리가 들어왔던 길로 걸어들어오는 기사를 보고 있노라니, 귀족들이 이쪽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돌아간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복잡한 길. 위겐 특유의 좁은 바위 통로. 그리고 이 지역에서 모르면 간첩이라고 불리는 위겐의 간판스타.
“돌 기사 님께서 이 뒷골목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마스터 나이트 타첼름, 스톤 자이언트라고도 불리는 마스터급 샤드나이트이며 돌 기사라고도 불릴 정도로 암석마법계열 파편과 궁합이 좋은 기사.
그 이름처럼, 그의 발자국을 따라 작은 석주가 자라나는 모습이 보였다.
“주에 세 번은 쥐새끼 잡으러 오는 길이니 그쪽보단 익숙하지. 그나저나, 과연 악명만큼이나 훌륭한 통찰력이로군. 패스파인더.”
“나 아슈?”
“알다마다. 정거장에 머물 정도의 부호를 도시에서 주시하지 않을 리가 있나. 더욱이, 네놈처럼 귀족 사이에서 유명한 놈이라면.”
“어이구 영광스러워라.”
나는 파블로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전해들은 대로의 능력이라면, 우리는 이미 놈의 사정권 안에 있다.
‘쓸까?’
손이 검 손잡이의 주변에서 망설였다.
“하이드, 그리고 그쪽의 소년. 도시 보안법 위반으로-”
-드드드득!
“협조 부탁하지!”
“조까!”
-까아아아아앙!
“호오오. 오러나이트라고 들었는데. 재밌는 능력이로군? 전향했나? 아니면, 연금술인가?”
부지불식간에 좁혀들어온 벽과, 갑자기 나타나 그것을 막아선 청동 구조물.
“[휴대용 야외 파티장 골조]. 제국 시대의 유물이다 새꺄.”
하이드는 끝내 검을 잡는 대신 시가 50만 실링을 상회하는 유물을 집어든 자신을 저주했다.
“나가기 전에….”
….딸깍!
꾸아아아악!
시동과 함께 석벽을 으스러뜨리며 확장하기 시작하는 청동 구조물.
제국의 황금기에 제작된 이 물건은 골조와 가구, 장식의 세 부위로 나누어 만들어진 유물으로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귀족이 ‘어떠한 극한 환경’에서도 간편하게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제작된 물건이었다.
그 시대 기준으로 극한 환경이란 끓는 쇳물 속이나 심해, 허리케인 정도는 되는 것이 보통이기에 지금은 실전된 ‘차단’과 ‘고립화’의 대지마법 개념이 들어간 금속 구조물.
단점은 일회용이라는 것. 그리고-
파삭!
마찬가지로 고가인 ‘제국시대 마정석’이 없으면 순식간에 박살난다는 것이었다.
물론, 잠깐이나마 유물의 영향으로 통로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으로 충분했지만.
“파블로! 길! 길!”
“패, 패스파인더라면서요!”“나는 그런 길 찾는 사람 아니야! 빨리!”
“위, 위쪽! 위쪽에서 왼쪽으로 기어들어가는 좁은 통로!”
파바바박!
타첼름이 잠깐 신경을 놓은 사이, 파블로를 옆구리에 낀 하이드는 순식간에 통로 사이로 사라졌다.
“….명성만큼이나 빠른 도주로군.”
잠시 바위통로에 손을 집어넣은 타첼름은, 이내 손을 거두었다. 이미 이번주에 받은 파편의 값어치를 한참 뛰어넘어서 움직였으니까.
그리고,
“….제대로 붙으면 위겐의 영주가 파산할 만큼은 받아내야겠군.”
잠깐이나마 손이 검을 향한 순간, 그의 모든 감각이 경종을 울렸으니까.
“….나다. 보안 위반자가 통로를 빠져나갔다. 알아서 붙잡도록.”
형식적인 보고를 마친 타첼름은 하이드가 사라진 통로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 신경을 꺼버렸다.
도시 전체를 상시 감시하고, 수호하는 것. 그것만 해도 그가 받은 주급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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