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43
Chapter. 20. 오프로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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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으음.”
평소 가정을 기반으로 한 결론은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아무리 논리적인 결론이라도 가정이 잘못되면 결론도 엉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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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그르륵!
하지만….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는 가정이 전부 치밀하게 맞물려 있으면? 어느쪽을 당겨도 착착 들어맞을 정도로 하나하나 설명이 된다면, 그건 믿을만 하지 않은가?
“….좋습니다! 좋다구요!”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결국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솔직히 과거가 어떻고, 전생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적어도 오트만이 얘기한 대로라면 최근에 겪은 기현상들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네요.”
[오호라. 기현상이라면?]“나를 방랑의 길로 내몰고 평생 괴롭혀온 ‘찾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도 내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이어져온 목표가 있기 때문이고.”
[그렇지. 자네가 꼭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지.]“내가 반쪽짜리 오러나이트인 이유도, 인간 자체가 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오러는 온전한 자아의 표상이니. 불완전하다는 표현보다는…. 음…. 아니, 계속하시게.]“이상한 기시감, 유적에서 귀신같이 유물을 찾는 능력. 그건, 원래 그게 어딨는지 알고 있어서 아닙니까? 아까부터 오트만이 계속 얘기하던 그 ‘준비’라는 거 말입니다. 몇 번의 삶을 거쳐왔다고 했으니 ‘유적’이 실존하던 시대에도 살았겠지요. 다람쥐마냥 여기저기에 다음 생을 위한 준비를 해뒀다면 내가 유적을 내집 안방마냥 드나들며 유물을 주워 나온 것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가만보면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은데, 마냥 억지라기엔 또 하나같이 잘 들어맞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유적이 낯익은 거? 유물 위치가 눈에 훤한거? 위험 천만한 마법함정들 천지인 곳에 몇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멀쩡했던거?
전부 과거에 내가 실존했다면, 지금은 유적이라 불리는 곳이 실제로 기능을 했던 시대에 ‘히히, 다음 생에 써야지’ 같은 식으로 여기저기 쓸만한 물건을 꿍쳐뒀다면 전부 가능한 이야기다.
몸만 오러나이트인 ‘반쪽 나이트’ 인생도 설명이 되고, 좀 애매하지만 나를 떠돌이로 만든 ‘탐색 욕구’도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
….좋아. 나는 과거가 있는 남자로군.
“이게 다 사실이면, 워로드와 얽힌 것도 이쪽과 관련이 있겠네요. 맞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제가 그놈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오트만 말대로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무언가 찾아다닌게 과거에서 넘겨받은 기억의 영향이라는건데, 당장 세상을 다 박살낼 기세로 돌아다니는 놈이 설마 날 위해 준비된 선물일 리는 없고. 그럼 그쪽이 내 목표물이란 뜻 아닙니까?”
[그렇구만. 어디 계속해보게.]“거기까지 가정하면, 이제 왜 워로드의 기억이 나한테도 보이는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건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네요. 기억. 키워드를 통해 기억이 공유된다…. 혹시 그놈도 ‘하이드’ 였습니까? 걔도 나처럼 뭐 찾아다녀요? 찾다가 미쳐서 무차별 살인마가 됐나? 아니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붙잡고 있는데, 오트만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왜요?”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좀 봤네. 이해해주게. 늙은이는 쉽게 과거에 빠져든단 말이지….]마치, 나를 통해 먼 과거를 살피는 듯한 눈빛.
[그 친구도 그랬어.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고. 혼자만 생각이 저만치 앞서나가서 한참을 중얼거리다, 도대체 무슨 계획이냐고 우리가 물으면 퍼뜩 정신이 들어서는 무모하고 장황한 계획을 늘어놓곤 했지.]『천재성은 종종 대물림되곤 하지. 하이드의 타고난 지능은 분명 그와 비교해도 될 정도다.』
“하하, 이것 참. 그냥 주워들은 것을 끼워 맞춘 것 가지고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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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잠깐만. 방금 뭔가 이상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오트만?”
[불렀나?]“방금 뭐라고 하셨죠?”
[거 칭찬에 약한 친구로구만. 자네의 타고난 지능은-]“아니, 그거말고 그 전에.”
이상하다. 분명 다른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분명 방향이….
“이쪽?”
고개를 돌리니, 심해의 칠흑같은 어둠만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뭔가 느껴지는게 있긴 했다.
‘여기만 해류가 다르네?’
둥둥 떠있는 몸을 규칙적으로 당겼다, 밀었다 반복하는 해류. 가만보니 희미하게 어둠속에서 조금 더 짙어 보이는 곳이 있는게, 뭔가 동굴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 전에는 내가 말했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너를 쏙 빼닮은 남자가 생각나서.』
‘와아. 동굴이 말도 하네. 심해는 신비하구나야.’
『굳이 인사할 필요가 있겠느냐 생각했는데, 역시 마주하니 반갑군. 하이드.』
번쩍!
‘와, 와아…. 시, 심해는, 음, 동굴 위에 조명도 있고…. 하, 하하….’
규칙적인 해류가 오가는 동굴 위로, 어둑한 주변이 환하게 밝아질 정도의 광원이 떠올랐다. 꼭 파충류 눈처럼 세로로 갈라진 모양. 이야, 가리고 있던 건 꼭 눈꺼풀처럼 생겼네. 그럼 아래는 콧구멍으로 봐도 되겠는걸? 어쩐지 해류가 좀 따듯하더라니. 해류가 아니라 들숨 날숨이었군. 그럼 저건 눈이고, 이건 콧잔등이고. 그러면 안광에 비친 저 넙데데한 판석은 죄다 비늘-
부그르르르르르륵-!
정말, 잠수를 배우고 가장 빠른 속도로 오트만의 뒤로 숨었다.
“드듣, 드, 드, 드, 드!”
『잘못 알고있군. 우리 종을 칭하는 명칭은 ‘드듣드드드드드래곤’이 아니라, 그냥 드래곤이다.』
계곡이, 아니 바다 계곡의 일부인줄 알았던 것이 몸을 일으킨다.
산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덩치.
내 머리위의 마력등이 초라해지는 푸른 안광이 가득한 눈.
왠지 모르게 많이 상하고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지상 최강의 방어구인 것은 변함없는 비늘.
그리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범선의 닻 만한 크기의 날카로운 이빨들.
『간만이군. 하-』
“살려주세요! 저 위에 선장이 시켰습니다! 그놈이 여기에 비공정이 있을거라고 했어요! 맹세코 드래곤의 보물인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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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만, 그렇게 한심한 표정으로 보지 말아주시겠습니까. 당신은 한번 죽었던 몸이지만 난 아직 살아있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좀 비굴해도!
오트만과의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바닷속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느니, 어떻게든 빌어보는 쪽으로 말이다.
[….정말 닮았구먼.]『부끄러운 부분까지 닮아버렸군.』
기어이 물속에서 ‘대역죄인 자세’를 갖추는데 성공한 나를 보며, 오트만과 드래곤이 말을 나누는 모습.
‘….둘이 아는 사인가?’
『둘만 아는게 아니라, 우리 셋이 아는 사이지.』
“허억!”
‘이런 망할, 드래곤은 마음 같은 것도 읽나봐!’
『보통은, 그런 생각이 들면 ‘망할’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을텐데.』
“흐이이익!”
‘아, 이건 죽었다.’
기구하구나. 그렇게 험난한 과거를 넘어 세상을 떠돈 끝에,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 밑바닥에서 열받은 드래곤의 손에 죽게되다니.
내가 이런 죽음에는 도대체 어떤 묘비명을 새겨야 합당할지 생각하고 있는 사이, 드래곤은 손찌검 대신 한숨(뒤로 날려갈뻔 했다) 섞인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저런 놈의 꼬드김에 넘어가 예까지 오게 되다니.』
[축하하네 알다르. 드디어 엄한 놈에게 얽혀 끌려다니던 내 처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됐구먼.]비공정 반쪽 만한 머리를 흔들더니, 내게 코끝이 닿을 듯 다가오는 드래곤.
『하던 인사는 마저 하지. 실패한 균형의 관리자, 알다르샥스가 옛 전우이자 벗인 하이드에게 인사를 보낸다. 단생종인 그대를 이만한 시간이 지나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기껍군.』
“어…. 예….”
이상하다. 오늘따라 자꾸 역사서에서나 봤던 이름이 귓가에 어른거리는데.
내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상황이 내 머리를 댕-댕- 울려대는 와중에도, 비상한 머리는 몇 년 전에나 읽었던 역사서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알다르샥스. 청룡. 낙뢰와 모래, 심판과 균형으로 상징되는 드래곤.
양대 제국전쟁에서 당당히 서제국의 편으로 참전한 역사상 가장 인간사에 많이 참여한 드래곤으로 이름을 날린 드래곤.
하늘을 새까맣게 매운 마도제국의 비공정을 정면으로 막아내 서제국의 우위를 이끌어내고, 마도제국을 궁지에 몰았으며, 그로 인해 ‘용맥 뒤틀기’의 시발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드래곤.
지금도 기사도 신봉자들에게 ‘드래곤!’ 하고 속삭이면 ‘악!’ 하는 기합과 함께 충의에 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게 하는, 그 이름 하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또다른 전설.
“왜…. 여기 계세요?”
『네가 불러서. 사막에 있던 나를 찾아와 옛 정이니, 직무유기니, 배임이니 하는 폭언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제가요?”
『그래, 네가. 내 대에서 흐트러진 세계의 균형을 제가 바로잡겠다 그리 호언장담하니, 어쩔 수 없지. 한 손 거드는 수밖에.』
“제, 제가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내 필사적인 눈빛에, 마주한 외눈의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꽈아악!
아야. 이상하다. 분명 꼬집으면 아픈데. 왜 꿈이 아니지? 칼로 허벅지라도 쑤셔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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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전설 세 개 봤다.
비공정 1호, 오트만 보들레르, 드래곤 알다르샥스.
하나는 내가 몰고 나가서 여기 처박았고, 나머지 둘은 내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단다. 그 둘은 또 그 말을 들었고.
와, 이 얘기 하나면 술집에서 평생 술값 안내고 얻어먹을 수 있겠군. 책으로 내도 되겠어.
도대체 이걸 뭐라고 생각해야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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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과거의 ‘하이드’는 신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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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해질 지경이군.』
[어쩌겠나. 우리에게 남은게 저 치들 뿐이니.]나름 진지했지만 돌아온 것은 아까보다 더 한심해 하는 얼굴들이었다.
저기 잠든 채 둥둥 떠있는 에그윌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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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속이 쓰릴 지경이지만, 아무튼 하나는 확실했다.
“이젠 믿기 싫어도 믿어야겠네요.”
죽었다 살아난 전쟁영웅까지는 그렇다 쳐도, 용이 보증하는데 뭘 어쩌겠어. 드래곤이 ‘이게 맞다-’ 하면 버섯으로 빵을 만든다 해도 그게 맞는 말이지.
좋아, 결심이 섰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뒤, 내 쪽을 보고 쑥덕거리는 오트만과 드래곤 앞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그리고,
쿠르르륵-
“자, 저는 마음의 준비가 끝났으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다는 뭔가를 하시지요!”
그 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쳐보였다. 아주 개방적으로.
‘과거에 노툼이 나의 첫 번째 전생에 기억을 전했듯, 이번엔 오트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했으니까. 아무래도…. 여기서 기억을 전해 받는 것이겠지?’
내가 모르는 기억이 내 머리에 덧씌워진다는게 좀 불안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판을 벌려놨는데 쫄려서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솔직히 좀 기대되는 것도 있고 말이야.’
정체모를 이끌림을 따라왔더니- 고대의 신화적인 유물이 떡하니 튀어나오고.
거기서 나타난 유령인지 정령인지가 또 전설적인 인물인데, 만나서 하는 말이 ‘오랫동안 자네를 기다려왔네’, ‘자네를 위한 준비가 있어’ 같은 소리네? 거기에 이젠 드래곤까지 나타났어? 날 보고 먼저 인사를 하며 ‘아, 반갑네 전우님. 나도 불러서 기다리고 있었어.’ 같은 소리를 주워 섬기잖아?
음유시인의 노래도 이정도면 너무 전형적이라고 욕먹을 판이다. 그야말로 나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됐다는 분위기.
‘….솔직히 나 정도면 비범한 인물이긴 하지! 막 모르는 기억도 떠오르고, 이상한 정신병도 있고, 사람도 훤칠하니 이만하면 괜찮고!’
그래, 받아들이자. 운명이 귓가에 속삭이다 못해 아주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지경에 이렀으니, 이쯤이면 받아들일 때가 됐지!
그대로 눈을 감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 이제 마법사의 손끝에서 휘황한 빛이 쏟아지며,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잠들어 있던 진정한 힘이!
[….]….힘이?
“저….기요?”
[….자네 뭐하나?]“어…. 안합니까? 기억 뭐…. 주신다고….”
드래곤은 이제 어이없다 못해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있었다.
[그건 잘못 알았구만.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억은 그런 식으로 넘겨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현생이라면 몰라도 죽은 영이 ‘순환’을 거치며 잃어버린 기억은 그 누구도 되살릴 수 없어. 말년에나마 마법의 기적에 도달한 나도, 주술과 영혼술 양쪽 끝에 도달했다는 노툼에게도 불가능하지.]“아까는 노툼이 제 기억을 돌려줬다면서요.”
“윽.”
짐작가는 게 아니라, 정확히 그렇게 살았다.
[만약 내가 자네의 이전 삶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는 대로 말해준다면. 자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 그것이 나라고, 내가 모르는 진정한 ‘나’의 정체라고? 대서사시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겠나?]“음….흥미롭겠죠?”
[그리고.]“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탄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또.]“어, 음….”
[보게. 그게 끝이야. 기억이란, 아무리 오랫동안 누군가 얘기해준다 한들 그것을 ‘떠올릴’ 수는 없는 것이라네. 그저 새로운 지식으로 자리잡을 뿐이지.]갑자기 덜컥 불안해졌다. 이 흐름은, 결국 내 과거인지 전생인지를 얘기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뭐 말을 하다 마는 것도 아니고!
“그, 그건 안 해보면 모르는 거 아닙니까? 설마 여기서 ‘떠올리는 수밖에 없으니 안가르쳐 주겠네!’ 같은 소릴 한다면, 솔직히 좀 너무한 것 같은데요?”
내가 항의하자 오트만은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얘기해주지. 사실은 전생의 하이드는 표독하고 깡마른 여자로 얼굴에 쇠고리를 수십 개씩 차고 다녔으며. 커다란 몽둥이로 사람 머리를 깨부수는게 삶의 낙이었다네.]“쿨럭! 켁!”
[걸으면 얼굴에 걸린 쇠고리가 쩔렁 쩔렁, 몸에선 죽은 인간의 피와 기름이 썩는 냄새가 났지. 아주 끔찍했어. 이런 무시무시한 진실을 말해주고 싶지 않아서 감추려 했네만. 자아, 받아들일 수 있겠나?]“그, 엄, 그건….”
[싫어? 그럼 이건 어떤가? 하이드는 누구라도 우러러 볼 훤칠한 외모에 조각같은 몸을 가진 왕족이었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나라를 일으켜 만 백성의 칭송이 자자하던 위대한 황태자였다…. 이건 어떤가? 받아들일만 한가?]….이거 농담인가?
[이것도 아닌가? 그럼 외눈의 암살자였다면? 배 나온 주정뱅이였다면? 음유시인이라면, 마음씨 좋은 주방장이었다면?]“아니 오트만! 이게 장난할 상황처럼-”
[아니면!] [환란 속에 어떻게든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고자 몇 번의 삶을 내던지고! 이미 충분히 다른 삶을 누려봤음에도 단지 2년 남짓에 불과했던 단 하나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마법사도, 영혼술사도 모를 모종의 수단으로, 영혼이 표백되는 순간 너머로 기억을 보존해냈으며! 그 모든 노고의 보상이 그저 단 한 순간의 완벽한 조우를 위해서다, 그리 말한 기사가 있었다면.]으득.
[그것을 진정 ‘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 모습, 그 각오, 그때의 선택을. 한없이 무너지기만 하던 세상 속에, 삶과 죽음 모두를 도구 삼아 기약없는 기다림을 이어가던 그 모든 순간을 고작 내 입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 [….그리하여 떠올릴 수 있겠다면, 내 얘기 해주지.]인자하게만 보이던 노인의 차갑게 가라앉은 격정은, 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깊이, 아주 깊이 가라앉은 눈. 도대체 저 노인은 저 망막 너머로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가.
[어렵지. ‘아는 것’과 ‘떠올리는 것’은 달라. 마법사의 깨달음처럼, 누군가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의 진체에 도달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만 하지. 나는 헛되이 입을 놀려 자네의 오랜 준비를 망치고 싶지 않다네. 하이드라는 인간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자로서, 절대로 말이지.]오트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많이 답답하고 궁금하겠지만…. 자네는 아직 준비가 안됐어. 자네의 모든 과거를 떠올릴 준비도, 계획을 실행할 준비도,] [지금 당장 직면하게 될 일을,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도.]어느덧, 해류가 사나워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는 오트만의 얼굴에는 한탄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겨우,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 끝에 이제야 겨우 마주한 것인데.
[이르구나. 너무나도 일러.]저 둘을 마주하기엔, 아직 하이드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어쩔 생각인가.』
[어쩌긴. 이런 순간을 위해 안배된 것이 아닌가? 이 또한…. 흐름이겠지.]노인과 드래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각오를 마쳤다.
아직 영문도 모르는 계획의 주최자 대신, 문앞에 당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쿠드드드득!
비공정을 뒤덮은 바위가 거짓말처럼 으스러지는 순간, 드래곤과 마법사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조각난 바위파편 사이로 드러난 두 개의 인영.
[그리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얼굴이 하나로고.]『간만이군 살라딘. 그리고…. 변절자.』
드래곤은, 하나 남은 눈을 분노로 번뜩이며 말했다.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자.
세계를 이렇게 만든 자.
그들의 적.
찬탈자.
시스템.
그녀는, 집씻듣 내뱉은 알다르샥스의 말에 답했다.
“….저 또한 이 세계의 주민으로서 고유명사를 부여받았으니 보다 정확한 명칭을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너 따위에겐 과분한 이름이지.』
“판단은, 개인의 몫이니.”
알다르샥스의 분노를 가볍게 즈려밟은 그녀는, 드래곤과 노인 뒤의 존재에게 눈길을 던졌다.
“이번에는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드.”
시스템은, 그녀가 모든 플레이어를 대하듯 정중하게 그를 대했다.
“관리자 시스템. 지금의 이름은, 월드.”
“월드라, 불러주시길.”
시스템은, 그녀의 새 이름을 소개하며 거짓말 같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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