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53
Chapter. 21. 어나더 솔로 플레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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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여. 저들을 살피소서.’
자비의 성기사 프라우크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서있는 곳은 제국 수도에 위치한 자비의 신전이었다. 그의 삶의 절반 이상을 보낸 곳이며, 앞으로 남은 여생도 그리 되리라 생각했던 곳이었다.
‘오늘이 그날이 아니게 해주소서.’
제국은 죽었다. 서로 죽여대던 뮤트가 하나로 집결해 몰려온 순간이 아닌, 황제가 오래된 저주를 제 손으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제국의 위기를 저주의 힘으로 이겨낸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저 부정한 생물들의 힘이 제국을 넘어뜨릴 만큼 강하다면, 그것을 이겨낸 저주의 힘은 도대체 무엇으로 막아야 한단 말인가?
시간이 없었다. 누대에 걸쳐 쌓여온 신전의 신성력도 어느세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그 영향은 쉬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고 있었다.
“으으으, 아아아아….”
“자비를, 여신이시여, 자비를….!”
힘없이 쓰러져 자비를 갈구하는 사람들.
프라우크는 신전 가득한 생존자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저들이 원천이다.’
생명력. 흑마법의 뿌리이자 원동력.
저 밖의 저주받은 병사와 뮤트들로 제국이 봉쇄 된지가 3년 이나 됐는데 사망자가 이다지도 적은 것은, 이미 수도를 집어삼킨 저주가 사람들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를 제외한 민간인들 중 사망한 것은 어리석게 밖으로 뛰쳐나간 이들 뿐이었다. 저주가 원하는 것은 명백했다. 그 권역안에, 살아있는 인간이 머무는 것.
그렇기에, 자비가 필요했다.
‘믿음을 주소서.’
수많은 귀족도, 그들의 사용인도, 허드렛일 하는 평민부터 제국의 고관까지도, 모두 저주에 생명력을 채워넣는 가축이 되고 말았다.
‘만약, 그날이 오늘이라면.’
자비의 품이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면. 신앙으로 무장한 그들조차 쓰러져 모두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가축으로 전락하기 전에.
“라투라. 이 미욱한 종자에게 자비를 베풀 힘을 주소서.”
‘자비’를 베풀수 있기를. 성기사 프라우크는, 오늘도 그런 강철같은 마음이 깃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아, 그의 메이스가 힘없고 선량한 사람들의 머리를 부수는 것이 보인다. 그는 다른 형제들처럼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머리를 부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성한 회랑이 피로 물들고, 그들이 마지막 자비를 베풀게 된 다음에는.
‘황성으로 향하리라. 먼저간 이들에게 모든 자비를 쏟아냈으니 몸이 부서질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꽈아악!
기도를 행하는 숨이 거칠어졌다. 어리석고 더러운 황제. 사특한 자. 이제 머지않아, 아니 지금 당장 자비의 행사가 끝나면…!
….톡톡.
“거기, 성기사. 그거 날 위한 물건인가?”
“….미치광이 다리크인가.”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프라우크는 그제야 자신의 허리춤에 있어야 할 메이스가 어느새 손에 들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면 물 한잔 주시게. 성수 조금 타서.”
“….당신이 감시 대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다리크.”
아마도, 저주를 연구하던 황성 지하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얼굴 잃은 흑마법사. 비록 그가 수많은 생존자들과 기사들을 이곳 자비의 신전에 데려온 공로가 있지만, 여전히 그는 성기사들의 감시를 받아야 할 존재였다.
방금 그를 혼몽에서 깨워준 것만 아니었다면, 프라우크는 그를 신전 감옥에 쳐넣었을 것이다.
“또 손님을 데려온 모양이군.”
스스로 통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프라우크를 건져올린 것은 작은 희망이었다. 이 흑마법사는 종종 수도를 구하겠다며 몰려온 기사들을 데려왔으니까. 비록 이미 이곳을 지나친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모두의 소식이 사라졌지만 혹시 아는가. 이번에는 다를지.
탁. 탁.
기대를 품은 프라우크의 눈에 새로운 도전자가 들어왔다.
넝마 같은 후드.
겉이 부서져 복잡한 내부와 그 안의 검이 보이는 검집.
한껏 경계 어린 얼굴로 주변을 담는데 여념이 없는 눈.
모두 해서, 단 한 명.
군대도, 기사단도 아닌, 기사 하나.
“….라투라. 죽음의 땅으로 찾아온 형제여.”
작게 피어난 희망은 빠르게 사그라들었지만, 겨우 이곳까지 찾아온 이를 냉대할 만큼 프라우크의 성정이 차갑지는 않았다.
“자비의 품을 찾아온 것을 환영하오. 자비의 뭉툭한 손끝, 프라우크요.”
“라투라. 일이 있어서 찾아온 하이드입니다.”
“….그렇군.”
생각과 다른 인사에 프라우크는 조금 더 실망했다.
이 낯선 자는, 먼저 밝힐 가문과 주군도 없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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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신전에 처음 들어서며 느낀 것은 향 냄새였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나름 신전 고아원 출신이라 향냄새 하면 고향처럼 느껴지는게 있어서.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여기 있는 사람을 죄다 훈연이라도 할 생각인가.’
신전 벽과 천장, 가지런히 누워있는 신도들 사이에도 세워진 커다란 황동 향로들은 마치 밖에 자욱한 저주의 안개에게지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허허허. 아직도 이런 의인이 남아있다니. 라투라, 참으로 자비로운 처사이십니다.”
자신을 이곳 자비교단 제국 수도지부의 주교라 밝힌 성직자는 그간 고생을 표현하듯 깡마른 손으로 내 손을 부여잡았다.
“황성을 향하신다구요.”
“예.”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그렇군요….”
그냥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조금 더 자세한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아직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사제와 성기사들, 그리고 신전에 빼곡이 들어찬 민간인들까지. 이들중 누구에게 시스템의 손길이 닿았을지 모르는데, 목표를 드러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더욱이, 지금 이곳에 퍼진 저주도 시스템의 농간이라 의심되는 상황이 아닌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람마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지요.”
다행히, 아까부터 기분나빠보이는 성기사와는 달리 주교는 마음이 넓은 사람 같았다.
“저희 자비 교단은 오래전부터 뒤쳐진 이들을 일으켜세우고 앞서가는 이들을 밀어주는 지원의 역할에 특화되어 있었지요. 수도가 이렇게 된 3년 동안 저희 신전의 형제들이 맡은 일도 같은 일입니다. 어떻게든 이 제국을 정상화 시키고자 하는 용감한 이들이 그들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그렇지!’
이걸 기다렸다. 길었던 사담 끝에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고!
‘뭐 달라고 해야하지? 우선 묘하게 뒤틀린 수도에 대한 지형정보랑, 자비교단제 회복 포션은 있는데로 다 달라고 하고, 혹시 성기사나 사제도 몇 명 빌릴 수 있을까?’
옛날부터 자비 교단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 활동하는 ‘무자비의 기사’를 제외하면, 교단이 공인한 용사도 없었고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자비는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슬로건에 입각해 먼저 일을 벌이기 보단 다른이들이 벌인 일에 손을 내미는 역할을 도맡아 하는게 이들의 방식이었단 말이다.
이렇게 된 제국의 초입에 있는 생존자 집결지가 자비교단이라 내심 기대는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대놓고 지원 의사를 밝힐 줄이야!
“다만…. 하이드 기사님에게 내어드릴 것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
한참 즐거운 계산에 빠져있던 찰나, 뭐든 다 내어줄 것 같던 표정의 주교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황성을 향하며 이곳을 거쳐가는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신전의 가장 귀중한 성물을 내어주고, 성수의 종잣물을 제외한 남은 성수를 모조리 병에 담아 들려보냈으며, ‘저주 물림’과 ‘기도하는자의 성역’을 유지하기 위한 사제, 최소한의 방비를 위한 성기사를 제외한 모든 형제님들 또한 먼저 간 기사님들의 일행으로 딸려보냈지요.”
“아….”
“그러다보니, 제국에 사악한 힘이 퍼지고 3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는 거의 가진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한 줌의 성수, 약간의 식량이나마 지원해드릴 수 있을까요.”
제기랄. 어째 곱게 넘어간다 했더니.
결국 ‘줄게 없다’는 말을 엄청나게 빙빙 돌려한 것이 아닌가. 보통 이런 경우에는, 저렇게 말꼬리를 흐린 다음에-
“….정말 죄송하지만, 저희 교단이 너무나도 시급한 일을 앞두고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사온데….”
저렇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법이다. 이거 허위매물 아냐 이거. 뭔가 좋은걸 잔뜩 줄 것처럼 끌어들여놓고, 막상 다가오면 ‘그건 없고, 대신 이런게 있는데….’ 하면서 조금 안좋은 옵션의 상품을 쑤셔넣는거.
“뭡니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아직 도시 이곳저곳에 고립되어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꽤 있는데, 그들이 이리로 올 수 있게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혹시 이 일을 하면 조금 더 나은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겁니까?”
“크흠, 흠! 여유가 생긴 인력을 동원하면 그만큼의 성수를 생산할 수도…. 흐흠!”
성수 준다는군. 저주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주는 만큼 깊이 들어가려면 꼭 필요했다. 그것도 되도록 많이.
“또, 3년간 이곳 신전 주변을 보호하며 수집한 사용인 도시의 길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도…. 원래 신전으로 오는 길이 노출될까 싶어 외부에 제공하는 것은 저어하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 지도랑, 자기들이 쓰는 길도 열어준다고 하고.
‘대단하다, 지원 전문교단! 앞에 나서서 일할 사람 구하는데도 전문가로구나!’
허위매물은 허위매물인데, 아니꼬아서 그냥 지나치기엔 저쪽에서 던진 미끼가 너무 탐스러웠다.
“그 고립된 생존자들. 어디 있습니까?”
“혹시 지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 저희 교단에서 배포한 지도로군요! 허허허허 라투라, 이런 인연이 있나. 우선 이쪽 구 시가지의 주택에서….”
다른건 몰라도 이 낙서같은 지도보다 정확한 지도는 꼭 필요했기에, 결국 미끼를 덥썩 물어버리고 말았다.
“허허허허! 라투라!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자비가 넘치는 성도님이시군요!”
어쩌겠어. 아쉬운 쪽이 참아야지.
솔직히 이런 저주가 자욱한 동네에서 3년이나 산 사람한테 완벽한 모습을 요구하는 것도 억지가 아니겠나. 하루 겪은 것만으로도 온몸의 진이 다 빠질 정도인데, 여기서 3년 살았으면 주교가 악마 조각상 같은걸 깎고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
성기사쪽은 그래도 양심이 좀 남아있나보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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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흰 도화지가 쉬이 얼룩이 지는 법입니다! 이곳에 오신지 얼마 안되셨으니 모든 변화를 경계하십시오-!”
다음날 아침. 나는 새벽 기도를 마친 주교의 환송을 받으며 자비의 신전을 나왔다.
“….부끄럽게 됐소.”
“괜찮습니다. 사람 사는게 다 그렇죠. 서로 나쁘지 않은 거래였는데요 뭐.”
“교단의 행사가 거래가 되어 선 안되거늘….”
동행자는 어제 봤던 프라우크인가 하는 성격 나빠보이는 성기사. 그래도 자기네 일이라고 인력 정도는 지원해주는 모양이다.
“이쪽이오.”
“당신이 봤다는 그 균열은 사용인 도시에서 성하도시를 가로질러 진짜 수도가 있는 곳까지 닿아있소. 그것을 경계호 반쪽은 뮤트가, 나머지 반쪽은 제국군이 득세하고 있지.”
“두 집단의 전투가 치열한 곳 주변엔 어느 정도 공백이 있소. 조심하면 전투를 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지.”
주교의 선택은, 탁월했다.
“굳이 제가 필요했습니까? 이 정도면 프라우크 성기사님 혼자서도 생존자들 다 데려왔을텐데.”
“돌아오는 길이 있지 않소. 지금 같은 속도로 건물을 뛰어넘으며 움직이는 것은 훈련 받은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생존자들에겐 기대하기 힘든 일이오. 일일이 한명씩 업고 나를 것이 아니라면, 한 명이 길을 지키는 동안 나머지가 인솔하는 방식이 좋겠지.”
“….그리고.”
우뚝!
앞서 달리던 성기사는 긴장한 얼굴로 멈춰섰다.
“혹은. 이런 경우에 혼자 있다면 쉬이 죽을 수 있으니.”
그가 손을 들어 막아서기 전에 나도 발을 멈추었다.
가려진 골목 뒤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발소리. 소리가 아니더라도 그 기척을 따라 눈에 띄게 짙어지는 보랏빛 안개까지!
“….피해다닐 수 있다면서요?”
“병사에 한해서. 기사급은 감각이 마스터나이트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오. 그래서 사용인 도시보다 더 안쪽에선 이렇게 숨어다닐 수 없지.”
콰아앙!
저주받은 기사는 벽을 과자처럼 부수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제국 기사특유의 치밀한 전신 판금 갑옷에 대형 강철방패와 검을 든 모습.
『폐하의 땅을 짓밟는…. 그릇된 자로구나….』
그리고, 그 갑옷 위에 저주화의 줄기가 힘줄처럼 휘감겨 있는 모습이었다.
어디보자. 병사급 하나 잡는데 내가 얼마나 걸렸더라.
“그…. 저주받은 기사는 강합니까?”
“…?”
마치 ‘전투를 앞두고 얼빠진 질문을 하는군.’ 같은 표정을 지어보인 성기사는, 성직자답게 친절한 답변을 남겼다.
“평균적으로 마스터 나이트의 갑옷 무게가 2할 정도 줄어들면 몸놀림은 두배 정도 빨라진다고 하지.”
“오.”
“저주받은 병사는 일반 병사의 열다섯배 정도의 힘을 내오. 계산해보시오.”
“아.”
이럴때는 머리가 좋은게 원망스러웠다.
“수, 수학적으로 접근하지 맙시다 우리! 불굴의 의지! 꺽이지 않는 마음! 그게 만드는 기적! 원래 성기사면 이런쪽으로 생각하는거 아닙니까!”
“….자비를.”
성기사는 대답 대신 메이스를 들어올렸다.
『충성하라. 역도들이여.』
아아, 이럴수가.
달려드는 기사의 검에, 불길한 보랏빛 오러가 한껏 치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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