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59
Chapter. 21. 어나더 솔로 플레이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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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탁-
‘5472. 5473. 5474. 5475-’
땀이 맺힌 손이 벽을 짚을 때마다 속으로 숫자를 헤아린다. 방향 감각마저 흩어버리는 이 어둠속에서 일정한 보폭은 거리를, 좌우로 나란한 계곡의 벽면은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대상이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인양선을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챙겨온 수중 호흡장비 덕분에 악취와 가스가 가득한 이 협곡 안에서 제대로 숨쉴 수 있는거니까.
‘5500 걸음. 균열에 들어온 시점에서 어렴풋이 성하도시의 성벽이 보였으니까…. 이 정도면 아까 본 뮤트와 황제군의 전장 아래까진 접근했겠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비명이나 굉음의 편린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이 계곡에 내려앉았다는 오래된 저주의 영향이겠지.
[나는 가능한 널 도울거다. 네 의지와 상관없이, 내 필요에 의해.] [너는 도움을 받고 황성으로 가기만 하면 그만이야. 난 알아서 네가 지나간 길을 따라갈테니까.]‘흑마법사 다리크. 녀석도 황성에 볼 일이 있다고 했지.’
[저주]라는 키워드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방금 헤어진 그 수상한 놈이 떠올랐다.다리크. 안면이 반쯤 녹아내려 이목구비가 죄다 사라진 흑마법사.
자기 입으로 황제의 저주와 관련이 있고, 그것 때문에 황성으로 향하며, 그런 이유로 나를 돕고 내 뒤를 따라오겠다 말한 자.
놈을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놈이 밝힌 사실은 내쪽에선 알아볼 방법도, 증명할 수단도 없으니까. 마구잡이로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알 방법이 없으니 애초에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대상이란 말이다.
‘하지만. 놈을 이용할 수 있는가…. 는 좀 고려해볼 만한 사항이지.’
탁. 탁.
벽을 짚는 규칙적인 소리를 따라 머릿속의 정보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다리크의 행동에서 딱 하나 신뢰할 수 있는게 있다면, 놈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여유를 두면, 내가 황성에 도달하길 원한다는 것까지.
‘놈의 말. 행동. 지금까지 흘러온 상황과 정황 모두 그것만큼은 사실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놈은 나를 자비의 신전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나는 자비 교단이 만든 안전한 길을 알게 되었고, 저주가 짙은 수도 안쪽에서 사용할 성수도 양껏 얻었으며, 주교의 만행을 발견한 끝에…. 3년 간 그 자리를 지켜온 자비의 신전이 황제군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사용인 도시에 가득하던 황제군은 신성의 보호가 사라진 신전으로 몰려갔고, 덕분에 내가 사용한 주택가 통로가 그토록 조용했던 거라고, 다리크는 그렇게 말했다.
탁. 탁.
차례로 자리잡는 정보들 중, 아주 해묵은 것이 툭 튀어나왔다.
[기척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이미 망자에 가까운 흑마법사 따위에게 기척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가.]몇 번이고 내 옆에 홀연듯 나타난 놈의 능력. 검 끝, 손끝에 닿는 실체가 분명 존재함에도 어딘가 허깨비처럼 느껴지고, 그럼에도 분명 나와 상호작용 할 수 있는 특이한 상태.
나는, 아주 오래전 그것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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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넬이라고 하네. 불운하게 악령이 된 내 누이이자, 나를 흑마법사로 만든 존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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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알드리치의 악령, 그의 여동생 넬의 악령과 여러모로 일치하는 면이 있어.’
흑마법사는 자신의 찢어진 영혼에 마찬가지로 조각난 다른 영혼을 기워넣는 것으로 탄생한다고 들었다.
알드리치의 동생, 악령 넬의 경우 알드리치의 부름에 따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불쑥 나타났으며,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적을 공격했고, 일이 끝나면 어딘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흑마법사 다리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방식또한 그것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였다.
자아가 저토록 생생하다는 점에서는 알드리치의 동생 악령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도 황성에 갈 일이 있거든!] [나는 황제의 저주가 닿아있는 곳에선 움직이지 못하네.]‘놈이 원하는 것은 황성에 있다.’
‘놈은 황제의 저주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성은 수도를 뒤덮은 저주의 중심이고, 악령(추정) 다리크는 그 저주에게 거부당하고 있다.
‘….황제가 저주를 사역한다는 것은 현 황제가 저주를 쓸 수 있는 흑마법사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
‘다리크는, 황제의 영혼에 깃든 악령이 아닐까?’
억측이지만 지금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이 정도 추론이 한계였다.
일단 수도 전역에 걸친 황제의 저주에 거부당하는 존재라는 것 만으로도 이 저주받은 땅에서 놈의 존재가 매우 특별한 것은 사실이있다.
추론의 반만 일치하더라도, 놈이 이 사태를 해결할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는 것 또한 사실.
‘역시, 뒤에 달고 가는 편이 좋겠군.’
결론적으로 고심하기 전과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결론이었지만, 끔찍하게 고요한 어둠 속에서 속삭이듯 다가오는 잡념을 쫓는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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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엉!
‘으으으!’
12,000 걸음 정도 걸어온 지점.
발을 서두르던 중, 무언가 금속으로 된 것이 발 끝에 체였다.
텅 텅그렁- 텅-
‘….투구?’
소리로 볼 때 속이 빈 금속. 어둠속으로 작은 메아리가 스며들 듯 사라지는 동안, 나는 바닥을 더듬어 나 발에 차인 투구를 찾아 들어올렸다.
더듬 더듬-
손끝에 걸리는 우툴두툴한 음각. 제국을 상징하는 나무 문양.
T자 형태로 뚫린 면갑. 눈만 뚫어놓은 제국 수도의 투구나, 철망 형태로 뚫린 자비 교단 성기사의 투구와는 또 다른 형태.
‘이게 수도에 저주가 퍼지고나서 도착했다는 외부 기사단의 흔적이로군.’
사람 미치게 하기 딱 좋은 어둠 속을 하염없이 더듬어가던 사람에게있어, 이런 변화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어디보자….’
휙- 휘익-
캉!
‘여기도 있고.’
터엉-
‘여기도 있군.’
길을 더듬 듯 검을 휘두르며 나아가자 하나씩 검 끝에 걸려드는 것이 있었다.
부러진 검.
우그러진 갑옷.
단단한 나무. 혹은 인골.
흔적은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나타냈다.
‘악취의 근원은 이곳이었나?’
저주에 뒤덮인 대량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다면 계곡의 상승기류에 그런 악취가 섞여들 법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칼끝에는 몇몇 갑옷이나 금속조각만 걸릴 뿐 부패하는 무언가가 걸려들지는 않았다.
타닷-
‘발소리!’
대신, 다른 무언가가 걸려든 것 같았다.
‘맨발. 체중은 내 절반 정도. 보폭이 넓고 움직임이 빠르군.’
긴장하고있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 상대가 날 기습할 생각이라면 이대로 못알아챈 척 하는 것이 좋겠지.
스스스슥-
‘돌에 스치는 소리. 저쪽도 벽을 짚고 오는군. 시야는 이쪽과 마찬가지다.’
스무 걸음.
카앙!
일부러 널브러진 갑옷을 두드리자, 어둠 속 무언가의 방향이 이쪽으로 확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온다.’
열 걸음.
눈을 감았을 때처럼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의 어둠이 움직이는 모습.
다섯 걸음.
세 걸음.
하나.
‘….지금!’
빠아악!
“아가아악!”
검집째 휘둘러진 파산검이 도끼처럼 적의 무릎을 찍었다. 얇고 높은 비명과 함께 손맛이 가볍다고 느낀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이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다.
피싯!
피하는 대신 앞으로 달려들며 목덜미가 조금 찢어진 목덜미. 그 대가로 균형이 박살난 놈을 밀어붙여 벽에 처박을 수 있었다. 이런 거친 육박전은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보다 체중이 가벼운 상대에게 이만큼 잘 먹히는 수단도 없었다.
‘상처로 봤을 때 적의 공격수단은 손톱. 혹은 날이 달린 수갑.’
우득!
“끄그악!!”
팔꿈치와 손목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꺾고, 그대로 잡은 팔째 휘둘러 멀리 던졌다. 체중이 가벼운 적이 반대편 벽에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끄윽, 끄으으으….”
무릎과 팔이 부러진 적이 버르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다.
“으극, 아아아….”
조금 더 기다렸다. 무언가, 어둠 속에 도사린 존재가 반응할 때까지.
.
.
.
.
“….소리를 주의하라는 게 이쪽이 아니었나?”
여성, 혹은 암컷으로 추정되는 적의 신음소리 말고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리크는 분명 소리를 낮추라고 했다.
오면서 발소리, 돌조각 굴러가는 소리 따위에는 ‘무언가’가 반응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으니, 분명 살아있는 생물의 소리에 반응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저쪽에 시끄러운 먹이를 던져서 그것의 주의를 돌릴 생각이었는데, 어째 어둠은 지금까지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끄으, 으그으으….”
“그럼, 소리를 듣고 찾아온 이쪽을 주의하라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굳이?”
물론 날 습격했고, 이 짙은 어둠속에서 소리만으로 이쪽의 위치를 파악하고 덮쳐온 점은 제법 주의할 만 하지만, 전투력만 보면 이곳 제국 수도 기준으로 형편없는 축에 속했다. 공격은 단조롭고, 가벼운 체중을 살릴만큼 그리 빠르지도 않으며, 묘하게 긴 팔다리는 생각보다 쉽게 부러졌다.
“위에서 굴러 떨어진 불량 뮤트인가.”
이 협곡 위쪽이 황제군과 뮤트의 전투가 한창인 것을 생각하면 제법 그럴듯했다. 어쩌면 이놈도 부상을 입어 원래 전투력이 다 나오지 않는 것일수도 있겠지.
“끄극, 으으으….”
“뭐,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말은 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혼잣말이라도 하면서 가면 좀 덜 심심하겠지.”
그러한 감사의 뜻으로 안 아프게 머리를 따주려던 그 순간.
“커허으…. 사려….. 사려조….흄, 이인그아….끄흑!”
우뚝!
그것의 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내려치던 칼날을 멈추었다.
파바박!
양 무릎으로 복부와 어깨를, 한쪽 팔뚝으로는 놈의 목을 내리 누른 채 재빨리 쓰러져 신음하는 그것의 몸을 더듬었다.
‘골격.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관절이 조금 높은 편이다. 갈비뼈의 개수도 다르군. 광대와 이마, 눈 사이 간격도 조금씩 달라.’
‘내가 모르는 수인? 아니야. 이세나 같은 별종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골격이 잡탕일 수는 없어. 부러진 팔목이 거의 다 회복됐군. 뮤트가 맞는 것 같은데….?’
시야가 차단된 상태라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골격, 근육, 피부의 질감부터 구조까지 이렇게 이질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조합된 생물은 뮤테이션 블러드라 불리는 종족 말고는 없었다.
“사려조…. 약소께에에-….”
문제는, 안 그래도 저 위에서 고유의 언어까지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던 놈들이 이제는 어색하게나마 사람의 말까지 하고 있다는 것.
‘설마. 네임드?’
[말하는 뮤트]라면 3월드에서 네임드 뮤트를 부르는 대표적인 별칭. 하지만 내 밑에 깔린 녀석은 도저히 네임드라 불러줄 만큼 강한 개체가 아니었다.“미, 미하아악-, 미아내…. 잘못 봤….”
심지어 사과를 하기까지.
‘도대체 어떤 뮤트가 인간한테 사과를 하지?’
지성이 있는 뮤트는 많아도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 뮤트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피에는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흐르고 있고, 따라서 인간과 뮤트는 공존할 수 없다는게 정론이었는데.
“….어이. 내 말 들리냐? 알아들을 수 있으면 발을 두 번 굴러라.”
“윽, 이이익, 익!”
지익-
버둥버둥!
“부, 부러져써….”
“진짜 알아듣는군.”
팔뚝으로 조르고 있던 그것의 숨통을 풀어주자 놈이 헐떡이며 숨을 들이쉬는 것이 들렸다.
“너는 뮤트인가? 아니면 이 수도에서 태어난 또다른 종족인가?”
“콜록 콜록! 뮤트? 종족? 어…. 몰라.”
“지능이 그리 높진 않은건가…. 그럼, 저 위에서 싸우고 있는 두 종족 중 어느 쪽에 속해있지?”
“왼쪽!”
“뮤트로군.”
속에서 작은 환호와 안도의 한숨이 교차했다. 상대가 저주에 의해 이렇게 변형된 사람일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으니까.
‘상대는 대화가 가능한 종족이다.’
‘뮤트 특유의 인간에 대한 무조건 적인 적의, 증오도 안 보여.’
뮤트라는 개체한테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던 가능성.
순간,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수도에 처음 온 순간, 수도 외곽에 바글거리는 뮤트 대군을 보고 떠올린 의문과 관련된 흥미로운 생각.
“이봐. 아까 잘못 봤다는건, 뭘 잘못 봤다는 거지?”
“으그으으…. 나, 떨어진 황제군 잡아. 놔두면 안쪽까지 들어와.”
“황제군이라. 고작 그 실력으로? 걔들이 저 위에서 떨어졌다고 망가지거나 하는 수준은 아닐텐데.”
“거, 거짓말 아냐! 꽃! 안개 없는 여기, 꽃 당황해서 머리들어! 늦기 전에 사사삭!”
“본능적으로 그 안개가 펼쳐진 곳을 찾기 위해 꽃이 밖으로 드러난 순간 꽃만 처리한다. 일리는 있구만.”
이 대화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 이 약골 뮤트는 떨어진 황제군이 협곡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 말은 이 녀석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높은 존재가 있으며, 협곡 안쪽에 황제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흑마법사 다리크는 이 협곡 안쪽 어딘가에 생존자들의 집결지가 있다고 했고,
이 이상한 뮤트는, 어째서인지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혹시 이 안에 너와 같은 종족이 더 있나?”
“있어! 많이!”
“좋아.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충분히 경계하며 놈의 손을 들어 내 얼굴 위로 올렸다.
“이렇게 생긴 종족도 같이 살고있나?”
지독한 악취로 후각이, 살아있는 듯한 어둠으로 시각이 차단된 이곳에서 상대의 형태를 가늠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
아직 덜 회복됐는지 뮤트는 힘없이 내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뮤트와 인간이 같이 살고있군. 맞나?”
“그….어? 나 그런거 몰라.”
심지어 나의 외형을 숙지시켰음에도, 뮤트와 인간의 형태가 다른 점에 특별한 의혹을 느끼지 못한다. 아예 인간이란 종의 차이 조차 모르고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다.
“저 위에서 싸우는 너의 종족들도 너와 같은 생각이고?”
“음, 어, 아마도? 왕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으니까?”
쿵.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단어 하나가 가슴을 꿰뚫었다.
수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
과거의 뮤트와 달리, 사실상 각각의 뮤트 로드가 다른 종족이라 봐도 좋은 4월드의 뮤트가 어떻게 저만큼이나 뭉쳐서,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3년 씩이나 제국을 두드리고 있는가?
뮤트 로드는 그 힘 만큼이나 머리가 좋은 녀석도 많은데, 왜 수도 밖에 드넓은 땅을 내버려두고 썩어 문드러진 제국에 3년씩이나 목을 매고 있는가?
‘왕. 분명 왕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다고.’
절대자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뮤트라는 종의 본능으로 자리잡은 인간 증오를 바꿔버릴 만큼 강한 지배력을 가진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귀족 중심의 군벌과 같던 뮤트를 휘어잡아 하나의 군대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적어도 내가 알기론, 뮤트는 전통적인 모계 사회라는 것인데.
“왕이 있다고.”
“응!”
“그렇다면, 여왕도 있나?”
제발.
“응!”
이런 젠장.
억장이 무너지는 내 귓가로 그 이름을 말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운 듯 쌕쌕거리는 뮤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왕 니그미께서 우리 모두를 이어주셔! 왕 아우드께서, 우릴 가르치고 이끌어!”
….누구?
“아우드 왕이랑, 여왕…. 니그미?”
“응! 마음의 어머니!”
“어…. 비늘이 있고, 뱀처럼 생긴?”
“맞아 맞아! 아름다운 비늘! 나를 만들어준 로드 바트란도 한 장 받으셨어?”
어,
어….
어?
뮤트의 왕- 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이야기가, 여왕으로 넘어가는 순간 훼까닥 뒤집혔다.
‘걔가? 여왕?’
살아남았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 정신나간 박교수를 만나고도 어떻게 도망쳤다는 소문도 들었다.
하지만 걔가 여왕이라니. 3월드의 네임드, 독과 수중전으로 유명한 ‘겁쟁이 니그미’가 여왕이라니?
“허물 없는 뱀, 모든 것을 포기한 여왕!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이써!”
가느다란 뮤트의 목소리는 존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 그 겁 많던 네임드 뮤트가, 이 거대한 뮤트 군단 전체의 여왕이라니. 뮤트 여왕의 자손인 네임드들은 생식능력도 없을텐데.
그리고, 그 녀석이 인간을 증오하긴 커녕, 자신의 무리에 받아들여 보호하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여왕 니그미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가.
무슨 수로 이들을 지배했으며, 왜 제국을 이렇게까지 끈덕지게 공격하는가.
그리고, 왜 인간을 보호하며 자신의 무리에 받아들였는가.
‘….알아보자.’
도박이다.
어쩌면 이게 함정이고, 생각없이 따라갔다간 기다리고 있던 뮤트의 손톱에 찢길수도 있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없을 뿐 내 개인에 대한 증오는 또 모르는 일이다. 꽤 오래된 인연이니까.
하지만, 이게 크나큰 기회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저 두터운 저주받은 군세를 뚫을 대항마.
니그미가 제국을 공격하는 이유를 알면, 어쩌면 협력할 수 있는 것도 아닌가?
“….이봐.”
“응?”
“혹시, 나 이전에도 이 협곡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 나 같은 존재들이 있나? 저런 갑옷에, 저런 칼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캉캉!
검집으로 갑옷을 두드리며 묻자, 뮤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아! 최근에는 없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 대답이 결정타였다. 지금으로선 발을 맞춰 보는 수밖에.
“니그미. 네임드에서 여왕이 된 니그미라….”
왕은 뭐고, 또 지금 녀석의 이름앞에 붙은 이상한 수식어는 뭔지 모르겠지만.
부디 녀석이 해묵은 원한을 잊어버리는 성격이길 바랄 뿐이었다.
왜냐하면, 녀석은 4월드의 교수를 만나고 도망쳐왔다니까.
나랑 똑같이 생긴 그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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