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6
Chapter.4 눈꺼풀(18)
***
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더니, 커다란 천 한 장을 찾아와 내게 던져주었다.
“안쪽으로 가면 물이 흐르는 방이 하나 있을 거예요. 물론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금 상태도 참 보기 좋지만…. 손님을 계속 그런 상태로 머물게 하는 건 주인으로서 실격이잖아요?”
“물이…. 흐르는 방?”
“네에~ 북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살롱 밑을 지나도록 만들었답니다? 여건상 외곽에서 사업하고 있지만, 그 지역이 썩 유쾌한 환경은 아니잖아요?”
예컨대, 그건가. 씻고 오라는 거.
[껍데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했을 때, 이, 이건….!]또다시 폭주하기 시작하는 기생충과 달리, 내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물. 마탑의 수원지에서 내려오는 물. 경험해보고 싶다. 느껴보고 싶어….!
교수는 곧장 살롱의 안쪽으로 향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다. 여기서 분명 물소리가 들린다.
벌컥!
고급스러운 나무문을 열자, 부드러운 느낌의 장식이 가득한 방이 하나 등장했다. 세련된 조각.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작은 유리병. 커다란 흰색 욕조. 그리고…..
촤아아아아-
정말이다. 욕실 안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모. 못참아.”
[어….껍데기? 네 의식이 대단히 복잡한 형태로 변하고 있는데…?]“못 참아! 이건 못 참아! 이예이이이이!”
풍덩!
이성을 잃어버린 교수는 곧장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에 바위라도 떨어진 것처럼 사방에 물이 튀면서 교수의 몸이 물속에 푹 잠겼다.
‘아아아…. 녹아내린다…. 모든 근심과 걱정, 번뇌가 사라지는구나….’
머릿속에 남아 어른거리던 화려한 감각과 부드러운 여인의 곡선이 강물에 휩쓸려 사라진다. 남아있는 것은 그저 만족감. 이건…. 그래. 그 느낌이야. 힘든 작전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 군복을 벗어던지고 침상에 몸을 던질 때의 그 감각.
“물이다. 물은…. 물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었어….”
시원하게 몸을 휘감는 강물의 감각과 함께, 교수는 그대로 의식을 놓아버렸다. 밖에서 락샤샤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교수가 정신을 차리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
실컷 수욕을 즐기고 몸을 닦고 밖으로 나오자 문앞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옷이 놓여있었다.
천막처럼 커다란 망토와 어떻게 찾았는지 내 몸에 맞는 튼튼한 가죽 바지, 조금 찢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입을 만큼 큰 셔츠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티가 났다.
교수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다, 카운터 뒤쪽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이제 그는 도시에 수배가 된 처지이니, 이 살롱에 찾아온 손님이 그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다행히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살롱은 창문에 모두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고 손님도 아무도 없었다.
락샤샤는 널찍한 테이블에 홀로 앉아 물담배 처럼 보이는 것을 피우고 있었다.
“외부의 시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길드 손님이 오는 날은 영업을 안 하거든요?”
그녀는 손을 뻗어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자리를 권했다.
후우우-
물담배의 연기가, 구름처럼 두 사람을 감싸고 흩어져갔다.
“그럼, 본격적으로 거래 이야기를 해볼까요?”
***
락샤샤는 진귀하고 희귀한 물건을 모으는 습관이 있었다.
드문 것. 세상에 몇 개 없는 것. 그런 물건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감각은, 나른한 그녀의 삶에 몇 없는 귀중한 자극이었다.
그래서 길드원들의 손에 끌려온 거대한 남자를 봤을 때, 잠깐 관심이 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뮤트로 오해할 법한 외모. 길드의 암호를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
‘살짝…. 찔러볼까?’
길드의 일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 정도면 잠시 즐길만한 정도는 될 것이라 생각하여 직접 상대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약물에 절어 흐리멍덩한 눈과 그녀의 유혹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그녀의 기대는 금방 실망으로 변해버렸다.
‘평범하게, 그냥 마법사에게 시달린 남자.’
대충 심문을 끝내고 길드원에게 넘기려던 순간, 그녀는 보았다. 칼날에 반사된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그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연기?’
그 순간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재미있어질지도 모르지만, 위험하니까. 그녀는 아직 이곳에서의 삶이 즐거웠고, 비밀스러운 외유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움을 담아 사체에게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는데, 죽은 남자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쿨럭! 글쎄. 그쪽이 아까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관계라는건, 서로 알아가는 거라고.”
그녀는 보았다. 잘려나간 경동맥과 기도가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을. 엘더 스파이더의 실에 잘려나간 그의 손이, 그저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달라붙어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불사의 육체가 저것에 가깝지 않을까?
‘진귀한….인간…!’
그녀의 나른한 심장이, 기분 좋은 고동을 울렸다.
***
그녀는 이 교수라는 남자와의 관계를 아슬아슬한 선에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뢰를 원하는 남자. 너무 저자세로 나가서도, 그렇다고 너무 압박을 주어서도 곤란해······.’
다행히 그는 거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길드원의 목숨을 아끼는 척, 자연스럽게 그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그녀의 페이스였다.
‘육체적인 면도 상당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머리를 쓰는데도 익숙해. 하지만······. 이성에게 약한 모습. 재밌다.’
그녀의 작은 터치에도 부르르 떠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애를 태운 뒤, 살살 구슬리며 남자의 비밀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 생각이었는데······.
“저….교수씨?? 차 한잔 하지 않겠-”
“아, 일 얘기합시다 일. 차 별로 안 좋아해서.”
“그, 그럼 다과라도?”
달칵!
우적우적우적!
“음. 맛있네. 됐죠? 피차 바쁘니까 뜸 들이지 말고 중요한 얘기부터 하자고.”
이 남자, 한 시간 가까이 씻고 오더니 갑자기 목석이 되어버렸다.
‘이상하다? 분명 내 감각권 안에 있었는데? 욕실에서 한 일이라곤…. 한 시간 내내 미동도 없이 물속에 잠겨있던 것뿐이었어.’
어떠한 행동도, 마법의 흔적도 없었다.
“그, 그럼 정확하게 어떤 내용의 의뢰를 하고싶으신지….”
“아,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혹시 하이 재킹(Hijacking : 비행기, 자동차 등의 탈것 납치)이라고 압니까?”
남자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빈 다과 그릇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음. 이 경우에는 타워재킹(Towerjacking)인가. 나, 마탑을 통째로 인질로 잡아보려고 하는데.”
….어머?”
이 남자는,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상식에서 아득히 먼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최고로다.’
목욕재계를 마치고 락샤샤의 앞에 다시 나타난 교수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 그 자체였다.
‘어찌 지고의 쾌락을 눈앞에 두고 한낱 여체에 흔들렸던 것이냐, 교수야. 언젠가, 대해(大海)를 마주하고 앉아 그 깊고 푸른 물에 대고 오늘의 추태를 사과하리라.
[이, 이건 도대체 무슨….! 무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물에 대한 생각밖에 남지 않다니…. 껍데기, 도대체 어떤 끔찍한 세뇌를 당한거냐!]‘불쌍한 기생충. 의식밖에 없는 너로서는 이 푸르른 편안함을 평생 모르리라. 너를 동정한다, 기생충아.’
교수는 눈앞의 락샤샤를 보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교태가 어리는 눈짓. 귀여운 듯, 성숙한 느낌을 주는 작은 얼굴. 비단결 같은 머리칼. 그리고 신이 따로 일주일 정도 추가로 시간을 내어 빚은듯한 완벽한 몸매. 그래. 이 여자는 한없이 아름답다. 마주하는 그 어떤 남자의 방심이라도 뒤흔들 만큼.
하지만 교수의 그런 헛된 마음은 이미 저 강물에 흘려보낸 뒤이니.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방법만이 고요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적어도 머리에 묻은 물이 마를 때까지는 이 상태가 유지되리라.
“마탑을 통째로 털어먹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나 해서.”
교수의 입에서 나온 의뢰내용에 락샤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내용이지. 도시 단위의 힘을 휘두르는 마탑을 상대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뻔하니까.
“다소······. 당황스러운 의뢰 내용이네요? 외지 분이라 모르실 수도 있지만, 이 도시에서 마탑을 거스르고 살아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랍니다?”
“알지요. 여기 온 지 하루도 안 돼서 아주 확실히 알겠어. 도시 내 운송도 마탑. 도시의 특산물도 마탑. 도시 거주지, 복지, 기타등등…. 아주 마탑이 도시 전체를 꽉 잡고 계시더구만. 다행히 나는 꽤 합리적인 사람이고, 무리한 부탁 같은 건 안합니다.”
교수는 주변에 뭔가 필기할 만한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다, 그냥 락샤샤가 내어온 찻물을 손가락에 찍어 테이블 위에 그렸다. 가운데 동그란 마탑을 그리고, 동서남북에 점을 찍어 대충 토브룬의 지리를 표현했다.
“하나는, 도시의 서쪽에서 소란을 피워줄 것. 소란의 종류는 상관없지만 규모가 조금 있었으면 하는데. 최소…. 영주성의 기사단이 서문으로 몰려갈 정도로.”
교수의 말에 락샤샤는 인상을 찌푸리며 난색을 표했다.
“음…. 쉬운 부탁은 아니네요? 기사단이 움직일 정도라면 도시 전체의 위기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것 같은데? 요즘 로드릭 사람들이 워낙 예민하니까. ‘뮤트가 습격했다~!’ 하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가능한거 아닙니까?”
“그거 알아요? 도시 안에서 그 정도 선동을 하다가 걸리면, 반역으로 잡혀갈 수도 있는 거?”
락샤샤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리 간단한 방식으로는 안 되겠지만, 가능은 하겠네요. 마침 어제부터 도시 내부에서 이상한 남자 한 명이 말하는 붉은 뮤트에 대한 소문을 내고 다니기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붉은기가 도는 피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재생력. 기이한 분위기.
그녀의 시선에 교수는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진짜?”
“가짜. 아까 들어보니까 감옥에서 있었던 일 다 알고있더만. 마법사가 공증하는 거 들었잖아요? 나 사람이라고.”
“하지만, 소문의 대상과 너무 똑같이 생겼는걸요?”
“그야 내가 낸 소문이니까.”
그 말에 그녀의 눈이 한번 더 휘둥그레졌다. 귀여워라.
좀 멀리 돌아왔지만, 계획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도둑 길드를 이용해 도시 내부의 병력을 서쪽으로 몰리게 한다.
붉은 뮤트의 소문이 퍼지게 되면, 마법사들은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이 도시에서 마법사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인 마탑안에 머물게 되겠지. 마법사와 기사, 위협요소가 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 두 요소의 위치를 확정시킴과 동시에 분리하여 외부에서의 조력을 차단한다.
“그리고 그다음 내가 마탑을 무력화시키면, 당신과 길드원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마탑의 고급 아티팩트부터 마도서, 현금, 귀금속 장식까지 값나가는 건 싸그리 챙겨서 튀는 거지. 의뢰 보수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락샤샤는 잠시 교수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계획이었다.
일이 다 잘 풀렸다고 치자. 이 남자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기라성 같은 마탑, 그것도 마법사들이 잔뜩 몰려있는 마탑으로 들어가 마법사들을 전부 제압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마탑은 이 도시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녀의 길드원들이 도시 병력의 주의를 끄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마탑에 저렇게 큰 이변이 생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병력은 마탑을 향해 방향을 돌릴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마탑을 제압하고 값나가는 물건을 챙겨서 도주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재밌어보여.’
좀 전부터 느릿한 고동으로 뛰고 있던 심장이,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이 예쁘게 포장된 도시에서 마탑의 추악한 가면을 벗겨낸다니. 정말 동화속 영웅시에나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계획에 대해 조금 더 들어보고 싶어졌다.
“자잘한 문제들은 천천히 손 보는 것으로 할까요? 우선, 마탑의 마법사들을 어떻게 제압할 생각이에요?”
락샤샤의 질문에 교수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이걸 물어봐주길 기다렸다. 사실 아까부터 이거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고.
“락샤샤라고 했나? 혹시…. ‘공마석’이라고 들어보셨는지?”
교수의 말에 락샤샤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
[외전] 43구역의 향신료상들***
※스포주의! 39화 / 눈꺼풀(11) 이후의 배경을 다루고 있음.
43구역.
게드로이츠 컴퍼니의 사용자 지역 구분에 따라 나누어진 구역 경계 중, 앞에 43이 붙는 지역을 말한다.
여느 황무지와 다를 바 없이 쓸쓸하고 거친 이 지역에는, 다소 특이한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 두명이 살고 있었다.
“타앙!”
“어때? 쓸만하지, 이 정도는? 그래도 제법 사용하는데?”
쓰으으읍-
“푸하아아아아아- Herr Gott, bitte vergeb mir, dass ich den Dreck gesehen habe.( 더러운 것을 보고만 나를 용서하소서.)
자, 여기 강철턱의 이안, 통칭 메탈죠 라고 불리는 상인이 있다.
이안은 며칠 전부터 같이 살게된 친구의 손에 들린 괴상한 쇠뭉치, 그의 의견에 따르면 ‘권총’이라 주장하는 무언가를 보고있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평가를 바라는 친우를 보고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어때? 어때 같은 소리 하고있네. 표적지를 5미터 거리까지 당겨서 쏘면 그게 사격이냐? 총신으로 후려치는거지.’
자신이 만든 수제 담배를 한 호흡 만에 끝까지 태워버린 이안은, 주머니에서 새로운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가, 다시 손을 집어넣어 하나 더 꺼낸 다음 입에 물었다.
불이 붙은 장작개비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인 이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고집불통의 작은 친구를 설득해야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어이, 벡스. 너는 그 쓰레기에 ‘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양심에 찔리지도 않으냐?”
“이이익! 무시하지 마! 소중한 ‘총’이라고! 이래 봬도 45구에서 내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준!”
맞은 편에 조잡한 총을 들고 있던 작은 남자, 벡스는 한순간에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진 듯한 얼굴이 된 그의 친우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물론 저어기 머리 한구석에 박힌 이성이 ‘이거 불발돼서 죽을뻔한 적이 더 많잖아–;’ 라고 속삭였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는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고, 그 원인이 해결된 지금에 와서도 그러한 성향은 변함이 없었다.
향신료 상의 일은 아주 위험하니 화력을 보충하는게 어떤가, 하는 이안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대충만든 사격 시험장까지 따라왔지만, 막상 버리려고 생각하니 도무지 자신이 만든 이 수제 권총을 버릴수가 없어 이렇게 티격태격하게 된 것이다.
이안은 담배를 문 상태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며칠 전 거래 상대가 실링 대신 지불한 담뱃잎을 말려서 직접 만든 담배를 오늘 다 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자아, 벡스? 잘 들어봐. 총이라는 건 말이지, 한쪽이 밀폐된 관에 들어있는 탄자를, 화약 등의 힘으로 날려 보내는 무기를 말하는 거야.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 앞에 있는 적의 몸에 구멍이 나야 해. 맞지?”
벡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총’을 들어 보이자, 이안의 이마에 힘줄이 한층 더 불거졌다.
“그리고, 어떠한 자극이나 도화선, 격발장치 등을 통해 화약을 터트려 그 충격으로 피해를 주는 물건. 그런 물건을 사람들은 폭탄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어엉? 알아들어?! 폭탄이라고 폭탄! 내가 총기랑 폭발물 양쪽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단언컨대! 네놈이 들고 있는 그 수상쩍은 스크랩 덩어리는 총이 아니라 폭발물이라고 이 멍청아!”
이안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그의 소중한 ‘총’을 매도하자, 벡스도 발끈해서 맞받아쳤다.
“멍청이라고 하지 마라! 그래서 터질까봐 총신도 잘 보강해놨다고!”
“보강 좋아하시네! 5.56mm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총신위에 파이프를 겹겹이 끼워넣어서 직경이 6cm가 넘어가게 만든걸 누가 보강이라고 부르냐! 돈도 많잖아! 버리고 새것 좀 쓰라고!”
“니가 화기를 와이프처럼 다루라면서! 수 년간 황무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조강지처다! 못 버려!”
빠직!
그 순간, 이를 벅벅 갈아가며 참고있던 이안의 성질머리가 터져버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소중한 와이프 M30과 저 너절한 스크랩 덩어리를 비교해?
“닥쳐라! 네놈이 손에 쥐고 있는 건, 와이프라고도 부를 수 없는 마스터베이션 키트란 말이다아아앗!!!!”
쿠당탕!
결국 폭발해버린 이안이 벡스에게 달려들고, 벡스는 자신의 ‘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날렵하게 성난 황소 같은 이안의 습격에서 달아났다.
지직- 지지직-
황무지의 총포 및 기타 자극적인 것 판매점, [SPICY LIFE]의 네온사인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모래 먼지 사이에서 희미하게 깜박였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여기저기서 총성과 포화 소리가 넘치는, 평화로운 43구역이었다.
***
“교수한테 물어보자.”
“음? 교수?”
멸망 전 볼링장이었던 곳을 개조해 만든 이안의 쉘터에서, 한참을 뛰어다닌 벡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 교수. 우리 셋 중에서는 가장 멀쩡하잖아. 솔직히.”
“음…. 그야 그렇지?”
이안은 며칠 전에 있었던 그 화려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냉철한 판단력. 한순간에 상황을 파악하는 그 기민함, 계획이 서면 머뭇거리지 않는 그 과감함. 녀석의 의견은 확실히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 짜리몽땅은 그 녀석의 말을 잘 듣고 말이지.’
녀석의 말이라면 저 고집불통 스크랩박이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이안은 왜 진작에 이 생각을 못 해서 이렇게 고생을 했는지 자기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좋아. 당장 물어보자고. 그 녀석이 분명 게임 방송 같은 걸 한다고 했지?”
“GG. 47구역 대화방에서 진행중.”
이안은 한쪽 구석에 있는 거래용 접속기에 전원을 올렸다. 다행히 지난번에 거래 대금 대신 받은 접속기가 하나 더 있어서, 백스와 같이 대화방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자아, 어디 얼마나 잘난 게임을 하길래 나의 구애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실까?”
이안은 47구역 대화방을 클릭하며 내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방송으로 먹고사는 친구라니. 뭔가 대단한 사람을 친구로 둔 것 같지 않은가?
스팟-!
화면이 켜지고, 이상한 석조 건물 같은 것이 보였다.
둘은, 순간 눈에 들어온 것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부그르르륵!”
“푸하아악!”
첨벙, 첨벙!
“나가! 내, 내 머리에서 나가!”
– 도막사라무 : ㅋㅋㅋㅋ 쟤 왜 저럼?
– iwoduf3872 : 몰라. 뮤트 피해서 저기 숨더니, 갑자기 중얼거리면서 발광하는데? 막 엄마, 엄마 그러면서?
– Jokass : 뭔가 문제가 생긴 거 아님? 지금까지 잘 하고 있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이거 리얼리스틱 모드아냐. 갑자기 미칠 수도 있는 거 아님.
띠링-!
[Player `단딴지‘ 님이 `professor` 님에게 1000 실링을 기부하셨습니다!] [Player `노마두라타‘ 님이 `professor` 님에게 1000 실링을 기부하셨습니다!] [Player `GuiGui2201‘ 님이 `professor` 님에게 5252 실링을 기부하셨습니다!]거대한 근육질의 남자가, 곳곳에 피가 눌어붙은 이상한 방의 한가운데 놓인 욕조에서, 넝마에 가까운 옷을 입은 채 거무튀튀한 물을 튀기며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자극적인 컨텐츠] 란 말인가?
뭔가, 뭔가 그의 가슴을 둔중하게 울렸다. 벡스와 자신이 시답잖은 짓으로 시시덕거리며 사는 동안, 교수는 이렇게나 열심히 살고 있었다니.
– 랜드라드로드 : 그러니까 정수기를 쓰는 것 보다, 펌프를 돌리는 게 훨씬 전력 적으로 이득이라니까?
– 발자취중진담 : 물은 어디 땅만 파면 나오냐? 지하수도 오염된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왜? 아주 사이코 갱처럼 탄산음료 비슷하다고 물에 세슘 타먹지 그러냐?
– 폼폼코도 : 오, 맛있겠다.
– 오스왈도 : 히히! 야한 짤 발싸!
– 간장게이바 : 이, 이게 뭐노
– 스피드 웨건 : 여기 그런 방 아니다.
– 노루Drug해요 : 아이구, 이 귀한걸. 감사히 쓰겠습니다~
이 수많은 고삐 풀린 망아지들 앞에서 저렇게 광대처럼 손을 휘젓고 있는 교수의 얼굴은, 그냥 보기에도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마치 내면의 누군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처럼.
‘행위예술 같은 거구나.’
이안은 게임방송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깊이가 있는 일 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교수가 잠잠해지더니, 뭔가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 DOOMgay : 어, 교수 깼다.
– 백수 : 진짜다. 이제 움직이는데? 아까 혼자 막 소리 지르면서 지랄하더니, 괜찮아 진 건가?
반갑게 인사하려다, 어쩐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안은 상식이 있는 성인이었다. 누군가의 치부를 보게 되었을 때, 때론 모른 척 해주는 게 서로를 위해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쉬이이익- 덜컥!
이안은 교수가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까지만 보고 접속기에서 나왔다. 벡스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접속기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벡스. 일하러 가자.”
“으응…. 그래.”
“그 쇳덩어리가 마음에 들면 그냥 들고 다녀. 남자라면 애착총기 하나 정도는 있는 법이지. 그것도 들고 다른 총도 들면 되지 뭐.”
“그렇….지. 이 총이 성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추천해줄래? 총 하나?”
교수의 치열한 삶을 목격한 둘은 작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황무지의 세 친구중 나머지 둘의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게 틀림없으니, 멀쩡한 자신이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깨달음을.
물론 교수는, 자신이 그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벡스는 이안의 거처에 있는 버기에 오늘 장사할 물건들을 싣고 있었다. 확실히 이안은 황무지에서 개인으로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돈이 많아 보였다. 남들은 한 대도 없어서 구역에서 구역으로 넘어가는데 꼬박 하루씩 걸리는데, 이 정신 나간 폭파광은 커다랗게 렙터 마크가 박힌 무장트럭에, 평소에 사용하는 버기에, 이제는 허머라는 구시대의 명품까지 추가되었다.
허머의 파란 차체에 남은 탄흔을 보고 있으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햅번….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바로 전에 방송에서 본 기괴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디를 가나 열심히 살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런 식’으로 열심히 살 줄이야.
아마 헤어지기 전에 잠깐 말했던 빚 때문일 것이다. 분명히.
‘으음······. 여차하면 내가 돈을 빌려줘야겠다.’
벡스는 버기의 화물칸에 한치의 빈 틈도 없이 탄 박스와 총기가 보관된 나무상자를 쌓아 올린 다음 손을 털며 생각했다.
오히려 잘된 일일수도 있다. 교수가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해버리면 찾아갈 만한 사람은 메탈죠 녀석과 그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교수까지 여기 합류하면, 열쇠 팔아서 번 돈으로 깔끔하고 튼튼한 발전기를 하나 사는 거야. 차도 마침 세대니까 셋이 한 대씩 몰고 황무지를 돌아다니다, 괜찮은 건물을 발견하면 거기서 사는 거지. 실드도 사고, 은폐장도 사고, 지하수 펌프도 사야되고…..’
“돈 많이 벌어야겠다······.”
“오, 짜리몽땅. 의욕이 넘치는데? 아주 좋은 자세야!”
언제 왔는지, 무장을 단단히 한 이안이 버기에 실린 짐을 점검하고 있었다.
“AK 2정, 애플 여덟 개, 공업용 다이너마이트 열 묶음······. 캬, 벡스 이자식, 역시 정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먼! 이거 뭐 확인할 필요도 없겠어. 어쩜 저렇게 깔끔하게 잘 정리했냐? 빈틈 하나 없이, 심지어 위에서부터 알파벳 순으로 정리했네?”
단순히 짐을 싣는데 ‘정밀하다’는 표현을 붙여도 좋을 만큼 깔끔하게 적재된 짐을 살피던 이안은, 등에 메고 있던 철가방에서 새까만 총기 한정을 꺼내서 벡스에게 던졌다.
철컥!
“우아앗! 뭐야, 이거?”
“뭐긴. 네가 말한 조건에 맞는 총을 하나 소개해 달라며.”
벡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손에 들어온 묵직한 총기를 확인했다. 황무지 생활을 꽤나 했다지만 벡스는 대부분 멀쩡한 화기와는 거리가 먼 스캐빈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 넘겨받은 총은, 그런 그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녀석이었다.
“USAS-12?”
“크흐흐흐. 어때, 끝내주지? 그 철 뭉치 같은 거랑 비교가 불가능하지?”
“아니, 좋은 총이기는 한데, 분명…..”
벡스는 총을 찾으러 간다는 이안의 말에 확실하게 그의 취향을 알려주었다. 자신은 전선에서 화력전을 하는 타입이 아니니까 가볍고, 움직이기 쉽고, 기왕이면 한순간에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무기를 선호한다고. 메탈죠 녀석에게 부담을 줄까 봐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은 스콜피온이나 우지 같은 소형 기관단총이었다.
그런데 막상 받아든 것은 조준경 아래로 대검을 착검한 것처럼 길쭉하게 뻗어나온 총신에 큼지막한 개머리판과 더불어 무려 ‘드럼탄창’을 쓰는 거대한 연발 산탄총인 것이다.
“도대체 내 주문의 어떤 면을 반영한 거냐?”
“음? 순간 화력 투사가 뛰어나고 움직이기 쉬운 화기 찾는 거 아니었어? USAS라고. `다목적 ★스포츠★ 자동 산탄총(Universal ★Sports★ Automatic Shotgun)`. 스포티 하잖아? 들고 다니기 쉬울 거라고?”
“유니버셜 스포츠 좋아하시네! 울트라 세비지 오토샷건이겠지! 아니,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스포츠가 12게이지 샷건 탄이 분당 360발이 나가는 총을 필요로 하는데!”
“헤이~ 츄라이 츄라이! 너무 그러지 말고 일단 한번 써보라고! 견착하고 연발로 갈기면 그 반동이 심금을 울린다니까? 심정지가 와도 CPR이 따로 필요없을걸?”
“%$#@&*^^?{*&**%^!!!”
내가 미쳤지. 화력밖에 모르는 저 또라이한테 총을 골라달라고 하다니.
“지금이라도-”
“우리 늦었다. 5분만 더 지체하면 거래 시간에 늦을 수도 있어.”
당했다. 이안은 이미 시간까지 계산해서 저 총을 들고나온 것이다.
“으으으으…. 햅번, 보고싶다아아….”
“괜찮아, 괜찮아. 처음에만 좀 힘들지, 쓰다 보면 다 익숙해져!”
이안은 울상이 된 벡스를 옆자리에 태운 뒤 버기에 시동을 걸었다.
“자, 그럼 오늘도 장사를 시작해 볼까!”
부아아앙!
차고의 문이 열리고, 이안의 취향대로 개조된 버기가 황무지의 모래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차 안에서도 티격태격하는 그 둘을 황무지의 모래바람이 까슬하게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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