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62
Chapter. 21. 어나더 솔로 플레이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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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균열이 생길 당시에 추락한 지상의 저택들을 그러모아 이어붙인 곳이다. 저택들이 놀랍도록 화려하고 튼튼하더군.”
“성하도시의 저택들은 전부 제국 귀족중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사람들의 것이었으니까. 에…. 뮤트, 원래 이름은 뮤테이션 블러드로, 220년 전쯤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 전성기를 구가한 종족이지. 여왕과 네임드, 생산형 뮤트인 챔버메이드와 그 외 뮤트 정도로 나뉜 크기에 비해 간단한 구조를 지닌 종족이었다.”
“여왕과 네임드. 챔버메이드와 그 아래 권속인가.”
사각사각-
“그렇지. 그중에서 네임드, 여왕이 직접 잉태한 직계 자손에 지금의 니그미가-”
후욱 후욱!
또각!
“니, 니그미가 포함되어 있었고….”
“잠시. 깃펜이 부러졌군.”
파울드가 ‘서로 혼잣말을 할 뿐인’ 상황을 꾀나 진지하게 여겼기 때문에 왕과 나의 대화는 서로 다른 방향의 벽을 향해 돌아선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그 진귀한 광경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대단한 인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뮤트의 왕. 온갖 종족의 잡탕인 종족이며 한때 겨우 2년 만에 세계를 집어삼킬 뻔한 종족의 왕이라는 자가, 내 등 뒤에서 열정적으로 필기를 하고 있었다.
동물의 다리 위에 곤충의 갑각을 갑옷처럼 뒤덮은 다리 위에, 지혜 교단의 상징이 선명한 문짝만한 책을 얹어놓았다.
체구에 어울리는 커다란 손은 그의 손톱만한 고급스러운 깃펜을 쉼없이 놀리고 있었으며.
기세만으로 나를 압도한 사자대가리 왕은, 주변에 쌓인 책들이 팔락거릴 정도로 흥분한 콧김을 뿜어내며 그가 모르는 여왕의 일대기를 작성하고 있었다.
저게 뮤트의 왕이라고. 흑마법적 실수에서 탄생해 고작 2년 만에 세상을 집어삼킬 뻔한 공포의 대명사, 뮤테이션 블러드의 ‘왕’이라 불리는 작자의 모습이란 말이다.
“….크르륵, 흠!”
“아, 어…. 니그미는 네임드에 포함되어 있었고, 지금과 달리 리자드맨에 가까운 생김세에 비늘도 녹색과 청록색이 섞인 그런 모습이었다.”
“녹색과 청록이라. 대단히 고아한 모습이었겠군.”
쿡쿡!
뭔가 등허리를 찔러서 돌아봤더니, 카울드가 고개를 돌린 체 그의 커다란 책과 깃펜을 내 쪽으로 들이밀고 있는게 아닌가?
크흠, 흠!
“뭐, 뭐요?”
“….황제의 저주가 자욱한 이곳에서 환상을 보고 혼자 떠드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또한, 몽유병처럼 정신을 잃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들도 종종 있지.”
쿡, 쿡쿡!
채근하듯 들이밀어진 그의 책에는 내가 중얼거린 말들이 황송할 정도로 멋들어진 필기체와 대문호 뺨치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 옆에는 반쯤 그리다 만 누군가의 흉상이 삽화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여왕. 당시 1세] 라는 각주와 함께.“….그려달라고?”
“나는 그저 혼잣말을 하고있을 뿐이며, 나도 모르는 사이 환각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 그림 못 그리는데.”
“대충이라도, 윤곽만이라도 좋다.”
세상에. 카울드의 기품 넘치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기대감에 파르르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뮤트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지 말라는 니그미의 명령은 지키면서도- 어떻게든 그녀의 과거사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군.
‘이게 뮤트의 왕이라고?’
이게 어떻게 환상이 아니고 실제란 말인가. 뮤트의 왕이라는 놈이, 키가 성벽만 하고 눈알이 수백 개 달린 피투성이 괴물이 아니라 책더미에 파묻혀 사는 마더콤 사자대가리라니! 벌써 열 번도 넘게 볼을 꼬집었고, 다섯 번 정도는 몇 개 없는 성수병을 만지작거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내가 저주에 당해서 환각을 보고 있다는 게 타당한 광경이 아닌가?
얼빠진 생각을 하며 대충 스케치한 삽화를 넘기자 등 뒤에서 기분 좋은 그르렁거림과 함께 카울드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쉬이 공감할 수 없겠지. 우리가 왜 이렇게 여왕을 따르는지. 과거 ‘악신 여왕’이라 불렸던 뮤트가 가진 정신파는 물론 그 어떠한 강제력도 없는데 말이야.”
카울드는 내가 망쳐버린 삽화(내가 손대기 전의 윤곽만 해도 예술작품에 가까웠다)를 손등으로 쓸어내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니 딱히 혼잣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왕의 크고 허름한 의자가 드르륵- 하고 끌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마주했다.
이것저것 기워붙여 사자의 형상을 흉내낸 듯한 얼굴은,
여전히 어색하고, 흉험했지만. 어딘가 인간적인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무언가 결여된 채 태어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있나.”
“결여?”
“그래. 생명체로서 본질적인 조건이 결여된 이들만이 가지는 공허한 감각. 과거의 ‘뮤테이션 블러드’는 어땠는지 모르나, 지금의 ‘뮤트’는 모든 개체가 이러한 결핍에서 비롯한 박탈감을 가지고 있지.”
카울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안에 손을 넣어 어금니 하나를 뽑아 보였다.
으득!
약간 피가 묻어나온, 어금니 형태를 한 보랏빛 여왕의 파편.
“우리는 이 알 수 없는 기물에 의해 탄생했다. 과거엔 어떤 모습을 한 어떤 생물이었을지 모르지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한 마리의 뮤트 로드로 완성되어 있었지. 가진 것이라곤 강인한 몸뚱이와 인간에 대한 증오, 나의 무리를 키워야 한다는 욕구 뿐. 그 외의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호수에 단 한 줌의 물만이 들어있을 때. 마치 그것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쓸쓸함, 허무함과 같은 기분이지. 과거의 뮤트가 여왕의 명령에 의해 폭력적이었다면, 현 세대의 뮤트는 탄생과 함께한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공격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신의 터는 넓은데 그 안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한 줌 가진 것을 어떻게든 키우기 위해 발작하는 것이지. 더 큰 무리를 원하고, 더욱 강하게 인간을 증오하고. 우리에겐 그것 말고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뮤트가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애초에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만 있었다.
“그럼…. 당신들은 지금의 ‘뮤트’가 과거의 ‘뮤테이션 블러드’와는 다른 종족이라 여기는 건가?”
“생명체로서 특징이라면 다른 종족으로 분리하는 것은 어렵겠지.”
“허나. 우리가 생물학적 특성을 따져 물어도 될만한 생명체인가?”
카울드는 곤충과 동물이 뒤섞인 듯한 그의 다리를 까딱였다. 말보다 명확한 답이었다.
“우리는 다른 종족을 잡아먹고 그것을 뒤섞어 탄생하는 종이다. 육체적 특징으론 우리를 하나의 종이라 구분 지을 수 없다는 뜻이며, 정신적인 결속이야 말로 ‘뮤트’를 하나의 종으로 있게 하는 뿌리이자 근본이라는 뜻이다.”
“정신적 결속이 뿌리이며 근본이라….”
“파편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는 태생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이지. 때문에 우리 종족은 아무 의미 없는 개별적인 존재로, 우연히 탄생한 환경 재해 같은 그런 삶을 살아왔다.”
“폐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살아왔지.”
팔락, 팔락-
카울드의 커다란 책이 첫장으로 돌아갔다.
아까 순식간에 그려낸 스케치와는 달리 조악하기 짝이 없는 삽화. 마치 알콜 중독증 화가가 그린 듯 어설픈 삽화는 시간을 들여야 겨우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바위와 해안. 바닷물에 떠내려온 누군가와, 그 앞에 허물어진 누군가.
삽화의 아래에는 조악한 글씨로 [신이시여]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카울드는 내 시선의 방향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시엔 신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내 손에 죽은 무수한 인간이 입에 담은 그 발음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지. 그걸 어떤 순간에 쓰는지도. 생각해보면, 권속과 정신파로만 이야기하던 내가 처음으로 말문이 트인 순간이 아닐까 싶군. 어떻게든 터져나오는 감정을 밖으로 내어야만 했지.”
하얀 비늘을 가진 그것은 심각한 상처를 입고 해안에 떠내려와 있었다.
당시 아주 작은 무리를 가지고 있던 카울드는, 평소처럼 거친 파도가 실어다준 고기라 생각하며 그것을 먹기 위해 내려왔다.
그리고. 그 뱀과 인간을 섞은 듯한 하얀 생물을 마주한 순간, 카울드는 태어나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을 마주했다.
“나를 보고 안심하더군. 기지 못할 만큼 다치고 몹시 겁에 질리기까지 한 상태에서, 그저 다가온 내가 같은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안도하며 쓰러진거야.”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너희에게 당연한 것이 우리에게도 당연할 것이라 여기지 말라.”
파편에 의해 만들어진 현생 ‘뮤트’에겐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의 뿌리. 단순한 무리의식이 아닌, 뮤트라는 종의 모든 구성원을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로 여기는 단단한 가족애.
니그미는 사라진 고대 뮤테이션 블러드의 유일한 생존자로, 그들이 잃어버린 본능적인 유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내가 그녀에게 묶여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재하는 나의 모든 것을 가느다란 줄로 분해하여 그녀라는 존재에게 새로이 단단하게 얽혀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니그미는 어떤 능력도, 권능도, 심지어 뮤트 로드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보라색 힘의 결정조차도, 누군가 강제로 뜯어낸 듯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폐하를 그렇게 만났다. 그저 존재하고 탐할 뿐인 내 삶에 유일한 의미가 생긴 순간이지.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통틀어 단 한명 뿐인, 우리에게 진실된 애정을 품을 수 있는 존재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마주한 모든 뮤트가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지. 그래서 오직 그녀만이 우리의 여왕인 것이다.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형제들의 염원은 그저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것 뿐이지. 우리는 그저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무리일 뿐이다.”
“그럼, 지난 3년 동안 의미없이 제국을 공격했던 이유도….?”
“여왕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지. 그녀가 원한다는 것에서 다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그럼 니그미는, 왜 제국을….?”
“….우리 때문이다.”
나의 질문에 사자를 닮은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금의 폐하가 조금 어린아이 같이 행동하시는 것은 눈치챘겠지.”
“….옛날과 조금 다른 것 정도는.”
“폐하께선 상처가 많으신 분이다. 우리 모두를 담을 만큼 큰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상처를 가지고 계심을 의미하지. 그중 몇몇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 번은, 성자라 불리던 자에게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와 형제를 모두 잃었을 때.
또 한번은, 워로드라 불리는 자에게. 카울드 이전에 이미 그녀를 모시던 그녀의 무리를 모두 잃고, 어렵사리 구한 그녀의 보랏빛 파편이 생살과 함께 뜯겨나갔을 때.
“상실감과 공포는 그분의 정신을 부숴버리고 말았지. 나는 과거의 그분이 어떤 존재셨는지 모르나, 지금의 폐하는….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을 뿐이다.”
‘제국이 가지고 싶어.’
카울드가 그녀를 구출하고 어느 날. 니그미는 카울드가 손수 잘게 뜯어 가져온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제국이라면. 제국의 무엇이 가지고 싶으신지.’
‘그냥 제국. 내가 들었는데, 제국은 한 가문이 700년, 800년이나 같은 자리에 같이 살고있는 거래. 한 가족이 그렇게나 오랫동안 같은 곳에 살고 있는거야!’
‘설마….’
‘그럼 나도 제국 할래! 우리 형제들도 다 모여서 큰 성벽도 쌓고, 멋진 궁전도 짓고, 그렇게 백년, 천년 같이 살 거야!’
‘카울드도, 나도, 다른 형제들도…. 아무도 안 죽고 그냥 오랫동안 같이 살기만 할 거야.’
“나는, 나는 그런 감정을 단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 삭막한 세상에 태어난 뮤트라는 종족은, 누군가 자신에게 그 정도 애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의 기록을 되짚어가는 카울드의 손가락은 오래된, 그러나 결코 마모되지 않는 감정에 벅차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같은 일을 겪은 폐하는 새로이 찾아온 그녀의 가족또한 같은 일을 겪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지. 그러던 중, 무수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그 긴 세월동안 황가의 이름을 이어온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셨던 거다. 순수하게, 정말 순수하게 그들을 부러워하셨어. 충격으로 어려져버린 그분의 생각에, 우리 형제들이 또 한번 그분이 겪었던 비극을 겪지 않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던 것이다.”
카울드가 말한 것처럼 정말 어린아이나 할법한 생각이다. 문제의 원인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상적인 대안에 결과만을 투영하는 어린아이나 할법한 생각. 망가져버린 그녀의 정신으로는 그 정도 사고가 한계였다.
‘….예, 폐하.’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날, 니그미는 카울드의 여왕이 되었다.
제국 변두리 해안가의 작은 던전은 아무런 징조 없이 폭주해 뮤트를 쏟아내었다.
영역이 겹치면 한쪽 무리가 흡수될 때까지 싸우던 뮤트들은, 어째서인지 수도로 향하는 카울드의 무리를 마주한 순간 아무런 마찰없이 그들과 합류했다.
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합류한 로드의 숫자가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가 된 순간, 그들은 수도의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라도 좋다. 부서진 왕좌에 허울뿐인 이름이라 해도 좋다. 이 도시의 중심에서 폐하께선 우리의 이름 앞에 ‘제국’이란 이름을 덧붙일 것이며, 그것으로 행복해하실 것이다.”
카울드는 누구보다 격정적인 열망을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으며, 시간을 들여 그것의 의미를 곱씹었다.
되새기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다.
“고작, 그거라고?”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이들의 행위는 되짚어보거나 궁리해야할 복잡한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단순한 욕망.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 라는 니그미의 어린아이 같은 욕망과, 그 어떠한 강제력 없이 순수하게 그것을 이뤄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군대.
제국처럼 되고싶다는 한마디가 이들을 제국으로 향하게 했다.
양대 제국 전쟁과 용맥 뒤틀기로 황폐화된 세상에 또 한번의 전란을 일으켰고.
끝내 제국의 숨통을 조였으며.
그 결과 미친 황제가 전염병을 풀어놓게 만들었다.
“그것 때문에 이 전쟁이…. 서제국령을 이 지경까지 만든 뮤트와 인간의 전면전이 시작됐다고? 그런 의미없는 투정 한마디에?”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빵 한조각보다 못한 세상이라지만, 이렇게 무가치할 수가.
카울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입술을 짓씹는 나를 비웃었다.
“우습구나. 꼭 너희들은 지금껏 의미있는 것을 위해 싸워온 것처럼 얘기하니.”
“적어도 우리는-!”
“우리는. 그래, 인간의 투쟁은 지금껏 무엇을 위해 이루어졌나.”
툭.
와르르르!
그가 발끝으로 무너뜨린 책무더기가 쏟아졌다. 누군가 손이 큰 존재가 읽은 듯 책 면의 절반 이상에 손때가 묻은 그것은 [제국의 역사]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투쟁.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더군. 작은 마을에서 왕국으로. 왕국에서 제국으로. 제국은, 제국으로 남기위해. 제국뿐 아니라 다른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싸운다. 문화, 종교, 경제, 혹은 무력으로 끊임없이 싸우지. 싸움이 끊이지 않아. 마치 쳇바퀴처럼 끝없이 돌더군.”
“하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지잖아! 그 개판을 해쳐나오며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그래, 과거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 여길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루지. 그리고, 그렇게 이룩한 발전을 통해 얻은 것으로 무엇을 하지?”
탁!
어디서 나왔는지, 날카로운 조각을 이어붙인 듯 한 카울드의 꼬리가 책 한권을 내쪽으로 튕겨보냈다.
한 페이지만 계속 펼쳐봤는지 책등이 접혀버린 [제국의 역사].
『그들은, 우리는, 감히 인간이 도달해선 안 될 지식에 닿았다.』
블루라인 산맥 전체가 녹색 빛을 뿜어내는 모습을 그린 삽화와.
『황가여. 부디 제국에 가호를.』
역사에 선명하게 남겨진 ‘A-Tomb(아톰)’이라는 이름.
“그리 치열하게 발전하여, 눈부시게 이룩한 성과로, 또 투쟁을 하더군.”
“탓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무의미한 것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카울드는, 뮤트의 왕은 그의 손떼 묻은 책들을, 대법관의 도서관 전체에 가득한 그의 탐구를 되짚어 내린 결론을 입에 담았다.
“상승의지. 너희 인간은, 그저 더 나아지길 원하는 것뿐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본능. 그게 너희가 투쟁하는 이유지.”
“그것을 위해 지금껏 이룩한 모든 현실을 갈아넣는다. 과거의 너희가 그토록 추구하는 순간에 도달하면, 그것을 비참하게 갈아 다음으로 향한다. 끝없는 쳇바퀴와 같지. 낡은 쳇바퀴에서 더 좋은 것으로. 눈부신 발전은 이루면, 그보다 더 빛나고 커다란 투쟁의 쳇바퀴로.”
“이것이 너희의 본성이다. 비난할 것도, 옹호할 것도 없는 타고난 종족의 본능이지.”
나의 의문에 왕은 답했다.
“이제 말해보아라.”
다음은, 왕이 물을 차례였다.
“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자기파괴적 도약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너희의 투쟁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지?”
“너희가 스스로 파괴할 미래를 위해 과거를 내던지길 반복하는 것과, 우리가 여왕의 아무 의미없는 욕망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 어떠한 차이가 있지? 둘 중 하나가 그것을 비난할 만큼 온당할 가치를 지녔는가?”
나는, 끝내 대답할 수 없었다.
“….”
“대답이 없군.”
“그럼, 답을 떠올릴 때까지는 다시 우리의 혼잣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 말투를 보아 아까 그것 말고도 폐하의 행보를 여러 가지로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숨쉬기 힘들 만큼 무거웠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으며, 오직 ‘제국을 가지고 싶다’는 여왕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국의 모든 역사와 투쟁을 머리에 새긴 현자는 작은 깃펜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기이한 사자머리 생물로 되돌아와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건 나의 원래 모습이 아니다. 폐하께서 제국을 원하시기에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단장한 것일 뿐. 사자는 제국의 상징이 아닌가.”
뮤트의 왕, 카울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게 등을 보였다.
이후 대법관의 서가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쪽은 니그미 왕조의 역사를, 다른 쪽은 네임드 니그미의 일화를.
한쪽은 들을수록 행복해졌으며, 다른 한쪽은 들을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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