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67
Chapter. 21. 어나더 솔로 플레이 (21)
****
어두운 곳을 달리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지금쯤 지상에선 전면전이 벌어졌겠지.’
전장의 소음은 갈수록 먼 과거에서 온 것처럼 흐릿해져갔다.
전장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주위를 둘러싼 어둠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지.
‘전면전은 내부의 황제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침투조가 서두르는 만큼 작전 수행시간이 늘어나고, 그만큼 여유가 생긴다.’
조급해진 마음은 귀와 코로 더듬어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앞으로 가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쿠우웅.
쿵….
..
.
흐릿하게 들려오던 전투의 흔적이 파묻혀간다.
탁탁탁탁-
…타닥. 탁-
… ….
..
.
가쁘게 나아가던 발소리도.
훅, 훅, 훅, 훅,
….후우, 흐,
…
그 발소리의 주인이 숨을 고르는 소리마저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곤, 마치 귀 밑을 뚫고 나오려는 듯 맥동하는 나의 맥박과 허공을 유영하듯 어색하게 손발을 휘젓는 감각.
몸을 움직이는 것. 숨을 쉬는 것,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떠나간 머릿속의 빈 자리에 다른 생각들이 스며들 듯 자라나고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 일부러 끌어올린 것이 분명한 좋지않은 생각들이겠지.
생각이란 본래 의식할수록 더욱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무언가 큰일을 결정하는 자라면, 그것이 가져온 모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함을 네게 말하고 싶었다.]가장 먼저 표면에 떠오른 것은 전쟁을 앞둔 뮤트의 왕이 일부러 찾아와서 해준 말 이었다.
[선한 왕조차 전쟁을 멈추지 못하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받아들여라.]‘내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만큼 강할까.’
그저 교수 녀석과 헤어졌으니 다시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나의 계획은, 어느덧 200년의 시간을 넘었다.
세계수님은 그것을 위해 무리하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결과 시스템에게 가장 먼저 노출되어 사라졌다.
노툼. 그 많은 것을 이루고도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으며, 자신이 이룩한 영광의 편린조차 누릴 수 없었다.
드래곤 알다르샥스는 서제국의 편에서 마도제국에 대항해 싸우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드래곤 세니카마르는 관리자로서 사라진 이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분투하였고, 살해당했다.
오트만과 알다르는 오직 나를 만나기 위해 저 깊은 심해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마지막까지 나를 인도하고 사라졌다.
루실라는 언제 돌아올지 모를 내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기 위해 그녀의 마지막 삶을 바쳤다.
‘할 수 있을까? 내게, 그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들지 않을 힘이 있을까?’
기억이 돌아올수록, 만나고 지나쳐온 사람들을 떠올릴수록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짐이 무거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툭
발이 완전히 멈췄다. 오감을 가리던 어둠이 뇌리에도 스며들어 천천히 나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포근했다. 마치 기나긴 한파를 뚫고 집으로 돌아와 두터운 이불을 덮고 누운 것처럼.
어둠과 함께 가라앉을수록 여기서 멈춰서서 이 편안함을 영원히 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철퍽.
봐. 다들 여기서 멈췄잖아.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뻗은 손 끝에 부폐한 살덩이가 파묻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여기다. 이 협곡의 끝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안식을 찾은 것이다. 충성심, 명예, 의기, 책임과 같이 그들을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부드러운 어둠에 가려지는 이곳에서, 그저 가만히. 깊은 잠 같은 안식에 들었으리라.
털썩.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산더미같은 시체더미에서 흘러나온 물이 얼굴에 튀었지만, 이미 모든 감각이 마비된 덕에 어떤 불쾌함도 느낄 수 없었다.
‘감사한 일이다.’
차라리, 이게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워로드는커녕 니그미를 모시는 뮤트로드 한명에게도 승산을 가늠할 수 없는 내가 아닌가. 워로드는 홀로 대륙을 상대할 정도로 전능에 가까운 전투력을 가졌으며, 시스템은 그녀가 쓰는 이름처럼 이미 세계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의 권능을 지녔다. 어쩌면, 나의 허황된 계획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기 전에 이렇게 끝내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어둠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듯한 감각.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고, 익숙한.
‘….익숙…한가?’
문득, 끔찍할만큼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리는 그 감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스파인더로서의 삶을 살기 전. 제국의 기사로, 섬의 마도공학자로, 어딘가의 어떤 하이드가 아닌,
그저 ‘하이드’로만 존재하던 시절, 허락없이 엿보았던 기억.
[어머니. 저는 그래도 살아갈 겁니다. 그냥 이렇게 살 거에요.]그것은, 나보다 더 많은 이에게 삶을 짊어진 박교수의 기억이었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더라구요. 발이 많이 무겁긴 한데, 아시잖아요. 황무지는 워낙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이라는거.]쿠르르륵-
절벽 사이에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끝없는 어둠속에서 툭 튀어나온 녀석의 기억에 가라앉아가던 내가 걸렸다.
‘너는….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녀석은 그것을 외면하는 대신 하나도 빠짐없이 짊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교수에게서 복제된 의식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 무거운 책임을, 죄책감을 전부 다.
[….발이 무거운 덕분에 남들보다 좀 덜 날려갑디다.]그 무게는 녀석을 짓눌렀고. 괴롭혔으며, 풍파에 시달리지 않을 강인한 중심이 되었다.
녀석은 멈춰서지 않았고, 무거운 발걸음은 지워지지 않는 깊숙한 족적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지금. 방향을 잃고 멈춰서, 그 족적 위로 발을 맞춰보는 내게도.
[세상에 반쪽만 완성된 자아가 없듯이, 반쪽짜리 오러 나이트도 없다.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존재할 뿐이지.] [….부정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스스로의 형태를 스스로가 거부하는 것이지.].
.
.
.
.
.
‘아아.’
.
.
.
.
.
‘부럽다.’
….
쿠르르륵!
떠오른다.
어둠과 함께 가장 편안한 안식으로 가라앉던 의식이, 먼 수면의 빛에 홀린 심해어처럼 속절없이 끌려올라갔다.
.
.
.
.
.
.
파앙-
“푸하악! 쿨럭 쿨럭, 우웨엑!”
돌아온 감각과 함께 느껴진 것은 사체 무더기속에 반쯤 파묻힌 내 몸과 입안 가득 밀려들어온 부패한 덩어리들이었다.
“쿨럭, 우웩! 제기랄! 저주라는 것들은 도대체가 하나같이 불쾌해서는….!”
입안에 들어온 썩은 살덩이의 역함보다 아직도 머릿속에 남은 어둠의 잔재가 더 역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을뻔했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망할 사자대가리. 쓸대없는 소리를 해서는….”
저주란 본질적으로 대상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한다. 악령이 흑마법사의 깨진 영혼에 파고들어 흑마법사가 완성되는 것처럼.
아마, 방금 어둠에 휩쓸려 떠올린 것들이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틈이라는 것이겠지. 남을 현혹하는 저주가 파고들기 쉽게 벌어진 내면의 균열.
“마음의 균열을 파고들어 가라앉히는 저주라…. 애초에 어떤 종류의 저주인지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군.”
그 모습은, 수도 한가운데 갈라진 틈에 자리잡은 어둠의 실체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었다.
음….어둠. 갈라진 곳을 파고드는 어둠이라.
철컥.
“흐읍!”
.
.
.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뽑아든 검에 힘껏 정신을 집중했지만,
파르르르-
.
.
.
.
“에라이.”
음유시인의 이야기처럼 깨달음과 함께 확! 하고 오러가 치솟진 않았다.
하이드는 여전히 ‘반쪽짜리 오러나이트’ 하이드였다.
“….박가놈 그거. 부러워 죽겠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강제로 의식의 밑바닥에 처박힌 덕분에 나도 모르던 나에 대해 조금더 잘 알게 됐다는 점 정도?
산을 부수고 도시를 조각내는 거대한 힘을 마주하며 생겨난 불신. 내가 가진 미약한 힘에 대한 불신이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박교수라면, 이럴 때 어떻게 생각했을까.] [녀석이라면 어떻게 풀어나갔을까?]지금껏 난관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하던 생각이었다.
교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놈이라면.
위대한 구세의 성자라면 이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갔을까, 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이 안되는 놈 같으니라고.”
지금껏, 느려터진 박교수가 200년만에 나타나고, 오자마자 적의 수괴가 되어 세상을 작살낼 동안 여기까지 세상을 이끌어온 것이 ‘나’였음에도 말이다.
나라고.
위대한 성자, 전설적인 용사, 전략의 천재, 황무지의 영웅 박교수가 아니라.
텔드랏 지역에서 열차를 타고 방황할때도. 바닷속에서 오트만과 월드를 만났을때도, 서제국령에 도착하고 수도에 당도했을 때도, 나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나였다.
“그 하찮은 능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이라고, 내가.”
펄럭, 뒤적뒤적.
잠깐 사이에 다시금 손발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기에, 서둘러 망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감각이 사라진 손은 가까스로 꺼낸 성수병의 뚜껑을 열지 못했다.
“처음부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들고 달려드는건 우리 방식이 아니었지.”
“문제를 정면 돌파하는 것은, 더더욱 내 방식이 아니었고.”
까드드득,
챙그랑!
그래서, 병째로 입에 쑤셔넣고 씹었다.
자비 교단의 신성력 때문인지, 유리조각에 난자된 입안의 고통때문인지, 아니면 비릿한 피맛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은 번쩍 들었다.
맑아진 정신으로 고민한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박교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그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주를 제거했겠지.
본신의 힘이 모자랐으면, 다른 놈들을 어떻게든 꼬드겨 같이 왔을거다 분명. 카울드라던가, 콰두르부라던가, 아니면 내게 호의적인 니그미같은 녀석들을 현란한 말빨로 현혹시켜 어떻게든 부족한 전력을 보충했겠지.
녀석은 직면한 문제를 돌파한다. 뒤에 따라올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다지기 위해.
“그럼. 나라면 어떻게 할까.”
까드득, 까득,
퉷!
잇몸사이에 낀 유리조각을 뱉으며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방식은 녀석과 닮은 듯 달랐다.
“난 그 녀석처럼 욕심이 많지 않았어.”
박교수의 목표는 그의 손이 닿는 사람들 모두였다.
그녀석은 마주하는 모두를 양껏 끌어안고, 마주하는 문제를 모두 들이받아버렸다.
본인은 냉철하고 날카로운 계산적인 성격의 소유자라지만, 글쎄. 머리 좋은 것 빼면 바바리안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에 비해, 내가 지난 200년간 달려온 길은 단 하나의 명확한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험한 길은 돌아가고,
큰 문제는 회피하고.
강한 적은-
….찰칵!
“다른 놈에게 떠넘기고 튀었지!”
화아아악!
머리위로 던져진 금속조각이 벌어지며 강렬한 빛이 그 틈으로 뿜어져나왔다.
광명 교단제 신성 섬광탄이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내 주머니에 있던 것은 싸구려 소모성 마력광탄일 뿐.
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구우우우-!!!』
놈의 둥지가 분명한 이곳에서, 내게 손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의 녀석을 밝힐 정도의 빛이라면, 충분했다는 말이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면, 놈이 찾아와 광원을 집어삼킨다. 광원에 드러난 사람도 함께’
‘불을 켜지 않으면 잡아먹히지 않아. 그 말은, 빛이 없으면 놈도 이쪽을 못 보는거야.’
말하자면 이 어둠속에서 빛은 양날의 검. 저주의 실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나를 놈의 손아귀에 쥐어주는 행위.
어둠이 마력광을 집어삼키기위해 달려든 사이, 협곡의 벽면을 향해 달렸다.
구조는, 잠깐 밝혀진 사이에 모조리 외워뒀다.
카앙!
“큰 충격으로 갈라진 지반이라면 당연히 취약한 지점이 있겠지.”
그중 가장 위태로운 곳에 칼끝으로 후벼파고, 그 안에 마공학 폭탄을 있는데로 쑤셔넣었다.
파스슥-
적어도 1분은 주변을 대낮처럼 밝혀야 할 마력광이 바스라지듯 사그라드는 소리였다.
마음 같아선 이 틈에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뒤따라올 뮤트의 정예에게 이 녀석을 떠넘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녀석들과 침투할 길을 뚫기 위해 내가 이곳으로 보내졌으니.
내가 떠넘긴다고 했던 것은 그쪽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앙-!
망치로 가슴을 때리는 듯한 충격. 폭발은 협곡의 약한 부분을 따라 절벽을 약간 무너뜨렸고.
스으으으-
새로 넓어진 자리에 어둠이 미처 스며들기 전에, 그 위를 뒤덮고 있던 보랏빛 안개가 빠른 속도로 스며들어 어둠속에서 드러난 저주의 실체에 달라붙었다.
“이 자리에 어둠을 싫어하는게 나랑 뮤트만 있는게 아니잖아?”
수도 전역에 퍼진 황제의 저주.
비록 좁은 협곡 사이의 땅이지만, 수도의 땅은 단 한조각일지라도 황제의 것이기에, 자색 안개는 지금껏 미뤄왔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협곡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구우우우우—-』
보랏빛 안개는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려는 비정형의 무언가에 끈덕지게 달라붙고 있었다.
“역시, 불켜면 화들짝 달려오는게 숨어있는 것 같더라니.”
고대의 저주인지 뭔지도 제국에서 몇백 년이나 연구 개발한 저주화(花)의 힘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던 거지. 그래서 이렇게 좁은 협곡 가득 어둠을 뿌려 보랏빛 안개를 차단하고 제 실체를 숨긴 것이고.
머지않아 협곡엔 어둠대신 숨이 턱턱 막히는 저주의 안개가 가득 차겠지만, 어차피 제 발로 지상에 나갈 참이니 우리에겐 의미가 없었다.
보랏빛 안개와 어둠, 실체와 비실체 사이에 있는 것들이 엉겨붙은 사이로 어렴풋이 협곡의 끝자락이 보였다.
길이다. 성하도시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
“….이게 내 방식이다, 박교수.”
네가 어떻게든 마주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 뒤따르는 모두와 함께 끝으로 향한다면.
나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갈 뿐이다.
‘다르다. 너와 나는.’
아마도, 이게 내가 외면하던 진실이겠지.
보다 정확히는, 그것이 내포한 미래의 결말이, 나의 목적지를 외면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순간 떠오른 가정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지만, 앞으로 달려나가는 발은 속도를 더했다.
‘….어쩌면, 이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나의 목적지. 우리의 엔딩.
200년의 삶은, 나를 독립된 개체로서 완성시켰다. 반이나마 오러나이트에 도달할 정도로.
어쩌면. 박교수의 의식 안에 더는 내 자리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주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지난 200년동안 그리워했던 그 자리는,
더는 내게 허락되지 않는 목적지일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