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70
Chapter. 21. 어나더 솔로 플레이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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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크. 얼굴이 거의 녹아내린 수상한 흑마법사. 그러고보니 자기도 황성에 볼일이 있다며 내 뒤를 따라오겠다고 했지.
“기어이 예까지 왔구만.”
돌덩이처럼 무거운 머리가 새로운 의문을 향해 지친 몸을 움직였다. 저자와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이래저래 무거워 보이는 얼굴이군.”
“….방금전까진 멍했는데, 지금은 생각할 게 많아서.”
“뭐든 많으면 해로운 법이지. 돈, 욕심, 말, 생각, 때로는 기대나 희망, 자비같은 것도 말이야.”
흑마법사는 잠시 내 뒤에 남겨진 돌무더기로 눈을 돌리더니 묻지도 않은 재를 터는 시늉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성의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은 알고 있겠지?”
….부스럭
당연하다는 듯 물어오는 말에 나는 망토 주머니에서 팬던트 하나를 꺼냈다.
발끝으로 꽃과 피막이 가득한 바닥을 겉어내자, 팬던트와 꼭 맞는 모양의 홈이 드러났다.
옛 기억 속, 무너지는 태후궁을 뒤로하고 달리며 울고있던 내 손에, 이것과 같은 팬던트가 쥐어져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꺼낼 수 있었다면…. 팔아먹지 않았을까?’
늘 기차 푯값에 허덕이던 ‘가난한 패스파인더 하이드’에게 있어 특별히 유용한 기능이 없는 유물은 그저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길 물건에 불과했으니까.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야 이것을 손에 쥘 수 있게 만든것도 모종의 설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웅. 쿠우웅.
황성과 성하도시를 갈라놓은 넓은 해자 사이로 거대한 석상들이 걸어나왔다.
‘석상들이 손을 모아 황성으로 향하는 다리를 만들었었지.’
쿠드득, 콰르르륵!
이번에는 그리 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온통 저주화에 뒤덮인 석상들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갈라져 부서졌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다리 또한 석상들처럼 곳곳이 끊어져 폐허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황성마저 저렇게 됐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군. 물러서시게. 성문을 뒤덮은 저주화는 내가 어떻게 해볼테니.”
흑마법사는 다 쉬어터진 목소리에 근심을 담아 황성을 올려보더니, 앙상한 팔을 뿌리에 뒤덮인 성문을 향해 뻗었다. 성문을 묶어둔 뿌리가 불에 닿은 듯 슬금슬금 물러가는 동안, 나는 다리크와 나눈 이야기들을 되짚어가고 있었다.
[황성의 문을 여는데 필요한 것은 알고 있겠지?]내가 황가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조차 기억을 되찾으며 겨우 꺼낼 수 있게 된 것인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황성에 가야 할 일이 있지. 누군가 황성으로 향하는 길을 뚫으면 그것을 상징 삼아 뒤따라갈 생각이다. 황제의 저주가 있는 곳에는 나타날 수 없거든.]아마 수도에 내린 저주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자. 흑마법적인 존재.
[흘흘흘흘. 길을 잃었구만? 도와줄까?]일그러져버린 수도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순간, 홀연히 나타나 나를 자비의 신전으로 인도한 사람.
“아.”
잡힐 듯 말 듯 손끝을 스치던 생각들이 하나로 모여 흐릿한 틀을 만들었다.
[자, 잡았다! 내가 붙잡았어! 너를 저 망할 것에게 넘길 수야 없지. 없고말고….]‘이건 또 언제의 기억이지?’
비어있는 틀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억들이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이어달리기란다. 관리자, 드래곤, 혹은 나 같은 마법적 존재…. 너는 수명과 시간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에게 네 기억을 부탁했지. 다시 만나 그것을 되살리기 위해 말이야.]생각에 앞서 무의식이 떠올린 것이다. 이 기억들이 모두 한 묶음이라고.
그 기억을 따라가듯 주문을 시전 중인 흑마법사를 향해 다가갔다.
앙상하게 마른 팔.
쉬어터진 목소리.
저주에 녹아내린 얼굴,
그리고.
[….내 평생에 걸쳐 이어질 감사의 첫마디를 이 자리에 두고 가겠네.]모든 것을 털어버린 듯, 홀가분한 얼굴로 떠나가던 흑마법사의 뒷모습.
“빌어먹을, 마법과 별개로 성문을 뒤덮은 저주화의 뿌리가 너무 두터워. 제대로 열리려면 좀 기다려야 겠구먼.”
“다리크.”
“알지, 숨 돌릴 틈도 없이 황제를 향해야 하는거. 그쪽이 급한 만큼 나도 급하니까 보챌 생각은 하지 마시게.”
“그러고 싶은데, 제게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요.”
“음?”
언제 물어뜯었는지 흑마법사는 손끝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흑마법의 촉매로 피를 쓴 것이겠지.
“모른 척하고 지나간 다음, 저 사람이 왜 그럴까. 하고 궁리할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피가 흐르는 손끝을 감싸주려다, 내 몸에 피에 젖지 않은 옷가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 대신 내 손으로 감싸쥔 그의 앙상한 손을 향해 말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보내고, 평생 마음의 짐이었던 동생을 보내고.
그렇게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그저 오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 평생의 목표를 마무리한 흑마법사.
그렇게 떠나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사람이다. 뮤트 종족전쟁의 막바지에도 볼 수 없기에 정말로 버림받은 영혼들을 돌보며 자신의 삶을 향해 떠난 줄 알았는데.
어째서, 다 털고 떠나간 당신마저 그런 모습으로.
이 비참한 운명에 휘말려있는겁니까.
“당신이…. 마지막 주자였던 겁니까? 알드리치?”
어째서 내가 끌어들인 사람들은 모두 이런 가시밭길로만 내몰리는 걸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게, 피 묻은 앙상한 손이 내려앉았다.
흑마법사 알드리치는 말했다.
“그래서 말렸잖나. 그거 하지 말자고.”
쩍쩍 갈라지는 쉰 목소리로, 낭패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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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분쯤 기다리면 문이 열릴게야. 황제가 수도 전역에서 그러모은 생명력으로 황성을 아주 둘러쳐놨다만, 나도 지난 몇 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거든. 무식하게 힘만 키운 수식 사이에 쐐기를 하나 박아놨지. 재수 없게 들통나서 황제의 저주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오기로 했던 뮤트 정예 친구들은 그보다 조금 더 걸릴거야. 얼치기 황제가 생각보다 더 뮤트 ‘여왕폐하’를 거슬려했거든. 감히 자신의 땅에서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게 아니꼬았겠지.”
“황성을 이따위 힘덩어리 철옹성으로 만들어 방심했겠지. 황성 안에 있는건 망할 황제뿐이야.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사들의 무수한 검격과 함께하는 것보단 할만 할거야.”
타닥, 타닥.
알드리치는 내가 걷어찬 모닥불을 다시 살리며 황제의 저주가 힘만 키운 초짜의 것이라고 비웃었다. 마법적 가미가 된 것인지 모닥불 주변의 안개가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5분.’
하고 싶은 말이 밀물처럼 떠올라 썰물처럼 사그라들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은 불빛에 어른거리는 후드 속 얼굴과 말하기 힘든 듯 기침하는 모습에 막혀버렸다.
“….그래. 내가 자네를 위해 준비된 마지막 주자라네.”
“오트만님처럼…. 말입니까?”
“그렇지. 마지막은 내가 되어야만 했어.”
“왜죠?”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만큼, 자네가 불합리한 사건에 휘말려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 것일까. 교수와 같은 시간에 서는데 성공한 지금, 내가 죽으면 모두 실패하는게 아니었나?
아니 그전에, 관리자도 아닌 NPC 알드리치가 ‘시스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건가?
따로 말하진 않았지만 의문이 가득 담긴 내 표정을 봤는지, 알드리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목을 가다듬는 그의 입에선 삶의 굴곡 만큼이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스템, 바깥세계, 신적인 존재, 너희 형제…. 그래. 다 알지.”
“어떻게…. 된겁니까?”
“뭐가 어떻긴. 교수 그놈에게 코 꿰인 놈들 중에 우리 파티만큼이나 제대로 얽힌 사람들이 있나. 나도 그 ‘시스템’이란 신이 혐오하는 예외적인 존재가 됐다는 뜻이지.”
“예외라면….”
“신. 반신이라는 이름도 아까운 1인분의 신성이지만, 어쨌든 어머니와 네리아의 영혼을 통해 이어 받았으니까. 어머니처럼 버림받은 영혼을 인도할 정도는 됐지.”
버림받은 영혼. 죽으면 서버룸으로 돌아가는 기존의 순환에서 벗어나 세상에 남겨진 데이터 소울들.
“….파편?”
“그래. 본디 내가 인도해야 했을 영혼들이라네. 망할 시스템이 영계로 가는 길을 틀어막아 그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나마 서제국령에는 내가 있어서 어떻게 수습이 됐지만, 다른 대륙의 사정까진 신경 쓸 수 없더군 그래.”
“그래서 이곳에는 파편기사나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던 거였군요.”
“망자의 기억을 제 몸에 쑤셔넣다니. 그게 미친 짓이 아니고 뭐겠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자살이라해도 무방하지.”
파편을 이용하는 샤드나이트에 대해 씩씩거리던 알드리치는 내 쪽을 보며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 예술적 자살행위의 정점에 이른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 둘다 알고있으니까.
“아무튼…. 자네의 ‘첫 삶’ 이후 시스템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 두 번째 부터는 어떤 방식인지도 어렴풋이 눈치챘지. 영계, 자네들 말로는 ‘서버룸’이라고 하나? 아무튼 그리로 가는 길목에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것을 보니까.”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시스템의 눈을 완벽히 피해 지금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나? 내가 죽어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그 과정에 개입하려 했다고?
“그,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막았으니까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하이드 자네도 ‘버림받은 영혼’이 아닌가? 서버룸에 제 이름붙은 자리가 없는 이례적인 존재이니. 내 자그마한 신성에 자네의 존재가 느껴지자마자, 그 미친 신이 손대기 전에 허겁지겁 낚아챘지.”
알드리치는 보이지 않는 낚싯대를 휘두르듯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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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잡았다! 붙잡았어!’
‘너를 저 망할 것에게 넘길수야 없지. 없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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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구나.
“그게 당신이었군요.”
“아무리 시스템이란 놈이 날고 긴다 해도, 놈이 바깥의 존재인 이상 나보다 손이 느린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몇 번은 놓쳤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이상한 곳에서 태어나게 된 적도 많았지.”
“그 외딴 섬. 마도공학자!”
“또는 숲속. 또는 짐승. 또는 벌레.”
“?!”
“다섯 번 뿐인 줄 알았나? 정말로? 자네가 주변을 살필 때 지금도 맹금류처럼 고개를 휙휙 꺾는 습관이 있는 것 알고 있나?”
“아니 그럼, 설마.”
“….220년의 기억 사이에 빈 시간이 좀 있을테지. 내 불찰일세. 욕하려면 지금 시간 있을 때 하시게.”
“만약 자네의 영혼에 새겨진 ‘강박증’이 아니었다면, 그 외딴 섬의 마도공학자로 태어난 자네는 다른 섬의 주민들과 함께 지루한 일상을 푸념하며 60년, 70년을 허비했을 수도 있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덕분에 그 기간이 17년 언저리에서 그친 것이지.”
“역시 시스템의 의지가 개입했군요.”
“교수가 떨어진 곳도 그 동북부 군도라네. 시스템이 자신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일부러 세상에서 동떨어진 지역으로 만든 곳이 아닐까 싶어. 배를 타고 험준한 바다를 한참 건너야 도착하는데, 필요할 때 풍랑 한번 일으키는 정도야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겠나.”
쩌적, 쩌저적-
성문의 저주화 뿌리가 말라비틀어지는 소리였다. 주어진 5분. 이제 몇 분이 지나고 몇 분이 남았을까.
“혹시나 제국에 오기 전에 네가 죽으면, 어떻게든 이 주변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말하자면 알드리치라는 이름의 마지막 방파제 같은거지.”
“다시 태어나면 갓난아기일 텐데요.”
“내가 연금술도 좀 하는 것 알텐데? 흑마법엔 강제로 몸을 성장시키는 비약이 제법 된다고. 한 6개월 살면 수명이 다하겠지만.”
“기억은?”
“그, 음…. 자네가 힘써주길 비는 수밖에. 정 안되면 초혼술로 자네 동의를 구해 악령으로 만들 생각도 했었어. 솔직히 그쯤되면 이미 다 어그러진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잖나. 실패하면 세상이 없어진다는데.”
“왜 처음부터 알드리치라고 밝히지 않고 이상한 연기를 하신겁니까?”
“깜빡 속았지?”
“몇 번 죽이려고 했는데요.”
“흘흘흘흘! 안 죽으니 상관없네. 성녀와 악령의 영혼을 영혼에 기워붙인 존재가 어디 생과 사 한쪽에 서 있을 수 있겠나.”
“아까 말했듯이 나는 우리 중에서 시스템에게 가장 많이 노출된 몸이야. 반 정도만 세상에 속해있는 덕분에 겨우 시선을 벗어났지만,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곧바로 놈의 시선에 걸리겠지. 음, 예를 들면 누군가 ‘알드리치’라고 부른다거나.”
“어…. 알드리치?”
“그래, 그렇게. 지금쯤 그년의 썩은 무 같은 얼굴이 시퍼래져선 ‘저 놈이 어떻게 저기에!’ 하고 있겠군. 이래서 눈치 빠른 아이는 싫다니까.”
당황하는 나와 달리 알드리치는 흔들림 하나 없어보였다.
괴짜에, 유쾌하고, 마음이 깊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
“괜찮아. 난 어차피 여기까지니까.”
쩍- 쩌저어어억!
순간, 성문 깊숙이 파고든 뿌리가 말라붙으며 성문을 아예 찢어버렸다.
“음, 시간이 됐구만. 그만 가봐. 열심히 하고.”
“알드리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까지라뇨!”
“뭔 소리긴? 네가 알아들은 그대로의 이야기지.”
먼지하나 없는 로브를 털며 일어난 알드리치는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모닥불을 발로 찼다.
훅-
그의 발은 숯과 돌무더기를 통과할 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난 반쯤 망자에 가까운 존재일세. 현세의 사건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어. 영계로 향하는 흐름에서 그 망할년보다 먼저 널 건져내는 정도나 할 수 있지.”
“하, 하지만 수도의 성문은 분명….”
“거 하루 종일 고생을 하긴 했나보구만? 그 좋은 머리가 바보가 다 된 것을 보면. 이 저주가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잊었나?”
알드리치는 그렇게 말하며 제 가슴을 가리켰다.
“저주는 어머니의 영혼이 썩어가며 흘러나온 진물 같은 것이라네. 비록 작은 조각이긴 하나 어머니의 영이 내 안에 깃들어 있으니 제국 황실에서 마구 주물럭거린 이 저주도 내 영혼과 희미하게 이어져있는 것이고.”
“저 저주 덕분에 망자나 다름없는 내가 세상에 붙들려 있을 수 있었다는 뜻이야. 그래서 저주가 지천에 깔린 제국 수도에서는 반이나마 실체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내 혼은 영계에, 거기에 매달린 실밥 무더기 같은 저주는 황성 지하에. 그렇게 반반이지.”
“그럼.”
“….자네가 충분히 유능하다면, 얼마안가 나는 세상에서 사라질테지.”
숨이 막혔다.
“괜찮네. 지금 당장 사라진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말했잖나? 나 황성 지하에서 할 일이 있다니까?”
“….더 늦기 전에 그냥 얘기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안되지. 저 간악한 시스템이 엿듣고 재 뿌리면 어쩌려고? 이곳이 그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지. 이 세상은 세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니까.”
“으음…. 정 힘들면 이거라도 들겠나?”
내가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져 숨을 몰아쉬고 있자 알드리치는 검은 로브 안에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흙갈색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병.
“이건 기억나지?”
“예….”
“숨이 막히고 뒷골이 띵할 때, 미래고 멸망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특효약이지. 이거 귀한거야. 끝내 제작법이 유실됐거든.”
챙!
거부할 사이도 없이 알드리치는 비슷한 약병을 꺼내 건배를 하곤 담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치이익-
실체없는 몸을 통과한 약물은 등 뒤의 모닥불로 곧장 뛰어들었다. 저런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니.
나는 알드리치의 물약을 마시는 대신 아공간 주머니에 소중히 밀어넣었다.
“아니 왜. 혹시 내가 모르는 알러지 같은게 있나? 아니면 편식?”“아뇨. 딱히 안마셔도 될 것 같아서.”
정확히는, 마셔도 이 돌덩이 같은 가슴이 가벼워질 것 같진 않아서지만.
쩌적! 쩌저저저적!
쿠구구구구구구!
“이건….”
“황성에 숨어계신 누구누구께서 자기네 철옹성에 구멍이 뚫린 것을 눈치채셨나 보구만. 서두르게. 황성을 둘러싼 생명력이 모두 한곳으로 몰려들고 있어.”
성문이 무너진 것처럼 황성 전체가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며 주변의 안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있는 살점에서 뽑혀나온 피와 만개한 저주화의 꽃잎이 바람에 실려 모여드는 그 모습은 역겨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나는 상해버린 알드리치의 모습을 새기듯 눈에 담았다.
‘또 짐이 늘었군.’
아니면, 버팀목이거나.
“갈게요.”
“잘 해봐. 아직 기억이 체화가 안돼서 그렇지, 양대 제국전쟁 때 자네는 혼자 비공정도 썰고 다니던 미친놈이었어.”
“제가요?”
“네가 그 넘쳐 흐르는 마법재능을 포기하고 검을 잡은 이유를 떠올리면 될 것이야. 나도 아쉬웠지만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지. 무의식의 단계를 인지할 수 있는 흑마법사라니, 으으음. 지금 생각해도 아까워 죽겠군.”
“….아, 으음.”
알드리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다가 이내 그것을 삼켜버렸다.
“왜요.”
“….별 것 아닐세. 한숨 쉬면 재수 없어서 참은 것 뿐이야. 상징적으로 불길하지.”
“곧 가신다면서. 여기서 듣다 만 이야기가 제 머릿속에 평생 남는게 더 불편할 것 같은데.”
“….미안하네.”
알드리치가 힘겹게 꺼낸 것은 예상치 못한 사과였다.
“난 처음부터 하이드 자네의 무모한 계획을 반대했어. 그냥도 아니고, 아틀라헤바와 세계수에게 내가 아는 모든 쌍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반대했지.”
“그렇게 못 미더웠습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알드리치의 앙상한 두 손이 내 뺨을, 어깨를, 팔을 쓰다듬었다.
“나는 모두가 떠나간 뒤에 남겨진 자가 느끼는 책임을, 그 외로운 중압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자네의 고통으로 남을 것을 알아서 견딜수가 없다네. 이건, 우리 세계의 일이잖나. 교수와 하이드 자네는…. 이방인이잖나? 외유를 하기 위해 찾아온?”
“자네가 우리 모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의무는 눈꼽만큼도 없는데, 너와 교수는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고통받고 있어. 나는, 나는 그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네. 세계의 명운이고 나발이고, 고작 두 사람의 등에 그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나는, 나는….”
세찬 바람이 말을 잇지 못하는 알드리치와 나를 덮쳤다.
이목구비가 다 사라진 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남은 눈구멍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하네….”
제기랄. 힘들어 죽겠다고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
“….어쩌겠습니까. 이게 가풍인가보죠 뭐.”
문득, 세상에 이름을 숨기고 선행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치솟았다.
내가 고생하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고작 한명 생긴 것 만으로도 이렇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데, 도대체 그걸 어떻게 숨기고 사는거냐.
“미안하면 나중에 나도 책 내줘요.”
“….”
“솔직히 전생이나 시스템 같은건 믿기 힘든 이야기니까, 어…. 어디 멀리 떨어진 곳의 오랜 전설 같은 느낌으로. 신전에 예스러운 벽화도 새기고 음.”
어쩌겠어. 우리가 하는 일이 다 이런 것을. 나중에 누가 알아주기만 했으면 좋겠다.
“갑니다. 얘기 잘 들었어요.”
마음같아선 하루 종일이라도 알드리치와 얘기하고 싶었지만, 늑장부리기엔 황성의 분위기가 너무 심각했다.
‘뭔가, 되게 전통적인 멸망 분위기인데.’
핏빛과 보랏빛이 섞인 폭풍의 중심에 선 부서져가는 황성.
세찬 바람에 이젠 넘친 에너지인지 불길한 스파크 같은 것도 번쩍이는게 꼭 마왕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붕괴 직전의 마왕성과, 그것을 홀로 마주한 기사라….
음….
“흐읍!”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검 손잡이에 힘을 집중했다.
탄력있는 부정형 액체같은 힘이 가슴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단련되어 완성된 기사의 영혼처럼 달구고 두들겨 만들어진 검에 그 가공할 에너지가 담겨-….
….파직! 팍! 파밧!
“니미럴.”
왕년에 나 장난 아니었다며. 비공정도 막 칼로 썰고 그랬다며.
한 순간 하얀 불꽃이 치솟는가 싶더니, 이내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작게 폭발하며 흩어저버렸다.
“상황은 전통적인데, 나는 전통적인 용사는 아닌 모양이네.”
….어쩔 수 없지.
실망스러운 칼은 잠시 칼집에 넣어둔 다음, 어깨위의 망토를 풀어 허리에 묶었다.
칼을 쓰기엔 조금 거슬리지만, 이쪽이 주머니를 쓰기엔 더 편리했다.
“어디보자. 전 대륙에서 가장 튼튼한 황성이라….”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내 눈에 무시무시한 기운을 뿌리는 황성이 들어왔다.
수백 년동안 겹쳐온 방어마법과 고대 주술, 제국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저주화가 거의 다 빨아먹었고.”
성벽도 3개월이면 쌓는다는 드워프 장인이 수십년을 녹여 만들었다는 최고의 건축물.
“건물 전체에 뿌리가 파고들어서 다 갈라졌고.”
그럼에도 혹시나 모를 붕괴를 대비해 만들어진 수만은 격실과 기둥, 무너져도 붕괴하지 않는 구조를 가졌지만.
“그거, 저주 연구한다고 황성 지하를 무지막지하게 파고들어가기 전에 나온 얘기겠지?”
.
.
.
.
..
“오.”
텅 빈 지만. 갈라진 고층 건물, 거기에 황성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마력 폭풍이라니.
…..좌라라락!
“하나, 둘, 서이, 너이….”
“….남겠는데?”
미안하다, 루실라.
나는 망토 주머니에서 쏟아져나온 각양각색의 마공학 폭탄을 주물럭거리며 옛 태후궁 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걔가 그렇게 제국을 온전히 남기려고 애를 썼는데.
“어차피 다 썩었으니까, 이거 끝나고 새로 짓자.”
전투 전문가 박교수가 말하길, 익숙한 지형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적진에 걸어들어가는 것은 제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으며.
“….내가 이안 그 사람 얘기를 참 좋아 했었지.”
그 옆의 강철턱 폭탄마가 덫붙이기를, 그럴 땐 그놈들 너구리 굴에 충분한 화약을 쑤셔넣으면 만사형통이라더라.
섬-하이드가 미친 듯이 만들어낸 마도-화학 고폭탄을 손가락 사이 사이에 가득 끼워둔 나는, 수도에 오고 오랜만에 한껏 미소지으며 말했다.
“예외, 예외하더니. 난 진짜 게임 외적인 존재였구나.”
섬-하이드는 몰랐지만, 현실의 지식을 엿보고 만들어진 그의 마공학 폭탄은 명백히 게드로이츠의 게임 룰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기술의 악마’인가 뭔가 하는 시스템이 그 반대 진형에 플레이어가 사용한 지식보다 훨씬 더한 이득을 마구 덤핑한다고 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을 떠돌며 이렇게 열악한 재료로 이렇게 대단한 위력을 내는 마공학 도구는 못봤다.
그땐 몰랐지만 미쳐가던 섬-하이드는 본의 아니게 내가 가진 치트에 가까운 능력을 활용해버린 것이다.
그의 외로운 섬 위에, 좁은 헛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마도구 만큼만.
이렇게 되면 전통적으로 비장하게 돌격할 필요가 없지.
험한 길은 돌아간다.
좀 위태로운 장애물이 있으면, 발파해서 뚫어버리는 것도 좋지 않은가?
“내 식대로 하자고, 내 식대로.”
박교수 말고, 내 식대로.
발걸음이 가볍다.
받아온 성수를 죄다 마시고 한병은 머리 위로 뿌렸지만, 그래도 응축된 안개는 숨을 쉴 때마다 코와 목구멍을 태우는 것 같았다.
“역시, 선행은 알리고 볼 일이야.”
지금 생각하면 좀 억울했나보다. 세상은 미쳐 돌아가지, 뭘 해도 실패만 하지, 힘들기는 문자 그대로 세번 죽었다 깨어날 정도로 힘들지.
하지만. 울며 내게 사과하는 알드리치를 마주한 순간 안에 쌓여있던 억울함이 쑥 가라앉아버렸다.
딱히 뭘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내 고통을 알아줬다는 사실 하나로 그렇게 됐다.
하, 참.
“소박하기도 하지.”
그러고보니 박교수도 개고생 한 다음에 사람들이 ‘오오오, 구원자님~’ 하면서 떠받들어주면 그거로 힐링하고 그랬지.
영혼을 보는 알드리치의 눈에 나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담긴 것을 보자, 완치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가문이란 말인가.
불길함이 몰아치는 황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하기 그지없었으며.
칙, 치직.
.
.
.
.
화륵.
착잡한 눈으로 하이드의 뒤를 쫓던 알드리치는 그의 뒤를 따라 꼬리처럼 늘어지는 하얀 불빛을 발견했다.
“….미안하네.”
앞으로 두 걸음.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불쌍한 것.
끝을 향하는 하이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저 불꽃의 의미는, 하이드도 그의 마지막을 어렴풋이 알았다는 뜻이며.
그럼에도 나아감을 의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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