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76
Chapter. 22. 라스트 퍼레이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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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팍. 찰팍.
쫘아악-
휴우우.
“하, 하일라 사제님! 수건…. 다 빨아 왔어요….”
소녀, 나일리는 쭈뼛거리며 빨래가 가득 든 바구니를 사제 옆에 내려놓았다.
3년 전, 일곱 살 소녀다운 밝은 모습의 나일리는 저주를 피해 도망쳐 나오다 아버지를 잃은 뒤로 말 수가 적어졌으며, 지난 3년간 차례로 어머니와 동생이 쓰러지며 아예 말을 못하게 될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고맙구나. 거기 놓고 가겠니?”
“….제가 할 일이, 더 없을까요…?”
“괜찮단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조금씩 일을 도와주고 있어서 이제 아이들 손까지 빌릴 필요는 없거든.”
“그, 그래도! 그래도 뭔가…. 제가 할 일이….”
이제 고작 열 살. 동굴의 차가운 우물물에 손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녀는 시린 손을 비비면서도 더할 일이 없는지를 묻고 있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게 기쁘겠지.’
하일라 사제는 그런 소녀의 변화가 기쁘면서도 안쓰러웠다.
“음, 그럼 밖에 나가서 예쁜 꽃이라도 꺾어주겠니?”
“이, 인근에 약초로 쓸만한 풀은 이미 다 캐버렸고, 고라 마법사님이 멀리 나가는건 위험하니까….”
“약으로 쓸 것 말고 그냥 예쁜 꽃이면 된단다. 3년 가까이 누워서 숨만 쉬던 사람들한테 잊어버린 봄 향기를 가져다주면 좋겠구나.”
“아…. 예, 예! 하, 할게요!”
그 말에 소녀는 활짝 웃으며 늘어선 병상에 힘없이 누워있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조금씩 체력을 회복해나가는 어머니에게 나가서 꽃을 꺾어오겠다고 말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봄꽃처럼 소담스러운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슬슬 병상이 거의 다 비어가는구려.”
“라투라. 여신께서 우릴 돌보심이지요.”
“글세. 여신은 몰라도 하일라 사제께서 밤잠을 세워가며 이들을 돌봤다는 것은 분명하오만.”
“제가 곧 자비의 손끝이니, 저를 이곳에 두어 아픈 이들을 돌보게 한 것이 여신의 자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허허, 참. 듣고보니 그렇기도 하구려.”
바깥의 풀 냄새를 한가득 안고 돌아온 마법사는 신음소리만 가득했던 병동이 사람 사는 소리로 채워져 가는 것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처럼 숨만 쉬던 사람들이 눈을 뜨고, 말을 한다.
근육이 다 녹은 빼빼마른 팔다리로 애써 몸을 일으키고, 말라 비틀어진 목소리로 말한다.
———
‘으으으…. 같이 온…. 내 아내, 는…. 어디있습….니까?’
‘딸…. 딸 아이가 분명 같이 빠져나왔….’
‘어, 엄마! 엄마아아아!’
‘나일리…! 오오, 내 아가…!’
———
“….어쩌면, 정말 여신께서 역사하셨는지도 모르지.”
“그러실 테지요. 분명 그러셨을 겁니다.”
지난 3년간 쌕쌕거리며 숨만 쉬던 이들이 하루만에 거짓말처럼 정신을 차리고 새 숨을 틔이는 모습은 무신론자의 마법자의 눈에도 종교적 감회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저주가 풀렸다.
길었던 밤이 끝나고, 마침내 새벽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가셨던 일은 어찌 되셨는지요.”
“남풍 여럿을 붙잡고 물었으나 대부분 비슷한 얘기를 하더군. 수도에서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고 하더군. 바람은 눈과 귀가 없으니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저주가 풀렸다는 것은….”
“마침내, 황제가 죽었다는 뜻이겠지요.”
황제가 죽었다는 대목에서 하일라 사제와 고라 마법사는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황성에 볼 일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이곳을 지나 황성으로 향한 기사가 한명 있었다.
기사단도 아닌 혼자뿐인 기사였으며, 번쩍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과 군마 대신 튼튼한 두 다리와 넝마 같은 망토를, 정련된 검 대신 부서진 마공학 부품이 잔뜩 달려있는 이상한 검을 찬 기사.
“하이드 경은 무사히 그분의 일을 잘 수행하셨을까요.”
“그럴거요. 다른 건 몰라도 수완 하나는 확실해 보이는 자였으니. 하이드 경이 소개해준 그 인양꾼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어디가서 제 목숨 하나 못챙길 위인은 아니라고 말이오.”
“그런가요….”
하일라는 잠시 그를 위해 기도했다. 자비여, 부디 외로이 떠난 하이드 경에게도 당신의 손길을 내려주시길.
쿠웅-
그 순간, 마치 기도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녀가 마주잡은 손을 내리자마자 동굴에 굉음이 울려퍼졌다.
“무슨 일이죠?”
“뭔가 커다란 것이 동굴에 충돌한 것 같은데. 설마, 수도에서 빠져나온 뮤트인가!”
“밖에 아이들이 나가있어요!”
“하필 지금…!”
사제와 마법사는 각각 성표와 지팡이를 부여잡고 동굴 밖을 향해 달렸다.
무거운 석문이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열리자,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는 작은 소녀와 마주할 수 있었다.
“하악 하악, 사,사제님! 마법사님!”
“나일리! 무사했구나!”
“괴, 괴물, 새빨간 괴물이!”
서둘러 소녀를 보호하려던 두 사람은 멈칫했다.
왜냐하면,
“어, 음…. 괴물이, 서, 선물을 잔뜩 주고갔어요.”
나일리를 품에 안아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그녀의 품안에는 싱그러운 봄꽃이 한아름 가득 안겨있었기 때문이다.
“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괴물이 선물을 주고갔다니?”
“어어, 갑자기 땅이 막 흔들리고 갑자기 그늘이 져서 봤더니 크, 크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래서!”
“어어, 뭐, 뭐하냐고 묻길래 어머니 드릴 꽃을 따고 있다고, 그랬더니 갑자기 품안에 꽃이 이만큼이나 생겨나고, 괴, 괴물은 사라졌어요!”
“….그대로 사라졌다고? 꽃만 잔뜩 안겨주고?”
“으으으, 사, 사실 사제님과 마법사님에 대해서도 물었어요! 최근에 새로 오신 배, 뱃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미, 미안해요! 너무 무서워서 다 말해버렸어요! 으아아앙!”
“괴물이 우리에 대해서도 물어봤다니….”
“하일라 사제, 난 잠시 나가서 동굴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소. 혹시 놈이 근처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고라 마법사가 굳은 얼굴로 동굴 밖으로 나가는 사이, 하일라 사제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소녀를 살폈다.
다치거나 어딘가 상하지도 않았고, 혹시나 모를 기생 생물이라거나 저주 같은 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괴물이 네게 손을 대거나 하진 않았니?”
“어어, 머리….”
“머리?!”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목소리로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괴물은 맞았니?”
“네, 네! 동굴 문보다 큰 키에, 굳은 피처럼 새빨간 피부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었어요! 무시무시한 꼬리도 있구요!”
“뮤트구나.”
그녀가 아는 어느 종족과도 닮지 않았으니 뮤트가 틀림 없었다.
그런데 저 묘사는 어딘가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음?”
순간, 하일라 사제는 소녀의 품안에 있는 꽃다발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교단의 성표?”
비릿할 정도로 피딱지가 눌러붙은 자비 교단의 성표와, 그 아래 돌돌말린 종이 한 장.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사제님.]뒷면이 편지지로 활용된 종이는 며칠 전 그녀가 어떤 기사에게 넘겨준 수도의 지도였다.
“하이드 경!”
[성표는 지난 3년간 수도의 신전을 지켜온 어떤 성기사의 것입니다.] [그저 잔해 속에 묻혀 사라지기엔, 그가 여신께 바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교단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시신은 다른 자비의 형제들과 함께 신전에 데려다 놨습니다.]“살아 계셨군요…!”
짧은 편지는 그의 소식과 함께 그녀가 지난 3년간 애타게 기다려왔던 형제들의 소식을 담고 있었다.
[날이 좋습니다. 이제 그만 밖으로 나오시죠.]이 땅에 내려온 저주가 사라졌다는 소식과 함께.
“으허허허허! 이런 정신나간 작자가, 흐핫, 하하하하하하하!”
그녀가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고라 마법사가 사라진 방향에서 동굴 안까지 들릴법한 박장대소가 터져나오며 배를 움켜쥔 마법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하일라 사제, 이리 좀 와보시오! 어서!”
“혹시, 누가 있나요?”
“아 얼른 와보라니까! 보여줘야 할 것이 있다오!”
“잠시만요, 저도 보여드려야 할 것이…!”
순간, 하일라 사제는 말을 잊고 말았다.
그들이 숨어살던 은신처 밖, 바위산의 한쪽 언덕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란 낙서.
[기사 하이드가 저주받은 황제를 참살하기 전, 하룻밤 묵었던 곳.] [+이 글귀는 발틴 제국의 상징인 황제검 라이오넬로 새겨짐.]“푸흡!”
“내가 그 친구가 사고칠 줄 알았지! 그냥 살아있는게 아니라 아주 칼로 산을 깎아낼 정도로 쌩쌩하게 살아있구려!”
“저건, 대체 왜….?”
“낸들 알겠소? 황성에 볼일이 있다더니, 설마 도둑놈일 줄이야….! 으흐, 으허허허! 그 도둑놈이 저주받은 황제를 죽이고 제국의 검을 훔쳐가다니! 으허허허허허허허!”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간 사람처럼 쉴새 없이 웃고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일을 나갔던 아이들이 멀리서 우르르 몰려와 ‘괴물이 성창을 주워다줬다.’며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쇠말뚝을 몇 개나 들고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괴물….”
3년의 저주를 며칠만에 끝낸 기사.
그가 수도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저주의 중심으로 뛰어든 그에게 평범하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부디, 당신에게도 자비의 손길이 닿기를.”
웃음소리와 활기.
하일라는 실로 오랜만에 세상이 살아있음을 느끼며, 얼굴도 보이지 않고 떠나간 기사를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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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나
타리무스
에그윌
“에그윌. 3번 조임 막대 좀 줘봐. 이게 고정이 안 되네.”
“그우. 없다.”
“왜 없어! 타리무스가 깎아다 줬잖아!”
“나무로 깎은 도구가 얼마나 가겠냐. 부러졌다.”
“염병 소금물 먹은 포도주같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네!”
태앵!
이세나는 휘어진 쇳덩이를 힘껏 내던지며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오늘도 하루 종일 고장 난 엔진에 붙어 있었지만, 성과가 영 없었다.
“하일라 사제님네 동굴에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지?”
“우리까지 다해서 65명이다.”
“65명….”
실험체 수인, 이세나는 며칠 전 해안가의 그들을 찾아온 사제와 마법사를 떠올렸다.
이래저래 갈곳 없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람들. 식량과 안전한 은신처가 있으니 같이 머물며 그들을 도와줄 수 없겠냐는 부탁은 부서진 배에서 교대로 경계를 서며 쪽잠을 자던 그들에게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멀쩡한 사람이라곤 사제와 마법사, 아이들 뿐인 그곳에서 인양꾼들은 제국의 현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미쳐버린 황제와 3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저주, 지옥이 된 제국의 수도.
“….역시, 전부 태우고 배를 띄우려면 출력을 포기할 수는 없어.”
밤새 이야기를 마친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천천히 죽어갈 뿐이니, 수도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자.
마법사가 말하길 서제국령 동남쪽에 사람들이 꽤 모여사는 곳이 있으니, 그리로 가보자고.
그렇게 해서 지난 며칠 동안 끙끙대며 반파된 웨일 호를 고치게 된 것이다. 손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육로로 이동할 수도 없고, 또 땅 위에는 배회하는 뮤트 같은게 있으니까.
딱 이틀. 그것도 파도가 없는 연안을 따라서 이동할 계획이라 배의 수리는 운행이 가능한 정도로만 할 생각이었다. 숙련된 트롤과 수인, 엘프 선원의 힘으로 그 정도는 뚝딱 고쳐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마도엔진이었다.
“그우우. 그렇다고 없는 부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도 손톱만한 정밀한 부품을.”
“왜 못해! 그림 록은 바다 창고기에 꿰뚫려서 폭발 직전의 엔진도 어떻게 고쳐내드만!”
“그건 선장. 우린 곁눈질로 대충 배웠다.”
“이익!”
이세나는 답답한 마음에 엔진을 걷어차려다, 그냥 뱃전에 드러누웠다. 지금 상태에서 잘못 건드렸다간 정말 손도 못댈 정도로 고장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을, 60명씩이나 구하려는지.”
“우우. 부탁받았다. 우리.”
“….썅.”
이세나는 에그윌의 힐난하는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돌아누웠다. 사실, 탑승 인원을 줄이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출력을 높이기 위한 부분을 다 떼어내면 동력만 연결해서 움직이는 정도는 그들의 부족한 마공학 지식으로도 어떻게든 되니까.
하지만, 사제를 찾아가 그런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불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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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경이 이리로 찾아가면 당신들이 있을 거라 하더군.’
‘하이드…. 경? 하이드?’
‘우우우! 너 하이드 봤다! 어, 어디있나! 너 따라가면 만날 수 있나!’
‘지, 진정하시게. 그는 이미 떠나고 없으니. 그저 이리로 가면 유능하고 곤란에 빠진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찾아온 것 뿐이오. 혹시, 여기 타리무스라는 엘프가 있는가? 연금술과 약학에 해박한?’
‘나요. 내가 타리무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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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지금도 녀석을 떠올리면 기분이 나빴다.
소중한 피붙이가 바다 위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며, 그녀석만 없었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여전히 변함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혼자 떠나간 하이드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 구석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녀석의 행선지가 수도라는 것과, 수도가 지옥이 됐다는 사실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이.
크르릉….
벌떡!
“다시 해보자. 아까 햇볕에 널어둔 마공학 엔진 정비서는 다 말랐겠지?”
“그웍. 소금물에 잉크가 다 번진 것 같았는데.”
“뭐라도 여기 있는 깡통 둘 보다는 낫겠지.”
그러니, 녀석이 떠넘기고 간 이 불우한 인간무리를 돕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정리하는 것 뿐이다.
이 일만 끝나면 마음 편히 녀석을 증오할 수 있겠지.
“허억, 허억, 허억!”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이세나와 에그윌이 쩍쩍 달라붙는 마른 책장을 넘기기위해 끙끙거릴 무렵, 수인의 예리한 귀에 엘프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타림? 무슨 일이야!”
“여, 여기! 여기이!”
쿠당탕!
“제기랄, 그 마법사! 이 부근은 안전하다면서!”
대충 들어도 긴장과 당혹함이 역력한 목소리에 타리무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해안가 뒤쪽 언덕에서 달려오던 그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급박한 상황임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그우우….”
“….”
“그건, 뭐야?”
뮤트라던가, 뭔가에 덮쳐진줄 알았던 타리무스는 멀쩡했다.
아니, 정확히는 꽤나 힘겨워보이긴 했다.
자기 몸통만한 커다란 자루를 들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니.
“나, 나도 모르겠어. 언덕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데, 일순간 광풍이 불더니 이 묵직한 자루가 내 몸 위로 날아들어서는….”
“사람은. 그걸 네게 던진 사람은 못봤어?”
“못 봤소. 뭔가 불그스름한 잔상을 본 것 같기는 한데…. 아니, 그것보다 우선 안을 보시오, 안을!”
쩔그럭!
상기된 얼굴로 자루를 내려놓는 타리무스의 모습에, 이세나는 그가 겁에 질린 게 아니라 흥분해서 그렇게 목소리를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유난을 떠는지. 뭐, 하늘에서 금화 자루라도 떨어진-”
촤르르르륵! 텅! 탱강! 짤그락!
“….떨어졌네?”
쓰러진 자루에서 제국 금화가 우르르 쏟아지고, 먼지가 묻었음에도 광체가 선명한 황금 촛대와 온갖 보석이 박힌 지팡이, 목걸이,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림 같은 것들이 쏟아져나와 해안가의 어둑한 숲속을 환하게 밝혔다.
.
.
.
.
“바다속에 잠든 내 피붙이들이여, 맙소사.”
“우우. 타리무스. 대체 무슨 짓을.”
에그윌과 이세나의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나, 난 아니오!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니까!”
“이 반지에 박힌건 제국의 대귀족 가문의 문장. 혹시 수면 가루 같은 걸로 귀족의 피난마차를 털었다면, 지금이라도 돌려놓고….”
“아니라고 하지 않소! 정말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캬아악! 둘 다 닥쳐봐!”
이세나는 번쩍번쩍한 보물더미들 중 커더란 금괴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디 먼지 쌓인 창고에서 쓸어담아온 것 같은 다른 물건들과 달리 누군가 손으로 닦은 듯 매끈한 금괴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겨넣은 글씨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우우, 뭔가 써있다.”
“뭐라고 써 있소?”
“있어봐! 눈이 부셔서 잘 안보이는데.”
차가운 금덩이에 입김을 불어넣고, 부드러운 털이 가득한 팔 안쪽으로 박박 닦으려는 순간.
….킁킁.
금괴에 희미하게 남은 누군가의 체취에 이세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타림.”
“음?”
“그 붉은 그림자가 어느 쪽으로 사라졌지?”
“아마, 해안 반대편으로 사라진 것 같소만-”
투다다닥!
이세나는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타리무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가고, 에그윌은 그녀가 던지고 간 금괴를 들어 그 위에 새겨진 글귀를 읽었다.
“….웨일호는-”
[웨일호는 수입을 선원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진다.] [미안해. 내가 너희들을 휘말리게 해버렸어.]“….”
“….”
“하이드!”
“하이드였나!”
타리무스와 에그윌도 이세나가 그랬던 것처럼 금괴를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수인답게 달음박질이 빠른 이세나는 잠깐 사이에 한참 떨어진 곳까지 가 있었다. 에그윌과 타리무스는 멈춰선 이세나가 허공을 향해 악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이, 비겁자! 도망자! 살인자! 역귀!”
“이세나! 이보시오, 이세나! 진정하시오!”
“이것 놔! 그 빌어먹을 자식이, 하이드 그 개자식이…!”
“그를 만났소? 하이드! 여기 있소! 하이드으-!”
타리무스가 발버둥치는 이세나를 붙잡고 있는 사이, 에그윌은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자루에 있던 보물과 비슷한 분위기의, 어딘가 고급 가구에서 떼어낸 조각으로 보이는 것.
“….사과하려고 했어! 사과하려고 했다고! 내가 못났다! 너 따위가 워로드나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를 움직일 힘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어느 바다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고, 나는 내 가족의 죽음에 대한 화풀이 상대가 필요한 것 뿐이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됐다.]“….저게 날아와서 내 머리를 때렸어.”
“내가 빌기도 전에, 그 녀석은…. 이미 나를 용서해버렸다고….”
가구 파편에는 방금 새겨넣은 듯 톱밥이 묻어나는 글자가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그 새끼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난 이제 누구한테 빌어야 돼? 응? 웨일 호의 선원은 가족이고, 녀석은 우리를 같은 식구로 기억하는데, 그런 녀석을 쫓아내버린 나는…. 이제 어떡해야 되냐고!”
털썩.
사실, 이세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갈곳없는 분노를 모조리 쏟아부은 하이드가 떠나고 나서야, 분노가 그를 향해 불타고 있는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억울함이 그런 것이었으며, 그녀는 그 감정이 제 속에 담아둘 수 없이 뜨겁다고 가까운 이들의 머리위에 쏟아부어 버린 것이다.
“가버렸어. 마주 보고 사과 한마디 못 했는데, 이렇게 가버렸어….”
“….그래도 살아 있었다. 하이드. 수도에 간다고 했는데.”
“그렇소. 살아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타리무스는 주저앉아 흐느끼는 이세나를 토닥였다.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지.’
엘프의 눈은, 수인이나 뮤트 만큼이나 좋은 편이다.
잠깐이지만 그의 눈에 스친 것은 분명 커다란 괴물이었는데, 그것이 하이드였다니.
‘피치못할 사정이 있겠지.’
‘건강하시오, 하이드.’
타리무스는 이세나가 너무 슬퍼하기에, 잠시 하이드의 변화에 대한 것은 혼자만 알고 있기로 하였다. 하이드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모습이 변했다면, 이세나가 그를 떠나보낸 자기 탓이라며 더 슬퍼할지도 모르니까.
그저, 지금은 바다를 떠난 그들의 선원이 육지의 풍파에서 안녕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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