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80
Chapter. 22. 라스트 퍼레이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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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손아귀 위의 편지가 나침반처럼 흔들린다.
까딱, 까딱, 그리고 까딱.
“….날지 않는군.”
“아아아, 역시나….”
거기까지였다. 커다란 손아귀 위의 편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잔뜩 기대를 품었던 노마법사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 드리워지고, 덩달아 나도 실망해버렸다.
풀이 죽은 마법사가 내 손 위에서 편지를 가져갔지만 이번엔 말리지 않았다. 늙은 바람마법사는 편지를 손으로 쓸고, 지팡이를 가져다 대고, 몇 가지 주문을 중얼거리기도 한 다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떠한 마법이 깃든 흔적도 없어.”
“분명 시동어에 맞춰 흔들리는 것을 봤다만.”
“입김이겠지. 괜찮아, 나도 그렇게 입김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제 됐다! 싶었던 적이 많으니까. 으음…. 이건 아스트라드님께서 개인적인 지인에게 보낸 편지로군. 황후의 기사, 하이드에게?”
“제국 전쟁 때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아, 그 전쟁. 확실히 아스트라드님께서 몇몇 기사와 교분을 나눴다는 기록이 있지. 홈을 지키기 위해 뭐든 가리지 않으셨던 분이니까.”
마법사는 금세 마음을 다잡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차피 저 편지를 연구해서 실마리를 잡을 생각이었으니, 어물쩍 편지에 대해 설명하는척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을 심산이겠지. 암암리에 도주를 위한 마나를 끌어모으는 것도 느껴지고.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지만, 당장 내 머릿속은 음흉한 바람마법사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분지에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큰 기대는 안했다. 아스트라드는 죽었고, 그런 녀석의 무덤에 인사차 들러서 ‘아스트라드, 나 죽으러가요.’ 하면서 각오나 다질 생각이었는데.
이 푹 꺼진 둥지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녀석의 눈동자처럼 푸른 물이 찰랑이는 염수호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 같은게 느껴졌던 것이다.
‘왜 아스트라드는 내 준비에 포함되지 않았지?’
이번 삶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 몇 번의 삶에 걸쳐 내 기억을 일깨우고 나를 좀 도와달라 부탁했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이 그만큼 긴 시간을 살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 교수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몇 번의 삶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수백년이 지나서도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장생종(長生種)에게 부탁할 수밖에.
오트만님은 본인의 라스트 스펠과 노툼의 주술을 통해 세상에 재현된 일종의 마법적 존재다. 내재된 힘을 다 소모하지만 않으면 200년이 아니라 2,000년이 지나도 존재할 수 있다.
알다르샥스? 드래곤이다. 내 기억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
알드리치? 생(生)과 사(死)에 걸쳐있는 반신에 가까운 존재라며?
‘그렇다면, 아스트라드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해.’
아스트라드는 인간이다.
인간이지만, 이미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가 된 천재다. 7위계로 구분되는 대마법사부터는 이미 몸에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보다 해당 속성의 마나가 구성하는 부분이 많아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죽지 않는다는 불로(不老)의 존재가 되며, 그렇기에 대마법사의 사인은 대부분 자살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대마법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누군가는 먼지처럼 흩어졌으며, 누군가는 평범한 화산을 활화산으로 만들어 그 안에 몸을 뉘었고, 누군가는 제 유해로 대마법을 펼쳐 마법사들의 고향을 만들어냈다. 그 누구도 타살당하거나 자연사하지 않았어.’
대마법사는 이미 인간이 아닌 마법현상에 가까운 존재이기에 그 유해도 평범하지 않다. 아스트라드가 죽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바람이 되었을 것이며, 바람 마법사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아스트라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홈을 지키고자 했다. 말년에 자연물에 가까워지며 허무주의에 빠진 다른 대마법사들과 달리 아스트라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고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없다.
“그…. 이 편지 말인데,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조사해봐도….”
이상해. 뭔가 이상해.
“사람들은 우리가 대마법사가 영면에 든 이곳을 막 어지럽힌다고 욕하는데 말이야, 이렇게 각자 다른 시설이 마구잡이로 늘어선 대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뭐지? 내가 뭘 놓쳤지? 뭘 발견해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지?
더 깊숙이 생각에 잠겨가는 사이 늙은 바람마법사는 이상한 장치를 낑낑거리며 끌고와서 내 앞에 늘어놓고 있었다.
“이건 내가 따로 구비한 마법연구 장비야. 알다시피 아무리 홈이라도 우릴 평생 이곳에 잡아둘 수는 없고,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 바람들은 몇 달 정도 연구하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나버려. 그래서 이 분지에 이렇게 가지각색의 연구용 시설이 중구난방으로 늘어선거야. 어떤건 다른 마법사가 와서 쓰고, 분야가 달라서 쓰기 힘든 것은 녹슬고 먼지가 쌓이고. 나름 홈이 없어진 다음에도 이곳에 자기가 머물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따악!
“그거다!”
순간, 나는 무뚝뚝한 뮤트라는 설정도 잊고 소리쳤다.
“마법사! 바람 마법사들!”
“뭐, 뭐가?”
“당신들! 아직 여기 남아있잖아!”
염수호를 중심으로 고물상처럼 마구 늘어선 마법사들의 연구장비. 조잡한 것부터 돈을 처바른 것까지 마법사의 숫자만큼 다양하고 독창적인 장비들이 즐비했고, 이것이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남들이 남기고 간 것을 쓰는게 아니라, 자기 지식과 마법에 맞춘 연구 시설을 구비할 정도로 이곳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방랑의 천형을 짊어진 바람 마법사가!”
“그, 그야…. 당연하잖아? 이곳은 우리의 홈이라고. 유일한 고향….”
“지금은 사라진 고향이지. 펠릭스 홈도, 아스트라드도, 무수한 바람 마법사들이 그 엄청난 대마법유적의 흔적도 느끼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사라진.”
늙은 마법사의 얼굴이 의문에서 당황으로, 경악으로 물들어간다.
“당신들. 홈이 아닌 다른곳에서 가장 길게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지?”
“이, 이를 악물고 버티면 한달 정도….”
“이곳에 남아서 연구하던 이들은?”
“다들 홈과 대부님을 되찾겠다고 독이 올라서는, 가장 짧았던 사람도 5개월….어어어!”
“그래. 펠릭스 드릭시엘의 대마법, 펠릭스 홈은 그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기능을 하고는 있는거야.”
“이, 이럴수가….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에게는 그게 당연한 것이니까. 폭풍의 언덕, 펠릭스 홈, 고향, 홈, 다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갈 때 떠올리는 것은 [어느 동네 몇 번지 몇 층 몇 호]같은 사무적인 글자가 아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훤하게 그려지는 낯익은 길, 계단과 골목마다 남아있는 추억을 떠올리지.
적게는 5년, 길게는 십수년을 세상을 방랑하다 돌아온 바람마법사들에게 그들의 고향은 단순하게 하얗고 유선형 기둥이 겹쳐진 건물이 아니라 이 지역 전체로 새겨져 있고, 그렇기에 이들에겐 바위계곡이 즐비한 폭풍의 언덕도, 염수호와 분지로 이루어진 ‘아스트라드의 눈’도 같은 고향이다. 그래서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고.
‘마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폭풍의 언덕]이라는 지역이 아닌 [펠릭스 홈]이라는 마법건축물이다.’
‘홈의 효과는, 적어도 그 안에서는 바람 마법사들이 길게 머무를 수 있는 것. 3월드 때도 밤이 되면 사방에 퍼져있던 마법사들이 전부 홈으로 돌아와서 잠이 들었지. 머물 수 있는 것은 마법 건축물 내부로 한정된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홈이 사라진 분지에 5개월이 넘게 장기간 주둔했지.’
휙! 휙!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눈에 담는다. 기억하는 펠릭스 홈 보다 명백히 넓은 분지. 밀도는 다르지만 그 분지 끝자락까지 늘어선 마법사들의 연구 시설. 위에서 보면 커다란 눈을 닮아 ‘아스트라드의 눈’이라 불리는 이곳.
어느새 저물어가는 햇살이 그림자를 남기며 부지런한 별들이 아직 여운이 남은 하늘에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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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승님의 바람은 이미….’
‘그건 마법사라는 이름의 무신론자 이교도새끼들 상식이고. 로하람 교단에서 죽은자는 무조건 별로 돌아간다. 로하람이 그랬다면 그런줄 알아.’
‘네 스승님의 바람은 흩어졌지만, 영혼은 저 하늘 어딘가에 계실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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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있군.”
“펠릭스 홈도, 아스트라드도 여전히 이곳에 있어.”
바람 마법사는 의외로 높은 곳을 선호하지 않는다. 대기권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바람이 불지않는 구간이 나오므로.
아마 마법사로서는 이질적인, 저 별들 사이에 있을 누군가를 기리는 마법사나 하늘을 동경하며 바라보겠지.
하늘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눈이라니. 저것처럼 아스트라드를 더 잘 표현한 마법적 상징이 또 있을까.
“아스트라드님이 이곳에? 하, 하지만…. 다 뒤졌어! 땅속까지 갈아엎고, 저 염수호의 물도 전부 빼고 찾아봤다고! 여긴 수많은 바람 마법사가 머물며 그분의 흔적을 찾던 곳이야! 그분의 경지에 미치진 못해도 하나같이 대단한 바람들이었는데, 눈앞에 있었으면 못 찾았을리가-”
“펠릭스 드릭시엘도 8위계. 아스트라드도 8위계였다. 같은 경지에 도달했으며, 100년이 넘게 선대 대마법사가 남긴 유산만 연구해온 대마법사라면 마법의 구조를 바꾸지 못할 것도 없지.”
모든 사실이 말한다. 펠릭스 홈이 이곳에 있다고.
확신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생각을 모으고, 응집시켜, 가속시킨다.
‘왜. 어떻게. 어디로.’
‘끝없이 늘어나는 부담. 깨지기 직전의 마법. 사라져선 안되는 고향.’
아스트라드의 성격. 행동. 말투.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떠올라, 하나가 된다.
살아 움직이는 아스트라드가 되어 녀석을 모방한다.
그리고, 답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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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미발송 편지가 모이는 곳입니다. 보시다시피, 홈의 마법이 별도로 만들어낸 공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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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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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무한한 건 없잖아요? 홈의 부담은 끝없이 늘어만 가고, 언젠간 한계를 맞이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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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송 편지…. 주인없는 편지!”
덜컹!
마법사가 실험대 위에 올려놓은 편지를 낚아챈다. 흥분한 탓에 옆에 있던 깃펜이 부러지고 잉크가 엎어진다.
편지지 앞면에 적혀있는 것은 아스트라드가 기사 하이드에게 보내는 사과문. 오래전 은혜를 입었음에도 당장 도와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뒷면은, 그냥 시험 삼아 보내려고 ‘대마법사 아스트라드 딜런 델하스트에게’ 라고만 적어둔 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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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찾아볼겁니다. 적어도, 아버지와 제 추억이 깃든 집이 사라지진 않았으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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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곳이 잘못됐던 거야.”
녀석은 무한히 늘어나는 홈의 마법적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어린 아스트라드가 일하는 곳도, 교수가 떠난 다음에 머문 곳도, 대마법사 아스트라드가 머물던 곳도 ’미발송 편지‘가 모여드는 홈이 자체적으로 만든 아공간이었다.
아공간을 사용하는 법은, 그 안에 든 물건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떠올리는 것.
입구는,
찰팍!
쏟아진 잉크 위에 내려놓은,
[아스트■■ ■■ ■하스트]명백히 잘못 보내어질 편지.
“….바람에게 실어보낸다.”
수취인의 이름이 반 이상 지워진 편지가 잉크를 뚝뚝 흘렸다.
편지마법의 조건. 3일 이상 거주한 장소, 보내는 사람이 받는 사람을 명확하게 떠올릴 것, 수취인의 이름.
앞의 두 개는 마법의 조건 미달성으로 마법이 구현되지 않으나, 마지막 조건. 이름이 틀릴 경우 보내는 쪽의 마법은 발동이 되어 홈으로 날아온 편지는-
….우웅.
휘우우우웅!
“되, 된다! 마법이, 편지 마법이!”
“받는 사람의 이름이 잘못된 편지는, 갈곳을 잃고 홈에 남겨진 미발송 편지가 되지.”
휘우우웅-
팍!
“사, 사라졌다! 뮤트 선생! 편지가 사라졌어!”
마법사의 말처럼 바람을 타고 떠오르던 편지는, 어느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게 아니지.”
나는, 편지가 사라진 염수호의 수평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착한 거다. 그게 가야할 곳에!”
쑤우욱!
허공에서 손끝이 사라지고, 서늘한 저녁 공기와 전혀 다른 공간이 손끝에 느껴진다.
그리고.
‘아스트라드. 펠릭스 홈.’
퍽!
“뮤, 뮤트선생? 어디 갔어! 뮤트 선생!!!”
아공간 속의 내용물을 떠올리자, 사라진 편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둑한 저녁, ‘아스트라드의 눈’위로 내려앉는 땅거미가 희미하게 일렁이던 작은 균열 위로 내려앉았다.
“바, 바람에게 실어보낸다! 바람에게 실어보낸다! 나, 나도! 나도 데려가! 나도! 뮤트 선생! 아스트라드님!! 어디 계십니까아아!!!”
어둑한 염수호 위로 홀로 남겨진 노마법사의 애타는 절규가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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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락!
파라라라라락!
그리고, 한손에 잉크에 젖은 편지를 든 괴물은.
“찾았다. 아스트라드.”
편지가 끝없이 쏟아지는 종이로 만들어진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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