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86
Chapter. 22. 라스트 퍼레이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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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홈- 스윗 홈-을 외치며 드러눕기?
집을 떠나있는 동안 집에오면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실천해보기?
솨악, 솨아악!
아니다.
정답은, 청소다. 쌓인 먼지, 어딘지 모를 틈으로 들어온 온갖 작은 생물, 어딘지 모르게 상태가 변해버린 물건들을 다 씻고, 털고 말려야 한다.
쿵!
콰르르르-
그리고 그것은, 무려 220년 만에 귀환한 하이드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염병할.”
따로 정의된 이름이 없어 ‘의식공간’이라 불리던 그곳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쿠르르르르-
멀리, 현대의 고층빌딩을 닮은 무언가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옆에선 파괴돈 목조주택 위로 [INN]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위태롭게 삐걱거렸으며, 그 앞에선 멋들어진 백마가, 그 뒤로는 지하철이 달리고 있었다.
저것들도 일종의 기억이었다. 교수가 저도 모르게 그의 낡은 소파를 이곳에 만들어낸 것처럼, 또 하이드가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책장을 만들어낸 것처럼. 워로드로 활동하며 흡수한 무수한 파편, 그 안의 데이터 소울들이 이곳에 자리잡고 저마다 품은 강렬한 기억으로 온갖 불완전한 무의식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세입자님들이 참 집을 더럽게 쓰셨네”
당연히, 무려 220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하이드에게 있어 그것은 심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고.
쿠웅-!
콰르르르!
솨악, 솨악!
그 결과, 몇 분 전까지 한 세계의 명운이 걸린 전투를 치르던 하이드는 가사노동에 열중하게 된 것이다.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어렸을땐 왜 그렇게 사람이 되고싶었나 몰라.”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다 치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빌딩이고 왕성이고 부숴서 치우면 뭐해.
[셀린느, 셀린느 저하, 아아아아….] [우우우…. 런던으로, 그때의 런던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저어-기 저 친구들. 꼭 강물 밑바닥의 오니(汚泥)처럼 뭉쳐 흐물거리는 것들은, 비유하자면 고장난 비디오테이프 같은 것들이었다. ‘파편’이라는 그 이름처럼 압축되어 결정화되어버린 영혼들. 그덕에 저들은 자신의 가장 강렬했던 한순간에 매몰되어 이 어둡고 광활한 의식속에 끊임없이 그리웠던 순간을 상상하며,
[아아, 나의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 맛없는 빵으로 기적같은 샌드위치를 만들어내던 빵집, 파괴되기 전, 폭격이 떨어지기 전의 그곳으로 갈수만 있다면….]….두두두두두두!
이렇게, 박교수의 의식속에 저만의 런던 거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도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몇 초만에 허물어져버리는 자신만의 의식공간을.
그런 행위를 반복중인 인격이 무려 4월드 전체에 가까운 분량이었고, 덕분에 어둡고 광활했던 의식공간은 현대와 중세, 판타지의 온갖 순간이 부서져 뒤섞인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그락, 솨아아악!
그들에 비해 하이드의 청소도구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괴물같은 근력과 괭이처럼 뼈가 일렬로 돋아난 꼬리 정도였으니. 백날 치워봐야 말짱 도루묵일 수밖에.
솨악, 솨아악!
“제기랄. 그냥 슥슥 떠올릴 때는 쉬웠는데.”
한때는 하이드도 저들과 같이 상상만으로 이곳에 실물을 구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입장이 달랐다.
화르륵!
영혼에 일렁이는 하얀 불꽃, 오러.
파편이 강제로 압축되어 경질화된 영혼이라면, 오러나이트는 자의로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고 압축한 존재다.
“영혼의 밀도가 다르단 말이지. 기사는.”
영혼의 순수함, 강인함. 오직 그것만을 보고 스스로를 오러나이트로 키워온 이유가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르!
“뭐, 이쯤이면 얼추 됐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뮤트의 근력은 충실히 주변을 치워내고 있었다.
딱 직경 10미터 정도.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어낸 덕에 검은 수면이 드러난 원형 공터에, 미리 준비해둔 가구를 얹었다. 낡은 회색 소파와, 오래전 그가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사용했던 커다란 책장.
물론 과거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긴 했다. 낡은 회색 소파는 그 위로 쏟아진 온갖 기억의 잔해들 때문인지 거의 난자되다시피 한 모습이었으며, 책장은…. 그보다 처참했다. 박교수의 의식공간에 속하지 못한 개별의 인격으로서, 옛날처럼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대신 잔해더미에서 박살난 가구들을 주워다 얼기설기 끼워 맞춰야 했으니까.
통나무 집의 기둥이었을 무언가로 축을 맞추고, 누군가의 대문이었을 쪼가리를 세우고, 부지깽이를 못 대신 두들겨 박고, 멀티탭의 전선 같은걸 몇 다발씩 들고와서 묶고 연결하고….
“….됐겠지?”
그렇게 해서 만든 가로세로 10미터 짜리 책장.
.
.
.
.
슬쩍-
삐거어억-!
끄그윽, 기이이익!
“어, 으으음….”
확인 삼아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봤을 뿐인데, 책장 전체가 요동치며 기함을 지르고 위에 낚싯대로 매달아둔 전깃줄 모빌이 사납게 흔들린다. 아무리봐도, 이런곳에 기억을 담았다간 해리성 인격장애를 지병처럼 달고 살 것 같은 모양새.
“에이, 몰라. 미리 말하는데, 난 할 만큼 했다?”
사실, 어떤 식으로든 기억만 전달하면 되니까 굳이 이렇게 옛날과 같은 형상을 고집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나도 보상이 있어야지. 무려 220년인데.”
그래도, 이렇게 하고 싶었다.
검은 수면이 드러난 공간. 그 중심의 낡은 회색 소파와, 그 앞의 커다란 책장.
하이드는 낡은 소파의 늘어진 가죽이 몸에 닿는 감촉을 즐기며 부서지기 직전의 책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볼품없지만, 마침내 도달한 그의 ‘마지막’.
파스스스-
뮤트의 강인한 육체. 그 손끝부터 작은 반딧불이 같은 빛이 되어 삐뚜름한 책장을 향해, 어설픈 모빌을 향해 날아든다.
“기억의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는 나야.”
오랫동안,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도 지켜온 나의 기억과, 그 안에 포함된 의식과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공유한 박교수의 기억이 다시 만들어진 기억의 저장소에 흘러들어갔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은 아니었다만.”
“몸도, 마음도, 영혼도. 2세기 정도 지나면 이래저래 변해버리더라고.”
과거엔 교수와 기억을 나누는 행위가 숨 쉬듯 쉬웠다. 애초에 같은 영혼을 공유한 두 의식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어떨까?
“….이 소파도, 이제 불편해서 못 쓰겠다.”
과거엔 피부처럼 느껴졌던 낡은 회색 소파는, 뮤트의 꼬리와 등뼈 덕에 엉거주춤하게 걸터앉을 수밖에 없어졌다.
그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작은 존재는 자아(自我)의 정점(頂點)이라 부를 수 있는 마스터 나이트가 되었다. 그 정신은, 자의로도 분할되지 않을 만큼 결정화되었다.
육신은 인간의 형을 벗어났다. 육신이 영혼의 형태를 따른다면, 영혼 또한 육신의 형태에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곱게 갈아서 넘겨주지 않으면, 더는 옛날처럼 쉽게 들여다보고 공유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야.”
오롯이 존재하는 오러나이트의 영혼 덕분에 ‘워로드’에게 흡수되고도 멀쩡하게 내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도 분할되지 않는 영혼은…. 박교수에게 내 기억을 공유할 수 없게 했다. 과거와 달리, 완전히 독립된 의식이니까.
교수의 기억은 여러 오염된 데이터 소울에 의해 산산이 흩어지고, 붙들렸다. 이대로라면 서버룸에 넘어간 녀석의 인격이 돌아온다고 해도 빈 깡통 같은 워로드와 다를 바가 없을 터.
어떻게든 녀석의 기억을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 박교수의 무의식 안에.
스아아아아-
그래서, 사라진다. 200년의 인고 끝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고생했다는 한마디 없이. 무슨 수를 써도 내게 저장된 기억을 나누어 줄 수 없다면, 통째로 넘기면 그만이 아닌가. 비록 ‘하이드’라는 존재는 사라지겠지만, 어쨌든 전해지긴 할 테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란 소리다. 박교수.”
나의 혼잣말은 저 기억에 담겨 박교수에게 전해질 것이다. 녀석이 그것을 읽는 순간 비로소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되겠지.
마음 같아선 끝없이, 꼭 220년을 채울 정도로 계속 얘기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녀석이 듣다가 졸아버릴 수도 있고, 그렇게 시간이 많지도 않으니까.
“장담컨대, 이 기억을 네가 읽게 될 즈음엔 길길이 날뛰고 있겠지.”
마음 같아선 교수 놈 기억만 추려서 주고 싶지만, 쪼갤 수 없는 오러나이트의 영혼은 거기에 내 기억까지 모조리 얹어서 녀석에게 전할 것이다.
길길이 날뛰겠지. 제 사람을 끔찍이도 아끼는 녀석이니까. 내 역경 넘치는 200년짜리 인생사를 받아들이기만 해도 미안해 죽으려고 할텐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기억은 이렇게 놈의 내면에서, 기억을 전해주고 사라지는 내 모습일 테니까.
안봐도 비디오였다. 녀석이 아는 욕 중에서도 가장 엄선된 욕설을 마구 쏟아내면서 소리지를거다. ‘왜! 왜 하이드, 왜 그렇게까지 한거냐 이 병신같은, 미련해터진, 왁왁왁왁왁-!!’
“그러게. 왜 그랬을까. 나도 그거 가지고 한참 고민했지. 강렬했다 한들 너와 함께한 시간은 2년이고, 너 없이 살아온 시간은 2세기가 좀 넘는데. 알드리치도 처음에 물어보더라. 여기서 멈추지 않겠냐고. 그 고행같은 ‘준비’는 관두고, 네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안쓰러워서 못 보겠다던데.”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200년쯤 되니 산맥이 증발하고 대륙이 쪼개지기도 한다.
200년동안 새로 생긴 인연하나 없을까. 그중에서 아끼고, 보살피고 싶었던 인연이 또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왜, 기어이 여기까지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는데, 어느순간 절로 답이 튀어나오더라.”
화르륵!
사라져가는 하이드의 몸에 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3월드, 제국에서 처음 피워올린 불꽃을 닮은 하얀 오러. 품은 의미는 불굴(不屈).
“이것만큼은 나눠지지 않는 거잖아. 그래서 마지막에 붙었을 때 나는 오러를 썼고, 시스템의 살뜰한 보살핌속에 마법사로서도, 전사로서도, 샤드나이트로서도 모든 가능성을 극한까지 피워낸 너는 오러를 쓰지 못했지.”
“애초에 불굴(不屈)은 내게 속해있었다는 말이다. 박교수가 아니라.”
첫 번째 단서는, 한 인간의 가장 의지나 다름없는 ‘오러’가 고작 떨어져나온 의식 쪼가리에 불과한 하이드 그 자신에게 속해있었다는 것.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 GG는 현실의 시뮬레이션이며, 그래서인지 전혀 다른 세계에서도 겹치는 부분이 아주 많이 나오지. 바깥이 핵전쟁에 뒤집어진 것처럼 4월드는 용맥 뒤틀기에 작살났고, 바깥에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은 도시국가 ‘돔’이 있다면 이쪽은 용맥 뒤틀기 이후에도 국가의 기틀을 유지한 제국이 있지.”
심지어 용맥 뒤틀기를 위한 마도장치의 명칭은 ‘A-TOMB’이었으며, 가이낙스가 바꾼 제국의 깃발은 돔의 깃발을 그대로 뒤집은 형태였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세계도, 어느 시점에선 겹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바깥에 변종 바이러스가 있다면, GG에는 뮤트인자가 있었어.”
언젠가, 박교수는 뮤트 인자를 보고 ‘형태만 다른 변종 바이러스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숙주의 가장 어그러진 기억, 트라우마를 파고들어 자리잡는 게 변종 바이러스라면. 그것의 거울상인 뮤트 인자는, 이 ‘의식 생명체 하이드’의 기원은 어디에 자리 잡았을까?”
똑같이, 인간의 가장 약하고 상처받은 기억에 자리잡겠지. 그리고 박교수에겐 너무나도 명확한 상처가 있었다.
“살아남은 것. 가장 가까운 이들이 널 위해 죽어준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것이 네 트라우마였어.”
“그렇게 만들어진 죄책감은 자기혐오가 되고.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자기혐오는 끝내 네게서 인간의 본능 하나를 도려냈지.”
인간, 아니 생물이라면 인류 같은 고등 동물부터 짚신벌레같은 미생물까지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
“자기애(自己愛). 그 무엇보다 스스로를 가장 우선시 하는 본능. 네 죄책감은 살아남은 스스로를 혐오했기에, 네게서 동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뜯어냈어.”
그것이 하이드가 들여다 본 박교수의 진짜 내면이었다. 어떤 생물이라도 판단의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자기 자신’이 PTSD로 뜯겨나가 이성과 양심의 뒤쪽에 자리잡아버린 기형적인 인격.
황무지 생존자들이 모두 그렇듯, 그 또한 광인(狂人)의 한 종류였던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 그것에서 발생한 과도한 스트레스에 압축되어 결정화된 영혼.
그렇기에 단단하고, 그래서 험난한 멸망기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깎아내어 탄생한 ‘모난 선함’. 하이드는 박교수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렇기에 박교수는 그 자신보다 먼저 누군가 희생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으며,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외면할 수 없었지.”
….그렇게 떨어져나온 트라우마. ‘자기애(自己愛)’위에 뿌리내린 뮤트 인자에서 자라난 것이 ‘하이드’였다.
“그래서 너는 스스로를 내던져 세계를 구하고.”
“그래서 나는, 나의 세계를 내던져 너를 구하는거다.”
한때 하나였으나, 강한 충격에 떨어져나가 서로 반대방향을 향해 날이 서버린 두 영혼.
“나는,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너를 아끼는 타인이라는 뜻이지.”
그래서, 불굴(不屈).
후우우.
오랫동안 홀로 품었던 말들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벌써 반쯤 채워진 책장 때문인지, 머리가 멍했다. 또 뭘 얘기해줘야 했더라.
왜 이렇게 헌신적인가. 얘기했지. 이걸 털어놓지 않으면 저 때문에 내가 희생했다고 평생 자책할테니까. 다소 운명론적이긴 하지만…. 원래 저렇게 태어났다고 하면 지가 어쩌겠어. 수긍해야지.
음. 그리고.
“….호사스러웠어.”
나름 아버지 뻘인데, 유서에 고맙다는 얘기 정도는 써줘야겠지.
“어떤 인격이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누군가의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에 둘러싸여, 몇 번이고 그것을 되풀이 할 수 있다니.”
그것도, 너와 같이 강렬한 누군가의 기억을.
분해된 영혼은 기억이 되어 책장을, 하늘을, 어둠을 채워나갔다.
부러진 낚싯대로 만든 모빌에 가장 밝은 기억들이 하나씩 자리잡았다. 낡은 소파에서 올려다본 그것은, 어둡고 광활한 하늘에 피어난 작은 은하수 같았으며. 검은 거울과 같은 수면은 그것을 비추어 또다른 밤하늘을 하이드의 발 아래 펼쳐보였다.
“그래. 이게 다시 보고 싶었어.”
마치, 낡은 소파에 누운 그가 꼭 작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아, 퍽이나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 순간.
200년 동안 머릿속에 그려만 왔던 순간으로 되돌아오는 것. 그게 하이드가 바랬던 보상의 전부였다.
….자그락.
굳이 따지자면, 사라져가는 와중에 슬쩍 챙긴 작은 기억 한 조각 까지가 그의 보상.
‘나도 어쨌든 흡수당한 데이터소울이니, 다른 파편들처럼 기억 하나는 챙겨갈 자격이 있겠….지?’
상념속에 의식이 흐릿해지고, 그만큼 주변을 빛이 가득 채워갔다.
“….시간이 됐….나.”
천천히, 확실하게 소멸한다. 티끌만큼이라도 ‘하이드’가 남는다면 그만큼 ‘박교수’가 모자라게 완성된다는 뜻이니. 그의 ‘자기애’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박교수가 단 한명의 버려지는 사람도 저버리지 않고 기어이 손을 뻗듯이.
머나먼 어딘가. 서버룸이라 불리는 기계덩어리 속에 조각난 박교수의 인격이 들어있을 것이다.
“슬슬 준비해…. 마지막 주자….”
소멸해가는 와중에도 하이드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만이 가득했다.
무려 200년을 준비해온 계획이, 단 한 순간의 역전을 위한 서막이 드디어 올라가고 있으니까.
“가….서. 마무리….해….”
200년에 걸친 기억의 이어달리기 끝에 박교수는 ‘나’라는 바톤을 넘겨받았다.
“빗나가지…. 마…. 잘 보이라고…. 깃발까지…. 박아뒀다….”
흐릿해지는 시야속에 환상처럼 결승선이 보였다. 4월드, 아무것도 없이 사라진 그곳에 우뚝 서있는, 시스템의 가슴을 꿰뚫은 은빛의 검. 라이오넬.
목적지를 알리는 신호이자, 적을 꿰뚫어 고정한 말뚝. 700년간 숭배라는 복잡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또 그만큼의 적의를 제국의 적에게서 축적한, 감히 기계지능이라도 분해하는데 한세월이 걸릴, 무의미하고, 무식하게 큰 압축 데이터 덩어리.
아마 지금쯤, 텅 빈 4월드에서 움직이지 못해 곤혹스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속이고 취한다. 그게 우리 방식이지.’
‘….그렇지, 껍데기?’
처음부터 정면승부는 우리 방식이 아니었다. 교수도, 나도 언제나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야 했으며, 승리의 공식은 항상 의표를 찌르는 일격이었다.
그것이 박교수의 방식. 그에게서 배운, 나의 방식
사라지고 싶지 않다. 한마디만, 그 망할 시스템에게 ‘넌 속았다!’라고 통쾌하게 외치면서 그동안 내가 뭘 해왔는지 알리고 싶은데.
그래. 하나만 더 부탁하자. 내가 그정도 부탁할 정도는 해줬지.
하이드는, 희미하게 남은 그의 정신을 동원해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차갑게 그의 잘린 목을 보며 승리를 선언하던 시스템에게 전할 말을.
『4월드 클리어 축하한다, 멍청아.』
4월드에선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치밀한 인공지능이며, 동시에 창조주의 힘을 다루는 신이니까.
『그러니, 어디 한번 마음껏 즐겨봐라.』
그러니, 패배가 확정된 말판 위에서 할 일은 승리가 아니다. 그 다음을 위한 준비일 뿐.
『승자를 위한 애프터 파티(After party)를.』
세계의 마지막. 4월드라는 말판이 무너지고 찾아올 단 한순간의 기회.
엔딩 너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그렇게, 기어이 220년을 버틴 끝에 제 목적지에 도달한 영혼이 빛무리 속에. 후련하게, 한점 미련 없이.
‘….하이드, 오버 엔 아웃.’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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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와 동시에.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공허. 그녀와 껍데기뿐인 워로드,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꿰뚫은 검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띠링-!
시스템인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알림음이, 존재해선 안될 문구가 떠올랐다.
드래곤과 같이 세계 안에서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자신의 핵심 데이터를 플레이어 수준으로 4월드에 옮긴 시스템에게.
쿠웅-!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커다란 문이 생겼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군중들의 함성소리. 희미한 악기 소리.
그리고.
끼긱, 끄그그극- 끼이익!
‘클리어 축↗하↘ 합-니다~♪ 클리어 축↗하↘ 합-!니다~♪’
그 사이로 들려오는, 입술을 짓씹는듯한 억눌린, 음산한 노랫소리가 쇠를 찢는 소음과 함께 새어 나왔다.
“지워지지…. 않아?”
불가능한 일이다. 시스템, 그녀의 단말 ‘월드’는 이미 4월드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 소울과 관리자의 권한을 확보했는데. 이제 4월드 밖으로만 나가면 개발자 계정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도 텅 빈 4월드에선 지금 당장이라도 세계 창조든 파괴든 원하는대로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데, 어째서.
끼이이이이익-
혼란에 빠진 그녀를 향해 고풍스러운 문이 좌우로 열리고.
콰악!
맹수처럼 뛰쳐나온 손아귀에 시스템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체 끌려갔다.
무대(Stage) 밖으로.
“어서와라.”
엔딩,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작은 월드.
“엑스트라 스테이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으드득!
“….이 자리에 없는 단 한 사람의 기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이 끝나고, 이 게임을 구성하는 모든 데이터 소울이 모여 벌이는 축제 속으로.
“….4월드 클리어한거 축하한다, 멍청아.”
모두가, 기꺼이 그녀를 기다리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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