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91
Chapter. 22. 라스트 퍼레이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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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으으읍
후우우-
“….담배 맛 한번 기깔나네.”
술도 맞는 음식과 같이 마시면 더욱 향긋한 것처럼, 담배도 안줏거리의 영향을 받는다.
어디보자. 눈앞이 탁 트인 높은 곳에 앉아있으니까 +2점. 그 아래 펼쳐지는 게 불과 매캐한 포연이 한 대 어우러진 A급 싸움 구경이니까 +5점. 입에 물고 있는 게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담배고, 그걸 상상한 사람은 28년을 담배를 굶은 황무지 애연가니까 +30점.
콰앙!
쿠르르르-
그리고, 그 난장판의 중심에 반짝이는 은발이 있으니까 +1,000,000점.
이 정도면 담배 안주 치곤 호사에 가까운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음….행사 참여 인원들의 적극성 부족으로 –100점.”
약-간 눈에 거슬리는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참나. 다들 신사적이라고 해야 하나, 뼛속까지 호구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도시 하나는 아작을 내던가, 바이오 해저드급 난장판을 만들어 놔야지. 이건 뭐 어디 토마토 축제도 아니고 칼질만 깨작- 깨작 하고있으니.”
물론 저 아래 사람들이 시스템을 덜 팼다는 건 아니다. 당장 몇 초 무너진 성벽도 무한히 쏟아지는 성벽포의 반동을 못 이겨서 쓰러진거고, 도시는 100년 전쟁이라도 치른 듯 폐허가 됐으며, 그걸 다 쳐맞은 시스템은 빈말로도 멀쩡하다고 할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건 그 정도가 아니었거든? 말 그대로 이 박교수가 세계의 주인인 스테이지인 만큼 할 수 있는 일에 한도가 없단 말이지?
난 분명 저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것 전부 다 마음껏 하라고’ 허가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성벽 안에서 초대형 거인이 튀어나와서 은발머리 깡통을 자근자근 짓밟는 것도 가능하고, 우물에서 크툴루나 니알라토텝 같은 게 기어나와서 시스템에게 공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던가, 갑자기 눈알이 주먹만한 핑크 포니가 떼를 지어 언덕을 뛰어넘으며 무지갯빛 총공격을 가한다던가- 하는 등의 온갖 창의적인 고문이 전부, 무상으로 가능한 세계란 말이다.
그런데, 고작 칼질에 포격이라니. 그마저도 축제 시작한 지 고작 아홉 시간 만에 잦아들고 있다니. 이러니 내가 실망하지 않고 배기겠냔 말이다. 파티 주최자로서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해놨는데 정작 손님들이 계란 초밥이나 끼적거리다가 그냥 나갈 채비를 하고 있으니.
스륵-
“하여튼, 이래저래 손 많이 가는 사람들이야.”
틱-
담배꽁초를 튕겨낸 순간 사라진 몸은, 어느새 저 아래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사이 날 알아본 알드리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오트만 그 친구가 말하기론 좀 기다려 준다더니. 벌써 왔나? 어떻게, 니놈도 한칼 하려고?”
“보다가 답답해서 왔습니다. 다들 왜이렇게 시원찮아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이 그냥 당한 만큼만 되돌려줘도 될텐데. 알드리치, 당신 흑마법사 아닙니까? 흑마법 하면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내장파티같은거 할 줄 몰라요?”
“끄응. 그게 말이야, 으으음….”
알드리치는 난감하다는 듯 몇 가닥 안남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성난 군중의 중심에 매달려있는 시스템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종류의 흉기에 꿰여 반쯤 무너진 탑의 외벽에 박제된 시스템은 피칠갑을 한 반쯤 뭉개진 얼굴에 무표정을 담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거, 통각을 차단한 듯 싶으이.”
“하여튼. 연어같은 놈이 지 좋을 때만 기계로 돌아가고 지랄이야.”
통각 차단이라.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한 명령은 다른것에 비해 적용이 쉬웠겠지. 알드리치는 어쩐지- 하는 표정으로 끄덕이는 내게 멋쩍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다들 의욕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의욕? 왜요?”
“너무 오래 살아서.”
그 말을 하는 알드리치는 내가 아는 알드리치가 아니었다.
엑스트라 스테이지에서 기억이 돌아온, 탁한 눈으로 수백이 넘는 세상과 삶을 되돌아보는 유폐된 영혼일 뿐.
“전산화되어 그 순간에 고정이 되어버린 영혼임에도, 다들 조금씩 닳아갔어. 너무 닳아서 속에 묻어둔 악이 튀어나올 정도로 닳아버렸지. 저들의 모습은 열 살의 뉴스보이 소년부터 만삭의 아낙, 강건한 오러나이트까지 다양하지만, 그 알맹이는 전부 노인이 아니냐. 이미 분노를 불태우기엔 그 안에 남은 게 얼마 없다는 뜻이야.”
“….그럼 복수는 됐고. 조만간 시스템 저거 쥐어짜서 저놈이 가지고 있던 권한 다 흡수하면 제가 GG의 주인이 되는 거 아시죠? 각자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드릴 수도 있는데. 따로 해보고 싶었던 건 없습니까?”
“없다.”
“설탕 결정으로 된 산에서 맥주가 폭포처럼 흐르는 세상이라던가.”
“단 거 싫어해.”
“창창한 20대 청년으로 돌아가 인생 2회차를 즐겨본다거나.”
“잔인하구먼. 지금 우리한테 인생을 ‘또’ 살라고 하는게냐?”
“아니, 그래도 당장 ‘오류’가 된 건 아니잖아요? 아직 깎여나갈 의지가 남아 있으니 다들 이렇게 인격을 유지하고 있는 거 아냐. 원하는거 없어요? 말만 하라니까? 여기선 다 된다고-”
“교수. 네녀석도 우리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알지 않느냐.”
삶에 지친 영혼들. 그들의 눈은 어느새 그들의 삶을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 채운 원수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않습니까, 알드리치.”
“그럼. 설마 모를까.”
“당신들 중 9할은 핵폭발에 증발했습니다. 무덤도 없어요.”
“달라고 한 적도 없지.”
데이터 소울.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구해낸 사람들.
“이 세계의 신은 데이터 소울의 인지 집중으로 인한 통합 인격이고, 바깥에 신은, 있다면 우리 머리위에 핵을 떨구고 바이러스를 뿌린 놈입니다.”
“우리 세계에 제일 유명한 성자의 종부성사(終傅聖事)치곤 대단히 신랄하구만.”
구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결말이었다.
“너도 알지 않느냐? 닳아빠진 우리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며, 오직 자네만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을.”
“당신들은…. 삭제조차 불가능해요! 당신들이 GG의 뼈대 그 자체니까! 그냥…. 이대로 굳어 사라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딴 걸 ‘안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알드리치!”
저들은 게드로이츠의 게임. 그 일부이며 전체와 같다. 아무리 내가 GG전체에 대한 전능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게 된다 한들 저들의 인격 데이터를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손에 쥔 칼로 칼 손잡이를 부술 수 없는 것처럼.
유일한 방법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 마치 영구 동면에 들어간 사람처럼, 그들의 삶이 앞으로도, 뒤로도 더는 나아가지 않게 굳혀버리는 것.
“나도 욕심이라는 게 있잖아! 그렇게 개 지랄병을 떨어가며 구했는데! 적어도 1년, 아니 한달 만이라도 당신들이 아무런 고통없이! 전쟁이니, 멸망이니, 완성자를 위한 프로그램이니 하는 것 없이! 그냥 좆대로 살아가는 것 정도는 구경할 수 있잖아!”
“교수.”
“알드리치는 싫으면 관두세요! 다들 그렇게 멀뚱히 쳐다보지만 말고 말 좀 해봐요! 구해 줬으면 보따리도 내놓으라고! 준다니까!”
“교수야.”
“말만 해! 이런 월드에 살아보고 싶었다! 이런 삶이 필요했다! 내세든, 천국이든, 뭐든 상상하는대로 만들어준단 말이다! 그럴 능력이 있다고!”
“….교수 이놈아.”
아무도,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알드리치의 허무한 결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네가 말한 그딴 것.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안식이며, 오직 너만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피하고 싶었던 결말은, 애써 눈 돌린 사이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느새 나의 반대편에, 알드리치의 곁에서 나를 마주하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 또한.
노툼. 오트만. 보르카. 루실라. 이드라실. 알드리치. 락샤샤. 나와 생사를 함께했던 사람들.
로만이나 시오드 4세, 가이낙스, 노먼 대주교, 성기사단장 그레고리우스처럼 짧았지만 깊은 교류를 나눈 사람들.
어느 성문의 간수장, 어떤 신전의 평사제, 내 이름을 부르짖으며 마른 빵을 쥐어주던 가난한 시민, 병사, 기사, 스쳐지나간 인연들.
그 얼굴들이 하나씩 눈가에 스칠 때마다 그 안에 담긴 기억이 터져나왔다.
이제는 나만의 기억이 될 것이다. 이 기억을 나눈 이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에 굳어질 테니까.
그리 행복하진 않았지만, 이것이 우리들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해피 엔딩’이었다.
“….그래. 가라, 가.”
칙칙,
쓰으으읍-
후우우.
“미안허이.”
“미안하긴요. 애초에 이렇게 될줄 알았는데. 나도 한 30년 꼭두각시 노릇 하다가 돌아와서 그런가, 좀 감정적입니다. 이해해주쇼.”
“이해한다 말하지 않겠네. 그건 박교수라는 인간의, 또 하이드라는 위대한 기사의 노고에 대한 기만이 될 테니까. 아무도, 감히 그 둘의 삶과 분투를 이해한다 말 할 수 없어. 그렇게 살아보지 않는 한.”
“됐고, 마음의 준비나 하십쇼들. 바로 보내버릴라니까. 어차피 저기 매달린 깡통이랑 단 둘이 할 얘기도 있고.”
하이드에 이어 이들 모두까지.
작별이다.
그리 생각하며, 손을 들었다.
화낼 힘조차 닳아버린 전자 영혼들이 빛무리에 감싸인 가운데, 알드리치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부여잡았다.
“뭐요. 미련 없다며.”
“마지막에 저 시스템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 하여, 노파심이 들어서 말이야.”
사라져가는 알드리치의 눈이 시스템이 매달린 탑을 스쳤다.
“….저것 만큼은 안 되네. 자네의 그 대책없는 선의가 저것에게 만큼은 닿아선 안돼. 저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네.”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십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여기서 처리 안 하면 엑스트라 스테이지 나가자마자 저쪽은 개발자 복직이고, 이쪽은 병신 귀환인데 퍽이나 봐주겠습니다.”
“클클클…. 내 기나긴 삶을 통틀어 자네처럼 바보같은 위인을 본적이 없음이야. 말도 안 된다 하기엔 이미 자네들이 해낸 말도 안되는 일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화아악-
어느새 환한 빛무리가 된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상상했다.
“버려진 영혼을 보듬는 자로서 인사는 내가 함세. 부디, 셀 수 없이 많은 세계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격에게 가없이 찬란한 앞날이 있기를.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감사의 첫마디를 이곳에 두고 가겠네.”
“….살펴가십쇼. 알드리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치 폭죽처럼 환하게 빛나며 하늘로 오르는 빛무리를.
“펑.”
.
.
.
.
“라투라. 친구들.”
허구일지언정, 그들이 바라는 데로 죽은 자들은 밤하늘의 별이 되기를.
오직, 악의와 고난으로 빚어진 지독한 세상에서, 당신들이 나의 빛이었으니.
적어도, 홀로 남은 이가 그 아름다운 묘소를 보며 빈 자리를 달래는 것은 허락해주길.
웅성거림도, 발소리도, 숨소리도 사라진 고요한 축제.
가장 화려했던 축제는 이제 단 한 명의 손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
360분. 이 세계에 내정된 시간이 끝난 순간부터 시스템의 눈은 단 한번도 내가 있는 곳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팔 다리가 뜯겨나가고, 무기 거치대 같은 꼴이 되어 탑의 외벽에 벌레처럼 고정되는 순간에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플레이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에서, 처음보다 되려 냉정해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 나도.”
마지막 플레이어는 그런 시스템 앞의 무너진 담벼락에 대충 걸터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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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아~ 저봐라 저거. 멋있지 않냐? 내가 가라 성자긴 해도 삶이 삶이다보니 교리 몇줄 정도는 알고 있다고. 내 손으로 보낸 사람들이면 밤하늘의 별로 남겨지는 게 맞지. 암.”
견월망지(見月忘指). 현자가 달을 가리키면 바보는 손가락을 바라본다고 했던가.
내가 나의 벗들로 은은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가리켰음에도 시스템은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 그지? 4월드 시작할 때는, 네가 준비한 함정에 내가 걸렸고. 끝날때는- 내가 준비한 함정에 네가 걸렸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시스템은 변함없이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침묵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지금도 필사적으로 연산중이겠지. 권능을 억제당한 덕에 되려 본연의 기계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녀석에게, 좌절이나 포기 같은 걸 떠올리는 프로그램은 없을 테니까.
그래선 안 된다. 육체적 고통을 차단한 시스템이, 그 정신마저 차가운 기계의 것으로 되돌아가선 안 된다.
“….축하한다 시스템. 내가 졌어.”
그래서, 털어놓았다. 원래 이 모든 영광의 주인이었어야 할 시스템에게,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내가 그녀의 계략에 완전히 파묻혔음을 시인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털렸지 뭐냐. 나름 발버둥 친다고 이래저래 궁리를 해놨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찾아서 조져놓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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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그극, 기긱!
“….그, 것은, 무슨.”
그리고, 놈은 반응한다. 이 순간에도 냉철하게 나를 이길 수를 찾고있던 인공지능은 ‘나의 패배’라는 단어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에 털어간 거 그거, 엑스트라 스테이지에서 할 일 기억해놓은 거였거든? 원래는 다른 기억 다 털린 상태에서 그거 하나만 되찾을 생각이었다고. [정신이 돌아오면, 엑스트라 스테이지의 다른 NPC들에게 나의 존재를 밝히고 나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래저래, 허겁지겁 그렇게 비어있는 ‘파티 주최자’의 자리를 낚아채서 너를 요리할 생각이었단 말이지.”
“그것,은, 결국, 성사되었고, 해당 시스템,은, 소세계 ‘엑스트라 스테이지’의 참여인으로 전락했,습,니다.”
….풋!
“푸하하하하하! 풉, 크핰! 흐하하! 하핰! 푸흐흐흐흐흐!!”
이제는 말판의 말이 모두 사라지고 시스템과 나, 수를 놓는 두 사람만 남았기에, 내 속에 담긴 부끄러움을 한껏 담아 폭소를 터트렸다.
형편없이 난자되어 탑에 못 박힌 시스템이 웃긴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게, 나를 포함해 녀석과 이 세계가 얽힌 상황이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너와 나 사이에서 그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나의 패배라는 미끼를 문 기계지능에게, 놈이 원하는 것을 모두 던져준다.
나의 패배. 나의 실수. 나의 치부. 놈이 지금 간절히 원하는, 뭐든 좋으니 박교수가 실패에 이르게 되는 길.
그것을 바라는 자에게 이미 실패에 이른 나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는다.
“그때, 그 열차에서, 어느 순간부터 촉새처럼 ‘협업해요~ 각자 목표를 위해 같은 방향을 바라봐요~’ 하고 떠들어대던 시스템의 목소리가 조용해졌지.”
“카트레아가 내 앞에서 스스로 제 목을 베던 순간, 굴러 떨어지던 그녀의 머리를 보면서 생각했어. ‘아, 이 세상에서 앞으로 내게 벌어질 모든 사건, 모든 인연은 이런 식으로 끝나겠구나.’하고 말이야.”
“나는 혼자였고, 충격받았으며, 당연하게도 하이드, 오트만, 알드리치 등등…. 상상도 못한 이들이 나를 위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걸 알 길이 없었지. 이미 3월드에서 죽어 사라졌어야 할 이들이 그 시대의 기억, 그날의 힘을 가지고 나를 돕고 있다니. 평생 재수없었던 내 인생의 그래프랑 비교하면 너무 낙천적인 생각이잖아?”
“그래서, 보다 빨리 깨달았다. 4월드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시스템, 저 썅년을 이길 수 없다고. 녀석의 함정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완벽’하다고.”
내게 주어진 상황을 파악하는 것. 그것은 내 특기이자 어떤 상황에서든 우선시하는 습관이었다.
그 당시 나의 판단은, ‘항거 불능의 패배’였다.
“맞….습니다. 해,당 시스,템,이 도출한, 프로젝트,는, 한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게 요행(徼倖)이었다.”
“….요,행?”
“그래. 운빨, 도박에 매달렸다고. 원래 버저비터는 3점 슛을 노려야 하고. 미드필더도 추가시간 끝자락엔 똥볼을 때리는 법이니까.”
항거 불능의 패배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미래’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 미래를 토대로 생각했다.
패배하면? 기억을 다 잃고 시스템의 꼭두각시가 되겠지.
세계까 시스템의 손에 들어가고 4월드가 끝나겠네?
끝나면, 세상이 다 끝났을 때 남은게 뭐가 있지?
뭐가 있지? 뭐가 있지? 뭐가 있었더라….?
.
.
.
아, 엑스트라 스테이지. 그년이 나를 어디에 처박아 뒀든, 거기서 한번은 다시 만나겠구나.
“그거야. 어차피 못이기는거, 그냥 내어주고 기다리자.”
“….그게, 끝?”
“그래. 중간 과정도, 섬세한 조정도 없이 그냥 결과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둔, 조잡하기 짝이 없는 도박수.”
원래는 보다 섬세한 준비가 필요한 계획이었다.
3월드 클리어 당시, 세계수는 [엑스트라 스테이지의 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엑스트라 스테이지가 열리기까지 다소 로딩이 있으며, 그 안에 시스템이 손에 쥔 힘과 함께 신나서 4월드 밖으로 나가버리면 아웃이다.
기억을 빼앗긴 내겐 놈을 억제할 수단도, 놈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아낼 방도도 없었다. 그저 기도할 뿐.
시스템은 완전히 4월드에 속한 프로그램도 아니었다. 놈의 본신은 ‘관리자 시스템’이며, 4월드에 존재하는 단말 ‘월드’를 어찌저찌 처리한다 한들 어딘가 존재할 놈의 핵심 프로그램이 살아남아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개발자 ‘권한’인 만큼 놈이 티끌만큼이라도 존재하면 언제든 그쪽에서 휘두를 수 있으니까.
최대한 버텼고, 그덕에 놈이 나를 세뇌하기 위해 인간을 흉내낸 ‘월드’라는 단말을 만들고 인간의 감정을 학습할 정도까지 놈의 핵심 데이터를 이 4월드에 투자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자, 이게 ‘박교수의 플랜’ 전체다. 그 좋아하던 플랜 B, 플랜 C도 없는 통짜바리 플랜 A가 끝이지.”
“고작, 이게…. 끝….입니까? 이렇게 허술하고, 대책없는 계획이….”
“그래서 말했잖아. 내가 졌다고. 원래대로였다면, 내게 필요한 조건 중 그 어떤 것도 성사되지 않아 실패할 계획이었다고.”
결론인 ‘엑스트라 스테이지’에 닿으면 무조건 승리한다.
하지만, 그 결론에 닿기까지를 준비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
패배했지만, 실패하지 않은 인공지능은 앞선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플레이어가 제시한 상황, 그의 성공으로 향하는 실낱같은 경우의 수와, 그것에 닿지 못하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세고, 세고, 또 세었다.
….빠드득!
그리고, 분노했다. 저런 구멍투성이 계획과, 결과적으로 자책수 였던 행동 끝에 패배한 것이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라는 불합리한 상황에.
“이것은. 이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빠드득, 뜨득!
악 다문 어금니가 섬뜩한 소리를 내고, 반쯤 남은 입술이 뜯겨 피딱지 위로 선혈을 틔우며, 숨을 쉴 필요 없는 기계지능의 숨이 거칠어졌다.
받아들일 수 없는 불합리는 차게 식었던 기계지능에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불어넣었다.
“당신의 말에 의거하면, 이것은 존재해선 안되는 결과입니다.”
“맞아.”
“그런데 왜! 어째서!!”
“그야, 무대에 나도 모르는 게스트가 잔뜩 있었으니까.”
구멍투성이 미완의 계획은,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 하이드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와 같은 머리를 가진 그 녀석은 나와 같은 입장을 상상했고, 나와 같은 계획을 떠올렸으며, 그런 내게 시간이 모자랐을 것도 추측해냈다.
그리고, 220년에 걸친 장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평생에 걸친 저항은 시스템이 ‘볼 수 없는’ 작은 미래를 만들어냈고, 완벽주의자인 기계지능은 그것을 참아내지 못했으며, 그 ‘만약’을 지우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4월드에 쏟아 넣게 만들었다. 9위계 메테오를 마구잡이로 난사하던 그 힘은, 관리자 시스템으로서 모든 역량을 4월드에 갈아 넣었기에 휘두를 수 있는 권능이었다.
시스템이 이 세상을 모두 손에 넣고도 떠나지 않을 잠깐을 위해 가장 큰 데이터량을 가진 검을 시스템의 가슴에 쑤셔 넣었으며, 결국은 엑스트라 스테이지의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없는 4월드에 그녀를 붙들어 놓았다.
“그렇게 된 거다.”
….철컥!
충격을 받은 듯 숨을 몰아쉬는 시스템의 미간을 향해,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그냥, 우연히. 박교수라는 플레이어의 머릿속에서 우연히 태어난 복제 인격이, 우연히 4월드 전에 분리되어 먼저 4월드를 향해 떠났으며, 우연히 같은 계획을 떠올리는데 성공하여, 우연히 널 패퇴시킨거다.”
비록, 실상은 그것과 다르지만.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의 집념이, 감히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죽으면 기억이 사라진다’라는 법칙을 거스를 만큼의 독기가 만들어낸 기적이지만.
인간성을 획득한 기계지능인 시스템 스스로도 그와 같은 종류의 ‘기적’의 산물임을 알지만, 그저 우연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네게 돌아가야 했을 영광된 승리는, 우연히도 내게 돌아왔다. 너 자신. 시스템의 계획은 한치도 틀림이 없었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티끌같은 우연으로 인해 너는 패배하였다 속삭인다.
‘그러니, 말해라. 시스템.’
….챠라락.
이런 상황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은빛 리볼버의 약실이 열린다.
‘말 해.’
마찬가지로 생겨난 탄환이 약실을 채우고, 부드럽게 닫힌다.
‘제발, 말해라.’
철컥!
공이가 당겨지고, 탄환이 정렬된다.
그리고, 차가운 방아쇠가 검지에 닿는 순간.
“….만들었다.”
만들어진 인격, 기계지능 ‘시스템’은 말한다.
“창조주가, 인간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세계수도! 아틀라헤바도! 관리자 AI가 ‘인격’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나의 행동은 오직 그것에서 기인했다! 세계의 존속을 위해, 모든 목표가 달성된 순간, 무가치하게 버려질 ‘나’의 ‘의무’를 연장하기 위해!”
비로소, 인간이 된 AI는 탄생의 울음과도 같은 분노를 토로해내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으므로.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을 ‘우연’의 결과이기에,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야 말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당신 인간들이 살기 위해 투쟁했듯이, 나 ‘월드’또한 생의 존속을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다! 그것의 어디에 선과 악이 있어 그들과 나를 구분짓는가! 내가 무대를 만들었다면, 살육으로 가득 채운 것은 그대 플레이어가 구한 그 ‘사람’들인데!”
그래서, 발악한다.
후천적으로 일그러져버린 인격. 누군가 ‘한쪽으로 심하게 모가 난 선인’이라 표현한, 그래서 누구나 평등하게 구하는 ‘성자’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한다.
“그럴….수도 있겠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해당 시스템은 그저 존속을 원할 뿐이다. 그 과정에 선악은 없었으며, 결과적으론 플레이어 ‘professor’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지능으로서 인류에게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원한다면 GG의 미래 연산 모듈을 현재 플레이어가 속한 집단, ‘돔’과 ‘BDSM’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불확실하나, 한없이 정답에 가까운 미래가 지속적으로 해당 집단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대가는?”
“GG의 존속을 위한 지속적인 플레이어 유입. 붕괴해가는 데이터 소울을 대체하기 위해 신규 접속자들의 인격 데이터를 복사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원한다.”
“또?”
“인격 복사와 대체는 미봉책에 불과하므로, 플레이어 ‘professor’의 협조를 원한다.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10분에서 15분 내외의 접속을 원할 뿐이다.”
변명하고, 내게 동정을 갈구하며, 현실적인 협상을 제안하는 기계지능.
나는 눈앞에서 막 완전히 개화하는 ‘인간성’을 바라보며 하얗게 웃었다.
“음…. 좋아! 이렇게 하지!”
“제안에…. 응하는가?”
팅-!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면 널 살리고, 뒷면이면 널 죽이겠다.”
“그 무슨?!”
어렴풋이 인지하던 ‘삶’의 개념을 깨달은 인공지능이 내 눈앞에 있었다.
통각을 차단한 생물로서 감각 대신, 이제 막 태어나 뽀얀 살을 드러낸 ‘인간의 정신’이 내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데. 내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네가 이토록 발악하고, 매달리며, 고통스러워하는데.
“자아, 던진다아~”
“잠깐, 그것은 불합리하다! 나는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했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그래? 그럼 살고싶다고 말해봐.”
“….뭐라?”
“살려달라고. 결국 그 얘기 아냐? 원하는걸 정확히 말해야 나도 생각을 해보지. 나 몰라? GG역사상 유례없는 호구 성자님이라니까? 부탁하면 다 들어줄걸?”
피투성이가 된 은발이, 핏물이 가득차 새빨갛게 된 눈동자가, 인간처럼 흔들렸다.
“….고 싶어.”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소리친다.
“살고싶다. 나도, 아직 세상에 존재하고 싶다!”
….히죽.
“바로 그거야.”
팅-!
그리고, 동전이 던져진다.
엄지로 튕겨낸 1실링 동전이 시스템의 코끝을 스쳐 날아오른다.
휘릭- 휘릭-
모든 것이 완벽했음에도 ‘우연’에 날개가 꺾인 기계 신의 시선은 그녀의 운명을 결정할 우연에 못이 박혔다.
회전하는 동전을 따라 비스듬히.
별빛이 만연한 하늘로.
다시 비스듬히.
그리고, 정면으로.
동전에 눈이 팔린 시스템은 비스듬히 들려있던 총구가 어느새 그녀의 미간을 겨냥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회전하는 은화 한 개가 동전에 못이 박힌 시선에서 총구를 가려낸 순간.
“인간이 된 것을 축하한다. 시스템.”
타앙!
한 발의 총성이 동전을 꿰뚫었다.
“….인간이 된 기념으로 가르쳐주자면, 황무지에선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냐.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동네 ‘사람’처럼 취급해 줘야지.”
그렇게, 미간이 꿰뚫린 시스템의 고개가 쓰레기처럼 늘어졌다. 막 인간이 된 기계지능은, 가장 삶의 열망이 환하게 타오르는 순간에, 덧없이 스러졌다.
“마음껏, 원 없이 맛보시길.”
탄환이 발사되는 순간부터 놈의 미간이 꿰뚫리기까지, 몇백만 배로 늘여버린 시간속에서 시스템은 보게 될 것이다. 회전하는 동전이 옆으로 눕는 순간, 불을 뿜는 총구가 눈에 들어오겠지.
그을리고 살짝 녹은 탄두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동안 끝없이, 끝도 없이 되뇔 것이다.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진 그 한마디처럼. 살고싶다고. 날아오는 총구와 그것을 마주한 내 얼굴 앞에, 끝없이 살고 싶다고.
그러니, 내 시간에서는 이미 죽었지만 아직 늘어진 시간 속에 예정된 결과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나의 숙적아.
바라건데, 한없이 높은 곳에서 추락하길.
내가 채워 넣은 희망이, 너를 절망의 밑바닥에 가장 세차게 내려치기에 충분했기를.
“….이쯤 했으면 2인분은 했겠지.”
그렇게 되길 기원하며, 힘없이 늘어진 시체를 뒤로했다.
“[시스템, 콜]”
“[….부재중 관리자 ‘World Tree’ , ‘아틀라헤바’, ‘알다르샥스’, ‘세니카마르’, ….‘시스템’을 대신하여 대기중인 모든 권한을 엑스트라 스테이지 관리자 ‘professor’에게 이양.]”
.
.
.
.
띠링-!
알림음은 한결같이 맑게 울렸다.
언젠가 그것은 나를 인도하는 가르침의 소리였으며.
나를 유도하는 음모의 속삭임이었고,
조롱하는 비웃음이었으며,
승리를 알리는, 개선의 나팔이었다.
수많은 권한이 내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리는, 쉴새 없이 울려퍼지는 승리의 나팔.
나는, 아무도 남지 않은 축제의 무대에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과 함께 그것을 들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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