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94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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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꼴꼴꼴꼴- 탁!
“들지.”
“옙.”
오랜만에 만난 영 총장은 내 기억보다 꽤나 늙어버린 듯한 얼굴을 하며 술을 권했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 나한테야 한참 전이지만 여기선 고작 11시간쯤 전 이니까.
“….주치의가 경고하더군. 술을 줄이지 못하면, 하다못해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둘 중 하나를 줄이지 않으면 내게 강제로 진정제를 주사하든, 내 약에 수면제를 타든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난 술을 줄이느니 내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버릴 사람이지.”
꿀꺽 꿀꺽
탁!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알고 싶지 않은데요.”
“자넬 죽여버리고 싶단 말일세.”
영 총장은 다분히 진심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술잔 아래 깔려있던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어올렸다.
“히아신스양은.”
“재웠습니다.”
“재수 없으니 자랑스레 웃지 말게. 미치광이 친구들은.”
“BDSM 본부에. 걔들은 내막을 몰라서 크게 걱정 안하더라고요.”
“좋군. 그 치들이 얌전하다는 것은, 자네가 저 안에서 어떤 미친 짓거리를 했는지 차분하게 이야기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뜻이니까.”
팔락, 팔락
지급으로 날아온 보고서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영 총장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후우우우.
“도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으니…. 일단 티끌만큼이라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해야겠군.”
팍!
힘 없이 넘어가던 보고서 중 한 장이 테이블 위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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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선 관찰 대상 기록
암호명 : 인세인트(Insaint/광성자(狂聖者)
활동보고 :
* 0740시 전임자로부터 임무 인계. 요관찰 인물 3인과 함께한 ‘나들이’는 큰 소요 없이 종료. 대상 47구역 돔 복귀.
* 대상, 0801시 페일 레이디와 함께 감찰부 실험/관찰용 연구실에 진입.
* 대상과 페일 레이디의 대화(첨부 1호). 원행과 복귀에 대한 진지한 담소.
* 1호 관찰대상 인세인트, 0824시 GG 접속. 전번 복귀로부터 7일 12시간 27분 경과. 갑작스러운 진입에 주치의, 전뇌 인격 연구부, 생명공학부, 언론/방송통제부 총 7인 해당 연구실 입회.
*접속 5분 경과. 관찰 대상 ‘페일 레이디’ 불안 증세 호소. 바이탈 안정, 유의미한 변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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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거, 그냥 일반 보고서가 아닌데?
“우리한테 감시 붙였습니까?”
“당연히. 자네와 자네의 유쾌한 친구는 바로 며칠 전에 시장 바닥을 향해 전차 포를 갈긴 전적이 있다는걸 기억해줬으면 하는군. 내 도시에서, 민간 무력집단이, 무단으로 발포했으며, 시장 바닥에 깊이 13미터짜리 구멍을 냈다네.”
아. 그거.
밀수꾼, 마약거래상이 만든 지하 시장을 초토화 시켰다지. BDSM의 유쾌한 행사 덕분에 최근 내 위산 생산량이 40% 가까이 늘었다네. 보고서에 자네들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속이 쓰려 죽어버릴 지경이니- 쓸대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시간낭비 하지말고 마저 읽지.”
“넵. 죄송.”
“여기. 이 부분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더군.”
나의 불만을 단칼에 일축해버린 영 총장은 손끝으로 보고서 끝자락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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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접속 시간 9시간 40분.
# 플레이어 ‘professor’ 계정에 연동된 돔 방송 부서에 다운로드 된 플레이 타임 [2,190,489시간 40분].
# 한 순간에 쏟아진 대량의 플레이 로그로 인해 전산망이 과부하, 해당 부서 및 GG와 연동된 3개 부서의 모든 전자망이 다운됨.
# 원인 분석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니 GG 서버와 관련된 모든 기능이 동시에 정지하여 복구에 난항을 겪고 있음.
보고자 : 감찰부 요원 칼 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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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는 접속했고, 9시간 40분을 플레이 했으며, 219만 시간이 넘는 플레이 데이터가 돔의 방송 부서에 쏟아졌지.”
“어….”
“초기엔 외부 세력에 의한 디도스 공격이라 판단했지만, 분석 결과 더미 데이터가 아닌 모두 진짜 플레이 데이터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네. 그러니까 방송부서에 쏟아진 약 240년 정도의 기록은 모두 누군가의 진짜 플레이 데이터라는 뜻이야. 그것도 직전에 아주 비장한 얼굴로 연인과 작별인사를 나눈, 누군가의 계정에서 쏟아진 데이터란 말이지.”
“음….”
“말해주게.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도 좋으니,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려주길 바라네. 아직 우릴 동맹이라 생각한다면 말이야.”
술기운과 다크서클이 섞여 짙게 가라앉은 영 총장의 눈은 다소 위험한 빛을 띄고 내게 물어오고 있었다.
‘아직 우릴 동맹이라 생각한다면.’ 그 말은 고작 10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돔의 주요 부서 3개를 완전히 정지시키고 GG의 서비스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돔을 일순에 마비시킨 이 사태를 ‘돔의 안위를 위협하는 수준’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주도한 인물로 가장 유력한 내가 그 원인을 이해 가능한 선까지 규명하지 않을 경우— 나를 ‘돔에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둘이 마주하고 술 한잔 하면서 물어왔다는 것부터가 제발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한다는 총장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지만.’
아무튼 이래저래 저쪽은 진심으로 쫄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나도 굳이 빙빙 돌려 말해서 간수치와 스트레스 수치가 모두 극단에 달한 총장님을 골로 보낼 생각도 없고.
“그…. 이게 참 설명하기가 대단히 길고 복잡한 얘긴데….”
“30분 전에 비상 걸어서 각 부서 요원들이 죄다 들어와 있네. 몇 시간 떠들고 있어도 나 대신 일 할 사람은 많아.”
“예, 뭐. 그럼. 219만 시간이면 대충 222년에, 내 28년 합친 것 같으니까….”
짧은 침묵. 잔뜩 긴장한 총장의 눈빛이 나를 향하는 가운데, 나는 그를 향해 빈 잔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어이, 영이.”
“….음?”
“음? 같은 소리하네. 얼 타지 말고, 거 아재한테 술 한잔 따라봐라.”
영 총장은, 언제나처럼 상상을 뛰어넘는 박교수의 대답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내 나이가 이백 여든 여덟 쯤 되는데, 영감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적당히 아재로 하자고. 뭐해? 잔 마르것다 이놈아!”
턱을 한껏 젖힌 채 내려다보듯 호통치는 교수의 모습에 그는 아주 깊이 생각에 빠졌다.
말투 하나, 행동 하나에 온갖 의도를 다 숨기는 저 협잡의 귀재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저딴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익숙한 망나니가 갑작스레 거드름 피우는 망나니로 진화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한 끝에.
피싯!
그의 이마 어딘가에서 알콜이 가득한 혈관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덜컥!
두툼한 양주병을 손에 쥐었다.
쿠당탕! 챙강! ‘이보게 영이! 이 무슨 패악을- 우아악!’ 콰당! 챙그랑!
한계까지 쌓여있던 총장의 스트레스는 끝내 이성 잃은 폭력으로 변해버렸으며.
고성과 깨지는 소리가 난무하던 총장실의 소란은 그의 고혈압을 대비해 옆방에 상시 대기중이던 주치의의 마취 가스가 퍼질 때까지 이어졌다.
“….거 젊은 친구가 성급하긴.”
물론, 거의 3형 변종이나 다름없는 교수에게 일반 마취가스가 통하지 않았으며, 멀쩡한 그가 쓰러진 총장과 주치의를 옮겼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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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님.”
“….”
“영 총장님.”
“….”
“어이, 영이-”
콰악!
“아이고! 장난 한번 친 것 가지고 되게 그러시네! 갱년기에요? 생리도 하십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가 비참하게 죽길 간절히 기원하겠네.”
으드득!
환자복을 입고 링거까지 팔에 꼽은 영 총장은 이빨을 바득바득 갈며 이마를 짚었다.
“….자네가 28년. 자네의 부 인격인 ‘하이드’가…. 222년을 저 안에서 플레이했다. 그 모든 기억이 박교수의 머릿속에 들어 있으며, 우리 방송 부서를 마비시킨 엄청난 양의 플레이 동영상은-”
“모조리 저와 하이드의 플레이 내역이란 말이죠.”
“미치겠군.”
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앞의 엿같은 사내를 눈에 담았다.
2미터… 초반? 중반? 신장은 접속해있는 동안 아슬아슬하게 ‘인간’의 경계에 걸칠 만큼 줄어들었다. 몸 여기저기 갑옷처럼 돋아나 있던 경질화 부위도 안으로 스며들어 반점 같은 자국만 남아, 괴물같은 왼팔과 가슴에 큼지막하게 붙은 금속판만 아니면 대충 사람으로 쳐줄 수 있는 수준까지는 왔다.
물론, 수많은 추론을 담은 연구에 의하면 저 몸은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다. 수석 연구원 첼시는 ‘언제는 박교수가 원하는 한 30번대 구역에서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되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과 변종 사이에 걸쳐 있는 몸. 한번 변하면 다시는 인간의 모습과 정신으로 되돌아 올 수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돌아올 생각이 없으면 무려 구시대 최강의 전략 병기 중 하나였던 ‘오르페우스’를 단신으로 억제한 수십 미터 규모의 괴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살테러를 감행한다면 47구역 돔 전체와 산화할 가능성도 있는 인간 전술핵 같은 존재.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허나, 영 총장의 두통은 그따위 ‘사소한’ 문제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문제는 한참 전에 그를 다시 받아들일 때, 박교수라는 인물의 성향과 행동 원칙을 모조리 분석한 끝에 ‘제법 안전한 수준’이란 판단을 내렸었으니까.
‘277년. 무려 277년의 삶을 머릿속에 담은 인간이라니.’
총장의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은, 저 괴물이 장난처럼 말한 이 사태의 원인에서 기인한 것이다.
4월드의 219만 시간. 워로드가 28년, 부인격 하이드가 222년.
3월드에서의 2년
거기에 황무지 박교수가 올해로 스물 다섯이니 25년.
도합 277년의 삶이 저 머리 안에 담겨 있다.
‘277년의 기억. 심지어 [죽음]에 대한 기억마저 다수 포함한 3세기에 달하는 기억을 지닌 이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미지에 대한 경계였으며, 실현된 불가능에 대한 경악이었고, 미지에 대한 경외였다.
영은 총명한 사내였고, 술에 쩔은 영은 그보다 몇 배는 총명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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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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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교수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총장은 이미 그 말에서 눈앞의 인물이 이백 몇십만이 넘는 플레이 로그를 모두 거쳐왔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차분하고, 냉철하고, 독하기까지 한 그가 박교수의 장난을 ‘깽판’이라는 장난스러운 대응으로 받아친 것은, 그런 농담같은 행동이 아니고는 도저히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육신은, 현존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생체 병기에 가까운 자.
정신은, 3세기에 가까운 기억을 담고, 삶과 죽음을 모두 겪었으며, 그 모든 풍랑 속에서 ‘박교수’라는 이름 석자를 확고히 지킨 자.
“세상에, 병실에도 술을 숨겨놨어? 서랍에, 메트리스 밑에…. 당신 무슨 주정으로 움직이는 골렘이야?”
그런 존재임에도, 여전히 한결같이 장난스럽고 능글맞은 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280년의 세월도 인간 박교수를 바꾸지 못했다.
….꿀꺽.
영은 그가 두려웠다. 과거의 교수가 그와 첨예한 수 싸움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영민하고 작전 수행능력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완벽한 동맹이었다면, 지금은…. 저것과 대립하는 미래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자, 그럼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합시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야기에 영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47구역 돔의 최고 지도자 알렉산더 영 총장님.”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무지 개인 생존자이며, GG 게임방송 랭킹 ‘1’위에 빛나는 프로 방송인 ‘professor’ 이며, 민간 중규모 캐러밴 BDSM의 리더이며, 게드로이츠의 게임 3월드 클리어에 빛나는 ‘완성자’이며.”
….따악!
우우우웅-!
“게드로이츠의 게임, 그에 속한 모든 권한을 전부 수여받은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현존하는 유일한 관리자. 그가 ‘완성자 보상’이란 이름으로 남겨둔 일곱 권한 중 나머지 넷을 모두 손에 넣은, 사실상 게드로이츠 컴퍼니의 차세대 사장되는 사람입니다.”
영은 보고 말았다. 박교수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실험동의 꺼져있던 화면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하나같이 오프라인으로 되어있던 GG 게시판, GG 운송드론, 경매장이 다시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이 간 여러 부서에 다시 활기와 소란이 돌아오는 것을.
달칵, 달칵달칵-
“….대단하군.”
동요를 감추려 애썼지만, 떨리는 손에 쥔 글라스 안의 얼음이 달칵거리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일곱 중 넷. 협력 관계인 레빗은 게시판 관리자 권한, 세이브 로드 권한. 부외자 천류제가 가진 것은 신체 강화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손에 넣었나?”
더는 떨림을 감추지도 못한 목소리에, 그를 마주한 존재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주아주아주아아아아—주 멀리도 처박아 놓으셨더라구요.”
챙!
글라스를 쥐고 있는 것이 고작인 그를 대신해, 잔을 부딪혀온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저어-기. 우리가 항상 바라보고, 또 기도하는 저어-기다 처박아 놓으셨답니다. 서버룸은.”
검은 갑각에 뒤덮인 날카로운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은, 위쪽이었다.
그들을 가린 콘크리트 천장 너머, 푸르스름한 실드와 자욱한 황무지의 먼지를 넘어.
누구나 바라볼 수 있지만,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
“어쩐지, 별이며 밤하늘이며 되게 좋아하는 양반이더라니.”
덜컥!
영은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비록 지금은 낮의 태양에 가려있고, 밤에는 두터운 먼지에 가려있을 지언정. 분명히 저 위에는 존재한다.
여전히 밤을 밝히는 몇몇 별들과, 무수한 인공위성이 수놓은 반짝이는 은하가.
“인공위성. 분명, 게드로이츠 컴퍼니는 독자적으로 무수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정도의 기술과 시설을 가지고 있었지.”
“60년대부터 일반 인공위성은 돈 많은 재벌도 쏘아올릴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으니까요. 이미 50년대부터 전 세계의 천문학자들이 총파업을 할 정도로 지구 궤도상에는 무수한 인공위성과 우주 쓰레기가 빽빽할 정도로 들어섰고.”
“아, 아무리 대전쟁으로 그 많던 위성이 모조리 파손되었다 한들…. 태양열 전지와 금속 몸체, 다 소모되지 못한 압축 배터리는 그 자체로도 강력한 전파 차단장치가 되겠지.”
어찌 이리 어리석을까. 게드로이츠가 제 입으로 ‘지구 어딘가에,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라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마리아나 해구, 남극과 같은 극지를 떠올리다니. 그 이름이 ‘서버룸’이라고 해서 정말로 LED 불빛을 쉴새없이 깜빡이는 기계가 가득한 정육면체의 콘크리트 시설 따위를 상상하고 있었다니.
“정말로, 우리 머리 위에 두었다니….”
감탄하고, 허탈하고, 좌절했다.
인류의 희망. 테라포밍, 기후 조절, 생태 복구를 위한 종자 저장소 따위의 미래를 위한 안배가 모두 남겨져 있다는 서버룸은 저 대기권 너머 무수한 우주 쓰레기와 인공위성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우주 비행선은 커녕 온갖 전자기 폭풍, 방사능 대기 속에 장거리 비행조차 시도할 수 없는 현대의 기술로는 그 좌표를 알아냈다 한들 닿지 못할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30번대 구역의 방사능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으며, 여름의 기온은 아무리 더운 날도 27도를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기온이 급감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느 세월에 우주 기술을 복원해, 언제 그곳에 도달한단 말인가.
….히죽, 히죽 히죽!
….그리고 저 새끼는 왜 저렇게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고 있나.
“아, 그게. 우리 영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여서.”
빠직!
좌절에 침잠되어가던 그의 혈압이 다시 솟구쳤지만, 울컥 솟아오르는 욕설보다 저 여유로운 얼굴의 이유가 몇 배는 더 궁금한 덕에 영 총장은 물을 수 있었다.
“방도가 있나?”
“흐흐흐흐.”
따악!
교수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윙윙윙윙윙윙-
[GG delievery]라는 마크가 선명한 운송드론이 가져다준, 방금 인쇄된 듯 따끈한 종이 한 장.=========
[넥스트-스페이스!]– 50인 규모, 지구 궤도상의 집단 거주지!
– 식물과 곤충, 기타 유기물을 이용한 자체적 생태계 순환!
– 보수 없이 약 430년간 유지 가능!
– 지구 관측장비와 귀환선 포함!
– 과거의 일탈은 잊어라! 이제는, 탈지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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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완성자 보상 5번. 유인 우주선 기지 ‘NEXT-SPACE’ 좌표 및 보안키. 가장 지독한 악당조차 쫓아올 수 없는 완벽한 쉘터. 완벽한 평화를 보장하는 우주 궤도상의 집단 거주지. 정확히는, 실험적인 궤도상 생존지로 향하는 ‘무인 우주선 기지’의 좌표 및 보안키라는 겁니다.”
영 총장은 손에 쥐어진 뻣뻣한 종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90년대 광고처럼 쓰여진 굵은 글자들, 우주복을 입은 캐릭터, 그리고…. 하늘로 우주선을 쏘아내는 우주 기지의 그림.
선명하게 존재하는, 우주로 향하는 길.
영은 숨을 몰아쉬고, 자꾸만 주먹이 쥐어지는 그의 손아귀 속에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그려낸 [NEXT-SPACE]의 광고지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놓은 다음, 반쯤 비운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잔…. 받으시오.”
“….엥? 뭐, 뭐요?”
“내게 달라고 하지 않으셨소. 따라 줄테니 받으시오.”
“아, 아니 그걸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버리면 내가 좀…. 어구구.”
쪼로록-
반존대. 그것이 영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최대였다.
‘박교수는 건드릴 수 없다.’
GG 서버가 운영하는 경매장의 물건만 배달하는 GG 운송드론이 그의 손짓 한번에 원하는 물건을 배달했다. 박교수는 운송드론을 이용한 모든 쉘터의 주소와 생존자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으며, 원하는 때에 무엇이든 그들에게 보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게 폭탄이든, 납탄이든. 필요하면 드론을 풀어 말도 안되는 범위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도 있겠지.
GG는 현재 일거에 정지된 상태였다. 모든 권한을 받은 유일한 관리자라 했으니 원한다면 원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대부분의 기쁨이 사라진 세계에서 실물과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가상의 세계는 마약 이상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 또한 박교수의 손에 있다.
인류의 희망. 서버룸의 좌표와 보안코드 또한 그에게 있으며,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또한 그의 손에 있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존재가 있다니.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저 밖에 바보들이 그렇게 외쳐대더라니.”
“예?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오. 한잔 더 합시다.”
영은 돔이라는 거대 집단의 수장으로서 새로이 탄생한 황무지의 절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가 원하건, 원치 않건, 박교수는 이미 개인이 가지기엔 너무나도 큰 힘과 권력을 쥐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세상에 반향을 일으킬 것이고, 그의 행동이 곧 시대의 흐름을 대변할 것이다.
세상은 보통 이런 존재를 ‘신’이라 불렀다.
저 밖의 ‘광명 교단 황무지 지부’라는 이상한 무리들이 제창하는 것처럼.
‘박교수, 그는 신이다.’
“콜록, 콜록, 카악! 케엑! 우웨엑! 우웁! 사례, 사례들렸…. 등, 등좀 두들겨ㅈ-켁!”
“….”
탁탁탁탁.
“어우씨, 뭔 술이…. 80도? 총장님 요즘 돔이 좀 궁합니까? 공업용 세척제도 술이라고 막 퍼먹고 그러게?”
….다소 미덥지 못한.
하지만 그 자식들을 방관하기만 하는 저 위의 누군가와 달리, 우리와 함께 독한 세상을 거니는 신.
그런게 존재한다면, 보다 믿고 싶은 쪽의…. 신.
“….라투라.”
“예?”
“아무것도 아닐세. 아, 아니오. 아무것도.”
영은 그렇게 얼버무리며 잔을 채웠다. 의문 가득한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에, 어느새 그의 히죽거림이 옮아버린 것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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