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99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7)
****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얘긴데….”
도대체 갑자기 왜 자기 어렸을 때 이야기로 넘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귀 기울여 듣기로 했다. 당장 래빗이 꽤나 의심스러운 나로서는 그녀가 먼저 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썩 나쁜 일만은-
“음, 의심스러운 상대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해주니 좋아하고 있네.”
“뭐?”
“그냥 찔러본 것인지, 아니면 확신을 가지고 물어본 것인지 판단하고 있고, 확신을 가질만한 빈틈을 보였는지 생각한 다음, 당장 의연하게 대처할지 발뺌할지 고민하고 있어.”
“사람을 잘 읽는데?”
“아! 의연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했다. 잘했어. 발뺌했으면 어디서 어디까지 거짓말인지 조목조목 늘어놓으면서 거짓말쟁이라고 놀릴 생각이었거든.”
“그-”
“칭찬 고마워. 나름, 나도 월드 클리어 기록이 있는 사람이라. ‘무시무시한 관찰력을 통해 긁어모은 정보로 사실에 가까운 추론을 만들어내는’ 누구 씨의 재주에는 못 미치지만, 사람을 보는 것 정도라면 나도 자신이 있거든.”
변했다. 부드럽고 화사했던 분위기가 그녀의 표정과 함께 거짓말처럼 흩어지며, 콘크리트 건물 속 정적에 어울리는 인형같은 얼굴의 래빗이 나타났다.
“그게 네 본 모습이냐?”
“본 모습…. 이라기보단, 그냥 어깨에 힘을 좀 뺀 거야. 여자의 맨 얼굴을 그렇게 대놓고 지적하다니. 매너가 없네?”
위화감. 내가 지금까지 계속 그녀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던 것도, 희미하게 느껴지던 위화감 때문이었다. 평범한 위화감이 아닌, 적어도 저 모략과 술수가 가득한 GG의 세계에서 수십년을 구르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은밀한 위화감 말이다.
‘문제는, 지난번 래빗에게 왜 벡스를 선택했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진심이었단 말이지.’
[벡스가 내게 꽉 잡혔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어]그렇게 말하던 래빗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심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했단 말이다. 저렇게 만인의 사랑을 받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 여자가, 하필 벡스에게 홀딱 빠지다니? 심지어 그 이유라고 말한 게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홀딱 빠졌어!’ 같은 10대 소녀나 할법한 이야기라니!
감히 의심병 말기라 칭할 수 있는 내게 있어 이런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판단하건데, 래빗은 벡스에게 진심이다. 그것도 꽤나.
판단하건데, 래빗은 엄-청나게 정교한 가면을 쓰고 사는 여자로, 지금 눈앞에 드러난 저 인형같은 예쁘고 딱딱한 얼굴이 본모습이 아닐까 싶다.
판단하건데, 그런 여자가 갑자기 ‘반해버렸어!’라며 누군가에게 결혼하자고 달려드는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내게 이렇게 모든 걸 털어놓는 건 더더욱 납득하기 힘들고.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한데.”
“그냥. 나는 내 아픈 과거까지 밝혀가며 나름 진심을 다해서 대하는데, 그쪽은 아닌~척 도끼 눈 뜨고 날 살펴보는게 조금 아니꼽단 말이지. 그래서…. 조금 솔직해지자는 취지에서 먼저 다가가 준 거야. 솔직한 거 좋아하잖아? 박교수.”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말투로군.”
“어느정도? 박교수. 황무지 사람답게 적당히 썩었고, 적당히 유쾌하고. 그런 주제에 굉장히 오지랖이 넓은 인물.”
“얼씨구.”
“언뜻 보면 이타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대책없이 이타적인 사람 특유의 ‘선한 행동’에 대한 관념이 보이지 않음. 일종의 책임감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보이며, 이는 친인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자학적인 성향. 쉘터 뒤쪽에 있는 작은 돌무덤, 전문적인 군사 지식과 실전에서 보여주는 군인 특유의 움직임을 토대로 보건데 어머니, 군인 시절 동료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있음.”
“….어이.”
“해리성 인격장애의 징후, 애정결핍에 의한….음~ 더 해줄까? 하면 더 할 수도 있는데, 박교수와의 사회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선 여기까지 하는게 맞다고 보는데.”
“이미 선을 좀 넘었어.”
“이 정도 안하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거라 생각해서. 아, 다나한테는 비밀이야? 이쪽이 외간 남자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나가 질투할 수도 있으니까.”
‘다나랑은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이라며 손가락을 입술위에 가져다 대는 모습은 영락없이 평소의 래빗이었다.
“평소에도 만나는 사람을 다….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거냐?”
“음, 그렇지? 당신이 습관적으로 자기 주변의 정보부터 확인하는 것처럼?”
“벡스도?”
“어머! 실례의 말씀을.”
“….하긴. 적어도 그 녀석에겐 진심인 것처럼 보였으니ㄲ-”
“그이를 고작 평범한 사람 관찰하는 수준으로 했을 리가 없잖아. 당신 같은 사람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하게, 그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몸에 남은 흉터 하나하나에 새겨진 모든 사연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얘기하고, 관찰하고, 들여다봤지. 앞으로도 더 알아갈 생각이고.”
“….이런 세상에.”
도대체 이걸 뭐라고 해야되냐. 벡스 녀석이 불쌍하다고 해야하나, 복받았다고 해야하나.
“이거, 완전히 망가진 여자였잖아?”
“그럼. 몰랐어? 조금 실망인데?”
래빗 프린세스. 언제나 밝고 행복한 모습으로 황무지 생존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녀는…. 어딘가 대단히 망가진 사람이었다.
애석하게도, 내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망가짐’이었다.
“….안드레이 게드로이츠. 너도 그 인간의 세계를 두 개나 클리어한 사람이었지.”
“그 괴짜 늙은이의 세계를 클리어 할 수 있었다는 건~ 그 인간의 사상에 부합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뜻이고.”
찰팍-
래빗은 손가락 끝을 찻잔에 담가 휘휘 저으며 그 소용돌이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는 그의 게임이 완성자를 ‘발견’ 혹은 ‘교육’하는 장치라고 말했으며, 여기서 그 ‘교육’의 방법으로 해결 불가에 가까운 끊임없는 갈등, 끊임없는 시련을 선택했어. 한계에 이른 압력속에 탄소뭉치가 다이아몬드로 거듭나듯,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낸 인간이야 말로 그가 원하는 ‘완벽한 지도자’로 탄생할 거라 생각했던거야.”
“결과는, 이리저리 왕창 깨진 인격만 잔뜩 만들어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간의 허들은 보통 사람에겐 너무 높았거든?”
“[완성자 제조기]로 만들어진 GG는 그의 기대와 달리 [정신병자 제조기]로서 악명을 높여나갔으니까.”
“응, 맞아. 그의 지론에 따지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깨진 쓰레기’만 잔뜩 만들어낸 샘 이지.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압력을 이겨낸 결정화 인격들이- 너.”
휙.
“나.”
휙.
“그리고 애초에 게임 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두드릴 대로 두들겨진 저 녀석.”
휙.
“이렇게, 셋뿐이라는 거야. 중도에 포기한 녀석들은 애초에 가망이 없는 평범이 들이고,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는 녀석들은 되려 게드로이츠의 교육 프로그램에 호되게 짓눌려 죄다 깨어져 나가- [GG가 만든 정신병자] 대열에 합류했고. 애초에 밖에서 이미 잔뜩 두들겨 맞아 어느 정도 모나고 날카롭고, 단단한 자기만의 형태로 굳어진 ‘반 정신병자’ 정도는 되어야 게드로이츠가 준비한 모진 압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게- 고작 셋밖에 없는 완성자 후보에 대한 내 관찰 결과야.”
나와 자신, 그리고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차례대로 가리킨 래빗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나의 월드를 클리어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상대가 어딘가 단단히 망가진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어야 한다는 거야. 박교수의 ‘강박적 책임감’, 천류제의 ‘닿을 수 없는 내면의 초인에 대한 도달 의지’, 혹은, 나의, 음….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관찰 성향 같은 거. 그런 방향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굳어진 게 우리 같은 ‘완성자 후보’ 라는거지.”
“음….”
솔직히, 약간 소름 돋았다. 주변을 살필 때 오직 ‘사람’만 보는 인간이라니. 래빗은 좀 멀쩡한 녀석인줄 알았는데, 이건 천류제보다 더 미친 사람이 완벽하게 멀쩡한 ‘척’ 의태해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고 있는 꼴이잖아?
“어머, 그런 겁먹은 얼굴로 노려보지마. 상처받잖아.”
“미안.”
“너무 미안해 할 것은 없고. 너도 모를 뿐이지, 나나 천류제 만큼이나 너도 괴상한 인간이니까. 이타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라니, 내면에 스스로를 한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른 사람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라니! 그건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 본능적인 혐오를 느낄 정도란 말이야. 지금이 난세라서 네가 영웅 취급 받는거지, 전쟁 전 같은 평화로운 시기였으면 너 [자기파괴성향 심각함] 딱지 붙여서 정신병원 들어갔을걸? 자해공갈 전과 50개쯤 달고?”
“망할 년.”
결국 내가 험한 말을 입에 담자, 래빗은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기랄. 정말로 사람 대하는 방면에서는 못당하겠군.’
방금의 ‘망할 년’은…. 아까부터 잔뜩 굳은 상태로 대하던 그녀를 다시 편하게 대하겠다는, 일종의 무장해제 선언 같은 것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솔직한 사람 좋아하고,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는 더 좋아하고, 그 상대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밑바닥을 드러내며 공감을 유도해오면…. 거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놈이다.
결국, 래빗은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박교수를 공략해냈다는 말이지.
“아하아, 참. 당신도 귀여운 면이 있네.”
“꺼져, 래빗. 난 너 같이 살벌한 여자 싫어.”
“그럴 리가? 내가 아는 다나는 나만큼이나 살벌하고 독특한-”
“우아아악! 안들려! 안들어!”
래빗이 더 말하기 전에 귀를 틀어막았다. 저런 인성파탄 세기말 인간 전문가가 분석한 다나의 내밀한 정보 따위, 알고 싶지 않아! 들으면 독이 된다! 분명히!
“그래서, 도대체 이런 상처뿐인 얘기를 왜 꺼낸거냐? 완성자 후보 셋은 전부 일반 사회 부적응 확정인 반미치광이니까 셋이 사이좋게 지내자고?”
“아니, 처음부터 말했잖아. 내 얘기는 벡스에 관련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얘기의 어디가?”
“내 망가진 부분에 대한 것. 이제 끼어들지 마. 할 얘기 다 하고 질문받아줄 테니까.”
래빗은 삐진 듯 귀엽게 볼을 부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본모습을 마주하고 있던 나로서는, 저 급격한 표정변화가 무서울 따름이었다.
****
윙윙윙윙-
“래빗,님. 요청하신 애플- 티가 없어 현장에 있는 마른 감자 잎 차로 변경했습니다.”
“어머나, 고마워라! 친절한 아이네? 이름이…. 티캣이었지?”
“전술적 개인 지원/보조형 터렛 T.C.A.T-3000입니다.”
“응, 그래. 반가워.”
래빗은 말하느라 지친 목을 조금 축이며, 내게만 말하듯 고개를 숙여왔다.
“사실, 아까 저 드론 하나 집에 들이고 싶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어. 나 내 집안에는 기계 같은거 안들이거든.”
“사람과 달리 속내를 읽을 수가 없어서?”
“정답! 눈치 빠른 녀석이랑은 이야기하기 편하네~”
래빗은 즐겁다는 듯(못 믿겠다) 수상쩍은 차를 홀짝이더니, 잘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이름. 뭔지 알아?”
“적어도 래빗 프린세스는 아니겠지.”
사람 이름이 어떻게 토끼 공주가 될 수 있을까. 부모가 미치지 않고서야.
“맞아. 내 본명. 이름이 래빗, 성이 프린세스야. 예쁜 이름이지?”
“죄송합니다. 제 속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고 제 이름을 걸고 단언할 수-”
“아냐, 우리 부모님이 미친 사람이라고 느낀거면, 그게 맞아.”
맞단다. 졸지에 본명과 부모님을 싸잡아 병신취급한 나쁜놈이 되었다.
“정확히는, 여덟 살 무렵. 다들 아는 [어리고 예쁘장한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직접 해체한 토끼를 들고있는 사진]이 유명해질 무렵에 우리 부모님이 개명했어.”
래빗은 그녀의 귀해 보이는 얼굴처럼 귀한 집 자식이었단다.
상류층 사람이라는 허영심이 가득한 부모에, 그 허영심을 채워줄 만큼 충분한 재산이 있는. 그래서 칭얼거리는 어린 딸에게 그 비싼 GG 접속기를 사줄 수 있는 그런 집안이었다.
물론 배달된 접속기에는 작은 책 한권 분량의 ‘사용시 유의사항’에 관련된 책이 동봉 됐지만, 래빗의 부모는 그런 사소한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딸은 아직 어렸고, 당장은 화목해 보이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 빼고는 큰 쓸모가 없는 짐덩이일 뿐이었으니까.
“아, 그런 종류의 사람. 있지. 분명 여기저기 있다고-”
“들은 것 말고, 직접 본 경우는?”
“….없지.”
“그렇지? 그러니까 나도 꽤나 희소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을거야.”
아무튼, 그렇게 무관심에 방치된 소녀가 바로 래빗이었다. 래빗은 그 나이대 소녀답게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가십거리와 파티,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 위한 전문적 트레이닝과 프랑스 매장에 새로나온 쥬얼리를 누구보다 빨리 구매하는 것 등으로 매우 바빴던 그녀의 부모님은 ‘가족사진 엑세서리’에 불과한 딸의 칭얼거림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고.
그렇게 감정 없는 가정부 드론의 보살핌 속에 자라난 래빗이 유일하게 부모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 억대 가격을 자랑하던 GG 접속기 초기 버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부모는 ‘들어간 사람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쥐 죽은 듯 누워있는 가상현실 게임장치’ 라는 이유로 래빗에게 선물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 길이 없는 래빗에겐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본 부모의 관심이자 그 증거물이었다.
“정말 기뻤어. 특히나 그게 비싸다는걸 알고는 더 기뻤지.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님이 비싼 물건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거든. 접속기는 비싼 물건이니까, 부모님은 그분들에게도 소중한 물건을 날 위해 넘겨준거야! 라고 생각했지.”
“….씁.”
“이 뒷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소녀는 부모의 선물에 흠뻑 빠졌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사냥물을 사고파는 게임의 방식에 익숙해진 소녀는- 너무나 멋진 선물을 해주신 부모님께 자신이 그 선물을 통해 배운 것을 보여드리고자 한 거야.”
“아이고야….”
“응, 맞아. 난리가 났지.”
소녀는 집 근처 풍성한 숲에 어설픈 함정을 놓았고, 생각보다 어설프지 않았던 함정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갈색의 가을 토끼를 잡아올렸고.
소녀는, 부엌에서 가져온 식칼로 거칠게 그것을 해체하였다.
머지않아 세계 조간일보와 인터넷 뉴스 1면을 차지하게 된 그 유명한 사진은 핏자국이 흥건한 그녀의 자랑스런 미소를 가득 담고, 어중간한 셀럽의 뒤를 캐던 파파라치에 의해 역사에 남았다.
한손에 식칼, 다른 손에 아직 토끼였던 흔적이 남은 부산물을 들고 피투성이가 되어 환하게 웃는 소녀는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셀럽’이란 가치에 매달리는 부모에게 전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무수한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녀의 비정상적인 발달 과정은 모두 ‘무시무시한 접속기와 그 게임’에 의한 것으로 발표되었으며, 단순한 이슈는 ‘가상현실의 끔찍한 부작용’이라는 초대형 이슈가 되어 세계를 강타했다.
소녀는 쏟아지는 관심 속에 겁에 질렸다. 초기 접속기의 메시지 기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거기엔 비속어/성희롱 차단 기능이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게드로이츠 컴퍼니를 역대 최고의 금액으로 고소하겠다 발표했다.
소녀는 더욱 겁에 질렸다. 원색적인 욕설은 이제 그녀를 돈 물어오는 괴물 정도로 취급했고, 그녀는 그것에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소송이 진행되고,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분들의 이름이 법정을 오가는 동안 그것의 시발점이 된 소녀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차침 시들해져 갔으며.
그 무렵 소녀의 부모는 소녀의 이름을 ‘래빗 프린세스’로 개명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도록. 법정에 원고인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그 시발점이 된 사진과 그 부모를 전세계의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세상이 모두 시끄럽고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소녀, 래빗 프린세스는 같은 이름의 계정을 향해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독기 어린 말들을 모두 홀로 감내해야했다.
“음~ 여기까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판이었는지 알아듣겠지?”
“….아니. 전혀.”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게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두분 모두에게서 삶을 이어받은 내게 있어 저런 이야기는 머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부모라는 존재가, 자기 애를 저렇게까지 물건 취급한다고? 물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정말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사춘기 소년 소녀의 허구 섞인 푸념이 아니라, 실제로 저런 ‘부모’가 존재한다고?
“나로선 그게 대체 뭐하는 빌어먹을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이해 못 해도 어쩔 수 없지. 사실인걸?”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앞에 것에 비하면 평범했다.
“이래저래 뒤틀려버린 소녀는 부모님이 원하는 ‘완벽한 얼굴과 몸매, 목소리마저 아름다운 악세서리’로 자라났고, 그러다가- 쾅! 전쟁이 터진거지.”
“어떻게 살아남았냐?”
“유행에 민감한 부자 부모 덕분에. 전쟁전에 한참 개인용 쉘터가 유행했잖아. 성형 부작용으로 얼굴이 울퉁불툴 해선 ‘셀럽’을 자청하던 부모가 그런 유행을 놓칠 리가 없지.”
래빗은 말했다. 그녀는 유년기의 경험으로 확실히 고장나버렸다고. 두분 부모님의 반복적인 훈육은 뇌가 맛이 간 소녀에게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그녀는 지금도 완벽해지는 것,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 사랑받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한다고 했다.
그리고, 끔찍한 메시지에 몇 년이나 시달린 대가로. 누군가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보고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것에 그녀 또한 반사적인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바스라져 가던 어린 정신의 생존본능이 만들어낸 비틀림.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움만 있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아름다운 포부를 가진 래빗의 추악한 뿌리였다.
“….래빗.”
“내 얘기 아직 안끝났어!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이 모든 구역질 나는 이야기에서, 벡스의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는 어디일까?”
래빗의 눈은 더 이상 인형의 유리눈알처럼 공허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날의 그녀를 부수었던 끈적한 악의처럼 지독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저번에 네가 말한 ‘순수’라는 것인가.”
“바로 그거야! 벡스, 이 사람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순수해.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살아남았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덜컹!
챙그랑!
테이블에서 떨어진 찻잔이 깨어졌다. 숨을 헐떡이는 래빗은 내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지르듯 말했다!
“박교수! 생각해봐! 그는 아주 희귀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한다 해도 믿을 정도로 희귀하단 말이야! 이 불타고, 녹슬고, 말라붙은 세상에서 저만큼 선하고 순수한 남자가 또 있을까?”
“없….겠지.”
“없어! 단언하건데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 있어도, 지금쯤 모두 타락했을거야! 왜냐하면 황무지 생존자는 죄다 ‘접속기’에 의지해 살고 있거든! 빌어먹을 오물로 가득한 ‘온라인’의 세계를 접했단 말이야! 벡스와 달리! 온갖 온라인의 악의로 어린시절부터 뇌를 가득 채워온 나 같은 것과 달리!”
그러고보니 그랬다. 전쟁고아 출신인 벡스는 전자 주민등록번호도 없었고, 그래서 자기 이름의 접속기 아이디조차 없었다.
“나를 봐! 이 죽은 생선 같은 눈을! 내가 만들어낸 가짜 미소에 그 사람이 수줍게 웃을 때마다, 난 수치심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어쩌면 이 세상에 유일할지도 모르는 순수를 오물 덩어리 같은 내가 더럽히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
래빗은 피가 날 정도로 내 팔을 꽉 쥐고 있었다. 단단한 내 팔이 아닌, 거기에 매달려 부러진 그녀의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왜냐하면…. 저 사람은 아이들을 사랑해. 벡스는, 그런 방향으로 고장난 사람이야….”
아아. 이럴수가.
“어떤 상황에도 아이들만큼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수많은 글과 영상으로 배워도 ‘부모의 사랑받는 아이’를 상상할 수 없는 나와 달리,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을 우리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야….”
툭, 투둑.
“그가 있으면, 나는 완벽해질, 수…. 있단…. 말이야…. 내가, 사, 사랑해주지 못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내 아이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 완벽한 한 쌍이 아닌가.
어린 날의 경험으로, 그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을 우선시 하게된 스케빈저, 벡스.
모든 것이 완벽한 여자이지만, 어린 날의 경험으로 ‘사랑받는 아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게 된 래빗.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병적일 정도로 집요하게 알아본 결과,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윽윽거리며 억지로 말을 퍼올리던 래빗은, 결국 허물어져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후우우.
“….그래. 이건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네.”
“윽, 으윽-”
“그런데, 그걸 위해서 나한테 이걸 다 털어놓은거야? 벡스 옆에 있는 이유를 의심하지 말라고?”
“우린, 집을…. 구하고 있어. 같이 살, 준비를….”
“나도 들었다.”
“그 사람의 가족이 되야….해. 이안 데스몬트, 박교수, 두 사람은 벡스 그 사람이 직접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한 사람이니까….”
“인정을…. 받고 싶었다는 소린가?”
도리도리-
“둘 다 눈썰미가 좋아서…. 나중에 이런 흠있는 여자라는게 들통나면 두 사람이, 특히 음흉하고 속임수에 강한 박교수 당신이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윽! 흑!”
아니 이 인간이 사람을 뭘로 보고.
“거 고평가 해주셔서 영광입니다요, 아가씨.”
어쨌든, 이 정도면 래빗의 진심을 차고 넘치게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깜짝 청혼에 혼이 달아난 벡스가 슬슬 돌아올텐데 그때 래빗이 이렇게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주저앉아 울고 있으면 벡스녀석이 내 눈알 하나쯤은 도려낼 것 같으니 슬슬 정리할 생각으로 입을 여는데-
“그래서, 나는 당장 전쟁을, 흑!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
“….왓?”
갑자기 이야기가 지구를 한바퀴쯤 돌아 본론으로 돌아왔다.
“렙터는 언제고 분쟁이 확정된 적이야(흑!). 물론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킨다면 한참 상승세를 탄 돔의 발전이 멈추고, 다시 지금의 성장세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훌쩍!), 황무지에서 언제나 생존이 우선인 것처럼, 돔의 운영 또한 집단의 생존이 최우선인 것은 변하지 않아(흑!).”
“어, 음…. 그래….”
“등 뒤에 칼을 든 적이 다가오면 뒤돌아 맞서지(훌쩍!), 갑옷을 더 껴입지는 않잖아. 적은 전쟁 준비를, 아군은 경재, 문화, 과학등 온갖 잡다한 것의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면, 시간을 들여 마주했을 때 어느쪽이 패배해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지는(크흐응!), 명확해.”
“어어, 그래. 알았으니까 우선 일어나 앉아서 얘기할까? 눈물도 좀 닦고, 코도 좀 닦고, 손톱은….”
“무엇보다,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는 전쟁을 겪어선 안돼. 걔는, 반드시 사랑받는 아이로, 평화롭게 키우고 말거야….! 게시판 권한으로, 우리 가족한테 나쁜 글, 나쁜 말 하는 놈은 전부 찾아서, 누가 보기전에 다 죽, 죽여버릴!”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김칫국을 마시든 축구팀을 만들든 악플러 대가리 토템을 만들든 다 좋으니까! 우선 정리를 좀-”
벌컥!
“래빗! 낟,나, 새, 생각! 그, 그….! 진지한 새, 생각을 해, 해봤는데….!?”
“아이고 맙소사.”
이 소리는, 갑작스런 청혼에 혼이 빠져버린 벡스가 복귀하는 소리이며.
갑작스러웠던 연인의 청혼의 답을 생각해온 키 작은 남자의 가슴 떨리는 귀환이었고,
마침 인파를 뚫고 돌아오다 그와 마주친 덩치 큰 애처가 폭파광의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일장 연설에 크게 개안한 벡스가 이 난장판을 눈에 담는 순간이었다.
“흑, 흐윽!”
“래, 어,어으으으어어, 래, 래빗?”
그의 대답을 들어야 할 사람이, 젖은 눈으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항상 그가 하는 말이면 뭐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들어주던, 세상에 이런 구김살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밝고 환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과, 풀어헤쳐진 옷으로.
곱디 고운 손톱이 다 부러져 피가 흥건한 채로, 저항의 흔적임이 선명한 손톱자국이….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팔뚝에 선명하게 남은 채로!
“해, 해…. 햅번.”
“오, 오해다. 래빗, 뭐라고 말좀-”
“으아아아아아아앙!!”
“아이고! 아가씨! 여기서 이러시면-”
.
.
.
.
.
빠드드득!
“….박. 교. 수!”
키가 작고. 어리숙하며, 말을 더듬고, 아이를 사랑하는, 순박하기 짝이 없는 벡스(24세) 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사랑에 눈이 먼 마초가 되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콰장창!
“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널 믿었다! 널 믿었다! 널 누구보다 믿었다아아아!!!”
“으악! 이 새끼 진짜 찔러!”
“크아아아아아!!”
BDSM 최고의 근접 습격 달인답게 하프 변종의 단단한 몸 사이의 연한 부분을 노리는 벡스의 손속에는 그의 무시무시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고.
….베시시-!
“저, 저 썅년이!”
“이노오오오옴!!!”
“으아악! 미안해! 미안해!!”
사정없이 몰아치는 단분자 커터의 폭풍속에, 박교수는 보고말았다.
주저앉아 울던 래빗이, ‘그녀 때문에 가족처럼 소중한 친구에게 달려드는 벡스’를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조, 좆됐다. 이건…. 아무리 봐도 망했어!’
이미 래빗의 사정에 공감해버렸다. 그의 망가진 사고회로는 이제 아무리 모진 마음을 먹어도 ‘저년은 안돼! 당장 헤어져!’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저 모습은…. 철저하게 사람을 분석하고, 자신을 숨기며, 음흉하면서도 끔찍하게 집착하는 저 모습은….
‘완전 시스템 그년이잖아!’
그에게도 매우 익숙한, 4월드의 시스템 인격 ‘월드’와 아주 똑 닮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합리적이긴 했다. 래빗은 나의 3월드 이전까지 가장 유력한 완성자 후보였고, 당연히 그 오랜 시간에 걸쳐 탄생할 첫 번째 완성자인 만큼 그녀의 데이터는 아-주 많이, 소중하고 철저하고 다양하게 시스템에 의해 분석됐을 테니까.
그놈의 시스템이 허구헌날 ‘학습된 감정 데이터에 의하면’이라고 말할 때의 ‘학습’은, 여성 플레이어 중 가장 완성자에 가까이 다가간 래빗의 인격을 학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하필 왜! 하필 왜 쟤가! 그년의!”
“박.교.수! 래빗 욕하지마아아아!!!”
파지지직!
“끄아아아악!”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원수를 만난 듯 공포에 질린 교수의 목소리는- 끝내 등허리를 파고든 아크 나이프의 전기 충격에 고통에 찬 비명으로 치환되고 말았다.
교수는 해명했으나, 벡스는 들을 생각이 없었고, 래빗은 님의 황홀한 분노를 말릴 생각이 없었으니.
결국, 소란을 참다 못해 달려온 천류제가 친히 두 사람을 떼어 놓을 때까지 BDSM 본부의 치정싸움은 이어져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