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0
Chapter.4 눈꺼풀(22)
***
“….교수?”
락샤샤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면서도 그게 낯설다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잃은 그 남자를 실에 감아 천장에 숨겨둔 것은 그녀였으니 저 안에서 나온 사람이 다른 인물일 리가 없는데. 왜일까.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눈앞의 남자가 이렇게까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 한 가지는 달라졌네요?’
눈빛. 어떤 상황에도 반쯤 장난기가 담긴 그의 눈빛이, 지금은 파충류의 그것처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이 기묘한 대치를 가장 먼저 깨트린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는 듯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아이작이었다.
“교수. 방금 저 괴물을 교수라고 불렀나?”
‘….이런.’
당황해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교수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지금껏 가면을 쓴 것처럼 미동 하나 없던 아이작의 얼굴에, 칼로 베어낸 듯 얇은 호선이 그려졌다.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입으로만 그리는 미소는 그야말로 광인의 그것이었다.
“교수…. 교수라….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의 실험체가 있었지. 수많은 실험체들 중 상당히 기억에 남는 녀석이었어. 이제 기억이 나는군. 저 모습은…. 처음 실험체로 잡혀 왔을 때의 그놈이야.”
쿠르릉! 쿠르르릉!
아이작의 손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런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그의 등 뒤에 있던 마력원이 그런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폭발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너희 뮤트들은….. 언제나 내 기대를 뛰어넘는구나. 그렇다면 저 괴물은 여왕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존재라는 말인가. 어떤 원리로 그렇게 변한 거지? 교수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니, 괴물이 된 뒤에도 인간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인가? 정말 여왕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의 의지? 그렇다면, 지금 그 안에 남아있는 것은 누구지? 교수 네놈인가? 대답해라!”
우우우웅-
맞잡은 손에서 중지와 새끼손가락이 곧게 펴지고, 엄지의 첫번째 마디가 접혀 안으로 들어가며 손가락에 담아둔 의미가 아이작의 심상을 고정시켰다. 여섯 번의 깨달음 끝에 얻어낸 마법. 아이작은 보고 말았다. 그의 꿈 속에서, 운명이라는 세찬 파도에 덧없이 휩쓸려 사라지는 인류의 미래를. 수 없이 반복되는 악몽속에서 아이작은 결심했다. 아무도 눈을 뜨지 못했으니, 눈을 뜬 내가 인류를 구하겠다고. 설령 살아있는 인류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리더라도, 그의 악몽 보다는 덜할테니!
“내 너의 몸을 연구하여 인류를 다음 단계로 이끌리라!”
아이작의 맞잡은 두 손이 양쪽으로 벌려지며, 마력원 위에 부유하던 물 전체가 폭포수처럼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제 6위계 오리진 스펠
[아이작 만달리우스의 가라앉은 파도]“쿨럭!”
“스, 스승님….! 커헉!”
공마석의 마나 반발장 안에서 마력 전달체 역할을 하고 있던 아이작의 제자들은 그 거대한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각혈을 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피의 대가로 마나 반발장 안에서 자유를 얻은 거대한 마력은 아이작의 손에서 살아 움직이는 폭력으로 변해 실험실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와아아. 저게 물이구나? 듣던 것만큼 그리 예뻐 보이지는 않는데.”
‘6위계 마법. 정말…. 죽을수도 있겠는데요?’
락샤샤는 갈등했다. 여기서 그녀의 모든 힘을 드러내면 어떻게 막아내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 직후 그녀는 탈진해서 쓰러질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그녀가 알던 교수가 맞을까? 눈앞의 존재를 아군으로 상정할 수 있을까?
“물이라…. 속는셈 치고 한번 닿아 볼까? 위험해 보이는데-”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교수를 바라보며 락샤샤는 한 손에는 실을, 다른 손에는 단검을 들고 숨을 고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우, 우왁! 이, 인간 여자!”
교수는, 아니 교수의 모습을 한 ‘그것’은 뒤에 있던 락샤샤를 이제야 본 듯,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오, 오해하지마라. 내가 널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껍데기는 지금 자고있고….”
“시간이 없어요! 대답!”
콰아아아아!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뭘 어떻게 만든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에 닿은 순간 그 질긴 엘더 스파이더의 실조차 잘게 조각나 흩어지는게 느껴졌다.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 중이잖아. 아까부터 다들 내가 뭐냐고 묻는데, 이거 꽤나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그쪽이 껍데기를 살려줬으니, 나도 그쪽을 살려줄게. 그러니까 침착하게 좀 기다려. 급할 필요 없으니까.”
“급할 필요가….없다고?”
그것이 앞으로 뛰어나가던 락샤샤의 앞을 손으로 가로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관심은 지금 두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저 마법보다 다른 것에 쏠려있었다.
이름. 독립적인 개체는 그 자신을 칭하는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는 의식뿐인 반쪽짜리였지만, 어쨌든 이렇게 밖으로 나왔으니 남한테 소개할 이름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쉐도우? 너무 식상해. 몬스터? 잠 깨는데나 쓸모 있어 보이는 이름인걸. 이름······. 누군가 나를 칭할때 불러줬으면 하는 것….’
느릿하게 흘러가는 의식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교수의 기억을 뒤지던 그것은, 마침내 마음에 쏙 드는 단어를 발견하였다.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니었다. 껍데기의 몸을 차지하기위해 녀석의 트라우마를 들추던 때의 기억.
[인간의 내면에는 짐승이 있지······. 이성의 얇은 껍질을 벗겨내면, 그 안에는 평생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거대한 짐승이 도사리고 있는 거야….]“내면의 야수,라….”
투둑, 툭, 투두둑!
교수의 피부가 갈라지며, 그 안에 갇혀 있던 괴물의 육신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껍데기가 지금 우리 상황과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지. 선한 박사와 그의 추악한 내면에 관한 이야기.
교수의 얼굴을 덮고 있던 얇은 가면이 피부에 달라붙으며, 귀에 걸릴 듯 쭉 찢어진 입이 움직였다.
“하이드. 내 이름은, 하이드가 좋겠어.”
탈피를 마친 괴물이, 아이작의 마법을 향해 달려들었다.
***
괴물, 하이드는 태어날 때부터 육체가 없었다. 에데오르나의 감염인자라는, 개별활동이 가능한 감염인자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그는 그 자신을 교수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또 다른 자아와 같은, 일종의 유령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숙주의 기억을 집어삼키고 그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뇌를 차지하지 못한 감염 인자의 본능은 의식에 파묻혀 작아질 뿐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습득할수록, 교수의 감각을 공유할수록 괴물의 갈증은 커져만 갔다.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갈증. 머릿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의식의 섬에 표류하는 듯한 외로움, 그리고…..
“껍데기, 네 사고는 너무 인간적이란 말이지..”
박교수라는 의식의 틀에 갇혀, 훌륭한 육체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답답함.
짧은 시간이지만, 무한히 재생되는 몸이다. 사고할 머리만 남겨둘 수 있다면 그 형태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째서 인간의 형태를 남기려고 하는 것인가?
‘재생을 꼭 다쳐야 할 필요는 없잖아? 예를 들면…. 이런식으로 사용한다거나?’
하이드의 어께어서 수십개의 붉은 팔이 자라났다. 순식간에 자라난 팔 위로 다시 새하얀 뼈가, 근육이, 피부가 자라나며 끝없이 겹쳐져 크기를 키워나갔다. 재질이 무르다는 것은 가공이 쉽다는 뜻과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난 그것은, 신체의 일부라기보단 거대한 창이나 말뚝처럼 보였다.
“마법사,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나?”
콰아아아아!!
지척까지 다가온 수류(水流)를 향해 그 몸에서 비롯된 거대한 구조물을 휘두르며, 하이드가 말했다.
“나는 괴물이야. 뮤트도, 인간도 아닌, 그냥 괴물.”
콰드드드드!
살과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과, 아이작의 마법이 충돌했다.
***
아이작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가라앉은 파도. 그가 여섯 번째 깨달음을 얻었을 때 만들어낸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 심해와 같은 수압으로 닿은 모든 것을 그 안으로 끌어들여 찌그러트리는 그 파도 속으로, 붉은 창이 파고들었다.
콰드드드드득!
거대한 창은 파도와 닿는 동시에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비틀렸지만 껍데기를 벗어던지듯 끊임없이 부서지며 물살을 갈랐다. 찌그러진 수 많은 육신 사이에서 새로운 육신이 돋아나고, 다시 찌그러지고, 다시 부러지고. 그렇게 수백, 수천 번 압축되어 검은색 바늘에 가까워진 창의 끄트머리는 결국 수압으로 이루어진 파도를 뚫고나와 수인을 맺은 아이작의 손을 관통했다.
“크윽!”
아이작은 재빨리 남겨둔 마나로 물의 채찍을 소환해 결정처럼 단단하게 굳은 창끝을 부숴버린 다음, 침착하게 가라앉은 파도를 취소하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수인이 흐트러지며 심해의 파도를 이루던 이미지가 흐트러졌다. 이런 제한된 상황에서 수인도 없이 몇 개의 깨달음이 중첩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시 공세에서 수세로 변경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갑자기 완전히 다른 생물이 되어버린 붉은 뮤트. 더는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이것이 말하는 뮤트인가…. 과연 명불 허전이로구나! 이 나라 제일의 기사를 꺾을만 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토브룬의 병력이 이곳에 도착한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방어에만 힘을 쓴다면, 놈의 기괴망측한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마음을 가라앉혀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마법의 심상을….
우드득-!
“크아아악!”
그 순간, 아이작의 상념이 끔찍한 고통 앞에 무너졌다.
‘워터 바인드는 빈틈 없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어디서 파고든….!“
고통의 근원지로 눈을 돌린 순간, 아이작은 자신이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손. 자신의 손에 난 작은 상처 속에서 자라난 팔이 자신의 손목을 비틀고, 손가락 사이 사이에 난 작은 이빨로 그의 팔을 물어뜯고 있었고, 그 손등에서 돋아난 새하얀 눈알이 저항하는 그를 노려보며 비웃고 있었다.
‘이, 이건, 이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손에서, 내 손에서 놈이 자라나고 있다니!’
늙은 마법사의 눈에, 공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식이 있으면 활용을 해야지. 뮤트는 머리를 날려도 어느 정도 움직이는 걸 알고 있었잖아. 뇌가 없어도 감염인자끼리 감각을 공유해서 몸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는 뜻 아니겠어?”
뭐, 너는 나처럼 감염인자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저런 것은 못하겠지만.
하이드는 잠들어있는 자신의 숙주에게 가르치듯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크아아악! 으아아, 으아아아악!”
아이작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채, 이성을 잃고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고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 자신의 몸에 침투하여 자라난 것에 공격당한다는 공포가 위대한 마법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히죽거리며 보고 있던 하이드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 락샤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인간 여자.”
“….뭐죠?”
락샤샤는 단검을 들어 놈을 경계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교수가 아니었으며, 대단히 위험한 생물이었다.
하이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상처받은듯한 얼굴이 되었다.
“체! 너무해. 껍데기에는 그렇게 살갑게 굴고, 나는 이렇게 찬밥이라니.”
“…..그야, 당신은 그가 아니니까.”
뭐, 그렇긴 하지.
하이드는 그녀의 말에 투덜거리며 바닥에 대충 퍼질러져 앉았다.
“저거 마무리 좀 해줘.”
“직접 하지 않고요?”
“하려고 해도, 더는 남은 게 없다고.”
락샤샤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하자, 하이드는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바싹 말라붙은 그의 손은, 손끝에서부터 바스러지고 있었다.
“흡수한 피를 사용 가능한 한계까지 다 써버렸어. 껍데기는 이런 거 컨트롤 못하니까, 여기서 더 썼다간 진짜로 말라 죽어버릴 거라고. 내가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무한한 동시에 소모적인 육체. 전투를 관찰하며 그동안 배운 것, 관찰한 것,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모든 것을 동원했다.
-물에 불순물이 섞이면 마법사의 이미지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가진 자원의 대부분을 투자해 마법 속에 던져넣었다. 창이 뚫고 들어가며 그의 살점이 파도 속에 삼켜질수록 그 압력이 약해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법은 마법사의 심상을 기원으로 한다.-
그래서 없는 자원을 쥐어짜 가장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공격을 연출했다. 적이 착각할 수 있도록. 적의 상상 속에서 자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불려나가며, 이성을 유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몸에서 떨어진 감염인자를 움직일 수 있다고는 해도 제 몸처럼 움직일 수는 없다. 저 마법사의 손목을 붙잡은 팔은 움직임을 멈춘 지 오래고, 물어뜯는 이빨은 가죽에 살짝 박힐 정도로 그 힘이 약했으며, 눈알은 그냥 저 혼자 데룩데룩 구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심상으로 세상을 바꿀정도의 존재가 마법사가 아닌가? 마법사의 가슴속에 스며든 공포는 이미 제 스스로 덩치를 키워나가며 세를 불리고 있었다. 아이작이 보고있는 것은 더이상 하이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법사가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가 형상화 한 것일 뿐.
껍데기가 적을 상대할 때 툭하면 써먹던 전법.
“이른바, ‘블러핑’이라는 거지.”
아아, 재밌었다. 역시 몸이라는 것은 좋구나.
점점 멀어지는 의식을 느끼며, 하이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의식을 파고드는 모든 감각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물방울의 차가운 감각,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락샤샤의 고운 얼굴, 피를 갈구하는 몸에서 느껴지는 갈증, 그리고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까지. 그 감각 하나하나가 하이드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인간 여자, 그 계획인지 뭔지 마무리 잘하고. 껍데기한테 안부 좀 전해줘라.”
마지막으로 락샤샤에게 윙크를 날린 하이드는 그렇게 천천히 의식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