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00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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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들들들들- 철컹!
위이이이잉!
이 소리는, 녹색 천과 환한 전등 불빛이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는 방에서, 천장의 레일에 매달린 대형 원형 톱날이 이동하는 소리다.
“턱주가리, 잘 잡아. 발버둥치면 ‘저거’ 두동강 난다.”
“거 퍽이나 듣기 좋은 소리구먼.”
이건 수술 가운을 입은 노인과 수술대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덩치 큰 남자의 대화였고,
“읍! 읍읍읍읍읍! 으브으읍!!”
이건, 입에 재갈이 물려 수술대 위에 티타늄 합금 사슬로 결박된 남자가 공포의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언뜻 보면 상당한 수위를 자랑하는 B급 스플래터 무비의 한 장면같은 이 모습은 놀랍게도 다친 환자와 그의 절친한 친구,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그들을 위해 지체없이 수술을 잡아준 친절한 의사가 함께하는 장면이다.
다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이 장면은 의사의 이름이 ‘우진’이라는 것에서 모두 설명된다. 그는 수준급 외상 전문의였고, 동시에 변종 해부 전문가였으며, 이 수술대는 종종 ‘살아있는’ 변종의 해부를 위해 사용되는 덕에 티타늄 쇠사슬이니 급속 동결 고정장치니 하는 게 수두룩했으니까.
그아아앙- 카가아악!
“으브으으으으윽-!!!”
“턱주가리. 늬들이 날 참 쉽게 보는데…. 네놈들 눈앞에 계신 분은 종합병원 원장에, 47구역 최대규모 암시장 주인에, 뮤트 테크라는 신기술 개발도 선도하는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지? 자꾸 이런 좆같은 푸닥거리로 잡일 만들래?”
푸샥!
“끄으으으#(*$@&*#@으으읍!!!”
“씁. 면목이 없수다. 내가 애들 간수를 좀 잘 했어야 하는데. 아 맞다. 이거 받으쇼. 오다 주웠어.”
“피 묻은 주머니? 뭔데? 누구 쑤시고 금덩이라도 털었어?”
“이빨. 오는데 걸리적거리는 놈들이 많아서 몸 좀 풀고 왔지.”“아, 그거 좋구만. 치과에서 쓰면 되니까.”
이안과 우진이 박살 난 피해자의 입에서 쏟아진 생니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다지고 있는 동안, 교수는 도대체 이 두 미치광이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저, 절대로 이런 규모의 수술은 아닐텐데?’
배운 바 의료지식은 응급구조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몸이 해체되는 감각이라면 장담컨대 살아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아크 나이프라는 살벌한 무기에 찔렸지만 그의 몸은 튼튼하기 짝이 없는 3형 변종의 몸이고, 게임속 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정신의 형태를 따라가는 변종화 육체 답게 어느정도 느릿한 회복력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리 벡스가 눈이 뒤집혔다고는 해도 그의 생명에 지장이 올 정도의 공격을 가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장기를 피해 등근육 한복판에 칼빵을 먹였을 뿐이지.
당장 등짝에서 피가 줄줄 새고 전기로 지져진 부분이 욱씬거려서 응급처치나 받을 생각으로 우진을 찾아왔는데, 그를 본 영감탱이가 눈을 반짝이며 이안에게 뭐라뭐라 하더니 ‘대형 변종 전용 수술실’ 같은 곳에 데려다놓고 산 채로 토막을 내려 드는 것이 아닌가!
똑- 똑-
지금 링거를 통해 떨어지는 액체는 한눈에 봐도 커다란 해골 마크가 그려진 동물용 마취제다.
졸졸졸졸졸졸-
그 옆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물이 아니라 그의 허벅지에 박힌 튜브를 통해 새어나오는 피를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받아내는 소리다.
짤깍 짤깍!
이건, 단단한 변종 외피 사이로 봉합이나 좀 했으면 됐을 치료가, 등판 전체의 외피를 톱질해서 열고 척추와 그 주변의 이것저것을 마구 헤집는 대수술이 되어가는 소리다!
‘나, 날 죽일 셈인가? 우진 영감….! 도대체 내가, 내가 뭘 잘못…. 잘못?’
그리고, 교수는 떠올렸다. 그에겐 28년쯤 전이지만, 우진에겐 고작 일주일 전이었을 사건을.
암시장의 쓰레기들을 소탕한다고 나섰다가, 마지막엔 이안이 끌고온 전차가 암시장을 가로질러 그 중심에 호쾌한 포격을 갈겨버린 순간을.
암시장 한 가운데 싱크홀마냥 뻥 뚫린 구멍과, 온갖 상점과 좌판을 짓밟으며 진입한 탱크 덕에 생업의 터전을 잃어버린 암시장 상인들.
그 사건 이후 사고를 친 당사자들은 일주일간 황무지 여행을 간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버렸고, 덕분에 개박살난 암시장의 사후처리, 갑작스레 장사 수단이 모조리 박살나버린 상인들의 항의 같은 것은 모두 우진이 해결해야만 했다.
있네. 개인적인 원한.
교수는 차오르는 공포를 억누르고, 입이 봉해지고 몸이 구속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흥얼거리며 그의 등을 째는 미친 의사를 말릴 수 있는지 차분하게 생각 하려다….
“흠. 그러고보니 이 녀석 심장이 두 개잖아? 변종 될 때 하나 늘었다지? 턱주가리. 차에 엔진이 두 개나 있을 필요가 있냐?”
“아닐걸? 한쪽의 출력이 충분하다면 굳이 필요하진 않지.”
“그렇지? 하나 적출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봐야 심장마비 보험 정도 밖에 안 될 텐데.”
.
.
.
.
“으으읍! 으븝! 그으읍! 으브으으으읍!!!”
실패했다. 왜 잊었을까. 차가운 냉미남 이안 데스몬트를 황무지 최고 미치광이 메탈-죠로 만든 것이, 바로 그 냉미남이 이 미치광이 의사를 보고 배웠기 때문인데.
버둥버둥! 들썩들썩!
다행인 것은 박교수씨의 하이브리드 변종 바디가 일반 변종에 비해서 꽤나 스펙이 높은 편이었고, 덕분에 탈출은 못 할지언정 이런 필사의 버둥거림이 수술을 방해할 정도는 됐다는 것이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엄살이냐?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으븝?!”
“거 말 잘하는 놈이라 그런가, 입을 틀어막아도 뜻은 어떻게 전달이 되는구만.”“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였수? 난 그냥 이놈 좆같아서 한번 째보는 줄 알았는데.”
“지랄. 암만 내가 야매라도 의사는 의사다 이놈아.”
웅웅웅- 찰칵!
우진은 커다란 조영기 같은 것으로 반쯤 해부된 내 등짝을 촬영하고는 펜으로 이것저것 기록하며 말했다.
“이 몸, 3형 변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멈춰버린 몸 말이다.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고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냐?”
“어…. 돔은 알고 있지 않겠수?”
“아니, 적어도 내가 요청한 협력 자료에는 병신같은 추측만 잔뜩 들어있더군. 박교수는, 말하자면 특이한 유전적 체질을 가진 환자와 같은 거다. 환자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환자가 부상을 입었을 때 정확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이놈은 주기적으로 제 몸을 작살내는 게 취미인 것 같으니 나라도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안그래도 한번 불러다 여기저기 열어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제 발로 찾아와줘서 지금 하고있는 거다. 알아 들었냐? 턱주가리?”
“킁. 나이를 더 먹더니 옛날보다 차분한 영감이 됐다는 것 정도는 알겠수.”
“너도 알아들었냐, 박교수?”
“….으븝.”
알아들었다뿐이랴. 새삼 이런 참의사를 저 뇌신경이 모두 말초신경으로 대체된 메탈죠와 동급 취급한 것이 미안해질 지경인데.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진 영감님이 아닌가. 내가 아등바등 황무지에 살아남던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우울증 약타러 다니던, 내 추한 시절 잘난 시절 다 아는 어르신인데. 사람이 좀 츤데레끼가 있어서 전부 말을 안해서 그렇지 분명 하는 일에 다 이유가 있을 게 분명….
“혈액통 좀 갈아라. 골수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피가 계속 나오는구만. 새거 놓고, 다 찬 거에는 이 라벨들 붙여놔라.”
“뭐요 그건. 어디보자…. [중간기 3형 변종 혈액, 돔 연구협력부서용], [암시장 판매용]…?”
“….읍?”
예? 뭐요? 판매용? 환자의 상태가 어쩌고 하는 용도가 아니라?
수술대에 묶여있는 나도, 그걸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던 이안도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바라보자 우진은 되려 당당하다는 듯 의료용 지렛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왜? 뭐가 어때서? 의사로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변종 생물학 권위자로서 최고 가치의 표본을 가능한 수집하고, 암시장 주인으로서 희소한 상품을 지나치지 않는건데?”
“으그으읍!”
“흠. 그러니까, 박교수 이놈을 째고 뜯은 게 환자의 상태가 어쩌고 한 이유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놈들 선물도 하고 겸사겸사 팔아먹기도 하려고 그랬다고?”
“셋 다 합당한 이유가 아니냐? 이 나이 먹으면 삶의 중심을 잘 잡는게 중요하단 말이지? 지난번 BDSM의 암시장 테러 기억나지? 내가 어디 보상금 뜯어먹힐 인물로 보이든?”
“아, 그렇지. 확실히, 앞으로 이래저래 돈 쓸 일이 많으니 당장 변상하는 것 보다는 저렇게 현물로 갚는 쪽이 더 좋겠구만. 크흐흐흐! 역시 우진 영감이야! 내가 알던 돌팔이가 맞구만!”
“크흘흘흘! 이 나이에 죽는 것말고 더 변할 게 어디 있을라고?”
으아악! 사람 살려! 두 미치광이가 사람쪼개서 팔아먹는다! 벡스! 다나! 총장님! 하이드! 으아아악!
“으읍! 읍! 으으으읍!”
아무리 소리쳐도 듣는 이라곤 수술대 앞의 미치광이 둘 뿐.
점점 빈혈과 마취로 몽롱해져가는 가운데, 나는 이 모든 사단의 시발점이 된 래빗에 대한 원한을 마구 곱씹으며 잠이 들었다.
부디, 마지막으로 들린 저 굉음이 내 뼈를 써는 소리가 아니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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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들들들들들- 덜컹!
“리자! 그놈 회복실에 넣어놔! 동네에 손 한번 잡아보겠다고 미쳐 날뛰는 떨거지들 많으니까 되도록 조용하고 안전한 곳으로 하고!”
“네, 선생님!”
결국 박교수가 빈혈성 쇼크로 정신을 잃고, 그 이후로 자동화 공장 같은 소음이 들려오던 수술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피투성이가 되다못해 피에 절여진 수술대를 밀고 나온 두 사람은 기절한 박교수를 간호사에게 넘기고는 녹초가 되어 휴게실에 주저앉았다.
찰칵, 퐁!
칙칙, 화르륵!
후우우-
“턱주가리. 나도 한 대 줘봐.”
“우라질. 도대체가 자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꼴을 못봤다니까. 사람이 인색한거요, 아니면 담배도 못 챙겨다닐 정도로 대가리에 빵꾸가 난거요?”
“기왕 몸에 안 좋은걸 피울바엔 더 맛있는 쪽을 피우겠다는 심보지. 세상에 얻어 피우는 담배만큼 맛있는 게 또 어디 있겠냐?”
“사상이 썩은 거였구만.”
휙!
“고생했수. 몸도 성치 않은 양반이 이런 중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알면 됐다 이놈아.”
이안이 던진 담뱃갑을 나이 답지 않은 민첩함으로 멋들어지게 받아낸 우진은, 그 담뱃갑 안에 직접 말아서 만든 담배가 가득한 것을 보고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가 이안이 직접 만 담배를 좋아하는걸 알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트드드득-
후우우-
후우우우-
잠시, 작은 휴게실 안에 타들어가는 불꽃과 한숨 소리만 조용히 오고갔다.
“….어떻수. 저놈은.”
“좋지 않지.”
도대체 접속기 안에서 뭘 하고 왔는지 이제는 세상을 자기 눈 아래 놓고 보게 된 놈이다.
경추 인근을 전기로 지져도, 코끼리도 재우는 마취제를 써도 멀쩡하기만 한 놈을 재우기 위해 피를 한 말은 족히 뽑아서 저혈성 쇼크를 일으킨 다음에야 할 수 있게 된 이야기.
우진이 온갖 의학적 소견이 들어간 필기와 엑스레이 사진을 꺼내는 동안, 이안은 지금쯤 그와 연결된 통신기를 붙잡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벡스를 생각했다.
“근육. 골격. 장기. 피부는 이미 인간의 수치를 벗어났어.”
“그건 생긴 것만 봐도 알텐데. 170 언저리의 인간이 5미터가 됐다가 3미터가 됐다가 2미터로 줄었는데. 그만큼 원래 인간으로 되돌아오고 있는게 아뇨?”
“아니지. 되려 빠른 속도로 변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내 소견이다.”
후우우-
자욱한 담배연기 너머로 한 손에 이마를 묻은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혈액도 인간의 것과 달라. 아직 검사 중이지만 호르몬 수치도 보통 인간 같으면 진즉에 어디하나 고장났을 수준이지. 그놈 피 쏟아내는 양은 어떻고? 이미 저 체구에 나올 수 있는 피가 전부 나온 수준인데, 의식을 유지하고 버둥거리고 있었어. 골수의 조혈모세포까지 완전히 변이했다는 뜻이야. 말 그대로 뼛속까지 변이했다는-”
“그래서 뭐!”
콰앙!
우진은 이안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의사였고, 환자의 가족에게 진찰 결과를 전하는 것 또한 의사의 의무였으니까.
“….머리. 지금 눈앞에 보이는건 박교수의 모습이지만, 사실상 대가리 안에 든 것 빼고는 전부 3형 변종이라 할 수 있지. 아마, 그마저도 언젠가는…. 바뀌고 말 것이고. 38구역의 그 사건 이후, 박교수의 몸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어. 그저 여러 가지 말도 안되는 요소가 겹쳐 그 진행이 늦어졌을 뿐이지.”
“제기랄, 빌어먹을, 우라질….”
치지이익!
이안이 쥐고있던 통신기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새어나왔다. 아마, 벡스가 분에 못 이겨 집어던진 통신기의 단말마일 것이다.
“….얼마나 남았지?”
“아무도 몰라.”
“얼마나. 남았냐고.”
“….길진 않겠지.”
쿠당탕!
결국 이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다.
“영감님 의사잖아! 그냥 의사도 아닌 대단한 의사! 턱이 통째로 날아간 놈도 살리고! 팔다리가 작살난 리자인가 뭔가 하는 간호사도 살리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의수 의족도 막 만들고 하는 대단한 놈 아냐! 뭐 없냐고! 하다못해 저 새끼 가슴팍 갈아끼운 것처럼 못쓰게 된 부분 짤라내고! 대가리 빼고 다 갈아 끼우면 어떻게든-!”
“애쉬필드. 자네 참 많이 변했구만.”
이성을 잃은 그를 바라보는 우진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 이안은 그 안에도 그와 같은 감정이 그 이상 담겨있음을 보았다.
이안은 두 다리가 없는 만큼 가벼운 노인의 멱살을 놓았다.
그도 안다. 세상엔 억지를 써도 바뀌지 않는 게 수두룩 하다는 것을.
하지만, 세상엔 눈앞에 드러난 사실일지언정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도 있는 법이다.
평생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아내가 눈앞에서 폭사했다거나.
그녀를 위해 살고자 맹세했던 자신의 딸이 그 폭사하는 아내의 품에 매달려 있었다거나.
혹은, 고생만하다 드디어 삶이라는 걸 좀 되찾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치익, 칙! 틱 틱!
“이런 염병 쳐먹을 세상.”
기름이 떨어진 라이터를 집어던진 이안은, 불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건. 숙주의 정신의 형태를 따라 변하는 거라고 했지.”
“일단 알려진 것에 의하면.”
“저놈은 그 망할 게임에서 조졌다 싶으면 괴물로 변해서 다 때려 부쉈고.”
“그래. 나도 그 영상들은 연구삼아 봤으니. 교수의 감정이 극단에 치달으면, 변이 바이러스가 크게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더군.”
“….메시지로 미리 이야기 한 것처럼, 교수 저놈은 렙터를 찾았어. 금방이라도 전쟁을 벌일 수 있지.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반드시 무리한다.”
이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모든 관점에서 렙터가 지랄맞게 숨기는 무언가가 유효한 결과를 얻기 전에 1초라도 더 빨리 찾아서 훼방을 놓아야함은 명실상부했다.
하지만, 그런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면…. 박교수의 상태는 무조건 악화된다. 엄청난 속도로.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턱주가리.”
“왜.”
“병신같이 반대할 생각일랑 하지말고, 그냥 찬성한다고 말해줘라. 당연히 렙터를 쳐야 한다고.”
“영감. 늙어서 대가리가 안 돌아가? 그렇게 되면 저놈이 어떻게 될 줄 몰라? 아니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버리는 샘 치자는 생각인가?”
“네놈이야 말로 화약에 미쳐 살다가 끝내 골 안에 든 게 다 터져서 곤죽이 된 모양이로군”
우진은 정말 한대 칠 기세로 노려보는 이안을 마주 쏘아보며 말했다.
“박교수가, 저 잔대가리로 세상을 평정한 놈이 우리가 다 아는 생각을 못 했을까? 당장 전쟁준비를 해서 렙터를 추격하는 쪽과 느긋하게 성장하며 놈들이 들이닥치길 기다리는 쪽 중에 어느게 정답인지를 정말로 몰라서 여기저기 묻고 다니겠느냔 말이다.”
“….저놈이라고 완벽하진 않아.”
“여기 오기전에 래빗을 만나고 왔다지. 전쟁에 대한 얘기를 하기위해 만났다고 했는데, 둘이 정말 진지하게 그 얘기를 했나? 자네가 보낸 메시지에는 그냥 찬성, 반대 정도만 듣고 끝났다고 했는데? 저 녀석이 정말로 전쟁을 벌일 이유가 궁금했다면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가도록 둘 녀석인가?”
“말 돌리지마. 난 지금 깊게 생각할만한 상태가 아니야.”
으르렁거리는 이안에게, 우진은 그를 달래듯,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짐을 나누어 들어달라는 투정 같은거다.”
“짐을, 나누어 들어달라고?”
“그래. 사형수를 목매달 때 간수 여럿이 스위치를 잡아당기듯. 이미 머릿속으로 필수라 판단된 전쟁을, 그 죽음의 소용돌이를 제 손으로 시작하는 책임감을 조금 나누어 받아 달라는 투정 같은 것이지.”
우진은 안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이안도, 박교수도, 지금 황무지에 살아남은 모두도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안다.
“자네…. 방금 교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화를 냈지? 소중한 누군가가 영원히 곁에서 떠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마구 감정을 쏟아내었지?”
“그건-”
“전쟁은, 하나만으로도 벅찬 그런 마음의 준비를 내가 알고있는 모두를 향해 해야하는 행위야. 시작되는 순간 단 한명도 예외없이 모두에게 사신의 대기표가 주어지지. 누구든 떠날 수 있어. 모두가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하지.”
“시작은 내가 해도 끝은 어디서 날지 모르는 파괴의 연쇄. 겪어보지 않았나. 당장 3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이안은 말문이 막혔다. 3차 세계대전. 구시대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전쟁은…. 그냥 끝나버렸으니까. 전쟁을 일으킨 쪽도, 그것에 맞선 쪽도 모조리 죽어 그것의 끝을 알릴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체, 산불이 사그라들 듯 자욱한 연기 속에 그냥 가라앉았으니까.
전쟁을 시작한 놈들이라고 그런 끝을 예상했을까.
박교수라고,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그런 끝을 향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박교수는 그런 전쟁의 시작점이 되어버린 것이야. 그러니…. 아무 말 말고 그냥 찬성해줘. 전쟁 하자고. 뭐 그런 바보같은 고민을 하냐고 윽박지르고, 멍청이 취급하면서. 네놈이 평소에 하는 것처럼.”
“그렇게, 저 등짐 많은 녀석에게서 ‘내가 전쟁을 시작했다.’라는 짐 정도는 덜어주자고.”
챡!
주름이 가득한 우진은 희미하게 웃으며 일렁이는 라이터 불빛을 이안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었다.
이안은 불도 없이 그의 입에 물린 담배와, 눈앞에 어른거리는 작은 불꽃을 눈에 담았다.
“….크흐흐흐. 염병할 거.”
트드드득-
후우우.
분노로 가득찬 고함 대신 토해낸 한숨이 안개가 되어 자욱하게 그의 눈앞을 가렸다.
“영감.”
“왜.”
“여기서 미리 인사 하겠수다. 내가 그쪽 한테는 인사를 하고 가야지.”
“청승떨지 마라 이놈아.”
“지랄. 언제는 ‘알고있는 모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같은 소리를 지껄이더니.”
우진은 킬킬거리며 담배연기를 뿜는 이안의 머리를 향해 담배꽁초를 던져주고는, 그의 휠체어 아래에서 묵직한 금속 케이스를 꺼냈다.
“아, 그거 내가 부탁했던건가?”
“아니. 그건 아직 준비 중이고. 이건 내 거지.”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케이스 안에 들어있던 것은, 뿌연 연기 속에서도 금속의 광체를 드러내는 두 개의 의족이었다.
“….나오시려고? 그 나이에?”
“나도 이런 골방에 틀어박혀서 남에 인사나 받아주고 있을 생각은 없어. 기왕 인사할 생각이면, 전장의 첫 총성이 울리는 시간에 하자고.”
“크흐흐흐, 참나. 노친네 성질머리 하고는.”
결국, 이안은 이번에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금속 턱 사이로 슬슬 새어나가는, 크게 웃지 못하고 잦아드는 듯한 웃음으로.
그가 마주한 고통을 감내해야 할 때마다, 언제나 그렇게 웃었던 것처럼.
“씻팔…. 그놈 결혼식 축가 뭐 부를지도 고민했었는데.”
“거 김칫국을 거하게 마셨구만.”
“이제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 이제는…. 크흐흐흐!”
황무지는, 그 위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언제나 그랬듯 긴 휴식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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