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10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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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지하 구조물. 고장난 엘리베이터. 콘크리트 벽, 허물어진 곳에 드러난 납판.’
“….천류제, 핵방공호다. 외부 오염 차단기능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아.”
“보호복을 해제하겠다.”
초대를 받은 입장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는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신원미상의 집단’이다.
그래서, 천류제와 나의 진입은 오래전 45구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수의 인원이 침투할 때의 군사 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때의 HIV나 지금의 우리나 똑같이 군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인 만큼 침투 양식에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예측가능한 구조 내 위험지역을 신속하게 점유해가며 내부로 돌입하는 것.
다만, 그때와 아주 큰 차이가 있다면-
“선두교체. T자형 통로다. 한쪽을 먼저 배제하겠음.”
탁탁탁탁!
둘 중 하나는 맨몸으로 비행기 랜딩기어 역할도 할 수 있는 인간 탱크라 위험지역을 몸으로 틀어막으며 선점하는 짓 따위를 할 수 있었고.
퉁— 퉁–
“….전방. 개방된 통로 정면, 좌측. 8평 규모 홀. 우측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다.”
나머지 하나는 금세기 최고의 천재가 만든 초감각화 프로그램의 수혜자로서, 인간 소나(Sonar)에 가까운 정신나간 정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과거의 세 친구가 각기 다른 분야의 특수부대 셋이 모여 침투한 정도로 볼 수 있다면, 이번 예술가 연합 침투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만든 슈퍼솔져 둘이 작전을 수행하는 수준이었단 말이다.
“클리어.”
“잠깐 대기. 이것만 처리하고 가자.”
거의 전력 질주에 가까운 경계 돌입 중 멈춰 서는 순간은 내가 가방에서 테이프가 잔뜩 감긴 무언가를 꺼낼 때 뿐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나오는군. 그 가방 안에 몇 개나 들어있지?”
“이거 말고도 스무 개 더? 원격 신관을 넣어둔 크레모아 베이스에 셈텍스, RDX같이 남는 폭발물을 붙여놓은 물건이라던데? 이안 녀석이 요즘은 이런 ‘구형’ 폭약을 쓸 일이 많이 없어서 욕구불만이었거든. 집에서 취미로 만들던 물건을 잔뜩 챙겨주더라고.”
“….생산적인 취미라 해야할지, 파괴적인 취미라 해야할지.”
은회색 덕테이프를 덕지덕지 감은 화약덩어리는 당연하게도 산소 대신 화약연기로 호흡하는 생물인 메탈죠가 넉넉하게 챙겨둔 물건이었다.
“불러놓고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진입을 막아서는 사람도 없고. 저쪽에서 적대할 생각이 없다면 한 대 모여 기다리는 중이라 가정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릴 깊숙이 끌어들일 생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잖아.”
“음. 만약의 상황에 퇴로를 만들기 위함인가.”
“초대를 했다는 건 내게 용건이 있다는 뜻이니까. 여긴 저쪽 근거지고, 그만큼 지리에 익숙한 놈들이 우회해서 깊숙이 침투한 우리의 퇴로를 가로막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라는 뜻이지. 만약 정말로 놈들이 나를 어떻게 해볼 생각으로 이런 수작을 벌였다면-”
퍼어엉-
내가 손으로 스위치를 누르는 시늉을 하자 천류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왔던 길로 나가야지 뭐.”
“늘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건가.”
“아마? 대부분?”
“….좋지않군.”
휴식 공간으로 보이는 곳의 의자 아래 폭탄을 설치하는 내 모습이 녀석에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내가 재수없게 폭사하거나 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겠지.
“설치 끝. 계속가자고.”
“부디 저걸 사용할 일이 없기를 빌지.”
짧게 숨을 돌린 천류제는 잠시 내려놓았던 전기톱의 바 부분으로 벽을 두드리며 일어났다.
“계단, 통로형 복도, 좌우 개방됨.”
“어이구 편리해라. 기왕이면 이상한 무기 말고 총들고 경계까지 해주면 정말 고맙겠는데.”
“사격은 선호하지 않는다. 심한 수전증이 있어서.”
“어이구.”
빠르게 내려왔다 한들 고작 10분.
이런 군사용 대규모 핵방공호는 해발 고도가 어느 정도 있는 곳에 못해도 2km 정도 깊이로 만들어진다. 거리 2km가 아니라 깊이 2km인 만큼 엘리베이터 없이는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야 겨우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 갈 길이 멀었다.
새것처럼 깔끔하게 단장된 텅 빈 방공호는 으스스한 발울림으로 우릴 맞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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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내려왔을까.
감으로는 대충 1.4km 이상, 가방안의 혼합 폭발물이 3개쯤 남아 슬슬 아껴가며 사용하고 있던 때였다.
“음.”
“드디어 뭔가 상상하던 괴물 소굴이랑 좀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45구역의 대규모 벙커가 지하 가장 깊은 곳에 넓은 거주구역을 둔 것처럼, 이곳의 핵 방공호도 가장 깊은 곳에 넓은 공간을 뒀을 것이다. 집체만한 괴물이나 엄창난 양의 화면에 둘러싸인 콜렉터 같은게 있을만한 넓은 공간이라면 그런 거주구 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지하로 내려가던 중이었는데.
바스락!
별안간, 지금까지와는 아주 테마가 딴판인 공간이 다음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부터 펼쳐져있는 것이다.
“….쓰레기인가.”
“쓰레기까진 아니지. 이런 튼튼한 비닐은 쓸모가 많아서 묶음 단위로 판매할 수 있는 스크랩으로 취급받거든. 봐, 이것도 중간에 끈으로 묶었던 자국이 있잖아.”
나는 우리 두 사람의 걸음을 멈춰 세운 형형색색의 쓰레기들 중 눈에 띄는 하나를 들어 천류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보아하니, 그런 용도로 모아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희미한 형광등에 비쳐 반짝거리는 은박의 비닐 쓰레기. 그 겉면에는, 팔다리 달린 바나나 모양 캐릭터가 우그러진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자봉지였다. 내가 어릴 적 즐겨 먹던 종류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물건이라.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란 말이군.”
“추억?”
“그래. 지들 말로는 그러더라고. 예술가 연합의 목적은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결락을 헤매다 죽어갈 변종 동지들이 3형이 될 수 있도록, 어떤 기억의 순간에 안착하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물론, 노호(老虎) 부루가 ‘제대로 된 상대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겪으며 죽고싶다’는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여 밖으로 나도는 걸 보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목표가 동족 늘리기일 뿐 정신병자 베이스인 3형 변종답게 제각각 추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튼 실질적으로 조직의 목표는 ‘적응자/3형변종 늘리기’ 라는 것이다. 저렇게 오래된 물건을 마구 수집하는 것으로.
도대체 무슨 구조로 그따위 공식이 성립하는지는 내 콩알만한 생물학 상식에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도 알 수 없지만, 당장 스스로를 ‘적응자’라 부르며 공간이동 비스무리한걸 해대던 하얀 양복놈이 제 입으로 직접 말한 사실이었다.
38구역. 돔의 과도기 병기를 팔겠다고 첫 BDSM 캐러벤의 원행을 나갔을 때. 허깨비처럼 캐러벤 숙소에 나타난 ‘W’는 이미 괴물처럼 변해버린 내 왼팔을 보며 대단히 즐거운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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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참으로 열정적으로 연구했습니다. 3형 변종이란 무엇인가. 왜 어떤 이는 거대한 괴물이 되고, 어떤 이는 사람과 흡사한 형태로 남는가. 우리는 괴물인가, 인간인가?’
‘나는 적응자, 당신들이 말하는 3형 변종입니다. 대전쟁 도중에 죽었으며, 다시 태어나 6년을 살았고, 희미하지만 과거 나의 [원형]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으며 나름의 사상과 의지, 목적을 가지고 당신 앞에 앉아있습니다. 나는 인간입니까? 아니면 바이러스의 변덕에서 태어난 괴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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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의 말을 하며, 스스로가 인간인지 사유하는 3형 변종. W란 녀석을 만났을 당시에 느낀 충격은 상식에서 아득히 벗어난 존재와 마주할 때 느끼게 되는 정신적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놈이 그러더라고. 지들끼리 이래저래 알아보니까, 변종 바이러스는 죽음의 순간에 숙주의 기억을 징검다리처럼 마구 건넌다는거야. 칠순 잔치에서 유치원 장기자랑으로, 이등병으로 입대하던 순간에서 다시 중학교 시절로. 그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아주 거대한 균열, 트라우마 같은 커다란 정신적 결함이 있는 곳에 냉큼 자리를 잡는다는거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정신적 부하를 이겨내고 살아있으면- 3형 변종. 그렇지 못하면- 그냥 걸어다니는 시체인 2형 변종이 되고, 머지않아 몸이 썩으면 좀비 같은 1형 변종이 된다는게 놈들의 설명이었다.”
“….음.”
“이해했어?”
“음. 나는 따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천류제는 한점 부끄럼 없다는 얼굴로 자신이 일정 수준이상의 복잡한 개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피력했다.
“굳이 그런 무의미한 지식을 설명한 이유가 있나.”
“저 밑에 드글드글한 잡동사니도 다 그런 이유로 수집된 물건들이니까.”
바스락!
들고있던 과자봉지를 손에서 놓았다.
납작한 과자봉지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둑한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지하 시설과 달리 조명이 없는 그곳을 손전등으로 비추자, 레드카펫처럼 길을 따라 바닥에 깔린 온갖 종류의 비닐 포장지들이 빛을 색색의 빛을 반사해 어두운 통로를 오색으로 물들이며 넓은 방공호 통로가 비좁을 정도로 벽면을 채운 물건들을 비춰 보였다.
“W 그놈이 그러더라고. 자기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누군가라던가, 죽음을 무릅쓰고 달성해야될 목표 같은 것 하나 없었지만 적응자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고. 중요한 것은 대상의 기억 속 강한 결락, 그리고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필요한 기억의 ‘참고점’ 들이라고. 녀석은 그런 식으로 기억을 자극하는 것들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더라고.”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한국어등 온갖 종류의 언어가 적힌 과자봉지들은 각자 고향이 다른 여러 사람에게 어렸을 적 군것질하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한 수집품이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장난감, 통짜 철로 된 낡은 자전거, 레고로 만든 건물, 게임 콘솔, 장난감치곤 말도 안 되게 비싼 피규어 같은 것들까지. 어둑한 계단 아래 복도에 끝없이 늘어선 것들은 그런 식으로 전쟁 이전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소한 물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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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즐거웠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시간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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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할 말만 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놈은 내가 이미 그들의 동족이라도 된 듯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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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걸 말한다는 것을 잊었군요. 변종 바이러스가 한번 개화를 시작했으니, 계속 당신의 기억을 거슬러 자리 잡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만약 위험한 시기가 찾아왔다 싶으면 제가 드린 명함의 아이디로 연락하시길. 허무하게 2형 변종으로 생을 마감하기엔 당신은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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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기분 나쁜 자식이었지.”
꽈아악.
아직도 그때 녀석의 손을 마주잡은 감각이 왼손에 남아있는 듯했다.
그때만큼, 아니 그때보다 더 변종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연락하는 수준을 넘어 놈들의 집안까지 제 발로 들어왔으니. 지금 상황만 보면 결과적으로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 것이 아닐까.
“아무튼, 여기서부터 앞으로 보게 될 온갖 옛날 물건들은 단순한 수집품이 아니라 ‘예술가 연합’이라는 집단의 목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핵심 생산라인? 뭐 그런 거라고 볼 수 있지. 저쪽이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란 말이고-”
스으윽-
철썩!
“여차하면 ‘이 버튼 하나면 네놈들이 죽어라 수집한 그놈의 [예술품]이 진짜 현대 미술로 거듭나게 된다!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기 싫으면 다 꺼져!’ 같은걸 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
“….또 폭탄인가.”
“그렇지. 아까 인간 랜딩기어 하고나서 느낀건데, 정말로 변종화된 몸의 힘을 남발하면 큰일 나겠다 싶더라고.”
버석 버석 버석 버석-
손전등으로 어둑한 복도를 비추며 잡동사니 길에 들어선 다음 물건이 가장 두텁게 쌓인 부분을 손으로 파헤쳐 그 안에 폭발물을 심었다.
지금까지 제법 요란하게 움직였음에도 전혀 피로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인간으로. 만두 녀석의 경우에는 이런 내 몸상태를 몰라서 벌인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금부터라도 인간의 경계선 안에서만 움직이는 거야. 인간 박교수의 수준으로만.’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제대로 손을 써야겠지. 그런식으로 내 남은 [인간 부분]을 계획적으로 써야하는거다. 필요한 순간에 손이 모자라지 않게, 최적의 효율로 내 평화로운 미래에 걸림돌이 될 놈들을 처리할 수 있게….’
떨그렁-
순간, 텅 빈 깡통 소리가 상념을 뚫고 들어왔다. 폭탄을 심겠다고 파헤친 곳에서 떨어진 물건이었다.
“….콩 통조림?”
하긴, 있을법한 물건이다. 기억을 자극할만한 잡동사니를 모아둔 곳이라면, 생존자 대부분이 전쟁 경험자인 만큼 군 보급품이 빠져선 안 되겠지. 특히나 병사들에게 얼마 안 되는 휴식인 식사와 관련된 물건들은 더욱 각별한 편이니 당연히 그 비율이 높을 것이고.
“하, 이거 오랜만에 보네.”
콩 통조림. 유통기한이 지날 대로 지나서 뚜껑을 까면 쉰내가 사방에 진동했고, 입에 넣으면 혀뿌리에서 눈 아래까지 쉰내가 파고드는 것 같았지만, 그나마 아군이 우리에게 제공해줬던 14 특작대 시절의 보급품.
“….돌겠군.”
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방금 생각하던 방식이 그 시절 보급병으로 생각하던 내 방식과 너무 비슷해 보여서였다.
‘내 남은 목숨을 계산했어. 꼭 부족한 보급품을 어떻게 분배해야 더 오랫동안 전투력을 유지할지에 골머리를 앓던 그때처럼.’
죽음의 공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4월드 시절에 너무 지나치게 정신을 마모 시켜서? 38구역에서 이미 한번 죽음을 겪어봐서? 한 번이 아니라, 하이드의 경험까지 몇 번이나 되는 죽음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어서?
‘정상이 아니야.’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모난 선인. 이타적인 부분으로만 한껏 치우쳐 망가진,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완성자.’
내가 받은 평가였다. 여러 사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깨진 끝에 그런 식으로 어긋난 인간상이 나라고. 그래서 엇나갈 리 없는 선하고 헌신적인 선구자가 될, 그들이 기다리던 완성자라고.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움직이는 거지? 무엇을 위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거지? 아니, 애초에 내게 ‘나’라는 주체가 존재하긴 했나?
‘하이드.’
갑작스레 찾아온 공황상태에, 머리는 오래토록 몸에 익은 경로를 따라 사고를 이끌었다.
여전히 텅 빈 자리였지만. 눈을 감아도 사물의 형상이 어른거리듯 녀석의 빈 자리는 ‘하이드의 빈 자리’라는 형태로 내 안에 남아있었다.
‘말해줘, 하이드.’
대답 없는 물음은 텅 빈 공간을 울리며 한 점으로 수렴했다. 난 뭘까. 내가 정말 스스로를 남들을 위해 소모할 무언가로 생각하는 건가. 박교수의 삶은 이미 닳아서 어딘가로 사라져버린건가- 하는 흐물흐물한 생각들이 뇌수처럼 새어나와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기울어 있었다. 녀석이 쌓아둔 기억의 책장 말이다. 어째서인지 전에 봤던 것과 달리 빡빡하게 한 대 뭉쳐서는, 중심으로 조금씩 기울어 가는 듯한, 마치 빨려들어가는….
아?
‘….기억? 한 점으로 수렴해?’
.
.
.
.
스아아아악!
-3형 변종이 되는 과정!!!
생각의 끝자락이 ‘3형 변종’이라는 단어에 닿는 순간, 회백색으로 덧칠되어가던 머릿속의 무언가가 단번에 흩어지며 명료한 사고가 들어왔다.
‘뭐, 뭐? 나는 뭐냐고? 내가 원하는 건 어디 있냐고?’
이게 누구 대가리에서 기어나온 개병신쓰레기 같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이따위 멍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뭔가에 당했다. 들어오면서 내 입으로 이 공간의 용도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으면서, 정작 그 용도 그대로 이용해서 단번에 승천할 뻔했어!’
한번 물에 담궜다 뺀 것처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머리가 빠르게 과거의 기억을 주워 섬겼다. 38구역, 해피 블라인드와 변종 무더기를 상대하기위해 돔이 구축한 방어진지에서, 갑작스럽게 병사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싸우다 서로를 죽이기까지 했던 기이한 상황!
‘발 달린 화형대! 방독면으로도 막을 수 없던 이상한 연기! 거기 있던 예술가 연합 적응자중에 분명 그런 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가 ‘우울증 말기 박교수’같은 이상한 사고를 하게 된 원인에 까지 생각에 도달한 순간.
“커흐으억!”
수장당했던 사람이 가까스로 맑은 공기를 마시듯, 겨우 머릿속의 감옥에서 빠져나온 내가 받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고.
“음. 집중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아쉽군요.”
“….너 이 새끼…!”
하얀 장갑이 내 눈앞을 가로지르며 마찬가지로 하얀 양복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로서 전시물을 가슴 깊이 즐기는 당신들의 모습에 기꺼울 따름입니다.”
W, 예술가 연합의 대외활동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적응자.
흰 장갑은 내가 방금 붙여둔 폭발물을 거두어가는 중이었고.
녀석의 품에는, 지금껏 내가 내려오면서 설치한 나머지 폭발물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득 들려 있었다.
“직접 찾아와 주신 것은 대단한 영광이지만, 이런 장난감은 사양하겠습니다. 진동, 연기, 열기, 모두 예민한 전시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나저나 기이한 일이로군요. 분명 천류제가 당신보다 정신적인 완성도에서 몇 배는 앞서있을 텐데. 그는 아직 기억을 헤매는 반면, 당신은 이렇게 표면으로 거슬러 올라왔으니 말입니다.”
“…!”
‘천류제!’
목이 부러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개를 돌리자, 천류제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동상처럼 가만히 굳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숨은 쉬고 있다. 내가 멍해지기 전과 차이가 있다면, 항상 사용하던 레이저날 전기톱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대신 장식품처럼 차고 다니던 낡은 장도를 뽑아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류제, 너-!”
“아, 지금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저런 거’에 베였다간 절대로 좋은 꼴을 볼 수 없거든요.”
“….베여?”
내가 되묻자, W는 가볍게 끄덕이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캔을 천류제 쪽으로 집어 던졌다.
휘익-
어딘가 느릿하게 천류제의 앞을 가로질러, 아무일도 없이 건너편에 떨어지는 콩 통조림 깡통.
탱!
탱그랑!
그런데 떨어지는 소리가 둘 이었다.
“하하하하.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장면이 아닙니까? 안 그래도 박교수씨 만큼은 아니지만 꼭 한번 모시고 싶었던 분들인데, 이렇게 오시는 길에 덩달아 데려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콜렉터의 선택은 이번에도 옳으셨군요.”
“저건, 뭐야….”
W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고요히 잠든 것 같은 천류제와 달리,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장도는.
녹슨 금속 사이로 가느다란 혈관 같은 것들이 갈수록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것은, 매달려 있던 천류제의 허리춤과 살아 움직이는 혈관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모시고 싶었던 분‘들’이라고.”
“들 이라면….”
오면서 비행기에서 들은 천류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의 과거가 집약된 것이나 다름없는 낡은 검. 마약굴에서 죽어가던 그에게 인간이 저렇게나 위대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동경하던 친구가 죽고, 그의 시신을 화장한 불로 벼려낸 칼.
‘….어떤 실험이 있었다. 서호는 실험에 직접 참여했고, 나는 피험자에게 물렸지.’
비행하는 동안 나눈 이야기에서, 녀석은 자신의 비정상적인 신체능력에 대한 가설로 그런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실험을 당해 미쳐 날뛰던 놈들은 막 죽어서 만들어진 2형 변종처럼 보였다.’
‘박교수 너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나도 반쯤 변종 같은게 됐을 수도 있겠지.’
천류제가 그러하다면, 직접 실험에 참여했다는 그의 죽은 친우는 어떤가.
저 녀석이 영원한 이상처럼 여길 정도로 빛나는 어떤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그의 친구는.
“우리 적응자의 몸은, 형태는 정신의 형상을 따라가지만 형질은 사망 당시 주변에 있던 물질을 따라가지요. 아무리 우리라도 물리법칙을 위배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닙니까? 어보미네이션이 주변 사체들을 끌어모아 몸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W는 한결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하얀 장갑으로 천류제의 손에 들린 검을 가리켰다.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천류제씨, 그리고 적응자 ‘한서호’씨.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한서호. 천류제의 정신적 결락, 그 중심에 선 인물.
W는, 혈관이 넘실거리는 낡은 검을 그의 이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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