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12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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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까.’
당장 주변에 널린 게 모르는 것 천지였지만, 지금 생각하는 것은 당장 내가 느끼는 이질감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내가 걷고있는 곳은 입구로부터 2km, 지표면으로부터 최소 700m 아래에 있는, 곳곳에 영어와 중국어, 러시아어 안내문이 벽면에 페인트칠 되어있는 초대형 지하 콘크리트 시설이고.
정작 그 시설을 활보하는 내 양옆에 늘어선 것은 장기 생존용 거주지가 아닌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 앤디 워홀 등 나 같은 문외한에게조차 들어본 적 있는 예술사 속 거장들의 작품들이며,
그것을 자랑스레 설명하는 이는 하얀 양복의 형상으로 나타난 증강현실 드론을 통해 말하는 시대를 초월한 과학자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평범하게 이상한 것들’ 때문이라기엔 지나치게 신경이 쓰였다. 오래전이었다면 그저 찜찜한 것 정도로 치부하며 넘어갔겠지만, 4월드 초입에서 한번 대차게 뒷통수를 얻어맞으며 여로모로 깨달음을 얻은 뒤로는 이러한 직감이 주는 신호 또한 상당히 신뢰하게 되었다.
‘안드레이 게드로이츠. 내가 확인한 인물과 지금 눈앞의 인물은 일치하는가?’
모든 정황을 봐도 그렇고, 본인도 제 입으로 자신이 게드로이츠임을 인정했다. 일부는.
그렇다면 ‘게드로이츠가 아닌 나머지 일부’는 뭐란 말이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요?”
좀전의 지친 노인에서 다시 원래 말투로 되돌아온 W-게드로이츠가 말을 걸어온 것은 20세기 초 현대 미술을 지나 3D 입체 미술이 대두되는 구간을 지날 때였다.
“그쪽이 말을 많이 한 덕분에.”
“과연. 작은 정보를 짜 맞춰 큰 그림을 엿보는 것이 당신의 특기였지요. 좋습니다. 그럼 콜렉터 님을 뵙기 전에, 우리 귀한 손님이 원하는 종류의 대화를 조금 잠시 해볼까요. 나름 침착하게 기다려준 보답으로 말입니다.”
“….굳이?”
“살펴본 바, 당신은 상대에 대한 의문이 많을수록 공격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콜렉터님의 안전을 위한 조치, 그러니까 ‘안내’라는 제 일의 연장선입니다.”
“누가 보면 업무에 대단히 충실한 괴물인줄 알겠군. 초대를 보낸건 콜렉터인데 정작 그 손님들에게 환각재를 끼얹은 주제에.”
“당연히 그또한 저희 예술가 연합에 대한 ‘안내’의 일부일 뿐입니다. 지금껏 이곳에 초대된 모든 손님은 그와 같은 과정을 겪었거든요.”
….안내. 그리고 일이라.
‘지금은 내가 알고있는 W에 더 가깝군.’
과거에 들었던 놈의 이야기에 의하면 W는 공적인 일이 없을 때는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놈이 묘하게 들떠보이는 것도 ‘박교수를 콜렉터에게 안내한다’라는 일 덕분에 이곳 예술가 연합 아지트로 돌아올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기억하기론 어딘가 한 자리에 머무는 걸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놈 같았으니까.
촤아악-
결국 정황상 게드로이츠로 보이는 인물이 말과 행동에서 W라는 인물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W-게드로이츠는 반투명한 폭포 형태의 조형물을 가로지르며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내게 손짓했다. 폭포의 뒤에 가려져 있던 것은 프레임 뿐인 의자와 테이블이 늘어선 쉼터 같은 곳이었다.
“생각과 사유, 2048년 알로드 칼. 현대미술의 과도한 복잡화로 인해 대중이 예술을 거부하게까지 된 시대에 다시금 예술을 대중에게 돌려준 후기(後記)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저런 불편해 보이는 쇠막대기 의자가?”
“일단 앉아보시지요. 앉아보면 작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테니.”
“음….”
조금 꺼림직했지만, 철골의 요철 정도에 불편함을 겪을 몸은 아니라 그냥 대충 앉았다.
찌리릿!
“?!”
결과는 놀라웠다. 의자의 철골에서 미약한 전류가 흘러나오는 듯 하더니, 이내 딱딱한 철제 의자를 내게 더없이 익숙한 낡은 소파의 촉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알로드 칼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대단한 공학자였습니다.”
“설마, 접촉한 대상의 기억 같은 걸 읽고 특정한 순간의 감각을 재현하는-”
“그 정도로 대단한 공학자까지는 아닙니다. 그저 구조물에 닿는 순간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어떤 구조에서 몸이 제일 익숙하게 앉아 있었는지를 읽어내고 그걸 전기 신호로 재현할 뿐이지요. 몸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쇠막대기 의자에 닿아있지만, 정작 감각은 살면서 제일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였던 대상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후기 현대미술은 이런 식으로 감상자가 어떤 인식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중요시했습니다. 지금, 신체적 불편함과 감각적 편안함이 공존하지 않습니까?”
정확히 지금 느끼는 감각과 일치하는 감상에 고개를 끄덕이자, W는 당연하다는 듯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정(情)과 신(神)의 분리. 정신은 신체적 감각을 대체할 수 있는가, 혹은 신체적 자극이 정신의 형상을 통제할 수 있는가. 노년의 안드레이 게드로이츠가 아주 깊이 관심을 둔 분야였지요. 덫붙여 말하자면, 여기 있는 전시품은 전쟁 전 게드로이츠 컴퍼니 사옥 로비에 설치되어있던 물건입니다. 낭비를 싫어하는 그가 큰 돈을 들여 이런 복잡한 설치미술품을 옮겨올 정도로 이 작품에 애정을 품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하더니 뜬금없이 예술사 이야기로 넘어가는 W. 슬슬 이것이 모종의 시간끌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넘어가려던 순간,
“이 자리에 앉는 것이 제 안에 ‘게드로이츠’를 표면으로 불러들이는데 필요한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그의 ‘완성자’가 그 이름을 부른 순간, 잠시나마 게드로이츠가 표면으로 드러난 것처럼.”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의심은 경악으로 변했다.
“저는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라는 인물의 지식을 사용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의 사체가 있는 곳에서 3형 변종이 된, 그의 육신을 흡수한 존재이며.”
“동시에 비루할만큼 내 지위를 탐하여 되려 내게 물들어버린 어중간한 인격의 존재라네.”
저벅 저벅 저벅
입체 폭포 뒤에서 걸어나온 인물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허상이 차지한 자리를 그대로 채워넣었다.
“만나서 반갑네. 지금의 내가 추구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게드로이츠가 추구하던 ‘완성자’를 마주하니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군.”
W. 하얀 양복을 입고 나타난 그의 진짜 목소리는 청년과 노년을 뒤섞어 놓은 듯한 기이한 뒤섞임이 있었으며.
“어디, 제대로 알기 전에는 죽어도 안심하지 못하는 자네의 궁금증을 풀어볼까.”
하얀 중절모와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어딘가 우울한 청년의 얼굴과 완고한 노인의 얼굴이 붙어있는 끔찍한 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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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윌리엄 터너라는 남자가 있었지. 그의 ‘비극’에 대해서는 오래전 내 스스로 자네에게 털어놨으니 굳이 되풀이할 필요 없겠지?”
“잠깐…. 생각할 시간을 줘.”
“얼마든지.”
고작 몇 문장의 말, 그 안에 내포된 정보가 너무나도 많아서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게드로이츠의 지식을 사유화하기 위해…. 그의 사체 앞에서 계획적으로 3형 변종이 됐다고? 그게 W라는, 저 윌리엄 터너라는 [원본]의 이야기란 말인가?’
게드로이츠의 죽음, 그의 지식을 넘겨받는 행위, 3형 변종이 개인의 의지로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특정 기억 자극에 의해 실제 게드로이츠와 유사한 인격이 발현되는 다중인격의 존재라니.
“이건…. 모순이야. 말이 안돼.”
아무리 생각해도, 내 기억속 정보들과 상충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 우리 완성자께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지?”
“당신, W.게드로이츠의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는 전재하에….”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네. 나는, 아 여기서 ‘나’란 W로서 나와 지금의 나를 통칭하는 말일세. 편의상 구분했지만 사실 별개의 인격이 아니야. 일종의 정신병리학적 조울증에 가까운 상태지. 아무튼 나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말한 대로의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W의 원본인 윌리엄 터너는 그의 어머니의 손에 죽었으니까.”
“흠. 그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그 흰 양복의 사업가가 아버지였다? 아니, 그건 지나친 비약이지. 애초에 러시아인인 게드로이츠에게 ‘윌리엄 터너’같은 독일식 이름을 가진 혈육이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떻게 이어 붙여도 네놈이 하는 모든 말은 개소리가 될 수밖에 없어!”
“흠흠. 계속해보게. 사고 과정이 꽤나 흥미롭군.”
게드로이츠의 얼굴이 붙어있는 쪽이 전면에 오도록 고개를 살짝 돌린 W는 이 상황이 흥미로운 퀴즈라도 되는 양 애매한 답변만 늘어놓고 있었다.
“자넨 대단히 뛰어난 직감을 가진 사람이지.”
“그게 뭐, 내 생각이 전부 비합리적인 감에 의존한 거라고?”
“아니, 순수한 칭찬이라네. 내가 살펴본 바로는, 이 박교수라는 인간은 현존하는 그 어떤 인류보다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헐거운 사람이거든. 말하자면 정신적 외상에 의한 후천적 천재라고 할까.”
톡톡톡
“인간의 뇌, 그 안의 무의식은 말하자면 필터없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대한 저장고 같은 것이야. 번잡한 도시의 사람이 하루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천명이라면, 의식이 기억하는 것은 고작 한 두명이지만 무의식은 시각이라는 감각이 인지한 대상, 그 수천 명의 사람을 모두 저장하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 방대한 쓰레기통 같은 저장고와 연결될 기회가 기껏해야 꿈을 꿀 때 정도지만, 자넨 달라. 자네의 표층의식은 기이한 경험에 의해 수도 없이 심층의식을 들락거린 경험이 있어.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하이드.”
“그래. 하이드. 자네가 하이드라고 이름 붙였는지, 아니면 스스로 하이드라고 명명했는지 모를 또 다른 부인격 말이야. GG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자료들을 보면 그 친구의 존재가 얼마나 자네의 표층의식을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닿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더군. 참 흥미로운 결과야. 게드로이츠가 살아있었다면 그걸 가지고 또다른 프로젝트를 계획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GG의 가장 중요한 데이터는 이미 자네가 모조리 다 들고갔으니, 대충 그런 가능성도 있겠거니 하는 수밖에.”
관자놀이를 가리킨 손가락이 금속판이 덧대어진 가슴을 향하더니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손짓으로 변했다.
“요는, 자네가 그냥 ‘감’이라고 생각한 직관이 의외로 셀 수 없는 계산과 경우의 수를 거쳐 도출된 논리적인 답안이라는 것이지. 방대한 데이터가 들어있는 무의식이 어떤 의문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내면, 자네는 ‘음? 왠지 이것 같은걸?’ 하는 직관으로 그 결론을 표층의식 위에 담게 되는거야. 이후에 이뤄지는 생각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결론을 의식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검산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지.”
“….그래서. 갑자기 윌리엄 터너가 어쩌니, 게드로이츠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왜 갑자기 내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내가 굳이 입으로 설명하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이야기가 자네가 침착하게 생각할 5분의 시간이면 전부 알아서 전달된다는 이야기지. 생각하게, 박교수. 자네가 저도 모르게 떠올린 정답들을 살펴보는게야!”
W.게드로이츠는 그렇게까지만 말하고는 정말로 조개처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반대쪽 우울한 청년의 머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그럴 리가. 나는 이미 저자의 발언이 모순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
‘똑똑히 기억해. W는 꽤나 그럴듯한 비극을 가지고 있었어.’
38구역 캐러벤 숙소에서의 만남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덕분에 그날 나눴던 대화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번듯한 사업가이며 흰 양복을 즐겨입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던 아들과, 잦은 외도로 피폐해져가던 어머니.
어느 날, 아들은 밤중에 몰래 아버지의 하얀 양복을 입어보고,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하얀 실루엣은 그를 매정한 아버지처럼 보이게 했다.
술. 마약. 오랫동안 쌓여온 원망. 안겨오는 어머니를 거부하는 아들과, 그런 모습에 또다시 상처받아 분노한 여자. 그리고, 타앙-
그리고 윌리엄 터너는 죽어서 하얀 양복의 W가 됐으며, 그날의 죄책감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어떤 특수한 3형 변종을 만들어냈다.
….여기까지가 38구역 숙소에서 W가 해준 그의 이야기다.
이 기승전결이 완벽한 이야기에 거짓말마저 없다면, 어떻게 게드로이츠라는 제 3의 인물이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로 꽉 찬 이야기다. 부유한 가정, 자수성가한 바람둥이 남편과 버림받은 아내, 드물게 돌아오는 아버지를 동경하는 아들….
‘….음?’
순간, 뭔가 덜컥! 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윌리엄 터너가, 저렇게 죽어서 3형 변종이 됐다고?’
아니, 물론 3형 변종이 될 수는 있는데. 뭔가 이미지가…. 배경이랑 어울리지 않았다.
‘변종 바이러스는 대전쟁 이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도중이었다면 소총에 난사당한 적군이 좀비처럼 되살아나 달려드는 꼴을 봤을테니까.’
‘그런데, 저 부유함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집안의 가정사가, 3차 세계대전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시대적 배경이 맞지 않았다. 부유한 사업가 남편의 외도에 분노한 아내가 실수해서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는 전쟁 전에나 있을법한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거기서 희생된 윌리엄 터너는 3형 변종 W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W의 원본, 윌리엄 터너가 거기서 죽지 않았다?’
분명, 그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분노한 어머니는 하얀 양복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타앙-
“….죽은 쪽이 아버지 양복을 빌려 입은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 쪽이었나?”
“역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빠르군. 술에 취한 어머니가 엉겨붙을만큼 거리가 가까운 상황이었지. 총구를 겨누는 모습에 아들은 기겁했고, 이미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은 어머니를 어떻게든 말리려다 그만, 타앙-”
“총알은 어머니의 폐를 관통했다네. 엄청난 고통과 출혈속에 어머니는 악귀처럼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지. 새하얀 양복은 피투성이가 됐고 말이야. 죽자고 달려든 쪽은 어머니였지만…. 실수라도 그 광경은 나의 원본인 윌리엄 터너에게 엄청난 트라우마가 됐지. 지금 이쪽 반절을 차지하는 이 우울한 젊은이가 바로 그 친구라네.”
“….딱히 숨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우울한 청년쪽 얼굴이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노인의 얼굴이 입을 열었다.
“자아, 훌륭한 시민이자 의대생이었던 윌리엄 터너는 존속 살해의 현행범으로 재판에 넘겨지게 됐지. 그는 나름대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누가봐도 그가 살인범인 상황이었어.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는 곧 불타는 여론으로 되돌아왔고, 윌리엄은 종신형이라는 무거운 형벌을 마주하게 됐지.”
“안드레이 게드로이츠가 찾아온 것은 재판 후 제가 감옥으로 옮겨지길 기다리던 처지였을 때였습니다.”
의식의 흐름이 옮겨가듯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려지며 청년 쪽 얼굴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 논문을 읽어봤다고 하더군요. 감옥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어차피 평생 죄수로 살 몸인데, 기왕이면 넓고 쾌적하고 식사도 매끼 뷔페식으로 나오는 멋진 빌딩에 갇혀 살 생각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스카웃 제의였습니다. 사내 복지 차원에서 게드로이츠 컴퍼니 빌딩에 상주할 정신과 의사를 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의사라.”
“윌리엄 터너의 ‘정신 박리에 대한 고찰’은 지금 검색해도 자료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당연히, 주치의로서 고용됐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그가 개발중인 게드로이츠의 게임의 연구개발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품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유능한 인재였던 윌리엄 터너는 비밀스러운 연구개발을 위한 완벽한 인재였으니까요.”
삐걱-
W-게드로이츠. 노인과 청년의 얼굴을 모두 가진 적응자는 한쪽엔 비웃음을, 한쪽엔 부끄러움을 담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라는 위대한 과학자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경지는 존경에 시기심이란 감정을 더했고, 그에게 목줄이 매인 현실은 거기에 굴욕감을 더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울타리안에서 썩어가던 중….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
W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앉아 있던 곳 뒤편의 벽으로 다가가 콘크리트 사이의 작은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녀는 수척한 모습에 비해 밝았습니다. 게드로이츠는 그녀야말로 GG 개발의 중심이 될 인물이며, 앞으로 인류를 담게 될 원대한 전자 세계의 방주를 관리할 첫 번째 주인이 될 사람이며, 그곳에서 빼앗긴 삶을 되찾을 첫 번째 수혜자가 될 주인공이라 말했습니다.”
덜컥! 드르르륵!
W가 손을 집어넣은 곳이 당겨지며 콘크리트 벽 너머에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핵 방공호의 거주지역, 그중에서도 특별한 재난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진 가장 안전한 방, 패닉 룸(Panic room)
“그 소녀의 정신을 연구하고 내면을 알아갈수록, 저는 그녀에게 빠졌습니다. 정확히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그녀가 이런 영문모를 실험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녀를 보듬어주고, 그녀가 응당 받았어야할 보살핌과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치욕스럽지만, 저는 나타샤의 아버지로서 게드로이츠의 자리마저 탐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울한 청년의 얼굴은 자신의 오른쪽에 붙은 노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안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나오며, 콘크리트 벽 사이의 하얗고 이질적인 문이 활짝 열렸다.
마치 정신병원처럼 새하얀 벽에, 눈이 아릴 듯 밝은 조명.
수없이 매달린 각양각색의 화면과, 각각의 화면에 연결된 굵은 전선.
그리고, 그 모든 전선이 등에 연결된, 어딘가 낯익은 여성의 뒷모습.
“나타샤 게드로이츠. 백혈병으로 죽어가던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유일한 혈육이자, 본디 GG의 유일한 관리자로 내정되어있던. 최초의 데이터 소울을 만들어낸 원본이시며, 그녀를 원본으로 한 최초의 이지를 가진 3형 변종, 콜렉터님이십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 몇 개나 나왔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은 둘 다 아니었다.
“세계수….님?”
세계수. GG의 관리인으로 무수한 시뮬레이션 세계를 관리하는, 은빛 머리칼의 소녀.
눈앞에 있는 여성은, 그녀가 나이를 먹으면 꼭 이렇게 자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를 보고 그녀를 떠올리셨다는 건, 역시 그녀를 직접 만났다는 뜻이겠네요.』
여성의 목소리는 성대가 아닌 진동판을 통해 울리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완성자, 제 자매나 다름없는 ‘세계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인 만큼 꼭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었어요.』
세계수는, 아니 그녀와 같은 모습을 한 콜렉터는, 잠이 든 듯 고요한 얼굴과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의 화면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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