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13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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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야기죠?』
“복잡하다기보단…. 좀 의아해서.”
숨을 고르고,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생각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분명 중요한 정보다. 여전히 어떤 일을 진행중인 듯한 게드로이츠. 그것을 알고있으며 이미 일부 연관된 것으로 추측된 예술가 연합. 지금 이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토씨 하나하나까지 높은 가치의 정보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정보들이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거지? 지금 시점에? 이런 방식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보를 굳이 내게 전달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이 급박한 순간에, 그런 은밀한 수단으로 메시지를 보내어, 잔뜩 경계하며 들어온 나를, 그들의 수장이자 완벽하게 비전투 개체로 보이는 콜렉터 앞에 데려다 놓았나. 도대체 왜? 무슨 연유로 내게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거지?
『그야,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박교수,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윌리엄 터너, W, 콜렉터와 나타샤, 영문 모를 일을 벌이고 있는 게드로이츠…. 이게 전부 다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네. 당신이 GG라는 전자세계가 잉태한 유일한 성공표본이 되어버린 순간, 안드레이 게드로이츠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이 당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준비라면….”
『곧 시작될 돔과 렙터의 전쟁. 2번 구역에 자리잡고 끊임없이 방사능을 퍼뜨리던 3형 변종 ‘워’. 이미 오래전에 발사 준비를 끝마친 넥스트 스페이스의 우주 왕복선, 저 하늘 너머에 당신을 기다리는 서버룸. 이런 것들을 말해요.』
내가 나와 전혀 인연이 없는 하얀 양복 입은 두 얼굴의 괴물이나 케이블에 연결된 여성을 돌아보자, 수많은 화면 속 이모티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의 중심에 있어요. 원하든, 원치않든 당신은 아버님이 준비한 마지막 계획에 휘말리고 말겁니다.』
『저는 그 전에 당신이 알기를 바랐을 뿐이에요.』
지잉-
화면을 채운 이모티콘이 사라지며 그 자리에 누군가의 영상이 자리잡았다.
엉성한 각도, 좋지 않은 화질, 누가봐도 실력 없는 아마추어가 끔찍한 장비로 촬영한 것이 분명한, 그렇기에 오히려 어떤 가족적인 따듯함이 느껴지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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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드로이츠. 굳이 그런 오래된 캠코더를 쓸 필요가 있습니까. 보안 카메라 설정만 조금 만지면 굳이 손댈 것도 없이 3차원 영상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텐데요.”
“터너 자네는 그렇게 대가리가 굳어있는 게 문제야. 우리 정도 수준의 공학자라면 계산을 넘어선 어떤 감성에 호도될 필요가 있단 말이지. 터너 자네가 그놈의 하얀 양복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진공 스타일러를 만들어서 방에 둔 것처럼 말이야.”
“그, 그건-”
“윌, 저 영감 말은 무시해. 저건 이미 우리 세대의 모든 과학적 역량을 배우지도 않고 감으로 때려 맞추는 경지에 도달한 미치광이의 의견이니까.”
“아버지가 그 정도는 아니에요 리 쉬에씨. 저분도 나름 공부를 하신다구요!”
“연구 보조인 제 입장을 봐서라도 제발 그만둬줬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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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영상 기록이에요. 이건 11년 전, W의 원본이 아버님의 연구팀에 합류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네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3년 전인가.”
『네. 아버지는 자기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는 취미가 있었어요. 워낙 지식의 차원이 남다르다보니 한번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자꾸 같은 말 반복하는게 귀찮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스스로의 대화를 기록하는 습관이 생기셨어요.』
영상 속 게드로이츠의 모습은 여러 매체를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과 비슷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활기차고, 당당하며, 전세계를 상대로한 기자회견에서 ‘엿이나 쳐먹어라’를 당당히 외치던 괴짜 과학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쪽은, 방금 그 영상에서 18개월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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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브라질에서…. 변종 바이러스에 대한 임상 시험을 했다고? 그것도 사람을 상대로?”
“정확히는 브라질 군정에서 독자적으로 시행한 것 같습니다.”
“대체 왜!”
“그쪽에서 핫라인을 끊어버려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실패작이 군사적인 용도에서 충분히 유용한 가치를 지녔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지금껏 투자된 금액에 난색을 표하던 WHO(세계보건기구)에게 중간 결과물의 공유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금액의 기부를-”
“애초에 T-4, T-31, T-78번 샘플은 피험체가 과도한 공격성을 보여서 폐기하기로 했잖나! 도대체 왜 그걸 그놈들이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거냔 말이야! ‘적응자 계획’은, 변종 바이러스는 단순히 강력한 괴물을 만들기 위한 게 아니라고! 우리 후손들이 예정된 미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생물학적 특이점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인류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였단 말이다! 그것을, 고작 그깟 돈 때문에, 쓰레기 같은 권력 때문에!!!”
“….마저 말씀드리자면, 실험 대상 지역인 브라질의 마약굴은 피험체를 포함해 지역 전체를 생화학 오염지역으로 지정하고 소각했다고 합니다. 이건 브라질 군부에서 공유해준 해당 실험의 레포트입니다.”
팔락. 팔락.
“….모두 다, 하나같이 공격성을 표출했다니.”
“역시 유전자 배열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아니야. 변종 바이러스는 완벽해. 그것은, 숙주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든 본질을 바깥으로 끌어내지.”
“나는 그게 사람들을 어떤 이상의 존재로, 가식과 꾸밈없는 본질적인 어떤 완벽한 인간상으로 거듭나게 할거라 믿었어. 피할 수 없는 멸망을 이겨내기 위한 강한 힘이 되고, 절망이 안개처럼 깔린 세상에서 서로를 위한 긍정적인 존재가 되게끔 변모할 거라, 그리 믿었지. 그리 믿고 만들어냈지.”
“….잘못된 것은 사람이었어. 변종바이러스가 드러낸 인간의 본질이 저 모양일 뿐이야. 추악하고 뒤틀린, 서글픈 짐승의 형상.”
“적응자 계획은 실패야. 변종 바이러스로는…. 사람들을 예정된 멸망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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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 게드로이츠는 마치 인류 전체에게 배반당한 것 같은 침통한 목소리로 윌리엄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첫번째 계획. 변종 바이러스를 통한 적응자 계획은 가장 단순한 방법이었어요. 어떤 식으로든 멸망은 다가올 것이니, 사람들을 그 어떤 역경이라도 견뎌낼 수 있는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자.』
“변종 바이러스가 괴물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게 아니라…. 일종의 진화를 위한 계획이었다고? 인류 전체에 대한?”
『네. 그 흔적은 지금의 변종에게도 남아있어요. 식량, 수분 섭취 없이 장기간 생존가능한 메마른 환경에 특화된 육체. 30시버트 이상의 방사능에 피폭되어도 아무 문제 없는 방사능 적응성.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기아와 방사능…. 핵전쟁 이후 환경에 대한 대비.”
『기아는 어떤 식으로든 인류가 멸망에 가까워지면 발생할 문제이며, 방사능은 굳이 핵전쟁이 아니라도 태양풍에 의한 감마선, 천체 폭발, 운석 충돌, 심지어 기계에 의한 멸망 시나리오에서도 존재하는 대표적인 위협이었어요. 실험 단계의 변종 바이러스에 두 기능이 가장 우선적으로 포함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죠.』
그것은 일종의 동화적인 상상이었다.
인간의 자아, 그 깊숙한 곳의 본질을 끄집어내어 생물학적 육체로 변모시킨다면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시련을 이겨낼 단단하고 강인한 껍데기가 되어줄 것이라는 상상.
다른 이들에겐 허황된 상상이었지만, 게드로이츠에겐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게드로이츠는 그의 역작 ‘변종 바이러스’를 만들어냈으며, 그 어떤 방법보다 가슴아픈 방식으로 배반당했다.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그 생에 가장 끔찍한 기억을 바탕으로 재탄생했다.
지이잉-
또 다른 영상. 상단의 날짜는 앞선 영상에서 다시 1년이 흐른 시점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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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러시아, 중국, 스위스…. 오만 버러지들이 다 들러붙는군. 이래서는 균형을 유지할 수가….”
벌컥!
“게드로이츠, 당신 대체!”
“소리지르지 말게 리 쉬에. 자네 목소리는 쨍하니 울려서 머리가 아파.”
“오르페우스,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이 이름을 듣고 생각나는게 없나요!”
“재밌군. 자네는 불교 신자로 알고있는데. 갑자기 고대 그리스 신들에게 관심이 생겼나?”
“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건…. 이건 일반적인 병기가 아니잖아요! 이런 대량 학살 무기를 왜 만들고, 심지어 그 설계도를 전 세계의 열강들에게 넘기고 있는거죠?”
“바보들을 꼬드기려면 사탕이 필요하거든. ‘완성자 계획’은 그냥 살포하기만 하면 되는 바이러스와 달리 꽤 여러 가지로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해.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100년간은 없을 전무후무한 병기’ 같은 소리를 했더니 전 세계의 지도자들이 설탕에 꼬이는 개미처럼 몰려들더군.”
“그러니까 왜 일어나지도 않을 ‘멸망’에 집착해서 되려 제 손으로 그걸 앞당기냐고 묻잖아요!”
“오오, 리 쉬에. 그건 내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 이로군.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실수들처럼, ‘이렇게 가다간 인류가 전부 뒈지겠다’라는 나의 예측도 바보같은 실수이길 바랐어. 지난번 적응자 계획의 실패에서 사람들의 실체를 들여다본 뒤로는 오직 나의 가정이 그릇 됐기를 바랐네. 그래서, 나 대신 미래를 들여다보고 계산해줄 친구를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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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 게드로이츠는 그의 연구실 한켠에 있던 커튼을 걷었다.
수많은 화면, 수많은 케이블. 직경 1m 정도 구체형 기계 본체.
가운데 있는 구체형 기계를 제외하면, 눈앞에 있는 콜렉터와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
“설마…?”
눈앞의 영상과 그녀를 번갈아 가리키는 질문에 콜렉터는 슬픈 이모티콘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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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형 미래 연산 시스템. 내가 팔아넘긴 대량 살상 무기 설계도의 대가로 받은 각국의 정보 라인과 연동되어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가상의 지구를 만들어내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지구가 가속된 시뮬레이션 속에서 각기 다른 조건으로 흘러가는 것을 봤다네. 결과는…. 절망. 절망뿐이었지. 어떤 미래도, 어떤 조건을 부여해도 인류는 자멸해. 운명이라는게 존재하는 모양이야.”
“….게드로이츠.”
“그래서,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최대한 예측 가능한 변수를 줄이고자 했다네. 예상 가능한 멸망의 시나리오 중 그나마 내 힘으로 최대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실현시키는 것이지. 핵전쟁, 조금 수정한 변종 바이러스의 살포, 돔, 렙터…. 뭔가 이것저것 많이 준비했지.”
“안드레이 게드로이츠!”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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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눈의 게드로이츠가 자신의 계획을 중얼거리는 동안, 리 쉬에의 눈은 그가 만들어낸 미래 연산 시스템이라는 기계에 못 박혀 있었다.
커다란 구형 기계. 수많은 케이블.
영상 속 그녀의 눈이 의심에서 경악으로, 그것을 넘어 증오로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리 쉬에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이 향한 곳. 케이블 더미 가운데는 내게도 몹시 낯익은 관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투명한 튜브를 꿀럭거리며 유기물과 수분을 내부로 공급하는 모습.
생명 유지 장치, 모든 접속기에 포함되었으며, 나도 장시간 플레이할 때 도움을 받았던 그것이, 게드로이츠가 개발했다고 하는 구체형 기계에 연결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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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를…. 몇 달 전에 이쪽 연구동으로 옮겨온 나타샤는 어디 있어!”
“자네가 생각하는게 맞네. 이래저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저 안에 ‘연결’시켰지. 괜찮아. 완벽하게 수면중인 상태에서 진행됐으니까. 그 아이의 시선에서는, 잠에서 깨어나보니 고통스럽기만 하던 몸이 완전히 새것처럼 재탄생한 느낌 이었을거야. 정신이 드는 순간의 배경은 그 아이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진짜 바오밥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해두었으니, 아마 선물이라도 받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걔는, 다, 당신 딸이잖아! 상태가 나빠져서 그녀의 병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겠다고 여기 틀어박혔잖아!”
“유전적 결함에서 기인한 질환을 치료하는 것은 나라도 매우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 나는 그 아이를 정말로 아꼈지만…. 지금의 내겐 그 정도 연구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했어. 많은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저지른 사람으로서, 많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도대체,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까지 된거야….”
“오해하지 말게. 그녀는 지금 꽤 괜찮은 상태야. 게드로이츠의 게임, 저 전자로 이루어진 세계 안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관장하는 중이거든? 놀라운 일이지. 기계만으로 이루어졌을때는 어딘가 어색하고 삐걱거리던 시뮬레이션이, 살아있는 인간의 정신이 한 방울 스며든 것 만으로도 놀라울만큼 다이나믹하고 섬세한 세계로 완성됐으니 말이야.”
“나타샤는 이제 저 안에서 마음껏 걷고 뛸 수 있지. 날 수도 있다네.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를 행성 하나 가득 자라나게 할 수도 있지! 이게 그 아이에 대한 치료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물론, 자네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터너 군은 그것을 나타샤에 대한 살인 행위라고 정의했지만 말이야. 하마터면 내 인생의 역작을 부술 뻔 했지. 그 친구가 그렇게 역동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
“이, 이이이이 악마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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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탕! 타앙!
게드로이츠의 손가락이 연구실 구석에 쓰러진 피투성이 양복을 가리킨 순간, 리 쉬에의 총구가 결국 불을 뿜었다.
세 발의 탄환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가볍게 피한 게드로이츠의 옷깃을 스치고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빗나간 탄환 중 하나가 박힌 곳에서 전기 스파크가 튀고, 스파크는 온갖 화학물질이 가득한 연구실에서 거대한 불길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끝까지 보세요. 거의 마지막이니까.』
게드로이츠 컴퍼니 사옥, 지하 연구실에 불길이 번져가는 가운데 리 쉬에가 저주를 퍼부으며 방화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불길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 불길과 함께 안에 든 모든 것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타버리길 바라는 모습.
[리 쉬에도 필요한 시나리오에 들어섰군. 다음은… 자네 차례라네. 윌리엄 터너 군.] [지금껏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해주게. 난 할 일이 많거든] [적어도 실험에 통제 요인은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존자라는 양떼를 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철컥!
[당분간은…. 렙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으니 말일세.]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게드로이츠는 말라붙은 고목과 같은 눈으로 쓰러진 하얀 양복의 연구원과 자신의 ‘미래 연산 장치’를 눈에 담은 다음.
리 쉬에가 떨어트리고 간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쏴버렸다.
타아앙-
은색 권총이 불을 뿜고.
머리가 박살나고, 뇌수가 튀며,
시대의 천재는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가 떠나고 몇 초 후,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하얀 양복의 남자가 피를 토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고통스러운 듯 허우적거리던 그의 눈이 자욱한 연기와 불길, 피가 샘솟는 자신의 가슴과 수많은 케이블이 연결된 구체를 스치며 독기가 깃들었다.
피 묻은 손이 나타샤 게드로이츠가 들어있는 구체를 쓰다듬고, 힘겹게 실험실 내부의 조작 패널을 더듬었다.
[생체 코드…. 쿨럭! 게드로이츠 그 작자의 생체 코드로 락이 걸려있어…. 코드는, 생명 신호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안돼, 이대로는….]머리가 터진 게드로이츠의 시체를 끌고와 몇 번이고 보안 패널에 손을 올리던 남자는, 점점 퍼져가는 불길 속에서 어지러이 보관된 앰플을, ‘변종 바이러스’라는 라벨이 붙은 병원체를 눈에 담았다.
[….살아있는. 살아있는 게드로이츠의 생체 코드가 필요해.] [변종화 과정. 실험에 기록된 대로라면, 어느정도 그 과정을 유도할 수 있어…. 쿨럭!] [그동안, 내가 변화하는 동안 나타샤도 살아있으려면….]피슉!
앰플에 담긴 액체가 순식간에 손목으로 빨려들어갔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운지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가까스로 손에 쥔 다른 주입기를 ‘미래 연산 장치’의 튜브에 꽂아 넣었다.
쓰러진 그는, 머리가 터진 게드로이츠의 시체를 그의 발치로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변종 바이러스 개발에는 나도 꽤 관여했어.] [게드로이츠 그자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T-92는 상당히 괜찮았지…. 그자가 적응자 계획을 내다버린 시점에서 조금 더 진보한 바이러스거든…. 이건 산 사람에게도 듣지….] [….사실, 게드로이츠가 이걸 세상에 퍼트려서 죄다 죽여버렸으면 하는…. 쿨럭! 마음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에 혹을 하나 떼어버렸다는 듯 못내 기뻐하던 아버지. 유명인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소재에 홀린 메스컴, 그들의 기사에 따라 나를 미치광이 사이코패스라 판결한 대중, 대중의 의견에 따라 과실치사가 분명함에도 여러 정치적 이유로 내게 종신형을 내린 판사…. 나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순수하게 대해준 어머니를 내 손으로 죽였다는걸 깨달았지.] [그런 나를, 빈 껍데기 같은 몸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유로 게드로이츠의 노예 계약에 붙잡혀온 나를 되살린 것은 너였다. 병으로 세상과 격리되어, 미디어와 사회의 오물에 물들지 않은 지극히 순수에 가까운 소녀. 네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마치 어머니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같았지.] [쿨럭! ….나타샤. 네가 나의 영혼을 살린 순간, 나는 너를 위해 남은 생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살아…. 만약 우리 둘 다 살아난다면, 그 어떤 추악한 모습으로라도 살아난다면, 내가 네 새 아버지가 되어주마. 저 악마같은 미치광이와 달리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오직 너를 위한 존재가….]우드득!
남자, 윌리엄 터너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몸의 내부에서 생겨난 육신이 헌 육신을 뚫고 나오는 고통은 의지로 버텨낼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반죽이되던 육신은 그 난잡한 과정중에 남자의 발밑에 있던 머리가 터진 시신을 끌어들였으며.
그 옆에 있던 구체형 기계는 안에서부터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없는 기계를 대신해 그것에 연결된 화면은 온갖 언어로 표현된 비명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에 가려진 캠코더의 영상속에.
삑- 삑- 삐이익-
누군가의 비틀거리는 실루엣이 게드로이츠의 보안 패널을 해제하는 장면이 담겼다.
방화 셔터가 열리고, 순환 장치가 가동되며 점차 연기가 사라져가는 사이.
비틀거리는 하얀 양복의 남자는 연구실 구석의 케이블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많은 화면에 연결된 케이블과, 그 케이블뭉치가 등에 연결된 소녀.
갓 태어난 듯 새하얀 피부에, 어딘가 금속의 잔재가 남아있는 소녀.
[….상당히 혼란스럽지만, 이건 확실하군요.]소녀를 향해 다가간 하얀 양복의 존재는 잠이 든 듯 고요한 얼굴의 소녀의 이마에 자신의 두 얼굴을 번갈아 입을 맞추었다.
남자, W는 벽과 소녀의 장치를 연결하던 것들을 세심하게 풀어낸 뒤, 마치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연구실 한쪽에 놓인 컨테이너에 조심스럽게 그녀와 그녀의 구성품들을 담았다.
W가 콜렉터와 함께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며, 영상은 마무리 되었다.
『이게 저희들의 이야기에요.』
게드로이츠의 충격적인 과거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콜렉터의 부드러운 기계음이 흘러들어왔다.
『고통은 없었지만, 믿었던 아버지의 손에 산채로 해체되어 기계의 구성품이 되었다는 그 끔찍한 사실. 그 순간의 기억을 토대로 3형 변종이 된 나타샤 게드로이츠가 지금의 콜렉터.』
“어머니를 살해한 순간, 그리고 겨우 되찾은 삶의 희망이었던 소녀가 나와 고작 몇 미터 떨어진 곳의 실험대 위에서 끔찍한 실험재료 취급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 두 가지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의 윌리엄 터너, 그리고 그 윌리엄 터너가 ‘상상한’ 이상적인 게드로이츠의 모습이 뒤섞인 형태로 탄생한 3형 변종이 지금의 W.”
『우리는, 예술가 연합의 시초가 된 두 변종은 그렇게 탄생했어요.』
나타샤 게드로이츠, 아니 과거엔 그녀였던 콜렉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형상화한듯한 이미지를 화면에 띄워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알아챘겠죠. 이미 게드로이츠가 미래 연산 장치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리 쉬에의 반응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뿐만이 아니라 쓰러진 윌리엄이 불길 속에 정신을 차리는 것도, 스스로 남긴 시체를 활용해 윌리엄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전부 알고 있었어요.』
“사실상 지금의 예술가 연합은 그자가 의도한대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술가 연합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지금의 상황, 그 모든 것이 말입니다.”
콜렉터와 W의 말이 머릿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선 영상속 게드로이츠의 마지막 말이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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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실험에 통제 요인은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존자라는 양 떼를 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당분간은…. 렙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으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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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머리를 쏴서 자결한 게드로이츠.
생존자라는 양 떼를 몰기 위한 통제 요인.
렙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나는 두 손에 머리를 묻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했을거에요. 그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로 각국의 정부와 많은 연줄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특히나 전쟁 병기에 관심이 많은 군부와 인연이 있었으니까. 그들중 적합한 대상을 물색해서 조치를 취하는 것은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거에요.』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는 죽었다. 그것은 명실상부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류의 존속을 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리고, 부담감에 으스러지던 와중에.
그 모든 프로젝트를 망가뜨린 ‘인간’ 그 자체에 실망하며 종국엔 완전히 뒤틀려버린 그의 인격은,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정신은 그의 육체와 함께 소멸했나?
“아마도 어떤 트리거로 깨어나는 방식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황상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당신이겠지요. 박교수.”
“이런 제기랄….”
두 얼굴을 가진 괴물의 목소리는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야기했다.
“구스타브 알 하르브 렙터…. 대체 언제부터?”
어떤 육신에 다른 인격이 깃드는 기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내가 몸소 체험한 GG의 기술이었다.
안드레이 게드로이츠. 미래를 엿보고, 세계를 제단했으며, 국가의 수장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존재.
GG를 만들고, 수많은 데이터 영혼을 감금해 셀 수 없이 많은 세계를 만들어 냈으며, 그러한 시련속에 지금의 나를 가공해냈다고 할 수도 있는 존재.
그리고, 구스타브 알 하르브 렙터. 돔을 제외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의 수장이며, 현재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 수많은 군대를 끌고 남하하고 있는 자.
『서버룸이 GG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관이라면, 저는 그 가상 연산 시스템의 ‘메인 하드’로서 게드로이츠 컴퍼니의 위성과 그 연결망이 닿아있는 전자기기라면 어느 것이든 제 몸처럼 다룰 수 있습니다.』
『렙터 소사이어티는 원칙적으로 제가 침투 가능한 게드로이츠 컴퍼니 산 디지털 기기를 금하고 있지만, 가끔 그들의 약탈품에 섞여있는 기계들을 통해 렙터 소사이어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염탐할 수 있었어요. 게드로이츠는 끔찍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콜렉터’라는 독자적인 인격으로서 제 목적에 그것이 상충하기에 그것을 저지하고자 합니다.』
지이잉-
콜렉터의 단호한 기계음과 함께 그녀의 화면에 새로운 영상이 떠올랐다.
바로 나. 47구역 개인 쉘터에서 근근이 살아오던 나, 45구역 지하에서 이안, 벡스와 함께 총격적을 벌이던 나, ‘교수’캐릭터로 3월드에 들어선 나, 성자, 워로드를 거쳐 끝내 GG를 구성하는 모든 데이터 소울과 함께 탈출하는데 성공하는 나의 모습.
『아직도, 여전히 모든 것이 게드로이츠가 준비한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그것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셋 뿐.』
『그의 정신을 오롯이 이어받아 계획을 그 의도대로 통제하려는 렙터-게드로이츠 본인이거나.』
『GG의 메인 하드가 인격을 얻은 존재로서 그가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구성해놓은 온갖 게드로이츠 컴퍼니 시스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 콜렉터거나.』
『그리고 그가 이미 버린 프로젝트에서 가장 적법한 방법으로 그가 그나마 순수를 유지했던 시절에 준비한 유산을 물려받은 당신. 오직 이 셋만이 이미 완성에 가까운 그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라고 판단했습니다.』
수많은 나의 영상이 흐려지며 나타난 것은 지금의 나. 러시아와 중동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깊은 핵방공호 지하에서 콜렉터와 W를 마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부탁할게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세상을 구해주시지 않겠어요?』
간절한 기계음에 내가 쉽사리 답하지 못한 이유는, 그 화면에 비친 내 모습 때문이리라.
콜렉터의 흐릿한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은 군복을 입은 인간형 괴물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47구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다나가 떠올랐다.
대화방 사람들, 벡스와 이안을 비롯한 내 사람들도.
생각보다 변종화의 진행이 너무 빨랐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아니, 그 때문은 아니리라.
왜냐하면, 체감상 ‘단단한 병뚜껑을 여는 정도’의 힘만 들인 것 같았으니까. 무리를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은 끔찍할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힘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변하고 있어.’
마치, 필요한 순간이 다가오기라도 하는 양.
얼마나 남았을까. 1년? 한 달? 일주일?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 안에 어떤 가느다란 선이 있고, 변종화 단계가 그 선을 넘는 순간 돌아올 수 없다는 감각.
나는, 끝내 콜렉터의 부탁에 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47구역에 있는 나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세계고, 상속자고, 모두 내팽개치고. 그저 돌아가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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