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14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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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같이 그냥 죽어줄 생각은 없다.’
3형 변종이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박교수는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 W와 콜렉터만 봐도 그들의 원본이 된 윌리엄 터너와 나타샤 게드로이츠를 그저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는 사람 정도로 대하지 않는가?
나는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오지랖이 넓은 사람일 뿐이다. 그저 내 욕심껏 눈에 밟히는 사람을 건져낼 뿐이지 한없이 희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방법. 방법을 내놔.”
『방법이라면….?』
“W는 변종 바이러스의 개발에 관여한 인물이고, 콜렉터 당신은 안드레이 게드로이츠가 남긴 시설 대부분에 관여할 수 있다고 했지. 심지어 당신들 적응자라는 스스로의 존재를 아주 열성적으로 연구해왔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지금 내게 일어나는 변화를 억제할 방법도 알고있지 않겠어?”
『박교수씨.』
“3형 변종으로 변해가는 내 몸을 원래대로 돌리거나, 최소한 현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내놔. 그렇다면, 너희들 말대로 성자든 구원자든 되어주지.”
그러니, 거래를 해야하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게 내게 있고 내가 원하는 게 상대에게 있다면 당연히 이게 자연스러운 순서가 아닌가.
콜렉터는 침묵했고, 그녀의 화면에는 난감한 듯한 이모티콘만 잔잔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당신네들에겐 그리 반갑지 않은 제안이겠지. 안 그래? 그냥 내버려두면 지금의 박교수는 아주아주 높은 확률로 ‘박교수였던 3형 변종 적응자’로 재탄생할 테니까. 너희들이 바라는 구원자는 그런 모습일텐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품으셨을까요.』
“부정하지는 않는군.”
그래. 결국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거지.
콜렉터의 기계음 섞인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눈앞에서 복잡한 퍼즐이 차곡차곡 채워져나가는데, 가운데 빈 공간이 있으면 눈에 띌 수밖에 없잖아.”
확실히, 나는 뭔가 전말을 알고 있을 때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것 같다.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뭔가에 휘말렸다는 느낌만 있을 때는 얼굴 딱딱하게 굳어가지고 여차하면 다 때려부술 기세였는데, 지금은 꽤나 긍정적으로 여겼던 상대가 나한테 음험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알았는데도 웃음이 나오잖아?
“너희들 말대로 게드로이츠는 어떤 이유로 한번 더 끔찍한 일을 계획하고 있고- 그것의 중심이 되는 것은 완성자로 확정된 박교수이며- 그렇기에 앞으로 모든 일의 중심이 될 내가 앞으로 있을 선택을 위해 이러저러한 과거의 진실을 알기를 원했다….라는건데. 여전히 예술가 연합이 원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고. 그것만 두루뭉술하게 넘어왔단 말이지.”
왜 불렀냐? / 진실을 알려주려고.
왜 진실을 알려주냐? / 박교수가 앞으로 모든 일의 중심에 있을 테니까.
모든 일의 중심이 될 박교수가 왜 진실을 알아야 하느냐? 그게 콜렉터, 예술가 연합이랑 뭔 상관이냐? / ….
아무리 생각해도 콜렉터의 설명에서 이러한 부분만 부자연스럽게 빠져있는데 내가 그걸 따져보지 않을 정도로 맹탕은 아니지 않은가.
『네. 맞습니다. 우린 당신이 우리와 같은 이들로 합류해주길 간절히 바라요. 실망하셨나요?』
“꽤나. 세계수님의 원본이라서 그런가, 처음부터 그쪽에게 상당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거든.”
『글쎄요. 전자세계에 존재했던 제 자매님도 저와 비슷한 식으로 일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어…. 생각해보니 그렇네. 엑스트라 스테이지도 몰래 준비했다가 짠! 하고 보여주고. 아스트라드와 이드라실을 통해 남겨둔 안배도 나 모르게 조용히 준비하고. 아버지에 딸들까지 트리플로 음습한 구석이 있었구만.”
그녀의 확답을 들은 나는 한숨 섞인 웃음과 함께 콜렉터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의 과거사. 진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의 박교수’가 죽기를 원한거야. 너희들은 살아있는 내게 관심이 없어. 죽은 이후에 태어날 ‘박교수 였던 것’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거지. 맞지?”
『….적응자 계획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의 기원과 발현 과정을 당신이 확연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변종 바이러스를 통한 인류 생존계획이 여전히 큰 가능성을 품고 있음이 당신의 죽음 이후에 태어날 적응자에게 충분히 전달될 테니까요.』
콜렉터는 살아있던 시절의 모습을 거의 간직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변종 바이러스에 의해 발현된 3형 변종이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고정된 인격이라는 뜻이다.
3형 변종의 형태는 그 기원이 된 트라우마인 동시에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다. 콜렉터의 경우, 아버지가 자신을 산채로 해체해야 뇌척수관을 쑤셔넣은 기계의 형태로 발현했다. 구체형 기계부분을 인간 시절 자신의 육체 형태로 대체한 상태 그대로 태어났단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콜렉터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는 무엇일까?
“설마, 게드로이츠 그 인간을 용서하기라도 한 건가? 자신을 기계의 부품으로 쑤셔넣은 아버지의 유지를 잇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태어났나?”
『설마요. 의문을 품었던 것뿐이었어요. 나타샤 게드로이츠는 말 그대로 ‘통속의 뇌’가 되어 생각했어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괴로워하고, 배신당하고, 다시 도전하고, 실패하고, 스스로 뒤틀려버린 끝에 자신의 딸, 동료, 심지어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게드로이츠 본인조차 소모품으로 사용해 버린 것인지. 도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이루어야할 계획이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3형 변종 콜렉터로 재탄생하며 그 의문에 해답을 얻었답니다. 적응자 계획은 실패한게 아니구나. 지금의 나는 자아가 있고 의지가 있는 생물이구나. 적응자 계획은 성공이고, 그저 진행과정이 한참 남아있을 뿐이구나! ‘나타샤 게드로이츠는 헛되이 희생당한게 아니구나!’- 하는,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던 것 뿐입니다.』
강렬한 인간의 감정을 담은 콜렉터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나는, 나타샤 게드로이츠의 ‘의문’을 이어받은 개체로서. 적응자 계획의 확고 부동한 성공을 원해요. 그녀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이대로 멸망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길 원하며, 그러한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행 능력으로 ‘아주 많은 적응자 동료’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주 많은 적응자 동료’의 영입 순번의 최상단에 박교수가 죽어서 태어난 누군가가 올라가 있다…. 이런 소리지?”
『당신을 원본으로 한 적응자는 아주 높은 확률로 ‘공격적인 이타성’을 지닌 개체로 발현될테니까요. 우리는 과거의 기억, 지식을 대부분 이어받아요. 그 존재라면, 이 모든 것의 전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아주 높은 확률로 예술가 연합에 합류할 것이라 예측했답니다.』
“우리는 인류를 멸종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순수하게 게드로이츠의 적응자 계획이 추구한 바를 따라서 ‘예정된 재앙에서 인류를 다음 세대로 존속시킨다’ 라는 목표를 따르고 있지요.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지금 살아남은 인류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은 다음, 우리 적응자들의 관리하에 평화롭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도록 보호하는 것 뿐입니다.”
콜렉터의 말을 이어받은 W는 조금 더 진심이 담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단순히 인류 전체를 3형 변종으로 바꾸는게 아니라, 환경 재앙에서 그들을 존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적응자로 만든 뒤 그들을 우리에 몰아넣고 관리한다. 가축처럼 말이지.”
“부디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시야를 넓게 가져주시길. 적응자는 방사능 오염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신체를 갖추었습니다. 당신도 최근 몇 달 사이 방사능 오염구역이 빠르게 넓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있지 않습니까? 언젠간 그 구역이 지구 전체를 뒤덮을 것이고, 인류의 생존 영역이 차폐 처리된 건물의 내부로 한정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바뀐 환경에 맞추어 변이된 우리 적응자의 능력이 그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
“이것은 관리자와 관리받는 자의 상하관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말하자면, 현세와 사후세계의 일원들 간의 격차라고 할까요? 우리는 당신들의 죽음에서 태어납니다. 보다 정확히는, 당신들 중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서 탄생합니다. 사회적으로 학대받고 억울한 이들만이 죽어서 그들을 ‘관리’하는 적응자로 재탄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권선징악은 도덕적 선택이 아닌 생물학적 과정으로 귀결될 겁니다! 새로이 탄생한 적응자가 트라우마의 관계자들을 내버려둘 리 없으니까요! 죄 지은 이들은 그들이 학대한 이의 손에 징벌당할 것이고,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대함에 있어 부드러워 질 것이며, 그렇게 사회는 서로의 고통을 공감할줄 아는 이들의 사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것을 유토피아라 부르지 않고 대체 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W, 내가 추구하던 것처럼 ‘어디서든 콜렉터를 만날 수 있는 작은 세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이 또한 제 개인의 목표에 부합하는 일인 것은 사실이니. 하지만 알아주십시오. 모든 적응자의 트라우마는 인간사의 어떤 악한 행위에서 발생한 만큼, 모든 적응자는 인간들의 부정적이고 악한 행위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모두가 각기 다른 개체별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간들의 삶이 ‘트라우마가 발생하지 않을 편안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는 하나같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 그럴 듯 하군. 그럴 듯 해.”
틱. 틱. 틱. 틱.
상대가 모든 의도를 털어놓은 가운데. 생각을 정리하며 케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 세 변종의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예술가 연합. 생각보다 확고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이다.’
내 속에서 이들에 대한 위험도가 몇 단계는 상승했다.
저 녀석들이 말한 대로라면, 예술가 연합은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니다.
왜냐? 저쪽에선 비참하게 죽은 인간이 많을수록 인재 영입의 기회가 늘어나거든. 저쪽은 누가 됐든 잔뜩 죽어주면 좋다는 거다. 제 입으로 ‘인류를 한 대 뭉쳐 관리할 것이다’라고 얘기했으니, 말은 안해도 지금보다 생존자의 규모가 작아지면 좋을 게 분명하거든. 동시에 셀 수 없는 죽음들 사이에서 적응자로 변모할 존재들도 상당수 발견될 것이고.
보나마나 전쟁이 벌어지면 W는 증강현실 드론으로 눈이 벌게지게 살피고, W는 내 운송드론을 포함한 온갖 게드로이츠 사의 카메라 달린 모든 장비로 전장을 살피다 막 죽은 시체 중 변종 바이러스가 발현하기 시작한 것들을 이리로 데려오지 않을까?
‘전쟁중에는 방관자. 전쟁 이후에는…. 인류를 탄압하는 무자비한 점령군이 되거나, 협조 여부에 따라 엄격한 보호자가 되겠지.’
마냥 정신병자의 헛소리(따지고 보면 이들은 정신병의 결정체다)라고 보기엔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또 골치아팠다.
방사능은 지금도 남하하고 있다.
이곳까지 찾아온 만두는 팔을 들어올리기도 힘들 정도의 두툼한 환경 보호장비를 착용해야 했으며. 천류제는 가벼운 방사능 제독장비를 착용했고, 나는 그냥 맨몸으로 방사능을 마구 들이켰다.
‘적응자. 게드로이츠 자신이 준비한 환경 재앙에 맞춤으로 제작된 인간의 변이체. 확실히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의 능력은 도움이 된다.’
“….그 계획에 꼭 박교수 변이체가 필요한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조만간 쓸만한 손이 꽤 많이 생길 것 같은데.”
『아뇨, 반드시 당신이어야 합니다. 이미 당신은 사후에 어떤 형태의 변종으로 재탄생할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이미 긁어서 당첨이 확정된 복권과 같으니까요. 당신이 ‘오지랖’이라 낮춰 부르는 이타심은 인종, 성별, 나이, 계급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작용함이 증명되었습니다. 당신의 가슴팍에 들어있는 기계장치 안에 몇억 단위로 들어있는 데이터 인격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뒤틀릴때까지 영원히 소모되어야 했을 그들을 구출했다는 것. 그것은 당신이 ‘오지랖’이 불특정 다수의 미래에까지 뻗어있다는 증명이랍니다.』
『당신의 죽음 이후에 재탄생할 존재는 차후 인간 관리에 있어 가장 높은 의결 기관의 역할을 할 거에요. 수없는 시련을 거쳐 도덕, 인격적으로 어떤 완성된 존재임이 증명된 존재가 살아남은 인류 전체를 보살피는데 있어 최고 결정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완성자 계획의 결과물이 적응자 계획의 결과물과 공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과거에 아직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았던 게드로이츠가 그리던,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진정한 시나리오가 아니겠습니까? 저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박교수.”
“결국 내가 빠른 시일 내에 죽어서 ‘적응자 박교수’로 합류해줬으면 한다는 소리로군.”
설득의 여지는 없어보였다. 이들은 확고한 노선을 정했고, 그 노선 위에 나를 올려둔 채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일단, 얘기 잘 들었다. 나사가 한다스씩은 빠진 놈들인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빠진 나사를 가지런히 모아서 정밀 기계처럼 만들어놓은 놈들이었군.”
“처음의 존대와 예의가 사라졌습니다만.”
“내가 알던 누구누구랑 전혀 다른 존재들이니까. 지인의 가족을 대하는 마인드로 접근하기엔 저 콜렉터님이 세계수님이랑 너무 다르더라고.”
“뭐, 좋습니다. 딱히 존중받고싶어서 부른 것은 아니니. 그래서, 우리와 공조해 ‘인류를 구원하는데’ 앞장서 주시겠습니까?”
W는 움직이지 못하는 콜렉터를 대신해 손을 내밀었다.
“….공조한다면, 당신들이 말하던 ‘렙터의 예정된 승리’를 뒤바꿀 수 있겠지.”
“정확합니다. 우리는 콜렉터님의 능력을 통해 게드로이츠가 렙터 소사이어티 내부에서 꾸미는 일을 확인했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막는 것으로 전황은 손바닥 뒤집듯 돔 쪽으로 기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예술가 연합에 속해있는 인원들 또한 돔을 지원하기 위해 가세할 것입니다. 부루의 전투능력은 직접 겪어봤으니 당연히 알 것이고, 글린다의 잿가루는 비록 약물로 극한까지 도핑한 돔의 사이보그 병에게는 미력하지만 그들의 장비를 다루는 이들에겐 충분히 유효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당신들이 짐작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동료들이 각기 다른 능력으로 돔을 지원할 것입니다. 렙터는 무너지고, 악의 가득한 게드로이츠의 인격을 담은 구스타브 알 하르브 렙터는 그가 세상에 남긴 원념과 함께 소멸할 것이며, 적응자/완성자 계획이라는 평화를 추구하던 그가 남긴 의지만이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것입니다.”
아이구, 화려하기도 해라.
확실히 이 정도면 스페이드 에이스만 열두장 들고 치는 포커 수준이군.
“좋아.”
장고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못 들은 걸로 하고, 처음 거래로 돌아가자고.”
“….제정신입니까?”
“아니? 정신 멀쩡하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거지. 내 몸을 잡아먹는 변종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단을 내놔. 그렇다면 내 친-히 돔의 군대를 이끌고 렙터의 파충류 새끼들을 도륙내는데 일조해드리지.”
역시, 거창한 미래를 위해 뒤져달라는 부탁은 못 들어주겠다.
나도 이제 가정이 있다고. 아직 애 이름도 못 지어줬단 말이지?
『우리쪽에 그 거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아실텐데요? 딱히 우리가 당신에게 회복될 방법을 제공하지 않아도 당신은 렙터와 맞설거에요. 박교수는 돔이 패망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죽는 모습을 좌시하지 않을테니까.』
“글세? 정말로 그랬다면 애초에 콜렉터 당신이 내게 공조를 요청하지 않았겠지. 그쪽에서도 당신들 목표를 이루는데 어떤 식으로든 내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이런저런 말을 곁들여서 ‘공조’라는걸 부탁한거야. 아마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양 휘둘러데는 그 ‘게드로이츠의 숨겨진 계획’을 막는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 그게 제대로 이행되면 예술가 연합의 목표도 개박살 나는거지? 인류의 가축화라던가, 보호라던가 하는게 전부 깽판 나는거 아냐?”
『그건 당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를 막지 않으면 겨우 살아남은 인류에게 미래따윈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가 협력하는 것은 서로의 필요를 넘어 각자를 위해 당연한 일이란 말이에요!』
“그으을-쎄?? 내가 살면서 항상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명언이 있는데, 바로 [적을 엿먹이고 싶으면 일단 그놈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라] 라는 말이야. 흑화 게드로이츠가 원하는 바? 모르지 뭐. 하지만 그놈도 방첩망이 있고 스파이가 있는 이상 우리가 전쟁 준비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이미 미래를 다 내다보셨다는 분이니 벌써 예상하고 날짜까지 딱딱 맞춰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놨을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그냥 전쟁 취소하고 돔에 틀어박혀 버리려고.”
『그건 바보같은 결정이에요! 그에게 보다 완벽한 준비를 위한 시간을 주는 것 밖에 안된다구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애초에 돔은 방어전을 수행할 때 전력의 10배 이상의 효율을 내는 기형적 군사집단이다. 지금까지는 돔과 렙터라는 두 집단 간의 알력을 토대로 공세가 옳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거기에 예술가 연합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개입의지가 있는 집단’이 추가되면 얘기가 다르지. 너무 불확실해. 나 안 나가. 돔에 틀어박혀서 자전거 돌려서 생산한 전기로 제우스나 쏴대지 뭐.”
『그런….』
“안될 것 같아? 나 원정군 참모총장인데? 여기서 내가 보고 들은 거 다- 우리 알렉산더 영씨에게 전달하면 그 인간이 밖으로 나가자고 할까, 도로 들어가자고 할까?”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수가….』
콜렉터의 기계 목소리가 좌절에 물들어가고 그녀의 화면에 우중충한 구름이 떠오르는 가운데.
나는 그녀의 케이블 위에 한껏 몸을 기대어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한없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제발 먹혀라. 제발! 로하람님 제발 콜렉터가 날 병신취급하게 해주세요!’
속으론 미친 듯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이 헛소리가 저들에게 먹혀들기를 기도했다.
‘게드로이츠가 무언가를 준비했다면 기존의 돔의 수비체계로 막을 수 없는 수준은 당연하다. 애초에 공세를 물리는 것은 말이 안돼.’
콜렉터 앞에서 한 말은 하나같이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적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 차단하기 위한 공격 결정이었는데 위험요소가 늘었다고 후퇴하면 추가된 위험요소에 예정된 위험요소를 더하는 꼴밖에 되지 않겠냐고. 당연히 돔에 틀어박히는건 병신같은 생각이지.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콜렉터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공세를 물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저들은? 3형 변종인 콜렉터는 개체의 삶의 목표인 ‘적응자 계획 완성’은 그것을 달성하는데 있어 상황이고 계획이고 따질 수 없이 무조권 이뤄야만 하는 것이다.
‘3형 변종은 오직 개인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 콜렉터는 실낱만큼이라도 그녀의 목표가 어그러지는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없어. 초조함의 수준이 달라.’
같은 조건에서, 똑같이 누구 하나가 물러나도 양쪽이 망해버리는 동일 선상의 블러핑이라면, 지는 쪽은 무조건 마음이 더 급한 쪽이다. 아무렴, 나는 진짜 ‘배째!’ 하면서 회군해버릴 ‘가능성’ 정도는 생각할 수 있지만, 콜렉터는 그런 방향으로 생각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든.
‘도대체 게드로이츠가 뭘 준비했는지는 몰라도, 콜렉터 입장에선 나와 돔의 군세가 반드시 게드로이츠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저들의 계획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야. 그렇다면 이 상황은 내가 조금 더 우세해! 빨아먹을 수 있다!’
‘분명 내가 거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저들은 이야기를 돌렸어! 뭔가 변종화를 되돌릴만한 방도를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거야! 애초에 저 새끼들 내면이 밖으로 끄집어내진 놈들이잖아! 거짓말 졸라 못해! 분명히 있다! 방법이 있어 저놈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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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생각을 하며, 속으로 로하람의 이름을 부르짖다 못해 돌아가면 3월드에 있던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광명 신전을 지어주겠다는 공략을 남발하는 단계에 도달했을 무렵.
『좋….습니다. 변종화의 완화, 박교수 당신의 몸을 잠식해가는 변종 바이러스를 억제할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지!’
『그 대신, 당신과 돔의 병력은 반드시 렙터 소사이어티를 공격해주셔야 해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거래이고, 이게 제가 요구할 거래 조건입니다.』
“그러지. 혹시, 내 변종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고 암살해서 죽여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그거야말로 멍청한 소리네요. 그렇게 했다가 당신이 우리 적응자들에게 악감정이라도 품은 적응자로 재탄생하면 우리로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강력한 적만 늘리는 꼴이 되고 말 거에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리낄 게 없군. 좋아. 방공호 밖에 나가는 즉시 내 개인 회선으로 출전 명령을 내리지.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렙터도 반응할거야. 그 시점에선 돌이키려해도 돌이킬 수 없다. 그 순간 우리쪽 거래조건은 달성됐다고 봐도 되겠지?”
『알겠습니다. 변종화를 억제할 방법은….』
다소 지친듯한 콜렉터의 입에서 내 생명을 연장해줄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아, 뭐. 그 정도면 충분히. 좀 어이가 없을 정도군.”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이 나를 관통했다.
살았다.
그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발끝부터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뇌리를 강타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지어줘야겠군.”
『그건 무슨 뜻이죠?』
“아무것도 아냐. 그냥 개인적인, 종교적인 이야기.”
모니터 속의 잔뜩 찌푸려진 이모티콘을 향해 한껏 히죽거려 주었다.
– 예술가 연합을 찾아가서
– 이미 38구역 사태 때 한번 적대한적 있었던 소규모 군사집단이 이번 전쟁에 어떤 향방을 보일 것인지 알아보고
– 뭣보다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내 상태를 되돌릴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 것.
게드로이츠가 어쩌고 과거가 어쩌고 하는 것은 여기서 끼어든 사실들일 뿐, 어디까지나 내 목적은 위의 세가지가 전부였으며.
방금, 그 세 가지 모두를 이룬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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