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15
Chapter. 23. 게드로이츠의 상속자, 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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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네요. 당신의 지나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단단한 인격을 다가올 미래 인류를 위한 도덕적 기치로 삼으려고 했는데.”
“끔찍한 소리 맙시다. 소년병 출신에 PTSD로 정신에 영구적인 상해를 입은 인간을 도덕의 기준점으로 삼다니. 보통은 그런걸 디스토피아라고 부른다고.”
“….아무튼, 렙터 소사이어티에 대한 것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찾아와 주시고, 평화적으로 대화에 응해준 것에는 감사드리겠어요.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이런 몸이라 배웅은 못 해 드리겠네요.”
“그래, 뭐. 각자 갈 길 가자고. 그러다 또 길이 겹치면 뭐…. 되도록 이번처럼 대화로 풀어보고.”
“부디. 아, 입구쪽 천류제에게서 움직임이 있네요. 깨어난 것 같으니 돌아가는 길에 확인해보세요.”
“그래, 뭐. 갑니다. 되도록 근시일 내에는 서로 보지 말자고. W도, 콜렉터 당신도.”
“….일이 이렇게 끝나서 정말 유감이에요. 박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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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걱. 터걱. 터걱.
“예술가 연합. 강압적인 인간 보호 사상을 가진 괴물 집단이라….”
콜렉터는 결국 우리의 대화가 거래로 끝난 뒤 별 탈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그쪽이 원하는 포지션을, 그쪽은 내게 변종화 억제의 방법을 제공하는 거래.
그 내용만 보면 썩 괜찮긴 하지만, 여기서 오갔던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기존의 목표를 전부 달성한 것과는 별개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콜렉터의 목줄을 틀어쥐고 협박해서라도 알고있는 것을 전부 실토하라고 하는 게 나았을까? 콜렉터는 몰라도 콜렉터를 끔찍이도 아끼는 W 그놈은 줄줄 불었을 것 같은데.”
처음에 그들이 내건 미끼 중 가장 강력한 것이라면 단연코 ‘어차피 렙터가 이기게 될 전쟁이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놈들은 렙터의 수장이된 게드로이츠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아냈고, 그들의 일원이 되어 협조한다면 그 모든 것을 공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렙터 놈들이 38구역 돔의 중앙 발전기를 통째로 쳐먹은 뒤 지금껏 모습을 감추고 싸돌아다니며 준비한 것이 게드로이츠의 그 위험한 계획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장비와 전술 모든 면에서 수성에 유리한 돔이 공세에 나선 것이 ‘저 미친 군사집단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니 준비가 끝나기 전에 미리 차단하자!’ 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으니, 사실상 돔이 원하는 ‘미지의 위협 차단’이라는 면에서 저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 것.
우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금과옥조나 다름없는 정보인데, 그것을 눈앞에서 놓쳤다고 생각하니 영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드로이츠가 원하는 것. 그가 황무지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피험체인 돔을 상대로- 통제 변수인 렙터를 휘둘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나마 한가지 건진 게 있다면, 여기 오기 전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추측할 수 없던 것과 달리 지금은 그나마 추측할 거리라도 생겼다는 것이다.
터걱. 터걱. 터걱. 터걱.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예술품 사이로 쭉 뻗은 길은 마치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으며.
언제 자라났는지 군화를 뚫고 나온 발톱이 돌 바닥에 터걱거리는 소리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을 기획한 과학자의 삶을 추적하고자 궁리하고 있었다.
“게드로이츠. 위대한 과학자. 현 세대를 몇 단계나 뛰어넘는 지식. 평생에 걸쳐 그런 지식을 인류를 위해 사용하고자 여러 가지 발명을 했지만, 대부분 그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사용되었지. 그가 국가를 초월한 어떤 거대한 통제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몰라.”
3월드 진행 중 봤던 게드로이츠가 남긴 영상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게 그 ‘파지 미트’라는 유기물 조형기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기아에 시달리는 극빈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유기물도 식육으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했고, 실제로 47구역의 오래된 내 개인 쉘터의 유기물 합성기도 그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 분명 그의 지식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데 이용되었다.
하지만, ‘파지 미트’ 기술이 그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누구나 배워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파지미트의 구조 덕분에 돈 없는 테러범부터 국가 단위 국지전에까지 모두가 애용하는 ‘조금만 스쳐도 피부에 암 병변이 자라나는 생화학 폭탄’ 따위가 만들어졌으며, 결국 게드로이츠는 자신의 손으로 이미 세상에 퍼져버린 그의 기술을 수습하기 위해 피가 마르도록 노력해야 했다는 이야기였지.
“초창기 영상의 순수한 모습과 비교하면, 확실히 실패를 거듭하며 변해가고 있었지.”
내가 알고있던 것. 분석한 것. 그리고 방금 새로 들은 지식들이 어우러져, 지금껏 허깨비 같이 느껴졌던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라는 인간의 상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끈질겼다.
이미 파멸이 예정된 미래. 그것을 막기 위해선 보다 진보한 기술이 필요했지만 그 기술은 개발되는 즉시 악용된다. 적응자 계획을 위한 변종 바이러스마저 그런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그는 인류의 내적 선함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으나 그 내면에 있는 것이 뒤틀리고 망가진 어떤 순간들이라는 것을 직시한 이후. 그는 다른 방식의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통제 가능한 환경으로 조정된 세계. 그리고, 그가 선별한 가장 완벽한 인격과 능력을 갖춘 지도자들.’
그렇게 시작된 것이 GG에 의한 완성자 계획이겠지. 지금껏 그의 기술을 악용한 혐오스러운 현실의 지도자들과 달리, 어떤 역경속에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 소수의 영웅을 찾아내고자 했다. 적어도 수십억 중에 열 다섯 정도는 있을 거라고, 인류 전체의 내적 선함에 대한 믿음은 그들 중 극히 소수에게는 선함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배반당한다. GG의 흥행, 그것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 소울, 그 데이터 소울을 이용한 수만년의 시뮬레이션과 셀 수 없이 많은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그가 바라던 ‘완벽한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속 게드로이츠가 절망하며 말한다.
‘아아, 인류 중 그 어떤 이도 인류를 보듬을 수 없구나.’
수십억 인구, 그중 소수의 선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며, 그의 내면에서 인류는 구제 불능한 악한 어떤 것으로 변모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 제 손으로 세계를 불구덩이로 만들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마저 내버린 과학자가 좌절한다.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이다. 그의 오판으로 인류의 90%가 절멸했으며, 방사능이 들끓는 대지에서 나머지도 천천히 고사해가고 있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어도 그 막중한 책임감이 교수대의 올가미처럼 그의 목을 감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게드로이츠가 되었다. 렙터 소사이어티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 또다른 계획을 가진, 인류 전체에 실망한 과학자로서.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더 이상 무엇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들까. 아니, 인류를 구하겠다는 과거의 목적이 남아있기나 할까? 어쩌면 그 정 반대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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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이어지던 상념은 여기에서 막혔다. 결국 게드로이츠가 심적으로 대단히 악의에 가득차 있으리란 추측만 가능할 뿐, 구체적으로 그가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니지, 콜렉터가 하나는 말해줬나.”
지금 그의 모든 움직임이 나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 이미 버려진 완성자 계획이 박교수라는 단 하나의 결과물을 제출하고 소멸한 이후, 그의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는 것. 콜렉터가 말하길, 모든 과정의 중심은 ‘박교수’였다. 놈의 마지막 계획은 어떻게든 나를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심. 중심이라. 나 자신이 이번 월드 멸망의 중심이자 열쇠라….”
생각을 하다보니 돌연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이번 월드’의 멸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그 해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여전히 GG안에서 또다른 세계로 넘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일 끝나면 우진 영감님처럼 야매 말고 진짜로 잘하는 정신과라도 좀 다녀봐야겠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털었다. 아무렴, 이제 9개월 정도 지나면 내 자식이 태어날텐데, 그때 ‘오, 뉴비다.’ 같은 생각이 떠오르면 좀 문제가 있잖아?
“늦었군.”
천류제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내가 그런 잡다한 상념에 허우적거리고 있던 도중이었다.
흐트러진 군복. 더 흐트러진 머리. 충혈된 눈. 가늘게 떨고 있는 손. 입구의 잡동사니 더미에 파묻혀 주저앉은 모습.
“….천류제냐? 아니면 천류제였던?”
“천류제다. 일단은.”
천류제는 덜덜 떠는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어렵사리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와 싸워봤다. 대단히 이상한 기분이로군.”
“어…. 그래.”
개인적으론 허벅지와 일체화되어있던 칼에서 막 살아있는 혈관이 튀어나와 주변을 장악하는 그런걸 ‘친구와 싸웠다’고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지만, 일단 본인 얼굴이 매우 후련해보이니 그런 것으로 치자.
“그래서. 누가 이겼어?”
내 물음에, 천류제는 말 없이 몸을 돌리며 통로 구석을 가리켜 보였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있는 것은, 천류제가 자기 몸처럼 항상 가지고 다니던 예의 그 칼. 쩍쩍 갈라져 촉수같은 것이 너울거리던 그것은 잡동사니 한쪽에 처박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믹’같은 몬스터가 실존하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징그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몸을 돌린 천류제의 뒷모습에 남은 상흔이었다.
예의 칼집이 붙어있던 허벅지, 골반 근처의 피부와 살점이 움푹 파여있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위로 뻗어가며 살이 갈라진 흔적이 나무뿌리 같이 척추를 타고 머리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상흔의 끝부분. 척추를 따라 머리에 이르면 천류제의 후두부에 동전 두 개만한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가 보면 산채로 해부당했다 해도 믿을만한 그런 모습이라니.
“어이, 너 그거….”
“괜찮다. 체조직의 손상 없이 깔끔하게 떨어져나간 것 같다.”
심지어 몸을 돌리자 등에 가려져있던 오른팔이 팔꿈치 어림부터 텅 비어있었는데도, 천류제는 내가 봤던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해 보이는 얼굴로 지친 숨을 가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일종의 기생생물이 아닌가 싶다.”
“기생했다고? 3형 변종이?”
“3형인지 변종인지 같은 것은 모른다. 그저 내 고향에서 있었던 실험이 저런 것을 만들어냈다고 추측할 뿐.”
버석 버석, 철컥!
천류제는 잡동사니에 파묻혀있던 그것을 들어올렸다.
검의 형태로 가공된 본체와 거기서 뻗어나온 흉측한 혈관. 그 위로 뻗은 척추를 본을 뜬 것과 같은 형태의 체조직과, 그의 머리에 뚫린 구멍과 같은 사이즈의 뾰족한 촉수와 뇌주름을 닮은 말단, 그리고 천류제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부분까지.
“아무래도. 나는 그날 서호를 이용해 터무니없는 것을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만들었다면….”
“이것. 숭배와 선망, 아집과 열등감, 그 모든 것이 해결되기 전에 그 대상을 잃었다는 절망감 따위를 두드려 만들어낸 허상과 같은 한서호다.”
천류제는 그것의 온갖 부속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장인과 같은 동작으로 검 부분을 살피고, 바닥에 떨어진 검집을 들어 그 안에 담았다.
“돌이켜보면 그날, 무딘 칼날로 서호의 목을 쳐낸 이후의 기억은 매우 흐릿했지. 지금 생각하면, 그날부터 나는 ‘내가 선망하는 한서호’의 환상을 만들어내 그것을 보며 살아온 것이다.”
검집에 담긴 검. 그리고 그 끝자락에 뻗어나온 기생체의 몸에서 그의 텅 빈 오른팔로 시선을 옮긴 천류제는, 공허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담긴 눈으로 말했다.
“정신을 잃고 꿈을 꾸었다. 나는 과거 브라질의 크라콜란지아로 돌아가 있었고, 한서호는 내가 살던 하수구 배관 바닥에 앉아 나를 마주보고 있었지.”
“꿈이라도 간만에 본 친구는…. 반가웠냐?”
“….우스꽝스러웠다. 키가 얼마나 큰지 허리를 숙여야 겨우 나와 마주볼 수 있었으며, 어깨가 넓어서 게걸음으로 걸어야 할 정도였다. 한서호가 평생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기자 출신에 늘상 두꺼운 안경을 썼고, 깊은 다크서클과 깡말라서 광대가 툭 튀어나온 인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를 흉내 낸 다른 인물일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나는 그 기괴한 인영을 보자마자 ‘내 친우 한서호’라고 대번에 인식한 것이다. 난 이미 한서호의 원래 모습 대신 내 속에서 비대해진 그의 환영을 그녀석으로 여기고 있던 것이었어.”
그것은, 일종의 자기비하였다. 그와 같은 선에 서고자 자신을 다듬었지만, 그래서 스스로가 나아질수록 ‘절대 닿을 수 없는 한서호’는 그의 내면에서 성장한 자신보다 훨씬 우월한 누군가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저 기생체가 그런 생각을 계속 주입했다는 거냐?”
“아마도. 저것은 그 순간에 대한 나의 집착, 유일한 친우를 잃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만큼 그 순간에 나를 머물게 하려 했던 것 같다. 계속 내 속을 옥죄어오던 조급함도, 쉼 없이 찾아오던 두통도, 한서호에 대한 집착도 저것이 끊임없이 내 뇌를 자극해서 계속 반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저것은 정말 한서호의 일부로서 내 몸에 달라붙어 있었을 뿐, 내 스스로가 그 순간을 되풀이 했을수도 있겠지. 무엇이 정답인지 알 길은 없지. 중요한 것은 서호와 내가 모두 저것에 얽혀 그날의 기억에 멈춰있었다는 것이고, 고인 물이 썩듯 저 안에 고인 우리의 기억도 이미 썩어 문드러진지 오래였다는 것이다. 그토록 선망하던 친우의 본모습보다 내 속에서 만들어낸 한서호의 모습을 더욱 진짜처럼 느꼈던 것처럼. 나는, 그 이상 한서호를 모욕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끊어내었다.
천류제는 꿈속에서 그의 자의로 비대하게 키워낸 한서호를 두 동강 냈고, 그 순간 몸에서 무언가 스르륵 떨어져나가며 힘이 쭉 빠졌다고 말했다.
“나의 감각이 게드로이츠의 선물로부터 비롯했다면, 나의 운동능력은 그날 내 몸에 기생하기 시작한 저것이 부여했다는 뜻이겠지.”
“변종 기생체에 의한 운동능력 증대라. 내가 다른 건 다 상담 못해도 그 부분은 조금 상담해줄만 하지.”
내가 오래전 하이드의 잠식으로 왼팔만 변종화 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자, 천류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고 엷게 웃었다.
“….어찌 됐건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불필요한 조급함도, 칼날같은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아. 이런 평화로운 기분은…. 고향에서의 몇몇 기억들에서나 느낄 수 있었지.”
“그러냐? 나는 아군 최정예 전투요원 ‘인간병기 천류제’가 졸지에 ‘그냥 감각이 날카로운 외팔검사 천류제’로 다운 그레이드돼서 되게 아쉬운데. 너 이제 엑소슈트 썰기, 군용트럭 썰기 이런거 못할 거 아냐.”
“그렇겠지. 필요 이상의 괴력은 몸에 뿌리내린 저 기생체가 담당하고 있었으니.”
“쯧. 아끼다 똥 된다고, BDSM본부에 고이 보관했던 전술병기가 어이없이 상장폐지 되어버렸네. 아이고 아까워라.”
“필요하다면 그간 숙박과 비품사용에 대한 대금은 지불하겠다. 신경쓰진 않았으나 재산이 아예 없진 않을테니.”
“됐고, 거기서 계속 쇠나 두들기면서 살아라. 애들 쓰는 날붙이도 좀 수리해주고. 총만 쏘면 다 되는줄 아는 놈들도 좀 두들겨주고.”
“음.”
“무엇보다 변종 바이러스 감염자중 신체 변이과정 도중 치유된 최초의 임상체로서 자주 돔에 들러서 검사 좀 받아주고.”
“음….”
“저건. 그래도 소중한 친구의 유해 비슷한 것 같던데. 두고 갈거냐.”
“음. 이제는 그 편이 좋겠지.”
내가 천류제의 왼팔을 둘러 부축하는 동안, 녀석은 들고있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서호의 유해를 태운 불로 담금질 했으며, 그 과정에서 변종화가 이루어졌고, 마찬가지로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의 몸에 자리잡아 지금껏 그를 채찍질해온 것.
쿠우욱.
천류제는 그것을 낡은 자전거와 브라운관 TV 사이에 세워 놓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곳은 나름 시대에 이름을 남긴 예술품들이 모이는 장소라지. 비록 자기 위로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두들겨낸 저것이라면…. 안쪽의 거장들 사이는 아닐지언정 입구의 옛 물건들 사이에 자리잡을 정도는 되겠지.”
천류제는 마지막으로 그의 친우가 남긴 흔적을 되돌아본 뒤, 내 부축을 거부하며 출구를 향했다.
“….뜻하지 않게 내 염원을 이뤘군. 그쪽은 잘 해결 되었나?”
“어어. 대충 반반 정도. 한참 올라가야 하니까 가면서 얘기해 줄게.”
“그렇다면 짧게 요약해야겠군.”
“?”
때앵-!
대답은, 천류제 대신 그의 뒤에서 좌우로 열린 문이 대신하였다.
“엘리베이터. 올라갈 때는 타고가자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 그거. 찾아놨어?”
“딱히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어서. 타라. 위에서 파일럿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잡동사니에 파묻혀있던 엘리베이터. 핵방공호 만큼이나 낡아보이는 물건이었지만, 어둑한 잡동사니 더미 속에서 드러난 차가운 형광등의 불빛이 대단히 반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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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륵, 덜컹!
위우우웅-
[-B40….-B39….-B37….]낡았지만 튼튼하게 만들어진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하고 있었고.
위이이잉-
———
‘천류제. 너 뒷통수로 뇌 보인다.’
‘….붕대 정도는 감아둬야겠군.’
———
저 아래, 점차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 카메라가 있었다.
카메라에 담긴 둘의 모습은 수많은 화면들 중 하나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화면의 주인, 콜렉터는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
촤악! 촤악!
철퍽, 쩌걱! 뚝!
———
엘리베이터를 비춘 반대쪽 화면에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노동에 가까운 행위에 열중해 있던 상대는 별안간 달라진 카메라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휘두르던 도끼를 멈추고 카메라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
‘아아, 이런. 보고 있었나? 이거 난잡한 모습을 보였군 그래.’
‘짬이 나서 운동을 좀 하고 있는 참이었지.’
‘개인적으로 배 나온 대머리 지도자보단 군복이 잘 어울리는 말쑥하고 콧수염이 멋들어진 지도자상을 선호해서 말이야. 병사들도 그쪽을 더 선호하거든? 배가 몇 인치 더 나왔는지 따위, 군사적 능력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말이야! 하하하하!’
———
『운동이라기엔…. 렙터같은 군사 집단의 수장이 할 만한 행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콜렉터는 작업하는 병사들처럼 하얀 나시에 군복 바지만 입고 호탕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이 혐오스러웠으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버님.』
아버님. 그녀의 아버지라는 명칭이 희미하게나마 어울리는 유일한 존재, 구스타브 알 하르브 렙터라는 인물의 인격을 지배한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는, 마지막으로 도끼를 휘둘러 발밑의 사체의 일부분을 큼지막하게 잘라내는 것으로 그의 운동을 마무리했다.
———
‘아아, 이런. 목소리가 차갑구나, 내 딸아.’
‘이 정도는 이해해줘야지. 다른 인격 위에 또 하나의 인격을 덧씌운다는 게 그렇게 편리하기만 한 기술은 아니거든? 그 자리를 대체한다기보단…. 한 쪽이 우세한 융합에 가깝지. 너도 알잖니. 렙터 이 친구가 여러모로 재미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도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 사실, 꽤나 흥미로웠단다! 상당히 직관적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하고 말이다.’
‘모르면 터너 군에게 물어보렴. 그라면 지금 내 상태를 아-주 상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지. 그쪽 반쪽도 내가 아니더냐? 하하하하!’
——–
안드레이 게드로이츠, 아니 이제는 렙터가 된 그는 부관이 건네준 수건으로 피투성이가 된 머리와 몸을 닦으며 말했다.
——–
‘내게 연락한 것을 보니 그 친구를 만난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구나. 그렇지?’
——–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듯한 은근한 말투에 콜렉터는 이를 악다물었다.
『….생각보다 자신의 죽음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어요.』
——–
‘멍청했구나.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그는 마더 테레사가 아니야. 어떤 아가페적인 사랑에 입각해 사람을 돕는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하나뿐인 완성자를 그리 저평가하다니, 상당히 불쾌하군. 으음, 생각보다 더 기분이 나쁜데.’
——–
탕! 탕! 탕!
불쾌하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부관은 그에게 권총을 건넸고, 반대쪽 구석에 두건을 뒤집어 쓴 채 무릎 꿇려 있던 포로 셋이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시체가 되었다.
——–
‘오해하지 말거라. 명정한 정신을 유지하는데 스트레스는 좋지 않아서 한 행동일 뿐이니. 구스타브의 몸은 이런 방식이 제일 쉽거든.’
——–
『오해한 적 없습니다. 당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제 원본의 뇌와 척수가 산채로 적출되는 과정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으니.』
——–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렇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더는 시답잖은 소리를 할 필요도 없겠군.’
——–
피에 젖은 러닝 셔츠를 벗어던진 그는 절반 이상이 금속성 의체로 이루어진 몸을 꼼꼼히 닦으며 말했다.
——–
‘네가 원하는 기회를 주었고, 완성자 친구의 부정적인 답변도 들었으니. 이제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차례로구나.’
‘나의 목적은 물론 너희들 불유쾌한 괴물 집단의 소소한 삶의 목적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나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며 비도덕적인 계획에 협조해줄 생각이 있느냐?’
——–
피를 닦아냈지만, 도리어 깨끗해진 모습이 더욱 피비린내를 풍기는듯한 렙터의 부드러운 질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당신의 그 정신 나간 계획을 어그러뜨리겠어요.』
콜렉터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박교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제, 예술가 연합에게는…. 이 길 밖에 없었다.
———
‘그래. 역시 내 딸이구나. 아주 바보는 아니어서 다행이야.’
‘괜찮다. 너희들의 계획 역시 나의 목표를 근간으로 두고있지 않느냐? 세상이 예측 불허한 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너희들은 대단히 놀라웠지. 오류 투성이 GG를 포기하고 옛 연구물을 찾아왔을 때 너희들끼리 또다른 인류 생존 계획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나의 목표가 달성 되었을 때, 자연스레 너희들의 염원도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니.’
‘자아, 마음 같아선 더 얘기해주고 싶지만, 이제부턴 총사령관도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다녀야 하는 페이즈라서.’
‘부디, 몸 건강히, 그 어두컴컴한 방공호에 쳐박혀있길 바란다. 내 딸아.’
———
타앙!
렙터의 화면은 렌즈를 향한 총구를 마지막으로 꺼져버렸다.
검게 물든 화면을 바라보던 콜렉터는 슬슬 지상에 가까워져가는 천류제와 박교수의 엘리베이터를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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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3….-B19….-B15….]‘치료제라.’
‘그래! 솔직히 사기당한 기분이라니까. 애초에 게드로이츠가 벌린 판이고, 게드로이츠가 수습할 판이었다는 거지. 세계라는 거대한 사회실험의 장에서 인류를 압박하고 생존자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뭉치게 하기 위한 통제 변인으로서 변종 바이러스를 선택했으니, 놈의 목적이 인류의 생존인 이상 바이러스를 치료할 치료제도 만들어뒀다 이거지.’
‘모든 해답이 있는 그곳, 서버룸에 떡-하니 치료제 엠플이 준비되어 있다더라고. 그것뿐만 아니라 방사능을 비롯한 온갖 환경오염 회복을 위한 테라포밍 기술, 이미 멸종한 동식물계 복구를 위한 유전자 은행, 변종 바이러스 치료제, 뭐 세상에 필요한건 다 거기있데. 완성자를 위해 준비된 곳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좌표도 있고, 권한도 있으니 가서 엠플 찾아서 팔뚝에 꼽으면 끝이래.’
‘허무하군.’
‘내 말이. 어차피 갈 곳이었으니까 일 두 번 안 해도 되는 걸로 만족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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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긴장이 풀린 모습으로 치료제, 서버룸, 세상의 전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슬프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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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0….-B7….-B4….]‘뭐? 잠깐만, 통신이 너무 많이와서 지금…. 아니 연락을 왜 안받긴! 킬로미터 단위 지하 시설인데 전파가 어떻게 닿냐고!’
‘….뭐? 잠깐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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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가까워지자, 외부와 연락이 닿은 박교수의 목소리가 다급해지며 실시간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정말로, 정말로 일이 이렇게 끝나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완성자.』
또 다른 카메라는 방공호 밖의 하늘의 영상을 담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 먼지구름 너머 저 높은 하늘의 모습을.
몇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부터 날아와 밤하늘을 비추는 진짜 천체의 빛이 아닌, 수십 년간 인류가 탐욕스럽게 띄워온 인공 천체의 빛으로 가득한 먼지구름 너머의 광활한 밤하늘.
콜렉터의 화면은, 그 아름다운 인공 별무리를 담고 있었다.
조금씩 제 위치를 벗어나 새로이 정렬되기 시작하는 천체의 움직임을.
엘리베이터의 화면속 인물들이 그녀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경악할 수밖에.
그것은 전쟁 같은 작은 움직임으론 막을 수 없는, 신의 행사와도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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