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17
Chapter. 24. 가장 위대한 채권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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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깍짤깍
푸슉!
작은 엠플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흔들어 섞고, 그것을 장착한 무침 주사의 끝부분을 정맥위로 올린다.
가벼운 격발음, 가벼운 압력.
“흐으으으으-! 후우우….”
결코 가볍지 않은 고양감.
의체 속 혈관을 모방한 튜브를 따라 흐르는 연녹색 액체는 순식간에 그의 모든 신경을 사로잡고, 한순간 이완시켰다.
“으으으음…. 좋군. 확실히, 긴장을 푸는데는 이만한 것도 없어.”
게드로이츠, 아니 이제는 렙터가 된 남자는 속을 비워낸 주입기를 내려놓았다. 마약, 그것도 사람을 광폭하게 만들거나 극도로 우울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업/다운 계열이 아닌, 되려 감정의 파고를 막아 명료하고 냉정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약물이었다.
원래도 구세대 이상으로 마약 제조에 조예가 깊었던 렙터 소사이어티는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의료 혁신의 영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간의 내장을 대부분 비워낸 사이보그가 냉정하게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그러한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지지 않으며, 장기적인 신체 능력의 증대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의 기적과 같은 개량을 거쳤다 한들 베이스가 ‘마약’인 것은 변하지 않으며, 화학적 중독성은 물론 후유증이 없는 듯한 효능은 심리적 의존까지 유발하고, 주기적으로 투여할 시 명료하고 냉정해지는 수준을 넘어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식물인간에 가까워지는 끔찍한 약이었지만.
“누군가, 전혀 다른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의 그는 과거의 과학자 게드로이츠가 아니었다.
“평생을 살아온 관점,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이의 인격과 섞여든다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던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두 개로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야.”
오래전 게드로이츠였다면 저따위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약물을 사용하는 행위에 격렬한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구스타브 알 하르브 ‘렙터’는 치사량에 가까운 마약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렙터’의 인격 사이에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라는 인격을 비집어 넣어 장악한 지금, 게드로이츠는 구스타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독약과 같은 마약을 거리낌 없이 투여하고, 기분풀이로 살인을 자행하고, 보다 더 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의 시선으로.
“놀라워. 참으로 새롭고, 또 혁신적이야. 케셀링.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밖을 주시하던 케셀링은 렙터의 물음에 몸을 반듯하게 돌려세우며 말했다.
“….각하. 실례지만 약을 정량 이상 투여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이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질문은 각하답지 않으십니다.”
“이런이런- 세상에! 페도어 ‘렙터’ 케셀링이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하고 반문을하다니. 꽤나 기념비적인 일이로군! 왜, 일개 팩리더에서 갑자기 군단에 다섯뿐인 스웜 알파로 발돋움 하고나니 상명하복에 대한 개념이 흐릿해지는가?”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그저, 최근 각하께서 보여주신 여러 움직임이…. 다소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드리는 충언입니다.”
렙터, 게드로이츠는 건드리면 손이 베일 듯 반듯하게 금발을 올려 넘긴 그의 창백한 수하를 보며 낄낄거렸다.
“우려라면, 구체적으로?”
“불온하게 들릴 수 있으나, 역시 ‘게드로이츠의 지식’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다소 혼란을 겪고 계신 것이 아닌지.”
“체득. 체득이라…. 그렇지. 내 쪽에서 게드로이츠의 삶과 지식을 흡수했지.”
적어도, 너희들에겐 그렇게 알려졌으니.
렙터의 절대적인 권력자, 우두머리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내 수하를 고문하고, 내 과거사를 훑고, 캐고, 조사한 끝에 내린 결론이 그러하니, 그리 믿겠지.
아아, 나의 충직한 살인마여, 도구여, 렙터 소사이어티여.
이 얼마나 우습고, 아둔한가.
너희들 또한 수많은 살인자를 말 한마디로 지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어찌 이다지도 쉽게 유도되는가. 왜 양 떼를 모는 이가 또다른 양이란 말인가.
“그렇다 한들. 지금 자네 앞에 있는 내가 렙터라는 사실에 변함이 있나?”
“없습니다.”
“이 렙터가 게드로이츠의 지식을 흡수한 덕분에 사이보그 병이 만들어졌고, 38구역 돔의 중앙 발전기를 탈취했으며, 이렇게 작전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할 수 있었지?”
“예.”
“그렇다면 다소 혼란스러운 행보를 보이더라도 일단은 내가 지휘권을 잡는 게 맞겠군?”
“….예.”
케셀링은 싹트는 의구심을 가슴에 묻었다. 의심은 불확실하나, 성과는 확실하다. 구스타브 알 하르브는 기울어가던 돔과 렙터의 힘의 균형을 맞춘 장본인이며, 일련의 과정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전을 통해 시행된 것이다. 작전중 지휘자가 바뀌는 것만큼 작전을 어그러뜨리는 요소도 없으므로 이번 일이 끝날 때 까지는 구스타브가 ‘렙터’로 남아있는 것이 합리적이다- 라고 생각하며 케셀링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 녀석의 충성심은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단…. 개인의 신념에 가까운 것이었군. 조만간 쿠테타를 일으킬 것 같은데….’
표정 변화 하나없는 케셀링의 얼굴이었지만,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간을 만년 단위로 연구해온 게드로이츠의 눈에는 그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상관에 대한 충성도, 조직에 대한 충성도 아닌 오직 ‘합리’라는 개인의 신념만을 기치로 삼아 움직이는 인간. 렙터 소사이어티라는 살인자 집단이 현 시대를 이끄는데 ‘합리적’이라 판단하여 그 이념에 동조하고 고위직에 오르려는 자.
게드로이츠는, 그런 속이 시커먼 수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케셀링. 이 창백한 말 같은 녀석은 아직 쓸모가 남았으니까.
“나도 자네 생각은 이해하지. 불합리한 행동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자네가 아닌가?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당장 이전에 있었던 [워-헌팅] 작전은 렙터 소사이어티에 극심한 피해를 남겼지.”
“….2번 구역. 농축 방사능 노출에 의한 손실, 3형 변종 [워(War)]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입은 손실을 합쳐 렙터 소사이어티 전체 전력의 3할 가까이가 소모되었습니다. 그 사체에서 추출한 여러 기관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하나, 돔과 분쟁을 이미 계획해둔 시점에서 다수의 장비와 인력을 소모하는 작전이 무슨 가치를 지녔는지, 궁리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출혈이 컸지.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
게드로이츠는 아주 미세하게 불만이 드러난 케셀링의 표정을 감상하며, 마치 친구처럼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2구역의 터줏대감, 피난민들이 전쟁이라 이름 붙인 생물은 그 이름에 꼭 어울리는 놈이었지. 미사일, 전투기, 총, 탄약, 날붙이, 화학병기까지, 전쟁통에 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집어삼킨 모습이었으니 말이야.”
“실제로 그것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쑥! 튀어나왔을땐 나도 긴장을 좀 했지. 그 괴물이 그런걸 몸에 쑤셔넣고 있었던 이유는 별거 아니야. 그놈이 변종이 될 때 그 자리에 그게 있었거든. 중동쪽 나라들이 중국과 연합해서 비밀리에 전쟁병기를 쌓아두던 그런 시설이었지.”
게드로이츠는 ‘워(War)’라고 불린 괴물, 그것이 사람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인간이 죽었지. 전쟁괴물, 그것이 되기 전의 원본은 다름아닌 이 모든 전쟁의 효시를 올린, 첫 번째 핵 미사일을 워싱턴 한 가운데 쑤셔넣은 인간이니 말이야.”
김장소. 그런 이름이었다. 북한의 최고 국방위원장이자 세습된 독제자이며 이미 군부에 의해 유명무실해진 꼭두각시 독제자는.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 어떻게 세계를 무너뜨렸는지를 모두 보았어. 아마 전쟁 그 자체와 같은 모습의 괴물이 된 것은, 스스로가 한 세대를 끝장낸 전쟁의 시작점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어.”
과거의 초기 북한이 모든 권력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곳이었다면, 후기 북한은 그렇게 응집된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독재자라는 상징물을 이용하는 곳이었다. 실질적 권력자는 군부의 장성들. 처분되지 않고 살아남은 김씨 일가는 이미 세뇌된 주민들을 다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인민 최고 국방위원장 김장소 또한 그런 살아있는 도구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유약하고, 어리석었으며, 그럼에도 핏줄에 진하게 남은 탐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게드로이츠는, 그런 그를 멸망의 시발점으로 선택했다.
“일이 틀어지자 가장 안전하다 싶은 곳으로 도망쳤겠지. 중국의 첨병이었던 북한의 지도자였던 만큼 비밀스런 격납고에 대한 정보도 어떻게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가 일러주었다. 가장 많은 병기가 잠든 그곳이라면 안전할 것이라고.
탐욕스러운 머저리는 핵 미사일이 발사된 직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고, 겁에 질렸으며, 게드로이츠의 안내에 따라 중동의 병기창에 제 몸을 숨겼다.
“거대한 사건은 때론 그것을 마주한 사람을 완전히 바꿔버리기도 하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머저리였던 김장소라는 인물도, 매일 인류가 퍼센트 단위로 줄어드는 전쟁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야. 그렇게, 병기가 가득한 격납고에 숨어 살다가, 죽어서, 전쟁 그 자체와 같은 괴물이 되었던 거야.”
그 거대한 병기창의 존재를 아는 이는 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비밀리에 모두 죽여버렸다.
김장수가 그 미사일 격납고에 들어간 다음, 게드로이츠는 출입 보안 코드를 모조리 바꿔버렸다.
오직 미사일과 병기만 가득한 그곳에 감금된 꼭두각시 독재자는 올 리가 없는 관계자들을 기다렸고, 심각하게 굶주렸다.
그는 콘크리트 사이로 새어나오는 물을 핥았고, 힘겹게 잡은 쥐와 바퀴벌레로 연명했으며, 탈출을 위해 통로가 비좁을 정도로 쌓인 온갖 미사일과 병기의 사용법을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익혀내려 애썼다.
그러다 굶어죽었다. 그렇게 3형 변종 ‘워’가 되었다.
전쟁 그 자체를 상징하는 3형 변종은, 제 몸에서 만들어낸 짙은 방사능을 2번 구역에서 세계로 퍼트려 살아남은 인류에게 카운트다운을 제시한 괴물은, 그의 교묘한 유도를 통해 만들어졌다.
당시를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이게 가장 가능성 있는 수단이라며, 김장수가 허울뿐인 독재자라도 그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개미처럼 죽인 전적이 있는 악인이라며 한 사람을 괴물이 되도록 유도한 스스로에게 셀 수 없이 변명을 했었다. 돔이라는 실험 장소에 생존자들이 모이게 하려면, 강력한 도시단위 실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만큼 좋은 수단이 없었으니까.
“자, 케셀링. 그럼 질문이야. 내가 왜 갑자기 우리가 이미 죽여서 해체까지 마친 3형 변종의 과거사를 입에 담았는지 말해보겠나? 힌트는, 자네가 이 질문을 시작한 이유 정도라고 하지.”
“해체한 그 ‘워’라는 변종의 사체가 병기로서 이용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렙터의 전력 3할을 소모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역시 자네는 머리가 좋군!”
말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과거의 게드로이츠’는 온갖 전술, 전략핵이 모여있는 미사일 격납고에서 탄생한 변종을 그저 ‘끝없이 방사능을 뿜어 인류를 압박하는 존재’로 기능해주길 바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구스타브 알 하르브라는 인물과 인격이 뒤섞인 ‘지금의 게드로이츠’는 그 전쟁병기 덩어리 괴물의 보다 유용한 용도를 생각해냈기에, 자신이 만든 괴물을 회수한 것 뿐이었다.
케셀링의 등을 한번 세게 두드려준 그는 자신의 방 한쪽에 엄중히 보관된 철제 박스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희뿌연 김과 냉기.
“취급에 다소 각별한 유의가 필요한 물건이라 내가 직접 그 시체 덩어리를 칼과 도끼로 쪼개며 헤집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네.”
“그럼, 저번의 그 ‘소일거리’라고 했던 운동이.”
“그래. 이걸 찾는 중이었지.”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은은하게 빛나는 포도알 크기의 연녹색 덩어리들이었다.
“이건….”
“그 괴물이 가지고 있던 방사능의 원천. 인공적인 가공이 아닌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 정제된, 구세대 인류도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단계의 핵반응성 물질이지….”
톡.
살아있는 혈관에 붙어있는 연녹색 알갱이를 뜯어낸 게드로이츠는, 그것을 손끝으로 가볍게 튕기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작은 한 알에 담긴 에너지면 커다란 원자력 발전소를 세울 수도 있고, 도시 하나를 통째로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다네. 이제 내가 왜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2구역의 그놈을 잡아왔는지 이해했나?”
“이해…. 했습니다. 돔의 원정군 따위는 각하의 안중에도 없으셨군요.”
“그런 샘이지.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 일하러 가도록! 내 자네를 신뢰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드러낼 생각은 없으니.”
“즉시 복귀하겠습니다.”
케셀링은 그의 뱀 같은 눈동자 가득 만족을 담은 채 그의 집무실 밖으로 돌아 나갔다. 기분이 좋겠지. 그동안 바보같은 괴물 하나 잡는데 거대한 군단 전력의 3할이라는, 현대전으로 치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확인해보니 렙터의 3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병기를 얻은 것이니까. 실로 케셀링의 ‘합리성’에 부합하는 행위였겠지.
“쯧쯧쯧. 이래서 멍청이들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는 거야. 조금만 동조하고, 조금만 유도 해주면 다들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해버리니.”
게드로이츠는 그런 케셀링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 이 포도알 같은 연녹색 방사능 덩어리는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조금 노력하면 3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각국을 수놓은 핵폭발을 재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가 왜 이 몇 개 없는 귀물을 돔 원정군 따위에게 소모해야 하는가? 그들은 그가 준비한 실험실 안의 실험체일 뿐이며, 렙터 또한 그에게 있어선 실험체를 다루기 위한 핀셋이나 약품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데.
게드로이츠는 렙터라는 광기어린 살인자 집단을 만든 수장의 인격과 융화되며 생각지도 못한 돌파구를 찾아내고 말았다. 과거의 평범한 과학자 게드로이츠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완벽히 바닥에 가라앉은 자의 시선에서 본 세계를 바로잡을 방법을.
달칵.
금속 상자를 닫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웨에에에에엥-!!!
그의 주문에 따라 철저하게 방음이 된 방에서 나오자 귀청을 찢는 사이렌 소리가 그를 반겨주었다.
[적 접근 중! 적 접근 중! 매설된 지뢰 구역으로 돌입한다!].
.
.
.
쿠르르릉!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며 한차례 진동이 사위를 휩쓸었다.
[도, 돌파! 돌파당했습니다!]치익-
앞다투어 쏟아지는 보고와 금새 합류하여 그것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하는 부하의 목소리.
커다란 전면창 밖에 보이기 시작한 광경은, 온갖 수라장으로 단련된 게드로이츠조차 희열을 참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모습이었다.
마치 청어 떼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전차들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포구를 돌리고 있었다.
폭발한 지뢰가 만들어낸 흙먼지 속에서 나타난 그것은 철책과 장애물, 차량과 인간을 노도처럼 부수며 본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하늘에는 조금씩 움직이던 위성들이 어느새 토성의 고리와 같은 링 형태로 몇몇 덩어리를 이루어 새로운 천체를 흉내내었으며, 땅에는 그들을 환대하기 위한 작은 녹색 과실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시작이로구나….”
일어날 일들은 일어난다.
그것은 게드로이츠가 수많은 경우의 수로 나뉘어진 세계를 관찰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것이 운명이라 부르는 미지의 것이든, 혹은 실제하는 신이 설계한 정해진 과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 그 누구보다 그 ‘정해진 결과’를 바꾸고자 노력했던 과학자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수단이 닳아 없어진 절망의 끝에서 비로소 새로운 해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멍청하게도, 이미 뿌리가 단단히 박힌 나무를 가지를 쳐서 바꾸고자 했으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아무리 다양한 미래를 준비한다 한들 결과가 바뀌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답을 어떻게든 더 나은 ‘미래’에서 찾으려 했으니 아무리 애를 써도 실패만 거듭했던 것이다.
“애초에,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잘못된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말이야.”
‘과거’라는, 보다 근원에 가까운 것을 고쳐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아무리 그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제법 열심히 시도해봤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만 명확하게 알았다.
하지만, 세상엔 시간을 돌리지 않아도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황무지만 해도 전쟁 전 시절을 ‘구시대’라 부르며 지금과 다른 훌륭한 시대로 취급하지 않는가?
위대한 발명이 실수에서 만들어지듯, 그는 이미 자신의 손으로 이 모든 것의 해결책을 한번 세상에 선보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어긋난 시점. 그게 도덕이든, 관습이든, 문화든, 기술이든….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선택을 한 시점에서부터 그 이후로 쌓인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면, 인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게드로이츠는 새로이 정립한 이론을 떠올리며,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동료를 생각했다.
리 쉬에. 그에게서 벗어나 ‘해피 블라인드’라는 기술 혐오 광신도 집단을 창설한 연구원. 어찌 보면 지금 그의 행동은 리 쉬에의 사상과 매우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현생 인류의 모든 기술은 물론, 그 기술의 존재를 목도하고 과거를 기억하는 구세대 인류 모두가 자결하는 것이야 말로 무너져가는 세계를 구할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했다는 것.
게드로이츠의 새로운 계획은 거기서 딱 두 가지가 달랐다.
하나, 잘못된 성장에서 비롯한 현 시대의 기술은 ‘제거’하지 않고 ‘격리’한다.
둘, 우리의 잘못된 과거,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 그들 중 딱 한 명을 살려둔다.
그를 실망시킨 수 많은 지도자들과 달리, 그가 손을 놓은 계획에서 기적처럼 탄생한 초인. 그 누구를 앞세워도 길을 헤매기만 하는 양떼의 인도를 맡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그야말로 완성된 인간.
쿵-
쿠웅-
쿵-!
지금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내며 포탄처럼 그를 향해 다가오는 자.
“나의, 우리의, 이 세계가 잉태한 유일한 성공. 이루 말할 수 없이 고귀한 완성자여.”
불확실한 미래는 그의 손에 맡겨질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위대한 자의 숙명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니, 위대한 자여. 나의 유일한 성공이여.
“우리로 하여금, 이 순간의 기념비가 되길 허락하라.”
게드로이츠는, 가볍게 들었던 손을 내리그었다.
-꽈과과과아앙!
수백 대의 전차가 동시에 쏘아낸 포탄이 단 하나의 인간을 향해 쏟아졌다.
게드로이츠, 렙터는 광소했다.
그는 이런 것으로 죽지 않을테니까.
다른 얼빠진 정신에서 비롯한 괴물들과 달리, 저자야 말로 살아있는 정신에 깃든 유일한 성공작. 그가 처음 기획한 그 모습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진짜 변종이니까.
그는 무적이다.
그는 새 시대의 유일한 등대다!
이런 공격은 그저 발을 묶어두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으음, 이런. 케셀링군의 말이 옳았나보군. 약을 좀 많이 투여했나.”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쥐어진 주먹을 펴며 게드로이츠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새로운 실패를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
“부디, 여기서 새 세상의 전야제를 즐기고 있도록.”
이 장엄한 포성과 굉음, 비명과 고함.
폭죽과 꽃종이가 아닌, 파괴로 얼룩진 이 세상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어울리는 예포가 아닌가.
게드로이츠는 그 거대한 폭력의 중심에 발이 묶인 교수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등을 돌렸다.
품안에 챙겨든 금속 상자와 함께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오래전 그가 다른 계획을 위해 준비해둔 시설.
이미 대부분의 발사 준비를 마친, 넥스트 스페이스의 우주 왕복선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번엔 성공하리라. 이번엔 다른 결과를 향할 수 있으리라 강하게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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