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20
Chapter. 24. 가장 위대한 채권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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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타앙! 타앙!
투박한 격발음과 함께 용도를 다한 샷건 쉘이 거칠게 허공을 갈랐다.
“데스몬트 형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같이 자폭병이에요!”
“사이보그병 뿐만이 아닙니다!! 이 새끼들, 안 보이는 동안 47구역 위쪽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모았다고요! 방사능 때문에 남하하는 피난민들을 싸그리 잡은 것 같습니다!”
BDSM 단원중 하나가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피가 아닌, 눈앞에서 폭발한 인간들의 잔해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카아악- 퉤! 겉모습뿐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싸구려 개조같은 걸 당했수다. 뭐가 진짜배기 사이보그고 뭐가 더미 고기방패인지 모르니 무작정 화력을 쏟아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절대 못 뚫어. 이미 밀리고 있단 말이우, 대장.”
“답지 않게 혀가 길다, 부들람.”
-짤깍.
휘이익!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부하의 보고에, 이안은 수류탄 하나를 엄폐물 너머로 까넣으며 대답했다. 잠깐 위로 손이 드러난 순간 쏟아진 조준사격이 무장 트럭의 방탄판에 쏟아져 마구 불똥을 튀겼다.
“벡스 형님이 앞에서 자빠진 놈들 하나씩 끌고 빠지지 않았으면 벌써 우리 중 절반은 골로 갔을테지. 도대체 본대 그 씨발놈들은 언제쯤 무거운 엉덩이를 좀 제대로 흔들어 준답니까? 우리도 획기적인 수단이 있다며?”
“우는소리 하지마, 자식아. 교수랑 본대가 포격을 다 받아줘서 이렇게 방탄 트럭에 엄폐하고 교전이라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이해해주쇼. 맨날 옆에서 떠들던 놈이 지금 내 몸에 묻어있어서.”
“니미럴.”
우수한 뮤트 테크 장비, 우수한 팀 워크, 3형 변종을 상대로 쌓은 전투 경험 덕에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렙터 네스트에서 고작 이백여 미터, 철의 성체를 마주한 이안과 BDSM은 그들의 역량만으로 측면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역시, 박교수의 무리한 작전에 동의하는 게 아니었어.’
지금도 임시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퍼억! 퍼억! 하고 인간 크레모아가 뼛조각을 흩날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네스트의 정면에선 초당 수백 발 단위로 쏟아지는 포격에 땅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저 병신 같은 놈은 언제나 자기희생을 전제로 계획을 짠다. ‘몸이 이상해. 될 것 같아’ 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백대 단위의 전차를 몸빵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이안과 BDSM은 변종 전투의 최전선에 있는 집단이었고, 그만큼 변종이라는 생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기괴해도, 결국은 생물이다.’
불을 뿜는 변종. 신기하긴 해도 대가리를 터트리면 죽는 건 똑같다. 배를 따면 내장이 들어있고, 소화기관도 있고, 들어있을건 다 들어있다. ‘변종화 박교수’가 특이할 정도로 강하다 한들 생물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은 변함없었다. 언젠간 생물로서 지니고 있는 자원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고, 결국엔 전장의 육편더미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기랄, 역시 영 총장 말대로 우주선 떴을 때 그냥 터트리는게 맞았어. 정말 저거 올라가기 전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 맞수?”
“….퉤.”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화약가루 섞인 침을 내뱉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 렙터의 강력함에 대해 잘 아는 사람으로서, 박교수의 바보같은 계획에 그 누구보다 반대했어야 하는 사람은 이안 그 자신이었다. 작전의 성공은 불투명하고, 희생은 확실했으며,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있어 저 우주선은 ‘인류의 미래’라는 너무 먼 가치에 치중된 목표물이었다. 작전이 실패할 확률이 부단히 높다는 것을 이미 ‘사령관 이안 데스몬트’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잘그락
여전히 그의 목에는 탄환 한 발이 장전된 데린저가 걸려있는 까닭이고.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우주선 앞에 그에게 익숙한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까닭이었다.
“구스타브, 알 하르브,”
놈이 있다. 악몽도 아니고, 술에 취한 허상도, 약에 취한 환각도 아닌, 살아 숨 쉬는 놈이 고작 몇백 미터 앞에 두 발로 서 있었다.
아마, 그래서 박교수의 계획에 동의했을 것이다. 심장이 없는 사령관 이안 데스몬트였다면 두말할 것 없이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이 작전에 반대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메탈조라 불리는 남자였다. 화약과 알콜에 찌든 그 심장은 뛰지 않았던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지난 몇 년 동안 아주 거칠고 격정적으로 뛰어왔다.
“렙터…!”
으드드득!
메탈조가 교수의 ‘몸빵 작전’에 동의한 대는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수의 심장에 직접 총탄을 쑤셔박겠다는 개인적인 욕망.
그리고, 전쟁은 그런 감정적인 행동의 대가를 철저하게 지불하는 편이었다.
렙터 네스트. 온갖 폐차량과 전차가 군집을 이룬 이동 요새의 벽면은 상판이 날아간 차량과 궤도가 다 깨진 전차 따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끄드득, 끼리리리릭-
개중에는, 아직 고정 포대로서의 역할 정도는 수행 가능한 낡은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낡고 녹 투성이가 된 포구 하나가 힘겹게 머리를 돌렸으나, 빠른 속도로 죽어가는 친구와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원수에 눈이 팔린 메탈죠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섬뜩!
오랜 전쟁 경험이 경종을 울렸을 때는, 이미 검은 공동 같은 포구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쿵!
그것이 불을 뿜는 순간 이안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옆에 있던 부들람을 걷어 차 피신 시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쐐애애액!
‘….제기랄.’
콰아아앙!
폭음, 그리고 충격.
렙터 전차병의 포격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오래전, 그가 그들을 유용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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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쿠우웅.
“….병! 의무병!!!”
폭발, 그리고 블랙아웃.
잠시 잃었던 정신이 되돌아 왔을 때는, 이미 고막을 두드리던 포성이 작은 땅울림으로만 느껴질 정도였다.
포격이 잦아든 것이 아니다. 그것을 느낄 감각기관이 죄 걸레짝이 된 것 이다.
“데스몬트 형님이 당했…. 전차 사단…. -었어!”
“싯팔, 의무병! 어디 살아있는 의무병 없나!!”
긴박한 목소리와 임시 바리케이드용 콘크리트 폼이 투사되는 소리. 지혈제가 가슴에 닿지 않고 그보다 더 안쪽에 떨어지는 감각을 느낀 순간, 이안은 포격이 그의 상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인지했다. 우진의 최신 뮤트 테크 보호장비도 바로 앞에 떨어진 전차 포격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끼들…. 모르핀을…. 작작…. 써야지….”
“혀, 형님!”
“대장!”
“….”
익숙한 부하들의 얼굴 너머로 검은 피부의 부들람이 악을 쓰며 무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장트럭을 줄지어 세우고 비상용 콘크리트 폼으로 급조 벽을 쌓아둔 모습. 이미 간이 진지 안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상태의 동료들이 잔뜩 누워있었다.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 부들람이 돌파를 포기하고 나머지를 불러모은 모양이다.
‘….멍청한 자식. 이건 보병은 막아도, 포격에는 쥐약이잖아. 두들겨 맞다 다 죽기 싫으면 억지로라도 뚫고 들어갔어야 하는데….’
말도없이 진형을 변경한 놈에게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나올 뿐 한마디 욕설을 내뱉을 힘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구스타브 저놈을 코앞에 두고. 손끝 하나 닿지 못하고.’
고통과 이명, 죽어가는 감각은 늘상 생각하던 것이라 그리 충격적이진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개죽음이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일지도 몰랐다. 과거에 그의 손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죽어갔으니까.
“죠! 메, 메탈죠! 어, 어이…!”
“후윽, 끄으으음….”
하지만. 반쯤 먹은 귓가에 어딘가 늙수그레하고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을 때, 이안은 반쯤 떠나보낸 세상이 그의 옷자락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짜리몽땅.”
“ㅈ,죠! 마,말하지 마! 숨, 숨 쉬는 데, 집중-”
“전황은.”
우습지만, 지금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이었다.
반가운 벡스의 목소리. 적과 아군, 자신의 피로 칠갑을 한 그 작달막한 녀석의 모습. 어딘가 이제 다 괜찮다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예감.
“우리가, 이 따위 거북이 진을 치고, 왜 전차 화력을 이쪽으로 돌린 렙터에게서, 아직 살아있는거지.”
“그, 그,그건….”
와락!
“교수 형님이 해내셨습니다! 렙터 전차 사단이 죄다 갈려나가고 있다구요!”
“대장이 또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대로 적 본대만 쓸어버리면-”
콰아아아아-!
부하의 말은 밤하늘을 가르는 핏빛 기둥에 묻혀버렸다.
이안의 흐릿해진 눈으로도 명확히 보이는 비현실적인 광경. 어디선가 본 듯한 형태로 달라진 박교수에게서 피보라가 쏟아지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엔 끔찍하게 깎여나간 쇳덩이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저게 그놈이냐.”
“예! 영상에서 본 모습과 동일한 ‘워로드’의 모습이십니다!”
“저게, 정상으로 보여?”
“….예?”
“어이, 짜리몽땅. 이게 그렇게 헤벌쭉할 일이냐? 변종 몰라? 여기 이렇게 병신처럼 웅크리고 있을 때가- 쿨럭!”
“마,마, 말하지 마…!”
언성을 높인 순간 폐부의 압력으로 우수수 터져나가는 상처. 끔찍한 고통이 따라왔지만 되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 있을 수 없는 상처다.’
이안은 그제서야 그의 팔뚝에 꼽혀있는 커다란 주사가 모르핀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리바이벌 킷. 그때 그거냐.”“하, 하, 하나 남아 있었어. 47구역 때, 나,나도 저걸로 살았으니까….”
“그래. 옆구리가 거의 통째로 날아갔었던 너도 이것 덕분에 살아남았지.”
부스스슥-
“그렇담, 나도 대충 움직여도 당장은 안 죽는다는 뜻이군.”
“아, 안돼! 우, 움직이면 단백질 충전제로 막아놓은 상처가-”
빠아악!
깨진 사발처럼 움푹 패인 가슴을 향해 손을 뻗는 벡스에게 날아든 것은, 우악스럽게 움켜쥔 이안의 주먹이었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주먹질은 벡스의 팔에 가볍게 막혔지만,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는 사실에 벡스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가리 닥쳐, 벡스.”
“형님! 제기랄, 리바이벌 킷에 포함된 도핑제 때문인가!”
“너도 닥쳐 부들람. 너희들은 내가 엄선한 머저리 들이지만, 오늘만큼 실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도저히 좆같아서 눈을 감을 수가 없군.”
“씨발, 약 쳐맞고 헛소리 할거면 그냥 더 누워있는게-”
“저게 정상으로 보이냐? 저게! 박교수 저 새끼가 저 지랄 하는걸 보고도, 3형 변종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너희들이 ‘이제 됐다! 박교수가 해줄거야!’ 하고 이렇게 가만히 웅크려 있는 게 말이나 돼!”
다시한번 목구멍으로 핏물이 올라왔지만, 이안은 오기로 그것을 집어삼켰다. 벡스도, 부들람도 짐작이 가는게 있는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천치같은 새끼들!”
그게 더 화났다.
“변종도 결국 생물이잖아. 수없이 터트리고, 쪼개고, 쑤시고, 해체하면서 확인한 사실이잖아! 뭔 알 수 없는 과학의 산물이고 나발이고 염병할 뼈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이라고! 저런 핏덩이 빔 같은걸 마구잡이로 갈기면 어떤 꼴이 날지 뻔히 알면서, 그걸 알면서…!”
으드득!
지금 이 순간에도 또다른 붉은 포격이 전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렙터의 포성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박교수의 모습도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이제는 인간형 괴수의 모습에서도 꽤나 멀어진, 온몸에 커다란 결정 같은 것이 큰 덩어리로 자라난 모습.
뭐, 치료제가 있다고? 완전히 변하기 전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개소리다. 저걸 원래 박교수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치료제는 원심 분리기에 넣고 갈아버린 인간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이다.
‘저 머저리 새끼, 이것저것 포기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끝내 박교수는 말리는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무리를 해버렸으며, 이놈들은 그걸 좋다고 바라만 보며 ‘박교수님이 다 해주실거야!’ 같은 식으로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쿨럭! 머저리, 팔푼이, 쪼다, 등신, 개호로 좆같은 새끼들….”
“….지, 진정해, 죠.”
-철컥!
말리는 벡스를 뿌리치고 그의 병상 옆에 기대어진 총기를 집어들었다.
“그저 해줘, 해줘, 아주 전쟁 맡겨놓고 구경하러 왔지. 저 새끼가 전차를 조졌으면 그 틈에 어떻게든 파고 들어갈 생각을 해야지.”
“죠, 메탈죠. 마, 망할, 제발 좀 진정….해!”
“진정? 개좆같은 진정은 얼어죽을! 이대로 여기서 노닥노닥 시간이나 보내면서 박교수가 전쟁을 끝내주길 기다릴거냐? 그 다음엔? 저렇게 쑥쑥 자라난 박교수-결정을 전쟁 박물관에 고이 모셔놓고 ‘그땐 참 고마웠어 친구야’ 같은 소리나 하게? 위대한 영웅 박교수 일대기도 만들고, 동상도 세워주고?”
“아서라 벡스. 그렇게 되면 난 사죄의 의미로 다나양 앞에서 무릎꿇고 내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느니 여기서 뒈져버리는 쪽이 훨씬 마음에 든다.”
“나, 나도 아, 알아! 저, 저대로 두면, 햅번이…. 돌아올 수 없게 된다는 거!”
지랄.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이안은 근처에 널부러진 탄띠를 매며 코웃음쳤다.
“하, 하지만, 이대로 아무런 조치도 하,하지 않고 움직였으면, 해, 햅번은 살려도 네가 주,죽었어!!”
“….죠! 너, 너는 지금 생각보다 훠,훨씬 많이 다쳤어. 그, 그몸으론 아,아무것….도 못해.”
스륵, 촤르르륵!
탄띠를 어깨에 걸쳤지만,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어깨에 걸칠 곳이 없어진 탄띠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어딘가 불안한, 하지만 이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확고한 벡스의 눈빛이 그를 마주했다.
“나, 나는 옛날의 벡스가 아, 아니야. 바보처럼 해,햅번에 집착하고, 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저,정신병자로 사, 사는 건 그만 뒀어.”
“저, 전부 소중해. 우,우선 당장 죽어가는 죠를 살렸어. 전장에서 죽어가는 BDSM 동료들도 살렸어. 이, 이제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는’ 햅번을 구하러 가, 갈거야.”
“….네가?”
“어어. 내가. 그게, 순서야.”
이안은 그제서야 벡스의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늘상 즐겨입는 주머니가 많은 판초우의. 그 안에는 뮤트 테크가 개발해낸 수많은 소모성 장비가 빈공간 하나 없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몸에 탄띠와 폭탄을 둘둘 감고 전쟁터로 걸어 들어가는 병사처럼.
“이, 이 방어 진지는 적 보병 전력을 효과적으로 사살하고 있어. 전차 부,부대는 교수가 줄이고 있고. 충분히 적 방어 전력이 주, 줄어들면-”
“들어가서, 직접 수뇌부의 목을 따버리겠다. 그거냐.”
“….내가, 내가 잘하는 거야.”
작달막한 체구에 근 40kg은 될법한 무장을 짊어지고 결연한 얼굴로 말하는 벡스.
“….하, 참.”
그런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어딘가 머리에서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녀석 뿐이었군. 여기서 전쟁의 광기에 휘둘리지 않은 놈은.’
박교수는 제 이상에 빠져 사는 이상한 놈이다. 결국 그것에 휘둘려 또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중이다.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메탈죠로 살기를 천명한 주제에 데스몬트 시절의 기억에 휘둘려 한눈을 팔았고, 그 대가로 상반신이 너덜너덜해져 약과 호르몬에 의지해 겨우 서 있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벡스만이 중심을 잃지 않았다. 명료하게 생각하고, 날카롭게 판단했으며, 혼란한 전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해내었다.
임시 진지에 누워있는 수많은 BDSM 대원들은 벡스가 전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후방까지 끌고 온 것이 벡스고, 반쯤 저승으로 넘어간 그에게 항상 품에 넣고 다니던 리바이벌 킷을 꼽아 겨우 숨을 붙여놓은 것도 벡스다. 그리고, 그 다음이 ‘완전히 변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는 박교수 차례’라며 네스트 한복판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있는 것이다.
어째 매일 옆에 달고 다니던 녀석이 훌쩍 커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크흐흐흐. 이래서 여자는 잘 만나고 볼 일이라니까- 쿨럭! 토끼 아가씨를 만나고 애가 확 변했잖아.”
“개, 개소리 하, 하지말고 누, 누워있어. 부, 부상자답게. 몇 시간 안에 필요한 조치를 받지 못하면 죽을테니까…!”
그래. 생각해보면 이 녀석은 아직 20대 중반이었다. 나 보다 열 몇 살은 더 어린, 아직 굳어지지 않은 청년.
“오냐. 그럼 믿고 맡길 테니까, 나 담배에 불 좀 붙여주고 가라. 어깨가 이 모양이라 팔이 안 올라가서.”
그런 생각을 하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조금은 안심한 얼굴의 벡스가 황동색 라이터를 꺼내 부싯깃을 당기고.
찰칵 찰칵
화륵-
“야야, 좀만 더 가까이 좀. 나 숙이면 내장 쏟아져.”
“머, 멍청하게 한눈팔다 당하기나 하—-”
파지지지지직!
벡스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불을 붙여주기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소매 속에 숨겨둔 스턴 건이 벡스의 뒷목을 지졌다.
-털썩.
“….그래. 한눈팔면 당하는 법이지.”
그 짧은 찰나에 내 손목을 붙잡았던 벡스의 손아귀가 힘을 잃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형님! 왜 벡스 형님을…! 미쳤수!”
“부들람, 이거 봐라. 거 실하게도 챙겼네. 짜식.”
“저건?”
“이 자식이 망토 안에 잔뜩 주워 담아놨던 거지. 아무리 봐도 강산성 확산 폭탄이 침투, 암습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지 않냐? 몸 가벼운 게 장점이라고 환경 보호복도 안 챙겨 입는 자식이.”
잠깐 녀석의 망토 안에 스쳐지나간 실루엣.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진 영감과 함께 연구 개발에 매진했던 이안이 못 알아볼 물건은 아니었다.
“생존을 담보로 한 침투 같은 게 아니야. 이 자식, 중동 테러범이나 할법한 생각을 했다고.”
“벡스 형님이 네스트에 들어가서 다 같이 죽을 작정이었단 말이우?”
“그런 셈이지. 하여튼, 젊은 놈이 어만 놈 옆에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지익, 지이이익!
이안은 쓰러진 벡스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방탄판을 집어든 다음, 휑하니 날아간 뱃가죽 위에 대고 덕테이프를 둘둘 감아버렸다. 방탄판에 붙은 약간의 수납공간에 빈틈없이 폭발물을 결속한 것은 물론이다.
“자폭이라면, 지금 살아 숨 쉬는 인간중에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놈이 또 있겠어?”
“형님!”
“찌그러져 있어. 벡스놈은 근접전 괴물이라 어쩔 수 없이 속임수를 썼지만, 부들람 너 정도는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조질 수 있어.”
“하지만, 형님은 상태가-”
“뭔 지랄을 해도 두 시간은 버티는 약물을 맞은 상태지.”
크흐흐흐, 아래턱 어딘가로 새는 듯한 웃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이거다. 이안 데스몬트가 아닌 메탈죠로서의 삶. 말라붙은 찌꺼기 마냥 남아있던 과거가 잠시 그를 쥐고 흔들었던것이다.
촤르륵, 촤르륵-
철컥!
폭탄과 화약. 총탄과 담배연기. 이것이 그의 남은 삶을 정의하는 전부가 아니었나.
“벡스 저녀석은…. 진로를 잘못 잡았어.”
“침투 병과가 아니라 의무병 같은 걸 했으면 14특작대 이상으로 이름을 날렸을걸.”
거기에 추가로, 서로 얼굴만 봐도 병신같이 실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친구들 정도를 얹을 수 있겠지.
“정말로 가는거요? 그 상태로?”
“그래. 박교수 저놈이 ‘신비의 인간 덩어리’같은 게 되어버리기 전에 누가 가서 저 강철 요새를 엎어버려야지.”
“그, 그럼 내가 가겠수다! 난 댁보다 몸도 멀쩡하고, 어디가서 꿀릴 정도로 몸을 못놀리는 것도 아니고! 재수없게 스캐빈져로 살다가 총맞고 객사했을 인생 구해준 값, 내 이번에 다 치르지! 그거 내놓으쇼! 얼른!”
“지랄. 부들람 네놈이 날 대신하기엔 100만년은 멀었다. 쳐박혀 있어.”
“형님!”
“제일 멀쩡한 무장트럭 한 대 가져간다. 벡스 녀석이 파고들 정도로 적 화력이 약해졌다면 차 타고 들이받는 것도 가능하겠지. 넌 상한 애들 인솔해서 뒤로 빠져.”
부들람이 뭐라고 더 말한 것 같았지만, 포격으로 한쪽 고막이 터져버린 터라 몸을 돌린 상태에선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지 마누라 찾아서 염장을 지르고 다니니까. 꼴 받아서.”
찰칵! 그릉 그르릉-!
“나도, 우리 와이프나 보러 가련다.”
부아아아아앙!
개조된 트럭의 엔진이 짐승같은 울음을 토해니더니, 대형 무장트럭의 여덟 바퀴가 땅을 긁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콰작!
포격에 넝마가 된 콘크리트 폼을 뚫고 나오자 확연히 소강상태에 가까워진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박교수의 모습은 누가봐도 한계에 가까워 보였다.
강철의 벽 같던 렙터의 전차부대도 스위스 치즈마냥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이안은 점점 식어가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경쾌하게 무전기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치익-
[채널-1. 메탈죠다. 본대, 그쪽 준비는?] [미리 말하는데, 아직까지 장비도 못박았으면 핸들 틀어서 네놈들부터 박아버릴거다.]치이익-
[보, 본대, 통신병 알리 윌슨입니다. 채널-1…. 이안 데스몬트님 맞으십니까?]통신병의 상태를 보아하니 신병이 무전을 잡아야 할 만큼 피해를 입은 모양. 저쪽도 만만치 않았군.
치익-
[아, 잘됐군. 그건 이쪽에서 커버하지. BDSM쪽 신호 유도기를 목표의 중앙까지 옮겨놓겠다. 본대는 장비만 잘 지켜.]치이익-
[재확인…. 바람! 통신 불안정으로-]달칵!
“재확인은 무슨. 잘 들어놓고.”
본대쪽 장비가 준비됐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글러브 박스를 뒤지던 이안은,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역시 이게 있어야지.”
찰칵!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썩 마음에 드는 선글라스.
입가에는 새 담배를, 옆자리엔 소중한 트리플 배럴 샷건을.
상체 전면이 거의 다 떨어져나간 몸뚱이엔, 방탄판과 탄환, 폭약을 한가득.
“메탈죠 최후의 드라이브라면, 모름지기 이랬어야지!!”
매캐한 매연과 담배연기가 가 섞인 쓰디쓴 향기속에 뒤집어질 듯 거칠게 달리는 차량의 진동이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눈은, 보란 듯이 우주선 앞에서 전장을 살피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안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다.
구스타브 알 하르브. 오직 그를 제외하곤, 다른 어떠한 것도 눈에 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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