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26
Chapter. 24. 가장 위대한 채권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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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거래도 뭣도 아니야. 그저, 내가 자네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지.]적막한 우주 공간 속. 미친 과학자의 전뇌가 이미 죽은 사체의 폐를 쥐어짜 하는 말은 그것 이상으로 기이한 무언가였다.
[신이 되어주게.]미친 자가 하는 미친 소리.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내가 만든 위성우는 지구의 표면을 한꺼풀 벗겨낼거야.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것과 같지. 이미 어긋날대로 어긋난 인류는 물론 극히 일부 미생물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사라지고, 우리의 고향은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되는거지! 바로 그 위에, 자네가 새로운 인류 문명을 번성시켜줬으면 하네.]“제정신이, 아니군….”
[바로 그거지. 자네가 말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 현대 인류 문명이 보편적으로 올바르다 정의한 그 상태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게 당연하지 않나! 인류는 이미 아주 먼 고대의 어느순간 잘못된 방향으로의 진화를 선택했어! 문화, 상식, 그 이전의 어떤 근본적인 무언가가 잘못되었지! 그러니 벗어나야 하는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흐.”
[되도록 내가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꿈꾸었지! 하지만, 이내 단념할 수밖에 없었어. 난 이미 무수한 실패를 답습한 실패자였으니까. 서버룸에 보관된 유전자를 통해 배양되어 새 지구에 뿌리내릴 인류는 말 그대로 백지 상태에 가까울텐데,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실패자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은 불쾌한 욕심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자네야. 가장 완벽한 인격. 구 인류의 관점에서 벗어난 미치광이, 어긋난 정신의 소유자이며, 놀랍게도 그 어긋난 형태가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완벽한 형태로 일그러진 인격자!]“흐흐, 흐….”
[자넨 정신병자야.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자기애가 없지! 부모의 희생, 동료의 죽음속에 살아남은 자네의 책임감이 제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적출해버렸고, 그 덕에 지금의 박교수는 오직 타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정신병리학적 이타심에 사로잡힌 미치광이가 된 거야!]게드로이츠의 말은 헛소리였다. 헛소리였지만, 나를 부끄럽고 화나게 하는 무언가였다.
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 남에게는 밝힐 수 없었던 ‘박교수’라는 인물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자네는 선하지 않아! 성자, 영웅따위로 불리는 자네의 이타심은 사실 텅 빈 내면을 채우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지! 스스로의 발전, 개선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인간으로 뒤틀려버린 덕분에 내면이 텅 비어버렸지. 행복해지고 싶어할수록 그 내면의 구멍은 무저갱처럼 넓어 졌을거야. 자네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나의 오래된 쉘터가 떠올랐다. 항상 장전되어있던 리볼버. 제법 아쉽게 실패했던 수 번의 자살시도. 이런, 내 내면이 그따위 모습이었던 게 저것 때문이었군.
[그래서, 자네는 타인을 위하기 시작했어. 생존 본능과도 같지. 텅 비어버린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찾을 수 없기에 그 안에 타인의 존재를 끌어들이기 시작한거야. 타인의 그림자로 자신의 윤곽선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지.] [이 얼마나 놀라운 가. 이 얼마나 완벽한 형태의 일그러짐인가! 자네는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늘 자신의 주변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고자 한다네! 개인의 행복에 근원이 되는 ‘자기애’를 상실한 대신, 타인의 행복에 비친 자신의 윤곽을 그러모아 힘겹게 행복해지는 것이지.][그것이 바로 ‘성자’의 실체일세.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자. 오직 타인의 행복 속에 포함된 자신에게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자. 이토록 심각하게 불안정한 영혼을 가졌음에도, 자네는 마주한 모든 시련을 이겨낸 자! 다른 이들이 다 부서지고 깨어져나갈 때, 외려 그 시련속에서 더 단단하게 굳어졌지! 마치 금강석처럼! 그 일그러진 형태의 자아를 확립하는데 성공한 것이야! 그 단단하고 일그러진 형태야말로 세상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열쇠’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프로젝트 키 파인더(key-finder)는 성공했어! 다음 세대를 위한 완벽한 지도자, 백지에 가까운 인류를 올바르게 인도할 새로운 목자! 그게 바로 자네, 완성자 박교수일세.]“이봐….”
[부정하고 싶나? 그렇다면 왜 지금 당장 이 강화유리를 부수고 내 작은 전뇌를 으스러뜨리지 않는지 설명해보게. 그 몸은 이 안드레이 게드로이츠가 만든 최고의 역작이야. 유일하게 원래 목표치에 근접한 형태로 성장한 변종 바이러스의 결과물이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고 생존할 수 있는 인류를 만들어내기 위한 진화의 씨앗이었어. 잠시 극저온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지금쯤이면 이 강화유리를 부수고 내 머리통을 손에 쥘 힘 정도는 돌아 왔을 것이야.] [못하겠지. 그래. 지금의 나라고 해봤자 죽은 몸을 전기 신호로 자극하는 수준이고, 아마 일이 벌어진다면 높은 확률로 자네가 빠르겠지만, 그래도 자넨 움직일 수 없어. 자네의 머리로는 ‘만에 하나’ 일어날 일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거든. 만에 하나 게드로이츠가 나보다 빠르다면. 만에 하나 저 스위치가 눌러진다면. 저 아래 지구에 존재하는 모두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나 혼자 남는다면!!- 과 같은 사실을 말이야. 자네가 살기위해 끌어모은 그 텅빈 내면 속 주변인물들. 그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자네의 존재도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문자 그대로 저 아래 있는 것이 자네의 전부라는 것이지. 그래서, 자네는 내게 사로잡힌 것이고.]“….”
쉼없이 이어지는 게드로이츠의 설명은 훌륭한 학생을 가르치듯 부드럽고, 신중하며, 애정이 어려 있었다.
[버튼이 눌러지는 것. 위성우가 떨어지는 것. 지구가 새로운 창세기를 맞이하는 것. 이것들은 이미 정해진 일이야.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는 법이지.] [내 제안은 그저 정해진 결과에 옵션일 뿐이야. 소중하고, 위대하며, 찬사받아 마땅한 나의 완성자가 행복하게 계획을 실행하느냐, 슬픔에 잠겨 계획을 실행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마치 숨을 고르듯, 죽은 몸의 가슴이 크게 부풀더니 한층 기대어린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자네가 사랑하는 이들 중 정확히 49명을 살려주겠네. 지금 당장 이 버튼을 누르는 대신 약간의 시간을 주겠어. 자네는 저 우주선으로 돌아가고, 인간이 생존가능한 공간에서 내가 준 치료제를 맞아 인간으로 되돌아간 다음, 몸을 추스르고 우주선과 함께 47구역으로 되돌아가는거야. 그리고, 거기서 자네가 선별한 49명을 태우고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지. 위성우가 떨어질 지구에서 벗어나, 50인 규모 우주 장기 생존기지 ‘넥스트 스페이스’로.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지.] [초기화 과정을 거친 지구가 다시 환경을 회복하는데는 55년~7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하네. 그동안 자네는 바쁘게 움직여야 해. 물리, 화학, 생물학, 지질학부터 인류의 문화, 역사 등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지. 내가 남긴 지식을 포함해서 다 서버룸에 준비되어있네. 작은 것 하나 허투루 해선 안 될 것이야. 그것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새로운 세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학문이니까. 신이 되기 위한 준비라고도 할 수 있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자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천수를 누리고, 지구의 자정작용이 끝날 때 쯤. 이미 변종화로 유전자 단계부터 다른 생물이 된 자네는 혼자 살아남아 서버룸과 함께 지상으로 돌아 가는거야. 서버룸에 준비한 수많은 유전자 샘플을 배양하고, 지구의 생물군을 복구하고, 인류를 재건하는 것이지.]“그건, 지나치게 먼 미래의 일을-”
[가능하다. 결단코 가능하다. 그것을 시행하는 자가 다름아닌 바로 자네이니까. 시간도, 조건도 초월한 어떤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낸 바로 그 인물이니까!]몸을 잃고, 어쩌면 영혼마저 잃고, 다른 이의 인격과 뒤섞여 전뇌 속에 담긴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하게 됐음에도 게드로이츠의 목소리엔 어떤 강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신뢰를 넘어 종교적인 맹신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자신의 모든 것. 삶, 가족, 인생, 태어난 땅마저 모두 희생해 일구어낸 단 하나의 결과물, 그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
[예술가 연합의 핵 방공호라면 위성우의 충격에도 어느정도 버틸 것이야. 3형 변종이라면 대기의 산소가 대부분 사라진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지. 자네, 콜렉터와 W가 품은 삶의 목표를 기억하고 있겠지.]“….거기까지 예비 해뒀던건가.”
[그래. 콜렉터, 그 아이는 덧없이 소모된 자신의 목숨이 헛되지 않기를 염원했네. 콜렉터는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계획이 성공하길 염원하는 존재지. 그래야 자신의 죽음이 무가치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가 살아남길 소원했고, 자네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순간 나의 손을 잡았네. W는 말할 필요도 없지. 그는 자신의 의식이 계속 콜렉터의 곁에 머무를 수 있게 아주 작은 인류 공동체만 세상에 남길 바랐네. 유전자 샘플부터 시작하게 될 소규모 인류 공동체라면 그의 염원에 아주 적합하지. 애초에 콜렉터의 뜻에 따르는 존재이기도 하고.] [그들은 자네라는 목자에게 있어 훌륭한 사도가 되어줄 것이야. 물론 여러 가지 고난이 따르겠지. 내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수도 없이 나타나겠지만, 나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네. 그 문제를 직면할 것이, 다름 아닌 자네이니까. 구 인류가 잉태한 유일한 성공과도 같은 자네일 테니까.] [자네의 몸은 이미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 유전자부터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지. 70년을 보내고도 꽤 긴 수명이 남아 있을거야. 그리고 그 수명이 다하는 순간이 되면, 어린 인류를 보살피고 이끌어온 자네의 기억이 충분히 쌓여 있겠지. 그 죽음 이후에 탄생할 진정한 신. 깊은 슬픔과 후회 속에 살아오며 의무를 수행하고, 인류를 재탄생시킨 그 강렬한 기억을 기반으로 탄생할 3형 변종 따위의 하찮은 이름으로 불러선 안될 진정으로 완성된 생명체!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결정지을 신 인류의 잣대가 탄생하는 것이야!!]게드로이츠는 헐떡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죽은 몸에 담긴 전뇌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오직 멸망을 향해서 치닫기만 하던 구 인류의 운명은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나는 ‘성공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지.]게드로이츠의 목소리는 마치 그 순간을 목도 하기라도 한 듯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악의가 없는 악행. 너무 뛰어난 나머지 모두가 보지 못한 미래를 내다본 과학자는 끝내 백억에 가까운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책무, 유일한 사명감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구역질나게도 그것을 약간이나마 이해하는 내가 있었다.
“이해는 하는데…. 공감은 못 해주겠는걸….”
[이해를 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자네의 우수함이 증명된 것이지.]“흐, 흐흐, 흐흐흐흐….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물론 이해를 했다고해서 전인류 리셋 같은 미친 계획에 동참할 정도로 내가 망가지진 않았지.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던 손. 감각은 없지만 감으로 어찌어찌 강화유리에 달라붙이 있던 손이 내 목을 향했다.
“네 거창한 계획이 그런 식이라면, 여기서 내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저 아래 아득히 떨어진 땅이 나의 전부라면, 지금 이 우주 공간속 나의 존재는 게드로이츠의 전부였다.
자아, 네가 나의 전부를 쥐고 있다면, 나도 너의 전부를 쥐고 있다. 게드로이츠, 당신은 세계를 포함한 우리의 전부가 걸린 레이스에 응할 수 있을까.
게드로이츠가 담긴 몸의 죽은 눈이 한참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래선 안 되지. 안되고 말고. ]다소 긴 침묵 끝에 들려온 것은 낙담이 섞인 대답이었다. 슬픈 듯 착잡하게 가라앉은 음성.
[이것 참, 참으로…. 안타깝군.]찰칵!
“?!”
그리고,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버튼을 눌렀다.
거대한 폭발이 만들어낸 빛이 기지 위로 내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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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는 없지만, 어떤 소리는 들리지 않고도 느껴지는 법이다.
그것은 한 행성의 시대를 끝내는 소리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과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축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가 우주로 쏘아올린 무수한 금속과, 그것을 사로잡아 작은 천체와 같은 크기를 이룬 전자석 기둥들이 그 추진체의 폭발과 함께 지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순간.
게드로이츠가 느낀 것은 진심어린 안타까움이었다. 순수하게 눈앞의 위대한 인물이 겪어야 할 심적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말이다.
[말했잖나. 내 제안은 이미 정해진 결과에 붙은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고.]어째서 알아듣지 못했을까. 이토록 총명한, 이토록 지혜로운, 감히 ‘그를 이해할 지능’을 가졌다해도 좋을 인물이 왜 그의 말뜻에 내포된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을까. 언변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나.
[생존자 49명은 그저 자네의 고통이 덜하길 바라는 나의 선물이었어. 수십년간 우주공간에 홀로 남아 기다려야 할 그 고통이 안타까워서, 그래서 제안한 작은 친절이었단 말이다! 자네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될 사람이 아니니까! 행복한 결말에 도달해 마땅한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제안한 것이란 말이다!] [목숨으로 협박? 그딴 건 처음부터 성립할 리가 없잖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이니까! 친인을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다면 죽을 만큼 슬퍼하겠지만 끝내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왜! 바로 저기 보이는 서버룸에 새로이 태어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남겨져 있으며, 그것이 전부 자네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이미 내가 얘기했으니까!! 그 책임감이! 단단하게 굳어져 영원히 변치 않는 자네의 성정이! 기어이 자네를 살려 책무를 다하게 할 테니까!]게드로이츠는 전뇌에 남은 배터리가 급격하게 소모되고 있음에도 소리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세계는 결국 결말을 향해 나아가겠지만, 이런 식의 슬픈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완성자가 행복하길 바랐다.
[왜 내가 자네를 고통스럽게 만들도록 했나! 다름아닌 내 손으로 자네가 기어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만들어야 했느냔 말이다!]하지만, 그가 자살이라는 가장 위험한 카드를 꺼내든 순간 게드로이츠는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반드시 삶에 붙잡아둘 책임감. ‘유일한 생존자’라는 의무는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가 소멸하는 순간 발생한다. 그가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을 하기 전에 게드로이츠는 그의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젠, 늦었어….]결과는 정해졌다.
소형 핵에 준하는 폭발력. 그것을 추진삼아 지구로 향하는 전자석과 그 자기력에 사로잡힌 금속의 고리들은 지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대기권을 돌파하겠지.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 모든 역사와 문명이 소멸한다. 그의 완성자는 홀로남아 그것을 지켜볼 것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스스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무딘 애를 써야할 것이다. 그에겐 마지막 생존자로서, 재건의 희망을 넘겨받은 존재로서 의무가 있으니까.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네. 이렇게 해어지고 싶지 않았어. 나의 염원, 나의 유일한 목표를 이뤄줄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 이 세상에 존재해줘서, 살아남아줘서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존경한다고, 잘 부탁한다고, 그렇게 헤어지고 싶었단 말이네….]결국 게드로이츠는 북받친 감정을 참지 못했다. 죽은 눈이 전뇌의 신호를 받아 쥐어짠 눈물샘이 끈적한 눈물 한 방울을 그의 눈가에 담았다. 지금껏 수많은 죄를 지었지만 지금처럼 죄악시 여겨진 적은 없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할 유일하며 진정한 존재에게 비할 바 없는 슬픔을 남긴 것이다.
[미안하네. 정말로 미안해….]훅, 후욱.
통신기 너머로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게드로이츠는 속죄의 의미로 얼마 남지않은 그의 전뇌에 얼마 남지않은 배터리가 다할 때까지 그의 감정을 받아내리라 다짐하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훅, 후훅, 훅….
흐느끼듯 불규칙한 숨소리. 그것을 집어 삼키듯 숨을 참는 소리.
흑, 흐흐, 흐흐흐-
마치 숨을 집어 삼키는 듯한 불규칙한 소리들 사이로 마침내 정해진 결과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한 선구자가 그의 감상을 토로했다.
“….병신.”
공기가 없는 우주, 입에 부착된 드론이 제공하는 한정된 공기로만 말을 전할 수 있기에 최대한 함축적인 의미로 표현된 그의 감상은.
슬픔도, 비난도, 욕설도 아닌 비웃음이었다. 무언가 내려놓은 듯 후련함마저 담긴 그러한 비웃음.
“아, 망할. 어떻게 잘 구슬려서 살아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했는데, 거기서 그걸 그냥 눌러버리네. 단호한 새끼.”
[박교수. 자네, 지금껏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건가? 이미 위성우는 지구를 향해-]“출발했지. 심지어 우리 대화를 포함해서 그게 출발하는 순간을 저 밑에 사람들에게 생방송으로 보여주기까지 하고있고.”
[그렇다면 받아들인 것인가? 이 모든 게 이미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그건 또 아니고.”
숨을 크게 들이킨 그가 입에 붙어있던 드론을 떼어냈다. 우주공간에 적응을 끝낸 듯 흉강 속의 공기를 울려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 가정. 정신병자 박교수씨가 의무에 목이 메여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가정은, 저 밑에 사람들이 다 죽는 게 확정되었을 때만 성립하잖아?”
[무슨…?]“당신 말대로, 저 아래 있는게 내 전부라는 말이지.”
그는 당황하는 게드로이츠를 놀리듯 강화유리 너머로 청록색 액체가 담긴 주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은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이 정체모를 몸뚱이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야.”
게드로이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이미 이해해버렸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라붙어가는 그의 눈이 유리창 너머 주사를 쫓았다. 치료제. 3형 변종화가 멀지 않은 완성자를 인간으로 되돌리고, 그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주어진 물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몸인지 우주에서도 살아 움직인다만, 과연 내가 인간으로 되돌아가도 살아 있을까.”
[안돼….]“그냥 있어도 어차피 몇 분 안에 죽겠지만 당장 급하기도 하고. 또 이미 전투/생존형 괴물로 거의 99% 변종화가 끝난 지금 상태는 크게 만족스럽지가 못하단 말이지.”
틱틱-
“다행히, 리롤 권한이 한번 주어졌더라고. 인간으로 되돌아갔다가 확! 죽으면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게드로이츠는 절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넌 인류의 희망이다! 유일한 희망이야! 그런 도박에 그 모든 것을 걸어선 안돼!]완성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저런 실낱같은 확률에 지나지 않는 도박수에 몸을 던질 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박교수가! 자신에게 걸린 수많은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다니!
“도박이라니. 그럴 리가.”
바닥에 쓰러져 입만 뻐끔거리는 그의 절규를 향해 완성자는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 말대로 일어날 일들이 일어날 뿐인데.”
[뭐….라고….]“38구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지. 해피 블라인드. 당신 친구 리쉬에는 인류의 기술문명이 소멸해야 된다며 오르페우스 같은 살벌한 무기를 꺼내 황무지 전체의 생존자를 조지려고 했지. 그때 내가 뭘 어떻게 했지?”
“살벌한 괴물이 돼서 그 모든 걸 씹어먹고 뒈져버렸지.”
“3월드? 마찬가지로군. 뮤트가 있었고, 인류를 조지겠다고 설쳤으며, 살벌한 괴물이 된 이 몸은 그걸 때려부수고 죽어버렸지. 4월드? 역시 마찬가지야. 시스템이 기워붙인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 워로드가 집어삼킨 사람들은 지금도 내 가슴 속 저장장치에 압축 데이터로 잘 보관되어있지. 나도 깨달은 바가 있다고. 정말로 어떤 일들은 돌이킬 수 없게 다가오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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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각자에게 달린 거잖아. 결과가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결과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한들. 여전히 인생은 흘러가고 있잖아? 그 순간 인생이 딱 멈추는게 아니라면 그 ‘정해진 결과’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과정으로 남을 뿐이지. 그게 어떤 것을 향하는 과정이 될지는,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달려있고.”
[아니야,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불가능해! 제발, 제발!!]“그래, 불가능에 가깝지.”
교수는 과학자를 향해 인사하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리고, 마법사는 영원히 불가능을 꿈꾸는 존재이지.”
푸슉!
강인한 손톱이 가슴팍을 가르고, 앰플에 담긴 액체가 그의 심장을 향해 흘러들었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난다. 당신 말대로. 멸망은 시작되었고, 나는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며, 언젠가 신적인 존재로 거듭나겠지. 당신의 계획과 차이가 있다면-”
콰작!
“….그 일들이 모두 지금 이 순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 뿐이 아닐까.”
짙은 청록빛 액체가 그의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사이. 강화유리를 깨고 들어온 손톱은, 원수의 머리를 향하는 대신 그가 설치한 캠코더를 향했다.
게드로이츠는 물어야 했다.
급변하는 기압과 냉기 속, 죽은 몸에 담긴 과학자는 그가 담긴 육신의 마지막을 쥐어짜 물었다.
[무엇, 을….]도대체 무엇을.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지금, 무엇을 하려는가.
“그야, 대단한 일이지. 당신 말대로 내가 먼 미래에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가 된다면.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있는 그런 일.”
질문에 대한 답은, 벌써 멀어져가는 그의 입 대신 화면을 통해 들려왔다. 소리가 없는 우주임에도 체내의 통신장치와 연결된 캠코더는 그의 음성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었다.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될 거다.”
지구로. 처음 그가 다시 세상을 마주했던 그날과 같이, 게시판의 작은 방송화면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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