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3
Chapter.4 눈꺼풀(25)
***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이 마법사는 죽는다!”
스릉-!
교수의 협박에 기사단장이 당장이라도 돌격을 명령할 듯 칼을 꺼내 들었다.
“개소리!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가 네놈의 목을 베고 다른 마법사님들을 구출해내겠-”
“그리고!”
팔락!
교수는 마법사를 붙잡은 상태로, 그 왼손을 이용해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작 만달리우스의 연구일지]를 허공에 뿌렸다.
연구일지는 낙엽처럼 흩날리며, 마탑의 주변을 포위한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마법사가 한 명 떨어질 때마다, 그의 개인 연구실에 있던 기록이 같이 떨어질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더군. 지금 떨어진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에게 끔찍한 실험을 반복적으로 자행한 일에 대한 기록이라거나, 토브룬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재미난 일에 대한 기록이라거나 말이지. 자, 이번 마법사는 어떤 기록을 가지고 있을까? 자아, 지금부터 1분이다!”
흔들흔들-
“으아, 으아아아아!”
교수가 밧줄을 붙잡은 손을 흔들자, 노쇠한 마법사의 비명이 리드미컬하게 마탑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떨어진 연구기록을 붙잡아 심각한 얼굴로 읽고 있던 기사단장과 시종은,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둘이서 뭔가를 쑥덕이더니 돌연 말머리를 돌렸다.
“어, 어쩔 수 없지! 토브룬 기사단! 마탑의 소유지에서 철수한다!”
술렁술렁
좌중에 소란이 퍼져나갔다. 그럴 수 밖에. 명예로운 토브룬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괴물의 말 몇마디에 물러나다니.
“그,그런! 단장님, 어째서 공격을 명하시지 않습니까! 보들레를 마법사님의 눈을 보십시오! 저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14, 15, 16-”
“으아아아! 흔들지마! 으아악! 으아아아!”
“…..각오한 귀족의 눈입니다. 저 한 분의 희생을 대가로, 나머지 모든 마법사님을 구하고 저 괴물을 목을 베어낸다면!”
“에이이익! 시끄럽다! 후퇴하라면 후퇴하는 줄 알아! 명령이다! 오트만 보들레를 공은 보들레를 후작가의 혈통이란 말이다!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된다고! 나는 어디까지나 로드릭의 귀중한 재원인 마법사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다!”
“37, 38….”
“빨리! 완전히 포위를 풀라는게 아니잖아! 마탑 소유지 밖에서, 넓게 포위를 짜라는거다!”
“…..알겠습니다.”
가까스로 기사들을 설득한 기사단장은 황급히 교수에게 말했다.
“좋다!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마법사님을 살려드려라!”
다각 다각 다각.
철컥. 철컥!
수많은 병사들로 웅성거리던 마탑은, 천천히 움직이는 말발굽 소리를 시작으로 점차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란스럽던 마탑 주변에 다시 물 흐르는 소리만 가득해지자, 교수는 교회 종처럼 허공에서 흔들리며 비명을 질러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노마법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여어, 고생하셨수다.”
“으헝헝헝! 보들레르 마법사님!”
“으아아, 으아아아아….”
“이리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마법사님!”
교수가 한 손으로 속옷 차림의 마법사를 던져주자, 젊은 마법사들이 그를 껴안고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도 그렇고, 아래층에 있던 마법사들은 뮤트의 피 냄새가 나지 않았어. 뮤트 연구에 참여한 것은 아이작과 그의 열 명 남짓한 제자들 뿐이었나 보군. 탑주가 마탑을 비운 사이 마력원에 가장 가까운 6층을 통째로 그의 실험실로 쓰고 있었던 거야.’
다행이다. 마법사는 다가올 전쟁에 있어 귀중한 재원인데, 여기서 다 죽여 없애야 했으면 많이 아쉬웠을 테니까.
‘여러모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떻게 계획대로 끌고 오긴 했군.’
물건은 다 챙겼고, 마탑 주변은 텅 비었고, 토브룬의 병력은 마탑의 소유지 밖, 좁은 시장 골목에서 다시 포위를 형성한다고 애를 쓰며 서로 발을 디딜 틈도 없이 여기저기 끼어있었다.
“자자, 다들 짐들 챙기자고! 슬슬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교수의 신호에, 락샤샤를 포함한 길드의 도둑들이 기다란 장대를 하나씩 챙겨 장물이 가득 든 상자 위에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올라타기 시작했다.
“준비됐으면, 깐다!”
도적 길드원들이 모두 상자 위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교수는, 탑의 마력원으로 다가가 그것의 가장 아래쪽, 가장 핵심적인 부품이 위치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마법사들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마나가 없어도 그들은 수계 마법사니까. 물에 빠지면 힘이 솟아날 사람들이지 익사할 사람들이 아니다.’
쩌적, 쩌저적!
마력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최상급 마나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토브룬 전체를 휘감은 여덟 갈래 강을 만들어낸 마력의 원천. 이게 깨지면 마법을 통해 끝없이 지하와 지상을 오가며 순환하던 인공 강물이 어떻게 될까?
“자, 그럼 70년 동안 도시 하나를 통째로 휘두르며 온갖 사악한 짓거리를 일삼은 마탑의 썩은 물을 통째로 뽑아내 보실까!”
쩌저저적, 콰창!
교수가 더욱 힘을 주자, 마침내 탑의 마력원이 완전히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쿠구구구구구구-
꿀럭, 꿀럭꿀럭!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 무려 여덟 개의 강을 도시에 묶어둔 강력한 마법의 힘이 사라지며, 마탑을 휘감은 물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올라온다! 모두 꽉 잡아!”
쿠구구구구구구!
심상찮은 소리가 점점 더 탑에 가까워지고,
퍼엉! 퍼어엉! 퍼엉! 퍼엉!
푸화아아아악!
탑을 기어오르는 여덟 갈래의 강물이 폭포수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범람하는 강물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도시를 휩쓸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홍수다! 강물이! 강물이 범람한다!”
“대피하라! 전 병력! 건물 위쪽으로 피신해라!
탑의 하층부에 뚫린 여덟 개의 구멍에서 끊임없이 지하수가 쏟아져나오며, 도시의 중앙에서 시작된 거대한 홍수가 도시의 모든 구간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살에 휩쓸린, 장물로 가득 찬 방수성 상자는 엄청난 속도로 도시 속 파도를 타고 있었으며,
쿠르르르르!
그 위에 올라탄 도둑들은 미리 준비한 장대로 바닥과 벽을 밀어내 햐류를 향해 방향을 조절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시티 래프팅이다! 잘있어라! 멍청이들아! 마탑의 보물은 내가 가져가마!”
그렇게 마탑의 귀중품과 도적들을 태운 상자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토브룬 병력을 지나 유유히 도시의 외곽으로 떠내려갔다.
***
촤아아악-
쿠웅!
범람한 강을 타고 도시를 가로지른 상자들은 도시의 가장자리, 빈민가의 벽에 충돌하며 멈춰 섰다.
“어이! 고생했다!”
“빨리 물건부터 내려!”
“쇠 지레가 모자라! 누가 가서 좀 가져와! 빨리!”
“물에 닿게 하지 마! 이쪽 상자는 마법서가 들어있다고!”
미리 얘기한 대로 빈민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도둑 길드원들은 전문가답게 훔쳐온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커다란 상자에 담겨있던 장물들이 순식간에 소분되어 작은 상자나 자루에 담긴 다음, 도둑들의 손에 들려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저 물건들은 잠시 도시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런 물건들의 출처를 궁금해하지 않을 특별한 손님이 올 때까지는.
“그런데 저거 저렇게 보내도 되는 겁니까? 길드원들이라고는 해도 다들 도둑이잖아요? 딱히 들고 튀는데 거부감을 느끼진 않을 것 같은데?”
“어머, 실례되는 말씀. 우리 밤손님들이라고 해서 규칙이 없는 건 아니랍니다? 훔치고 싶으면 훔치라고 하죠 뭐. 달 그림자가 토브룬에만 있는건 아니니까요.”
하긴. 도둑 길드가 물건을 도둑맞았는데 그냥 두고 볼 리는 없겠군.
“자, 여기 미리 약속했던 몫이에요.”
락샤샤는 도둑들이 다 가져가고 마지막에 남겨둔, 신비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주머니를 교수에게 내밀었다.
“중형 아공간 주머니랑, 탑에 있던 현금의 50%와 리드플로우 학파 마법서 종류별로 각 1권씩, 최상급 마나석은 두 개밖에 없어서 하나만 챙겨드렸고, 말씀하신 방어 관련 아티펙트는 제가 잘 골라서 넣어뒀어요.”
아아, 인생은 쓰고 보상은 달콤하다더니.
게임 시간으로 약 한 달, 접속기에 딸려있는 식사제공 기능으로 물에 불린 칼로리 바 같은 걸 처먹으면서 접속 종료 한 번 없이 스트레이트로 달려온 보상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촤르르르륵-!
만약 자본주의가 종교라면 저 돈 떨어지는 소리야말로 그 신앙에 대한 찬미일지니. 락샤샤의 손에서 앞서 말한 물건이 모두 들어있는 주머니를 받아들자 실링 획득하는 소리가 무슨 은화 더미에 깔린 것 마냥 무지막지하게 들려왔다.
[소지금 : 182만 4950 sil]돈. 빚을 갚고도 70만이 넘게 남을 엄청난 양의 돈.
인벤토리.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자마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4칸에서 24칸으로 확장된 인벤토리.
그리고, 마법서. 확장된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인, 리드플로우 학파의 마법서들.
“부자다, 나는, 나는 부자야….!”
나는 필요한 물건과 현물을, 락샤샤의 길드는 나 같은 개인이 처리하기 힘든 장물을 나눠 가지기로 사전에 협의했었다. 내가 많이 번 것처럼 보이지만, 장물을 전부 정산하면 락샤샤의 1할도 안될 것이다. 그만큼 마탑에는 돈이 되는 물건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으니까. 죄다 리드플로우 학파 마크가 찍혀있을 뿐이지.
– 하이웨이나초맨 : 어휴, 아주 알이 꽉 찼네.
– 간장게이바 : 끝났으니까 병원 가라. 돈도 벌었으니까 좀 비싸고 큰 병원으로다가.
– 스피드 웨건 : 지금은 또 상태가 안정된 것 같네. 내가 알기론 한번 잠식이 시작되면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던데.
으음…. 이쪽은 여전히 싸늘했다. 하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죽으면 다 끝인데.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돈에 미쳐서 목숨을 등한시하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돈이 없으면 돔의 마켓플레이스 측이 사기 거래로 신고를 넣어서 계정이 정지될 판이었다고. 나도 그런 사정이 없었으면 나가서 밥도 먹고, 바람도 좀 쐬고 하면서 게임했지.
빚을 상환할 돈을 다 모았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압박을 많이 받고 있었는지 힘이 탁, 풀리면서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교수?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요.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어차피 얼굴 팔린 건 붉은 뮤트고, 아직 이 도시에서 내 얼굴은 탈주범 교수로 알려졌으니까.”
교수의 말에, 락샤샤는 기묘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흐응~ 그러니까, 아직 이 도시에 남아있겠다는 거죠?”
“그렇죠 뭐. 여기서 기다릴 사람도 좀 있고. 아직 남은 일도 좀…. 어이쿠!”
“어머.”
졸음과 피로로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교수를, 락샤샤가 품에 안았다.
“음…. 이건 뭘까요? 맨손으로 6위계 마법사와 싸워 이기고 탑을 박살 낸 남자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다? 이건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해석해도 될까요?”
“어으으…. 그걸 맨손으로 해냈으니 이렇게 쓰러지는 거라고 해석해도 되겠지요? 좀 봐줘요. 이 정도 호사는 누릴 만큼 열심히 일했으니까.”
“정말. 말로는 못 당하겠네요?”
락샤샤는 작게 웃으며 품에 안긴 교수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락샤샤의 부드러운 품에 안기자,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왔다.
“어으…. 나 좀…. 여관에…. 부탁….”“쉬이이. 무슨 뜻인지 다 알아요.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기고, 그만 쉬도록 해요.”
“감사….”
꾸벅꾸벅 졸던 교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의식을 쥐어짜서 시스템 창을 불러 [마켓 플레이스로 송금]을 누른 다음, 로그아웃 버튼으로 손을 옮겼다.
띠링-!
[경고 : 비정상적인 로그아웃을 감지. 안전지대에서 로그아웃 하지 않을 시,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게임의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정말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어차피 락샤샤가 여관에 옮겨주면 안전지대니까…. 거기서 저장되겠지…. 몰라… 이제 쉴거야….’
다소 불안한 경고 문구가 뜨긴 했지만, 이미 잠에 취해버린 교수는 더는 생각을 이어갈 힘이 없었다.
교수는 락샤샤의 품에 안긴 그 상태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
한편, 교수가 잠든 그 시각 모든 것이 깔끔하게 쓸려나간 마탑의 정원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아, 아름다워….!”
남자의 이름은 로만 가치아 맨슨. 그는 도시 외곽에 ‘교수’라는 이름의 탈주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찾으러 달려나가 마탑의 참변을 피한 마법사였다.
교수를 찾아 빈민가의 술집을 뒤지던 중 심상치 않은 마력 파동에 왔던 길을 거슬러가며 범람하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와 마탑에 도착한 로만은, 그만 그것을 보고 만 것이다.
“크, 크고, 아름다워….”
탑의 옆구리에 흉물스럽게 박힌 거대한 보랏빛 공마석 기둥을 보며, 로만은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왜 내가 저 생각을 못 했지? 마나를 밀어내는 힘이라니. 구조적으로 잘 조정하면 마나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제어하여 마나가 흐르는 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저거였어. 내 마력회로 이론에서 부족했던 마지막 조각은, 바로 공마석이었던거야!’
젊은 마법사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내가 마법은 싫지만 마나는 좋아하는 괴상한 마법사가 된 것도, 우연한 기회에 고블린 마도공학을 배우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정확히 막혀있던 부분의 해법을 얻은 것도.
멍하니 상념에 빠져있던 로만은, 자신의 로브 소매에 매달려있던 리드플로우 학파의 문장을 뜯어버렸다.
“나의 길은 마법이 아니었어. 운명은, 처음부터 나를 마도공학의 길로 이끌고 있었던 거야!”
반쯤 무너진 탑과 거기에 박힌 기둥을 바라보는 로만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로만은,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평생을 마도공학과 공마석 연구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