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4
Chapter.5 인사이드 아웃(1)
***
드르르륵-
푸쉬익!
조용하고 깔끔한 방. 그 한쪽 구석에 위치한 접속기가 열리고, 그 안에서 창백한 남자가 기어 나왔다.
“해, 해냈다아아아······.”
몸을 움직이는데 무슨 연체동물처럼 팔다리가 흐느적거린다. 그럴 수밖에. 근 5일 가까이 꼼짝도 안 하고 접속기에 누워서 게임만 했다. 접속기의 ‘플레이 최적화 장치’의 기능으로 묽은 식사를 공급받고 생리현상까지 해결하며 누워서 5일. 관절이 굳어서 삐걱거리는 게 아주 생생하게 느껴진다.
“안에서 자고 나와도 되지만, 그러면 뭔가 쉰 것 같은 기분이 안 든단 말이지.”
사람은 역시, 현생을 살아야지.
그렇게 교수는 접속기 옆의 낡은 소파까지 기어간 다음, 그대로 축 늘어져 잠들었다.
***
몇 시간 뒤.
그렇게 죽은 듯이 자고 있던 교수를 깨운 것은, 며칠 동안 영양죽 같은 것만 먹은 사람이라면 문자 그대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매혹적인, 고소하면서도 본능적인 부분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였다.
교수가 홀린 듯이 그 냄새를 따라 접속기가 있는 방을 나서자 이것저것 현대적인 물건이 잔뜩 들어선 쉘터의 전경 사이로 온실 한쪽 구석에서 뭔가를 굽고 있는 코듀로의 모습이 보였다.
“코듀로….?”
“아,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교수는 코듀로의 인사를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녀석의 드론에서 나온 작은 로봇팔이 열심히 흔들어대는 프라이팬에 시선을 집중했다.
치이이이익-
작은 모닥불 위에서 뜨겁게 달궈진 팬 위에, 먹음직스럽게 갈색으로 구워진 큼지막한 고기 한 덩이가 구워지고 있었다.
고기다. 고기. 맨날 먹던 퍽퍽한 칼로리 바가 아니라 고기!
교수는 냅다 달려들기 직전,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코듀로?”
“넵!”
“이거…. 설마 ‘싼 고기’냐?”
“에이~ 설마요! 제가 미쳤다고 ‘싼 고기’를 쓰겠습니까? 이거 ‘비싼 고기’에요.”
코듀로의 말을 듣고 나서야 교수는 안심하고 그 향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었다.
비록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황무지에도 동물이 살긴 살았고, 돔이나 렙터 같은 집단은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을 먹여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고기의 종류에 상관없이 그런 가축이나 황무지 토끼, 방사성 거대전갈 같은 정상적인 생물을 도축해서 나온 고기가 ‘비싼 고기’.
이것들 말고,
거래소에 ‘고기’ 라고 검색하면서 낮은 가격순으로 확인하면 온갖 고기가 부위별로 주르륵 올라오는데, 이런 고기는 대부분 판매자가 사이코갱이나 스캐빈저인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이 거래소에 올린 매우 수상쩍은 고기는 ‘싼 고기’ 라고 부른다. 원재료는 아무도 밝힌 적 없지만, 멍청이가 아니라면 다들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그거다. 역겨운 자식들.
더 역겨운 것은, ‘싼 고기’는 의외로 수요가 있어서 꾸준히 팔리는 물품이라는 것.
그래서 황무지에서 고기 먹는 놈 보면 일단 경계해야 한다. 비싼 고기는 워낙 매물도 없고 귀하니까.
‘잠깐만. 근데 그런 귀한 물건이 왜 우리 집에서 요리되고 있는 거지?’
교수의 머릿속에, 지난번에 접속기에서 나왔을 때의 악몽이 재방송되기 시작했다.
그날 코듀로의 개 짓거리 때문에 45구역부터 토브룬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지 않았던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추억이고 나발이고 저 드론은 나사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분해해서 용광로에 쳐넣어 버리고 이 쉘터는 폭파시켜버리고 말겠다!’
교수는 마구 방망이질 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코듀로에게 물었다.
“코, 코듀로? 근데 웬 ‘비싼 고기’야? 혹시…. 또 새로 산 거 있어?”
휘익-
치이이익!
교수의 질문에 멋들어지게 팬을 흔들어 고기를 뒤집은 코듀로는 렌즈를 마구 흔들어가며 말했다.
“설마요! 제가 일반 깡통 로봇인줄 아십니까? 저는 학습하는 AI라구요! 지난번 참사에서 배운 게 있는데 설마 제가 뭘 또 샀으려구요. 이건 사은품입니다.”
“사은….품? 이 황무지에서?”
“어······. 그렇다던데요? 마켓플레이스에서 며칠 전에 주문했던 물건들이 어제 다 도착했는데, 거기에 큰 거래에 감사한다면서 사은품으로 고기를 한 짝 끼워 보냈지 뭡니까?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거 공짜에요 공짜. 마켓 플레이스는 돔 쪽 회사니까 이상한 고기를 쓸 리도 없고.”
“음…. 사은품이라….”
교수는 잘 구워져서 세련된 그릇에 담기는 스테이크와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보았다. 크게 잘라도 9~10인분은 될만한 양. 신선해 보이는 게 제법 가격이 나갈 것이다. 그런 물건을 사은품으로, 그것도 다른 놈도 아니고 돈 귀신 마켓플레이스가 보냈다고?
교수는 군침이 도는, 아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식탁 위에 올려진 스테이크를 노려보았다. 이거, 너무 의심스러워서 막 침이 고이는군. 아주 의심스러워.
“뭔가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스크루지도 학을 떼면서 도망갈 마켓 놈들이 공짜로 뭘 줄 리가 없는데?”
“글…쎄요? 혹시 그거 아닐까요?”
“뭐가?”
교수가 묻자, 코듀로는 로봇 팔로 쉘터의 한쪽 구석에 잔뜩 쌓여있는 잘 포장된 나무상자들을 가리켰다.
“저거요. 샤워부스에 공기청정기, 자동포탑, 소형 보조 실드 생성기. 목록 자체만 보면 여기에 발전기만 넣으면 대충 새로운 거주지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는 가구들이잖아요?”
“그렇….네?”
“마켓측에서는 이 정도 구매력을 갖춘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고 판단하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표시로 사은품을 보낸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친교의 표시로 보낸 고기라….”
코듀로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발전기야 어차피 파는 물건이 없으니 알아서 어디에서 구하는 거고, 거기에 은폐장은 없어도 실드에 자동포탑이 있으니 어느 정도 방어도 가능하고. 공기청정기로 투과되는 모래만 막아주면….
‘딱 전초기지형 쉘터잖아?’
그제야 교수도 마켓플레이스의 의도가 이해가 갔다. 마켓에서는 나를 어떤 규모가 있는 집단의 첨병으로 착각한 것이다. 다른 구역으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미리 정찰병을 몇 명 보내 전초기지를 세우는 것은 제법 흔한 일이니까. 아마 저 사은품은 ‘돔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묵인해주겠다.’는 은밀한 신호겠지.
교수는 칼로 스테이크를 썰며, 코듀로의 드론을 향해 테이블에 있던 숟가락을 집어 던졌다.
태앵-!
“아야! 왜요! 이번에는 잘못한 것 없잖아요!”
“야, 니가 저번에 산 물건들로 작은 쉘터를 지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열을 받겠냐, 안받겠냐?”
“그, 그건! 좋은 의도에서….!”
“그렇게 치면 아이작 그놈도 의도는 좋았어 이 자식아. 나름 인류를 구하겠다고 그 지랄을 한 거니까.”
아이작에 관한 것도 여러모로 생각해볼 일이지. 그냥 미친놈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생각해볼 문제기는 한데…..
‘지금은 일단 좀 먹고.’
테이블 밑에 달아둔 나이프로 크게 한 조각 베어내자, 스테이크가 저항감 하나 없이 부드럽게 갈라지며 핑크빛 속살을 드러내며 육즙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순간 저도 모르게 ‘해산물이 아닌데 괜찮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손은 잘라낸 스테이크의 끝을 잡고 입으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터업-
입에 넣는 동시에, 입안 가득 풍겨 나오는 육고기 특유의 고소한 지방의 맛과 감칠맛, 혀를 압도하는 고기의 맛!
육질은 또 어찌나 부드러운지 이빨에 닿는 순간 기분 좋은 저항감과 함께 툭, 하고 으스러지는데,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저절로 아, 하고 감탄사가 나오는 맛이었다.
“어때요, 훌륭하지 않습니까? 주인님의 바이오리듬을 계산해 가장 편안하게 기상할 수 있는 시간에 맞춰 가장 행복한 방법으로 주인님을 깨워드렸는데. 마음에 드셨는지요?”
교수는 입안 가득 쑤셔 넣은 고기 때문에 말은 못 하고, 그저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것으로 자신의 성실한 종을 치하했다.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산(사은품도 산 것으로 치면)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고 있으니 뭔가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첫 월급으로 옷 사 입고 외식하러 가는 기분이랄까.
“성장했구나, 박교수.”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쑤셔 넣으며, 교수는 가끔 이렇게 사치를 부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
그렇게 배를 불린 다음 교수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마켓플레이스에서 GG드론을 통해 보내준 택배를 뜯어보는 것이었다. 다른 건 다 천천히 설치해도 되는 물건이었지만, 딱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설치해야 하는 물건이 있었다.
찌이익- 부욱, 북! 찌지지직!
광인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뜯어낸 포장의 아래쪽에는, 교수가 애타게 찾던 물건이 수줍게 그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Kiral tec. 샤워부스 세트]두툼한 불투명 유리 위로 선명한 노란색으로 표기된 카이랄 테크의 로고.
밀폐형 샤워부스 두 개와 세트로 딸려온 소형 지하수 펌프 하나, 그리고 펌프 안에 들어가는 두툼한 여과용 패널까지. 그야말로 기능미의 극치. 아름다웠다. 당장 써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코듀로.”
“예, 옙?!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상태가 좀….”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평온하며, 안정된 상태야. 그나저나 이 펌프를 설치해야겠는데, 혹시 쉘터 바닥에 이거 설치할 만한 장소가 있을까?”
“음…. 글쎄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라 찾아봐야겠지만, 배수관 근처에 구멍이 나 있을 테니까 공사를 좀 해주면 충분히….”
“공사 같은걸 할 시간이 없으니까 물어본거 아니겠니? 나는 지금 ‘당장’ 이걸 써야 한다고. 지금. 당장.”
교수는 눈을 번뜩이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환한 얼굴로 펌프를 들고 온실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만요! 지금 온실에 비는 땅이 한 조각도 없다고요! 도대체 그걸 어디에다 설치하실······.”
“비켜!”
“끄악!”
뭔가 부산스럽게 주변을 날아다니는 코듀로를 쳐낸 교수는 온실의 가장자리에 막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워내는 감자밭 한뙈기를 흙발로 마구 짓뭉갰다.
“아이고오오! 감자가! 생존에 필요한 칼로리가!”
“닥쳐!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이게 더 필요해!”
찰칵! 찰칵!
드드드드드-
그렇게 대충 발로 흙을 정리한 다음 생겨난 공간의 가운데에 펌프를 내려놓자, 멸망 이후 기술의 첨단을 달린다는 카이랄 테크의 물건답게 펌프가 알아서 자리를 잡고 땅속으로 준비된 관을 심기 시작했다.
펌프가 자리 잡는 동안, 교수는 소형 욕조 두 개를 모두 들고 와 부드러운 흙 위에 올려두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듀로. 이걸 두 개나 산 이유는?”
“그게…. 두 개를 세트로 사면 할인해준다고 해서요. 두 개를 붙이면 커다란 욕조처럼 쓸 수도 있다는 말에 혹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니, 아주 잘했어. 아아주.”
“?”
교수는 경건한 자세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펌프를 지켜보았다.
찰칵!
그리고 펌프가 완전히 자리 잡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온실에 연결된 충전기에서 전력을 끌어와 연결한 다음 샤워부스 두 개를 딱 맞물리게 연결하여 조립시켰다.
그리하여 완성된, 온실 속에 지어진 샤워장.
꿀꺽-
교수가 떨리는 마음으로 수도꼭지를 위로 들어 올렸다.
쏴아아아아-
“아아아…. 물이다….”
순식간에 옷을 벗어 던진 교수가 샤워부스의 문을 닫자, 완전히 밀폐된 부스 안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이야, 물….”
그래, 나도 안다. 이 감정, 이 행복이 게임 안에서 넘어온, ‘잠식’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의 교수에게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 청량한 물…. 헤헤, 헤헤헤헤…..’
“주, 주인님? 물이 계속 차는데요?”
“부르르륵- 뽀글-”
“주인님! 문 좀 열어봐요! 그러다 죽어! 익사한다고!”
교수는 코듀로의 말을 무시하고, 샤워부스가 가득 차도록 물을 채웠다. 지난 5일간 논스톱 플레이로 피로해진 몸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기분이었다.
‘헤헤, 헤헤헤헤….’
쾅쾅쾅! 쾅쾅쾅쾅!
“으아아아! 제발! 문 열어 이 미친 주인 놈아!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