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59
Chapter.5 인사이드 아웃(6)
***
저 득의양양한 웃음. 내가 있는 자리까지 일직선으로 이동한 것. 이 녀석들, 내가 여기 있는걸 알고 찾아온 것이다.
‘45구역에서 봤던 벡스 녀석의 탐색 실력이면 내가 지운 흔적도 찾아올 만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따라올 거면 병원에서부터 같이 왔으면 되는거 아닌가?‘
“흐흐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일단 타라. 47구역까지는 거리가 좀 되니까 가면서 설명해줄 테니까.”
“47구역? 너희들 설마…. 우리 집까지 따라오게?”
“그래. 너도 먼지 먹으면서 20시간 넘게 황무지를 걷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잔말 말고 일단 타.”
“어, 그래. 고맙다.”
“야! 잠깐만! 나도 같이 타고 가!”
“꺼져 늙은이. 자리 없어.”
“없기는! 자리 사이에 나 같은 놈 세 명은 누워도 남겠구만! 어차피 모래폭풍이 심해져서 저 구멍 숭숭 뚫린 버기로는 못 따라간다고. 저것도 뒤에 견인 시키고 같이 타고 가자. 이미 뒤에 걸어놨어.”
“씁. 속도 떨어지는데. 그냥 모래 좀 먹고 타고 오지?”
인상을 쓰는 이안에게 벡스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조수석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여어, 벡스. 또 보네.”
“키힛! 자주 보면 좋은 거지, 햅번.”
교수에게 인사를 한 벡스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큰 차량이다 보니 이렇게 셋이 앉아도 자리가 남는 느낌이었다.
“뭣보다, 셋이 이렇게 가는 게 더 재미있잖아?”
“그건 그렇군. 어이 교수, 기본은 알지? 조수석에 앉은 놈이 떠드는 거다.”
“이 자식들은 언제적 얘기를….”
부아아앙!
“싫어? 싫으면 다수결로 하던가. 오랜 전통에 따라,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운전자의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데 한 표.”
“벡스 이름으로 한 표 추가.”
“….징그러운 새끼들이 붙어살더니 아주 죽이 척척 맞는군.”
힘찬 엔진소리와 함께 세 사람을 태운 렙터의 무장 트럭이 힘찬 엔진소리와 함께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모래폭풍 속, 기차처럼 연결된 세대의 차 안에서 세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벡스는 언제부터 운전하게 된 거냐? 저번에 45구역 방공호에서는 운전 못 한다고 했잖아.”
“크흐흐. 당연히 내가 가르쳤지. 내 친구가 운전도 못하는 뚜벅이라니, 나는 그 꼴 못 보거든!”
“개소리! 자고있는 사람을 납치해서 브레이크를 뽑고 악셀을 풀로 고정해놓은 차량 운전석에 묶어둔 게 어떻게 운전교습이야!”
“그래서 연료는 30분 어치만 넣어뒀잖아! 덕분에 이렇게 운전도 하게 됐고!”
“덕분에 차 소리에 몰려온 근처 변종이 잔뜩 따라붙은 상태에서 차가 서버렸다고!”
“그래서 구해줬잖아!”
“구해줄 일을 왜 만들어!”
왁! 왁!
꽥! 꽥!
‘지들끼리 알아서 잘 놀고 있네.’
[재밌다! 재밌다!!!]45구역에서 이 녀석들과 헤어지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내가 대충 아무 얘기나 툭 던져도 이야기가 끝이 나질 않았다.
“햅번, 땅콩 먹을래?”
“오, 웬 땅콩? 보존식이야?”
“우리건 아니고. 장사하다 덮쳐오는 녀석들을 여섯 명 정도 죽였는데 그놈들 주머니에서 나온 거야. 육포는 버렸고 이것만 챙겨왔지.”
아작, 아작.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견과류 특유의 달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자 정말 셋이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모래폭풍 안에 있으니 습격당할 위험도 없고. 분위기도 적당히 무르익었고. 이제 슬슬 물어봐도 되겠군.
“그래서, 갑자기 나는 왜 따라온 거야? 둘이 할 일 있어서 먼저 간다더니. 솔직히 자존심도 좀 상했다고. 나름 황무지 생활에 숙달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뒤를 밟히다니.”
“에이~ 아무리 그래도 쉘터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이랑 황무지에 굴러다니던 스캐빈저 출신이랑은 보는 눈이 다르지. 흔적을 지운 흔적이 너무 티가 났다고.”
벡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자랑스러운지 연신 헤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 그렇다는군. 나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만. 간다고 했던 일은 별거 아니야. 그냥 짐 좀 챙기러 원래 살던 곳에 들렀다 왔거든.”
“짐?”
“그래. 내가 43구역에서 장사를 했던 이유는 워낙 분쟁이 심한 지역이라서였거든. 43구역이 뭐로 유명한지는 알지?”
교수는 지역 대화에서 봤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이것저것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뭐였지?
[어디보자···. 이거 아니야? ‘43구역은 제철산업이 활발하던 지역이라 그 공장 설비가 몇 개 남아있는 땅이다. 그걸 차지하려고 집단 사이에 분쟁이 자주 일어나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변종이 되어 돌아다니며, 그 변종을 죽여 그 부산물로 먹고사는 기타 용병이나 스캐빈저들이 또 모여들어 24시간 총성이 끊이지 않는 땅이다.’라고 읽었는데?]‘땡큐.’
사람은 무의식에 스치듯 봤던 기억들을 저장한다더니, 하이드는 저런 식으로 내가 잊어버린 기억도 읽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 위험한 것만 빼면 정말 편리한데?
“제철공장이 유명하지 아마?”
교수가 하이드가 읊어준 내용을 그대로 얘기하자, 이안은 좀 놀랐다는 듯한 얼굴로 교수의 말에 답했다.
“생각보다 더 잘 알고 있는데? 보통은 그냥 사람 많이 죽어서 시체들이 들고 다니는 장비 벗겨 먹는 지역으로 알고 있거든. 아무튼, 죽일 변종도 많고, 죽일 사람도 많은 지역이니 나 같은 향신료 상이 장사하기 딱 좋은 지역이지. 그런데 최근에는 이것도 좀 시들해졌어. 아직 살아있는 공장 설비중 하나가 또 완전히 정지하면서, 이제 목숨 걸고 제철공장을 지키면서까지 벌어먹기에는 수지가 안 맞게 되어버린 거지. 43구역을 주름잡던 집단이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 게, 슬슬 43구역이 말라붙을 기미가 보인단 말이야.”
아작, 아그작.
이안은 벡스가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땅콩을 한 움큼 가져가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런 녀석들은 떠날 때 크게 한탕 하는 게 일반적이거든. 장담하는데 알이 꽉 찬 내 가게의 엉덩이에 총구를 쓱 들이밀고 싶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미리 발을 뺀 거지.”
“다 죽여버리겠다고 창고에 화약을 줄줄이 꺼내던 저 머저리를 내가 말렸다. 굳이 싸워줄 이유가 없잖아? 어찌어찌 이긴다고 해도 가진 걸 다 써버리면 그대로 손해인데. 말렸지, 그래서. 죽자 살자 매달려서.”
“세상은 정말 어디를 가나 요지경이구나···.”
장사하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런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손님이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하는 게 일상다반사니까.“
“그럼, 이번 기회에 아예 이주하는 거야? 다른 구역으로?”
“그래. 다행히 메탈죠- 의 스파이스 들은 불량품 없고 위력이 좋기로 소문이 난지라, 다른 지역에서도 수요는 제법 있는 편이거든. 그동안 기름값 때문에 마진이 안 나와서 못 팔았던 거지. 마침 크게 산다는 손님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현금화를 좀 해서 다른 구역에 새로 자리 잡을 거다.”
“참…. 황무지에는 바람 잘 날이 없구먼. 그래서, 어디 자리 잡을 건데? 47구역 근처라면 내가 좀 알려줄 수도 있는데.”
“오, 그래? 그거 고마운걸? 안 그래도 네 녀석의 도움이 꼭 필요했는데.”
“정말 우리 쪽으로 오게? 나야 좋지.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겠군. 그래서, 어디쯤을 생각하고 있는데?”
교수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이 녀석들이랑 같이 있으면 즐겁다. 47구역이 좀 넓은 편이라고는 해도, 같은 구역 내에 있으면 자주 볼 수 있을 테니까. 가끔 만나서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좋은 술이라도 구하면 한 잔씩 하면 좋겠지.
이안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교수를 마주하며, 마찬가지로 싱긋 웃어줬다.
“너네 집.”
“….응?”
“우리 너네 집에 들어가서 살 거다.”
“뭐 씨발?”
[오예!]행복한 상상으로 가득했던 교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
“절대 안 돼. 우리 집 쥐콩만해서 두 명이나 더 들어올 자리도 없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연히 같은 쉘터에는 안 살지.”
“휴우. 그러면 그렇지. 그럼 어디에-”
“너희 집 바로 옆. 발전기랑 기타 필수설비는 다 가지고 다니니까 조립식 쉘터 키트만 사면 된다고. 중형 쉘터도 짓는데 2주 정도밖에 안 걸려.”
“그거나 그거나! 이게 거주지라는 게 그냥 옆집에 사는 정도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멸망 이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차라리 집에 같이 들어와서 사는 게 낫지, 우리 집 옆에 새로운 쉘터를 짓는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대형 은폐장 같은 것 있어?”
“소형도 없다. 굳이 전기 써가면서 숨어 살 필요가 있나? 다 죽여 없애면 되는 것을.”
“아이고 세상에….”
쉘터가 괜히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게 은폐장, 실드 생성기가 최적의 효율을 발휘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은폐장 발생기는 대단히 예민한 물건인데, 주변에 다른 은폐장 이나 실드 발생기가 있으면 그 파장이 겹쳐서 제 역할을 못 하게 된다. 소형을 여러 개 쓰면 서로 방해가되서 못쓰니 생존지역이 넓어지면 출력이 높은 중형, 대형 은폐장 같은 것을 써야 하는데 저쪽에 없다고 하니, 이쪽에서도 쓸 수 없는 것이다.
“혹시 47구역 세력 간의 관계는 다 알고 왔냐? 여긴 돔의 도시가 있는 곳이라고. 쉘터가 두 개 이상 모이면 ‘집단’으로 취급받아서, 그때부터 돔의 정찰병들이 수시로 마크하게 된단 말이다. 은폐장을 못쓰니 숨어서 짱박혀있지도 못하고.”
“그럼 기왕 모인거 집단으로 발족해서 활동하면 되잖아? 이미 알려진 이름도 있는데. HIV라고.”
“우리 그 이름달고 렙터랑 돔 애들 작살냈잖아. 머리 위에 박격포 떨어지는거 볼래?”
“아하!”
“아하는 무슨! 43이랑 다르게 47구역은 이 근방에서 제일 큰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그 평화가 우연히 유지되고 있겠냐! 당연히 복잡한 역학관계가 있는 거지! 아니 니들은 장사하는 놈들이 시장조사 하나도 안 해놓고 이주할 생각을 하냐?”
스윽-
“그야, 생각을 안했으니까. 장사할.”
내가 기가 막혀서 역정을 내자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벡스가 대화에 합류하였다.
“사실 장사고 뭐고 대부분 핑계야.”
“아니 늙은이, 그걸 니가 말해버리면….”
“이대로 가다간 진짜 파투 날 것 같은데 그냥 다 털어놓자고. 햅번, 너 진료실에서 나가고 나서 우진 영감이랑 따로 얘기를 좀 했는데, 너를 그냥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어.”
“나를? 왜?”
“왜긴 임마. 너 미쳤다며. 원래 정신병은 혼자 있으면 더 커진다더라. 대화 상대가 없으니까 혼자 막 중얼거리다가 벡스처럼 맛이 가기도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환각도 보고, 가끔 너처럼 인격이 분열되기도 하고. 옆에 대화할 사람이 좀 있으면 훨씬 낫지.”
“그러니까, 나 하나 케어하겠다고 사업 기반을 옮겼다고?”
“아니 이놈이 아까 내가 한 말은 뭐 들은 거야?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뜨긴 떠야 했는데, 마침 우리 친구가 몸이 쇠약해져서 막 밥숟가락도 못 들고 침도 질질 흘리고 병 수발이 필요하다길래 옆집 살면서 좀 도와줘야겠다, 이런 취지였지.”
이안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동안, 벡스는 주머니에서 제법 커다란 무침 주사용 카트리지와 본체를 꺼내 보여주었다.
“우진 영감님도 부탁했어. 이거 줄 테니까 용병 일 한번 한다 생각하고 가서 너 좀 도와주라고. 이 정도면 충분히 의뢰비 정도는 될 거라고.”
벡스가 손에 들고있는 카트리지가 눈에 익었다. 대전쟁시절 14 특작대 사람들도 하나씩은 들고 다니던 물건.
“리바이벌 키트(Revival kit)?”
“그래. 머리랑 심장만 안 터지면 어떤 부상을 입어도 주사 한 방에 최소 4시간의 전력 행동을 보장한다는 구 시대의 최상급 도핑용 약품이지. 사실상 여벌의 목숨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물건인데, 대전쟁시절에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다 사용하는 바람에 수요에 비해 공급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물건이다. 친구 병 수발들어주는 일에 대한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비싼 편이지.“
“영감님이 너 생각 많이 해주시더라.”
“영감이 쓸데없는 짓을…..”
진지해진 분위기 속에서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라는 놈들은 나 돕겠다고 집안 기둥뿌리째 뽑아서 찾아오고, 그냥 친한 영감이라고 생각했던 양반은 쌈짓돈 털어가면서 그걸 부탁하고 있고. 사이코패스 냉혈한이 아닌 이상 이걸 어떻게 거절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들끼리 이미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는데.
교수는 새끼고양이 마냥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벡스와 이안의 징그러운 얼굴을 견디다 못해 말했다.
“….일단 가자. 가서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예에에에에스!”
“HIV! HIV! HIV!”
“그딴 거지같은 이름은 절대 안 쓸 거니까 그렇게 알고!”
[오예! 재미있는 인간이 한 가득!]“아이고 두야….”
교수는 앞으로 같이 살기 위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생각도 안 하는 두 명의, 아니 세 명의 머저리를 보며 두 손에 머리를 묻었다.
물론 푹 수그린 얼굴 사이로 피식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몰라. 내가 그런거 아님. 하이드 놈이 웃고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