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66
Chapter.6 영광의 이름으로(1)
***
뚜벅. 뚜벅. 뚜벅.
빛 한점 없는 대리석 복도. 하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작은 램프를 들고 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뚜벅. 뚜벅.
달칵-
발걸음을 멈춘 남자는 잔뜩 녹아서 흘러내린 수많은 양초 옆에 새로운 양초를 세우고 불을 붙인 다음, 그 양초로 이루어진 작은 우리 안에 잠들어있는 소녀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콜렉터(Collector : 수집가).”
환자복과 드레스의 경계에 있는듯한 옷을 입은 소녀는, 그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주변의 빛을 거부하듯 파르르 떨렸다.
“W. 늦으셨네요.”
“부끄럽게도.”
“이 말라붙은 세상의 어느 곳이라도 단숨에 도달할 수 있는 당신이, 정작 복귀에는 애를 먹다니. 참 이상한 일이에요.”
잠에서 깬 소녀의 부드러운 질책에, W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귀엽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하는 움직임에 그녀의 등 뒤에 연결된 수많은 전선이 함께 움직이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모셔온 W의 눈에 그 모습은 평소에 비해 상당히 활기차게 느껴졌다.
“즐거우십니까?”
“그래요. 특별한 꿈이 많이 찾아왔어요.”
사락-
그녀가 손을 들자, 아무것도 없던 새카만 허공에 커다란 화면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무지의 어느 작은 쉘터.
그 안에 둘러앉아 ‘우린 이제 부자야!’ 라고 외치며 기쁨의 춤사위를 추는 세 명의 남자.
43구역.
바닥에 떨어진, 탄흔이 가득한 ‘우진 비뇨기과’라는 간판과 그 주변을 새카맣게 메운 검은색 군복을 입은 무리들.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의 절반 가까이가 화상으로 뒤덮인 남자.
돔.
‘2급 기밀’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힌 문서의 내용과, 자신의 수첩 속에 스케치 된 강철 턱의 남자를 심각한 눈으로 번갈아 보고있는, 삐뚜름하게 모자를 쓴 감찰관.
32구역.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린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며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릴 정도로 푸른 눈을 가진 노파.
7구역.
쿵. 쿵.
간헐적으로 형광색 빛이 점멸하는 짙은 안개 너머,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생물의 발걸음.
그리고.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대리석 건물 속, 촛불과 기계장치의 불빛만이 깜박이는 장소에서 얘기를 나누는 하얀 정장의 남자와, 소녀.
그 모든 화면을 눈에 담은 W는. 그들의 현실 만큼이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바람이…. 부는군요.”
“네. 지치지도 않고. 또.”
그 말에 동조하듯,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타고 그들의 옆을 스쳤다.
세찬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촛불이 꺼지며, 어느덧 복도에는 하얀옷의 남자도, 소녀도 없이 기계장치의 불빛만이 깜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
+ Player `professor`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 Jokass :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출세하신 교수님 아냐?
– 남바쓰리 : 형님! 개업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혹시 47구역 남부 시계탑 사거리 근처에 오실 일 있으면 이 남바쓰리를 찾아주십쇼!
– 노루Drug해요 : BDSM의 수장님 아냐 ㅋㅋㅋㅋㅋㅋㅋ 이 미쳐버린 시대 최초로 변태 같은 이름을 대문에 걸어놓은 집단ㅋㅋㅋㅋ
– takealook : 남자 중에 남자. 난 그날 이후로 교수를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접속기에 들어가 47구역 대화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경쟁하듯 밀고 들어오는 채팅들. 다들 웃으면서 축하해주긴 하는데, 영 불편한 이름이 자꾸 눈에 띄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 professor : BDSM 아니야 임마. 내가 미쳤다고 그 이름을 그대로 쓰겠냐. 정식으로는 ‘빅 드림’ 으로 등록했으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채팅을 올리면서도 내심 찔끔했다. 뭐, 보나 마나 뻔하지. 민주주의의 배신자니, 공산주의가 골수에 치밀었으니 저놈을 칼로 찌르면 빨간물이 튀어나올 거라니, 원색적인 비난으로 도배되겠지.
– 훌리건 : ?
– 홀리 : 에?
– 스피드 웨건 : ?
– Jokass : ?
– 노루Drug해요 : 뭐래.
그런데 반응이 좀 이상했다. 뭐지. 이건 내가 예상하던 반응이 아닌데.
– professor : 뭔데. 뭐가 또 문제야?
– Jokass : 아니, 교수. 그 BDSM은 네가 만든 단체 아니야?
– professor : 뭔 소리야. 당연히 내가 만든 단체지. 그리고 BDSM이 아니라 빅 드림 이라고.
– takealook : 얘는 또 무슨 헛소리야. 오늘 아침에 커뮤니티에 올라온 ‘D – times` 에 공식으로 너네 이름 올라와 있던데? BDSM으로.
– professor : 개소리도 모양 맞춰가면서 집어넣어라.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마! 내가 돔 직원이랑 통화도 하고, 어! 감찰부 사람이랑 얼굴도 보고! 다했-
.
.
.
어…… 잠깐만. 방금 뭔가 대단히 불쾌한 추측이 머릿속에 번뜩 하고 스쳐지나갔는데 말이야.
.
.
.
‘음? 에절 너 왜 또 땀을 그렇게 흘리고 있냐? 아아, 다한증 있다고 했지?’
‘어, 어어어어! 그, 그렇지!’
내가 불렀을 때 눈에 띄게 당황하던 녀석. 겁을 좀 줘서 그러려니, 했는데. 만약에, 아직 켕기는 게 남아서 그랬다면?
– professor : 야, 간게 어디 갔냐.
– 홀리 : 음…. 글쎄요? 방금 전까지 여기서 잘 얘기하고 계셨는데…..
– 간장게이바 : 홀리 쒯!
+ Player `간장게이바‘ 님이 대화방에서 나가셨습니다.
“허, 허허허허허허허허허.”
놈의 반응이, 내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랬구나. 우리 간게 친구, 그러고 보니 감찰부에서 일했구나. 감찰부는 외부의 정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니, 내가 전화한 그 델마르라는 사람도 감찰부 사람이었겠네. 그 사람은 분명히 빅 드림이라고 알아들었지. 거기에, 우리 독사같은 간게가 나쁜 말을 속삭인 거야. ‘사실 저 사람들 이름은 빅드림이 아니라 BDSM이에요! 황무지 최고의 변태 집단이에요!’ 하고 말이지.
“허허허허허허허허허.”
입에서 세상 다 산 노인과 같은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틀렸다. 저 ‘D – Times`는 돔에서 발행하는 신문 같은 것이다. 그 지역에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거의 다 담고 있기 때문에, 47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빼놓지 않고 보는 종합 정보 글이란 말이다. 그 말은 즉, 이미 황무지 전역에 우리 이름이 BDSM이라는 강렬한 이름으로 소개됐다는 뜻이고, 내가 지금부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이드.’
[음? 왜?]‘저번에 내 머릿속에, 갚아줘야 할게 있는 돔의 인물의 목록이 크게 적혀있다고 했지?’
[아아. 그렇지. 그때 그 옛날 동료가 네 손에 쥐여준 파일에 들어있던 인물들의 이름이 모조리 적혀있더라고.]‘그래. 그럼 그 옆에 크게 한 명만 더 새겨줄래?’
[뭐, 어렵지 않지. 뭐라고 적어줄까?]“에젤. 으드득! 레이든.”
교수는 접속기에 누워 이빨을 부득부득 갈며 다짐했다.
다음에 만나면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간장게이바! 에젤! 에젤 레이든!!!! 이 쓰레기같은 새꺄아아아아!!!!
게임 시작 +0초.
교수의 스트레스 수치는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
***
[캐릭터 동기화 완료] [구원자님. 부디 게드로이츠 대륙을 구해주시길….]화아악-!
눈 부신 빛과 함께, 교수는 다시 한번 GG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짹짹짹짹-
솨아아아-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따듯한 아침 햇살과, 선선한 아침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 그 사이에서 지금, 이 순간이 평화롭다는 것을 강조하듯 들려오는 작은 새들이 지저귐 소리. 그 평화로운 광경에 들끓던 분노가 어느정도 스르륵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아아, 정화된다. 그래. 이거지. 게임에 접속하면 이렇게 돼야지!’
지금까지 너무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이런 당연한 것에서도 감동을 하는 것을 보면. 나무로 된 벽에, 조금 허름하지만 깔끔한 새하얀 침대. 굳이 애써 확인하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과거, 정상적인 캐릭터로 게임을 할 때 매번 눈을 뜨면 확인할 수 있었던 평범한 배경에, 평범한 효과음. 이곳은 여관이다.
‘투란에서야 그냥 전장에서 픽 쓰러졌으니 쭈욱 알아서 진행됐지만, 토브룬 때는 달랐다고. 번거로운 일도 전부 처리했고, 믿음직한 동료한테 여관에 좀 데려다 달라고 직접 부탁했으니 굳이 여관까지 찾아가서 로그아웃하지 않아도 이렇게 안전한 장소에 세이브가 되어있단 말씀이야!’
일반적으로 GG에서 안전한 로그아웃이란 여관, 아군 세력의 침실 혹은 숙영지, 또는 모닥불, 천막, 모포가 포함된 제대로 된 야영지(야습 확률 있음) 등에서 로그아웃을 함을 말한다. 이렇게 주변의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 로그아웃하게 되면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잠이든 상태에서 게임 속 시간이 멈추게 되며, 접속하면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동료한테 옮겨달라고 해도 이런 시스템은 유지가 되거든. 그래서 옛날에 전사 플레이할 때 장거리 이동할 일 있으면 마차 한 대 빌려서 목적지를 여관으로 해놓고 대충 로그아웃하곤 했으니까.’
이래 봬도 나온 지 11년이 넘은 게임이다. 수많은 고인물에 의해 온갖 공략법이 다 발견된 게임이란 말씀.
“자아, 바깥 문제도 다 해결했고, 토브룬의 마탑도 깔끔하게 밀어버렸으니 슬슬 그 뒤처리를 시작해 봐야겠-”
물컹-
“….어?”
몸을 좀 풀고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옆에 손을 짚었는데, 뭔가 묘하게 부드럽고, 탄력적인 물체가 손에 잡혔다.
닿자마자 본능적인 끌림이 느껴지는 감촉. 나밖에 없는, 나밖에 없어야 할 침대의 옆자리, 저 이불 밑에 감춰진 유려한 곡선은 도대체?
초인적인 의지로 손을 회수한 교수는, 전쟁 발발 직후 슈퍼마켓처럼 난리통이 된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아, 아니야. 그런 병신같은 일어날 리가 없어. 3류 만화책에서나 보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설 같은 전개가-!’
부스스슥-
“어머, 달링?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아침~?”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악몽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처럼, 천천히 이불이 흘러내리며 실크 재질의 아슬아슬한 나이트가운을 걸친 락샤샤가 교수의 눈앞에 나타났다. 초승달처럼 하얀 눈웃음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락샤샤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거리며 움직이는 나이트가운이…. 아, 안돼! 고, 곡선이! 눈을, 눈을 감아야….
부릅!
감기는커녕, 태어나 처음 빛을 본 맹인처럼 눈이 빠릿빠릿하게 떠졌다. 교수도, 하이드도 아닌 본능에 내재된 어떤 초월적인 의지가 지금 이 순간 눈을 감는 것을 불허하고 있는 것이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도, 도망쳐야 해. 어디로?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 정신을 잃고 잠이든 다음, 눈을 떠보니 아름다운 반라의 여성과 한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내, 냉정해져야 한다. 나 박교수, 수많은 전장과 사지를 해쳐나온 남자. 적병들 사이에 홀로 고립되었을 때도, 수백이 넘는 변종 사이를 달리면서도 탈출에 성공한 남자다! 이것도 그런 흔한 위기들 중 하나일 뿐이야. 떠올려라, 그 수많은 도주의 순간을! 할 수 있다! 장절한 탈출극 끝에 당당히 몸을 빼내고 외쳐주마! 이것이 나의 도주 경로ㄷ-‘
“어젯밤에는···. 정말 많이 힘들었나 봐요? 가만 보면 당신은 참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푸우욱-!
“커헉!
락샤샤가 한 손으로 매력적으로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천천히 쓸어내며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단어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힌다. 역시 훌륭한 암살자. 들어오는 공격 하나하나가 살인적이다.
‘어젯밤? 힘이 들어? 뭘 했길래? 도대체 뭘, 무슨 짓을? 쾌락 없는 책임? 저 아름다운 남국의 여인에게 내가, 내가! 내가아아아아!!!!’
두근두근두근두근- 퍼엉!
삐이이이이이-
상황종료. 현 상황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것, 불가능함.
‘하, 하이드! 교대다! 나는, 나는 버틸 수가 없어!’
[오, 오오오! 마, 맡겨둬라, 껍데기!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의 허약한 정신력과는 비교가 불허한 독립 의지체인 이몸이-]뚜욱-
한순간에 몸의 모든 감각이 차단되며 순식간에 마음에 평화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사, 살았다. 저 녀석 덕분에 위기(?)를 넘겼어.’
조금만 더 저 공간에 락샤샤와 함께 있었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나는 신체 건강한 젊은이란 말이다. 물론 마음이야 동하지만, 좀, 그렇잖아. 게임 캐릭터기도 하고, 락샤샤도 누군가의 플레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NPC일 수 있는데, 좀….. 거부감 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 takealook : 도망치지마! 맞서싸워!
– 홀리 : 꺄아아악! 너무 야해요! 자,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뭘 보여주는 거예요!
– 스피드 웨건 : 팩트 – 본인이 화면 끄면 안보임.
– 노루Drug해요 : 우효오~ 쵸 럭★키! 자고 일어났더니 이국적인 미녀가 내 옆에~? 오이오이, 오마에, 인기남이었던 거냐고~
– 하이웨이나초맨 : 교수, 도, 돈 필요하지? 아, 아조씨가 사실 알부자거든?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냐고!
– 간장게이바 : ㅇ
– 흥안만두 :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강호의 도리!
저 미쳐 돌아가는 대화방을 봐라. 내가 돌았냐. 저놈들 앞에서 홀딱 벗고 스트립쇼 하게.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교수는 하이드가 버텨주는 동안 차분히 현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분명히 정신을 잃었고, 락샤샤가 나를 여관에 데려왔겠지. 여기까진 확실한 사실이야. 토브룬 외곽에서, 여관까지. 나를 옮기는 시간 동안만 자율 진행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중간에 깨어났다면 그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나 정말 녹초가 되어서 쓰러진 것이다. 깨어났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니, 락샤사가 어떻게 해보려 했다고 해도 캐릭터가 일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고, 비록 그녀가 반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내 옆에서 잠에서 깼지만 분명 아무일도 없었-
화아아악-
그때, 새까만 의식의 공간에 새하얀 빛이 비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벌써? 대충 10초도 안 지나간 것 같은데?’
[끄아아아악-!]하이드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교수의 의식이 다시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
“아, 돌아왔다.”
다시 몸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교수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코앞까지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있는 락샤샤였다.
“어쩜 이렇게 진귀할까···.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 아아아….. 탐나라….”
“도, 돌아왔다니. 무슨….”
“모른 척 하지 말아요? 하이드. 방금 당신의 몸속으로 쪼르르, 도망간 귀여운 영혼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음…. 여자의 감?”
락샤샤는 화사한 미소 사이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교수의 이마를 쓸어올렸다.
“눈빛이 달라요. 하이드의 눈은 순간을 불사르는 유성 같은 빛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의 눈은…. 마치…..”
흑단 같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한참 교수의 눈을 응시하던 락샤샤는, 베시시 웃으며 돌아섰다.
“음, 얘기 안 해줄래요?”
“허, 허어어어어-”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교수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자, 그녀는 나비처럼 하늘하늘하게 걸으며 또 숨죽여 웃었다.
“아아, 정말. 당신과 하루 종일이라도 놀고 싶지만, 마탑을 그렇게 만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또 해야 할 일이 생겼답니다. 나도, 당신도?”
“해, 해야 할 일이요?”
처억!
락샤샤는 검지로 교수의 입을 막은 채, 주머니에서 살짝 젖은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또 존댓말!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 거예요? 자아, 락샤샤~ 라고 불러봐요. 락샤샤~”
교수는 그에게 손을 살랑 살랑 흔들며 유혹하는 락샤샤를 애써 무시한 채 그녀가 건네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수배서?”
“그래요. ‘인간 탈주범 교수’ 에 대한 수배서에요. 그런데 그 아래, 현상금을 누가 걸었는지를 좀 확인해보시겠어요?”
교수는 락샤샤의 말에 따라 종이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에 젖어 희미하게 번진 글자였지만, 읽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토브룬 영주성, 로드릭 왕국이랑….. 다 평범한 거-어?!!”
콰악!
현상금을 건 집단의 마지막 명단을 본 순간, 교수는 저도 모르게 종이를 찢어질 듯 꽉 쥐고 있었다.
“광명 교단?!”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틀림없이 로드릭 왕국의 국교(國敎), 빛의 신 로-하람을 모시는 광명 교단이었다.
“이놈들이···. 왜 ‘탈주범 교수’를?”
교수의 질문에, 락샤샤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
[외전] 어느 수집가의 꿈 [외전] 어느 수집가의 꿈***
[43구역]그그그그그-
척, 척, 척, 척!
검은색 일색의 군복을 입은 무리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도색된 장갑차에는 황무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선명한 검은 비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팩 리더. 목표 지역에 대한 포위를 완료했습니다. 평소 하던 대로, 선전포고를 시작할까요?”
병사는 보고하면서도 당연히 허가가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선전포고란 박격포와 대전차 미사일을 동원한 무차별 위력 활동을 의미했으니까. 극단적인 합리주의, 완벽주의자인 그들의 상관은 적을 대함에 있어 쓸데없는 가식과 명분을 찾는 것을 혐오했다. 적이 준비할 시간을 주는 만큼 아측 병력의 손실로 이어진다. 그게 그의 지론이었고, 부하들은 그렇기에 자신의 상관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수 있었다.
“아니, 잠깐 저쪽과 대화를 해보고 싶군.”
그렇기에 병사는 케셀링이 ‘대화’라는 수단을 선택한 순간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대화…. 말씀이십니까?”
철컥!
병사의 입이 열린 순간, 팩 리더의 뒤에 그림자처럼 시립 해있던 남자가 순식간에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명령에 의문을 품지 마라, 서전트(sergeant).”
끼리릭-
“아니, 평소와 다른 명령을 내렸으니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 의문은 혼란으로, 곧 작전 수행 속도의 저하로 이어지니.”
남자가 방아쇠에 힘을 주기 직전, 하얀 장갑이 그의 행사를 가로막았다.
얼굴의 절반 가까이가 화상으로 일그러진 남자, 케셀링은 부관의 손에서 총을 빼앗은 뒤, 질문을 한 병사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번 작전은 제법 장기전이 될 예정이다. 네스트에서는 적대 세력이 43구역을 비운 사이 그동안 작전에서 제외되었던 이 지역을 철저하게 점령할 생각으로 많은 병력을 이 지역에 투입했지. 눈앞에 있는 시설은 의료시설이니, 잿더미로 만드는 것보다는 점령하여 아군 의료시설로 사용하는 것이 더 쓸모 있지 않겠나.”
“가, 감사합-”
타앙-!
풀썩.
“물론 명령 하달에 가장 방해되는 것은, 너 처럼 명령에 의문을 품는 병사지만 말이야.”
케셀링은 부관의 손에서 빼앗은 총으로 질문을 한 병사의 머리를 쏴 버린 다음, 피가 튀어 벗어버린 장갑과 함께 부관에게 돌려주었다.
공손하게 총을 돌려받은 부관이 곧바로 새 장갑과 손바닥만 한 사각형 마이크를 내밀었고, 케셀링은 익숙하게 장갑을 받아들어 손에 낀 다음 마이크의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우진 비뇨기과’에 전한다. 해당 시설은 지금 이 시간부로 렙터 소사이어티의 지원 시설로 발탁되었으며, 당 시설에는 그 어떤 명령에도 거부할 권한 따위는 없음을 알린다. 5분 의 유예시간을 주며, 시간 안에 시설의 모든 무장을 해제하지 않거나, 별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 즉시 아측의 적으로 간주, 섬멸하겠다.”
치지익-
케셀링이 마이크의 버튼에서 손을 뗌과 동시에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병원이라고 했으니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도 있겠지. 그들에게는 불행히도 렙터는 남의 사정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집단이 아니다. 적의 세력권에 있었으니, 그들도 적이다.
치직- 끼이익-
순간 소음 속에서 시끄러운 노이즈가 들리더니, 병원 측에서 확성기에 증폭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이보게, 김간. 이거 지금 방송 되는 거 맞나? 한번 써본 적이 있어야지 원. 아, 들린다고? 좋아. 좋구만.”
목소리만 들어도 꼬장꼬장한 느낌이 드는 노인의 목소리. 노쇠했지만, 힘이 있었다. 아마 저자가 이 시설의 주인, 우진이리라.
“킹슬리. 몇 분 남았지?”
“4분 03초입니다.”
케셀링이 시간을 재는 사이, 마이크에서 우진의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거 살벌하고 쓰잘대기 없는 얘기 잘 들었네. 보아하니 외지인 같은데, 딱 한 번만 얘기해줄 테니 잘 들으시게. 일단, 우리 병원은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금지야. 미안하지만, 자네들이 지금 밟고 있는 그 땅도 우리 병원 부지이니, 무단침입을 한 셈이지. 내 자네들이 정중히 사과하고, 무단 침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제시하고 물러난다면 없던 일로 쳐주겠네.”
“3분 46초입니다.”
“아니, 시간을 잴 필요는 없겠군.”
마이크의 버튼을 누른 케셀링은, 이례적으로 상대의 장난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럴만한 대상이 얽혀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군. 마지막으로 그쪽의 의사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찾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HIV라는 집단에 대해서 알고 있나? 최근 놈들의 근거지를 습격하였지만, 건물은 텅 비어있고 흔적은 두 갈래로 나뉘어있더군. 하나는 이쪽으로, 하나는 43구역의 바깥으로. 혹시. 그들이 이곳에 있나?”
치직, 치지직-
두 집단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대답 대신 흘러나온 것은 노인의 웃음소리였다.
“흘흘흘흘…. 이거이거, 미안하게 됐군. 내가 대접이 부족했어. 이렇게 밖에 세워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안으로 들였어야 하는데 말이야.”
위이잉-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순간, 건물 외부에 빽빽하게 설치되어 은빛 벽처럼 보이던 터렛들이 동시에 외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아까 까먹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내가 말하는 ‘관계자’ 라는 것은 환자를 의미하네. 지금부터 거기 시커먼 쓰레기들 전부. 내 환자가 되어줘야겠어.”
케셀링은 노인의 사나운 목소리에, 확성기 너머 노인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전군. 전투개시.”
부르릉! 그드드드드득-
철컥! 끼리릭!
척, 척, 척, 척
치지익-
“끌끌끌…. 무슨 조선시대 사대부마냥 묏자리에 환장하는 머저리들이 아닌가. 오늘 입원자 명단은 그대로 염라대왕한테 보내줘야겠군.”
노인, 우진은 진료실 캐비넷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옛 무장을 꺼내들며 웃었다.
“내 이름은….. 그래. 제일 위쪽에 써두는 것으로 할까. 그래도 내 환자들이니, 내가 인솔해서 내려가야지.”
철컥!
그 말을 끝으로, 43구역의 유일한 병원 주변에는 납으로 이루어진 소나기가 한참을 내렸다.
빗소리 대신 총성이 쏟아졌지만, 그 결과로 땅이 젖어드는 건 매한가지였다.
***
[돔, 감찰부 어딘가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엿 같은 국장은 뭔 보고서를 다시 써오라고 지랄이야. 교수네 패거리의 영입에 관한 관심이 생각보다 큰 것 같은데······. 집행부랑 갈등이 더 커진 건가? 이러다 내전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닌지 몰라.”
에젤은 감찰부에 복귀한 뒤 한참을 그의 상급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의 터질 듯 부어오른 뺨이 문제였다. 일단 에젤 스스로가 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긴 했지만, 어쨌든 저 볼을 보면 돔의 공무 수행 중인 인원이 외부에서 뒤지게 처맞고 왔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결국 에젤은 보고서에는 애매하게 기록해뒀던 교수와의 인연에 관한 얘기를 모조리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라서 놀다가 이렇게 됐다고 안 하면 감찰부의 명예를 위해 교수네 쉘터가 날아갈 판국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에젤의 진술을 들은 상관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돌연 에젤에게 BDSM 캐러밴에서 있었던 대화와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해 보고서를 올리라고 하며 이렇게 사무실 까지 하나 내어주고, 기밀 데이터 접근 권한까지 떡하니 쥐여준 것이다.
팔락, 팔락,
그렇게 에젤은 그림을 좀 그릴 줄 안다는 죄로 보고서에 상황과 인물까지 묘사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들던 중, 기왕 권한이 생긴 김에 자꾸 그의 신경을 건드리던 인물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고, 지금 이렇게 자료실에 찾아와 케케묵은 먼지를 먹어가며 오래된 기밀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분명히 어디서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이안, 이안 말콤. 이놈은 뒤졌고. 이안 맥그리거, 도 뒤졌고. 이안 코프 – 는 작년에 추방됐나? 아, 아직 언더돔에 수감되어있군. 이안 조, 이안 존스…. 에이 썅, 뭐가 이렇게 많-”
팔락.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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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급 기밀]고위험 인물 리스트
– 적성세력
– 렙터 소사이어티
–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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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 데스몬트(aka 애쉬필드)
– 직위 : 팩 리더 / 스웜 알파(마지막 정보 갱신 : 2054.03.17.)
렙터 소사이어티의 초기 멤버중 하나로 대전쟁 시기에 용병으로 활약했으며 지역섬멸, 대규모 테러에 특화된 인물. 나이, 출신, 인종등 모든 것이 불분명하나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인상적인 외모에 대해서 서술함(#자료2 참고). 뛰어난 전투 능력과 지휘 실력, 일선 병사들의 인망까지 두루 겸비한 그는 스웜 알파급 고위직까지 고속승진하였으나,근 3년간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질서와 정의를 수호하는 돔에 물적, 정신적으로 막대한 해악을 끼친 인물. 반드시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를 숙지, 발견 즉시 보고할 것.
– 현상금 : 생사불문 / 450,000,000 sil
– 주요 정보제공 / 4,500,000 sil
첨부자료 :
#1 초창기 렙터 모집 포스터(‘마땅한 대접을 원하는 자 렙터 소사이어티와 함께하라’ 문구 하단, 포스터 중앙에 위치한 백인 남성의 모델일 가능성이 있음.
#2 생존자들의 서술을 바탕으로 작성된 대상의 몽타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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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하고 깊은, 퇴폐적인 느낌의 갈색 눈. 거친 스케치만 봐도 느껴지는 이안 데스몬트라는 남자의 강렬한 인상. 분명 닮았다. 뭐가 닮았는지 설명은 못하겠지만….
“에이 설마. 다른 놈도 아니고 스웜 알파급 고위간부를 못 알아보면 감찰부 명함 떼야지.”
분위기 빼고는 낮에 본 덩치와 몽타쥬 속의 인물은 완전히 다른 사람임이 틀림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여자 열 명은 혼절시킬 것 같은 퇴폐적인 느낌의 미남자.
뒤를 돌아보면 시체 열 구 정도는 툭 던져줄 듯한 강철 턱의 듬직한 마초 남자.
탁!
에젤은 오래된 기밀문서를 다시 봉인한 뒤, 쓰던 보고서를 마저 마무리 하기로 했다.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45구역에 새로운 파이가 나타나면서 돔의 내부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돔이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한다면, 정말 분열될 수도 있을 테니까.
***
[32구역. 해피 블라인드 거주지]치렁치렁한 옷을 걸친 노파가 까마득히 높은 단상 위에 올라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디딜 곳 없이 좁은 단상에, 세찬 바람까지 불고있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지만, 노파의 푸른 눈에는 한치의 두려움도 없었다.
“들어라, 눈 감은 자들이여.”
그녀의 목소리에, 단상 아래에 모인 수많은 교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그 피와 악으로 가득 찬 전쟁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누구도, 그 어떤이도 예외 없이 신음을 흘리는 세상이로다.”
둥- 둥-
그녀의 단상 옆에 시립한 남자들은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북을 울리고 있었다. 황무지의 바람 소리를 뚫고 북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교인들의 심장도 그 울림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보라! 고개를 숙여 풀 한 포기 없는 땅을 보라,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대들의 품에 안긴, 작은 생명을 보라!”
둥- 둥-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노파의 외침에, 교인들은 저마다 품에 안은, 혹은 손을 잡고 따라나선 자식들을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식이 있거나, 혹은 있었던 사람들이다.
몰아치는 모래바람 속에서, 노파의 형형한 눈빛이 야수의 그것처럼 푸르게 타올랐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어찌하여 새로 태어난 이 죄 없는 영혼이 이토록 고통받아야 하는가! 이들은 죄가 없다! 죄가 없으니, 고통받아야할 이유도 없다!”
둥- 둥-
“애석하게도, 세상은 멸망했다. 우리는 두 번 다 시 청명한 바람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며, 푸르른 강산을 볼 수 없을 것이니! 되돌릴 수 없다면 잊어야 한다! 잊고, 잊고! 또 잊어서! 과거에 향수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우리의 모습을 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아니될 것이 아닌가!!”
둥- 둥-
노파는 고개를 숙여 교인들과 눈을 맞추었다.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린 교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노파의 푸른 눈에서도, 그들과 같은 의미의 눈물이 흘렀다.
“눈을 감으라, 형제들이여. 과거의 문명을 잊어라! 우리 아이들이 검은 아스팔트와 마천루의 빌딩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눈을 감으라! 형제들이여! 과거의 잔재가 아이들의 영혼에 스며들어, 다시 한 번 그 끔찍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눈을 감고! 쇠와 기름을 멀리하라! 필요하다면 과거를 답습하는 이들의 눈을 감겨서라도! 우리는 이 시대의 안식을 찾고 말지니!”
둥- 둥-
어느새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었다. 황무지의 삭막한 풍경도, 피로 얼룩진 자신들의 의복도 보이지 않는, 편안한 어둠이 그들에게 안식을 부여했다.
“눈을, 감으라.”
이미 과거의 악재를 머릿속에 담은 과거의 인간들이, 그 모든 오욕을 눈에 담고 그대들을 이끌지니.
“나, 눈을 감지 못할 죄인이 그대들의 목자가 되어 길을 인도하리라.”
둥- 둥- 두둥-!
두 번의 북소리를 마지막으로 단상과 주변을 밝히고 있던 횃불이 모두 꺼지며, 황무지에 그들을 위한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
‘같은 세상에서 같은 경험을 한들, 어쩜 저렇게 다른 방향으로 달려갈까요.’
소녀는 그녀의 꿈을 하나하나 소중히 모아 저장했다.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이와 같지 않으니. 모든 꿈은 그녀의 소중한 수집품이다.
세상을 가지려는 자.
과거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
남아있는 세상을 파괴해서라도, 과거의 잔재를 잊고자 하는 자.
빛깔도, 색도, 향도, 풍미도. 하나같이 같은 게 없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수집품.
“아아,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아름답구나.”
소녀는 그렇게 자신의 데이터에 저장된 꿈을 소중히 그러안았다.
그녀는 수집가였다. 그녀가 모으는 수집품은 세상에 흘러넘치지만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가장 고귀한 예술품. 인간의 삶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