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72
Chapter.6 영광의 이름으로(7)
***
‘어쩐지 너무 물 흐르듯 잘 따라온다 했어! 급조한 변명치고 너무 잘 풀렸다고! 어디서부터 맞춰준 걸까? 처음부터? 제커스를 데려온 시점? 내가 여왕과 관련이 없음을 고백했을 때? 구원 교단의 정보를 입에 담았을 때?’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달리, 교수의 입은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원하겠습니다. 나 교수는, 스스로의 의지가 남아있는 그 날까지, 인류를 위해 헌신하다 갈 것을 맹세합니다.”
보통 용사 서원처럼 [교단의 뜻을 따라] 같은 문구를 넣지 않은 것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기랄, 그래! 자존심 상한다! 털렸어! 저 구렁이 같은 년한테 제대로 털렸다고!
그런 교수의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던 세나디스는, 주변을 둘러싼 사제들과 성기사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것으로 또 한 명의 용사가 탄생했습니다. 절차에 따라 시간을 들여 축복해주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용사 교수’가 전해준 정보는 지급을 다투는 사안이니. 축복은 제가 약식으로 진행할 테니, 사제님들과 성기사들은 즉각 병력을 편성하여 노래하는 투구 주점으로 향해주세요.”
“광명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투라, 로 하람.”
사제와 성기사들은 여주교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허겁지겁 신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감히 자신들의 앞마당에 이단의 본단이 있다니. 참기 힘들었겠지.
그렇게 신전에 교수와 그녀, 둘만이 남게 되자 세나디스는 법복이 바닥에 떨어진 향유에 물드는 것에 괘념치 않는지, 교수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마주 보았다.
“눈치도 빠르고,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자세도 마음에 들어요. 아아, 로 하람이시여. 행하라, 그리하면 내 손길이 거기에 있을지니. 어쩜 이렇게 딱 맞는 인재를 내려주셨나이까.”
사제들이 자리를 비우자, 그녀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투부터가 엄숙하고 신성한 느낌에서 가벼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미 내가 그녀의 능구렁이 같은 속내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본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사실 모를 수가 없지. 나도 사제들이 나가자마자 이빨을 부득부득 갈고 있었거든.
“언제부터…. 계획된 겁니까?”
“음….어려운 질문이네요. 애초의 계획과 결과가 너무 많이 달라져서. 이걸 계획대로 됐다고 해야 할지, 안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두 번 접은 낡은 편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당신에 대한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 건, 이 편지를 통해서예요.”
“그게…. 뭡니까?”
“후훗. 한번 직접 읽어보는 게 어때요?”
교수는 여우처럼 샐쭉하게 웃는 그녀를 한번 노려보고는,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채 펼쳤다.
“이건….”
“놀랍지 않나요? 저도 처음 교단의 정보원이 이 편지를 제게 전달했을 때 이게 가짜가 아닌가, 몇 번이고 의심했어요. 그도 그럴 게, 그 강철로 만든 기사의 표본 같은 여자, 샤를롯 데 아가트가 개인적으로 어떤 남자에 대한 추천장을 남겼으니까!”
교수의 손에 들린 종이 위에는 샬롯의 직인과 함께 교수라는 인물이 얼마나 로드릭을 위해 헌신할 수 있으며, 기사가 되기에 적합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말들이 어색하게 쓰여진 귀족적인 수사들 사이에 담겨있었다.
“어….어?”
샬롯이, 추천장을 남겼다고? 나를 업고 신전까지 데려가 살려내라고 깽판까지 놓은 걸로도 모자라서?
– 간장게이바 : ??????
– 스피드 웨건 : 오.
– 무카바 : 샬롯 누님 루트가….. 열려있다고? 그 철벽녀가?
– 흥안만두 : 이게 그 못생긴 남자의 매력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 Jokass : 야야, 방금 교수 방송이 커뮤니티 전체 방송 랭킹 50위까지 올라왔음. 샤를롯 데 아가트 공략 풀렸다고 소문난 거 같은데.
– G미연시G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잊혀진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 ‘19금 플레이 협동조합’에서 왔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기위해 지금도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신 선구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약간의 호의를 남기고 가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layer `G미연시G` 님이 50만 실링을 기부하셨습니다!
– takealook : 수상하게 돈이 많은….
– 스피드 웨건 : 해금 조건 : 해당 인물과 아군으로 소속된 전장에서 전장 공헌도 30% 이상 / 샤를롯 데 아가트의 인정 / 아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 특히 샬롯의 주변인물은 모두 사망 / 플레이어의 사망에 이를 정도의 부상, 그 부상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헌신이 알려져야 함 / 앞의 모든 과정이 선행된 상태에서 적을 몰아내고, 샬롯이 생존해야 함. /
지금까지 확인된 정보로 최대한 빡빡하게 맞춘 조건. 추측임.
– G미연시G : 퍼가요~
– 美しさ賛美 : 퍼가요~
– 븅탁 : 퍼가요~
– 전대가수 : 강호에 기인이사가 밤하늘의 별과 같이 즐비하다 하더니….. 끝내 도원향으로 향하는 전인미답의 길을 찾아내는 이가 있구나….. 목숨을 걸고 구해준 정보, 요긴하게 쓰도록 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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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 다들 많이 놀란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샬롯이 나를 꽤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추천장을 써줄 정도라니. 그 기사도의 현신 같은 여자가, 낙하산을 꽂으려고 하다니. 잘은 모르지만 이게 남들이 말하는 그거 아냐? 그린라이트인가 하는 그거?
교수는 헤벌쭉해져 있다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제기랄! 그때 감염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걸리지만 않았으면, 그대로 왕실 기사 루트로 갈아탈 수도 있었다는 얘기잖아! 잘만 하면 샬롯도 동료로 들이고!’
아아, 속쓰려. 속쓰려 뒤질 것 같아. 그때 조금만 사렸으면 이런 개고생 안 하고 남들처럼 해피하게 게임하고 있었을 텐데. 왕실 기사면 특 A급 직업이잖아. 지금보다 100배는 쉬웠을 거라고.
교수의 속이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세나디스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광명 교단은 아가트경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죠. 당연하잖아요? 빛의 신을 모시는 이들이, ‘전장의 태양’이라 불리는 기사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한때 그녀가 로-하람이 내려주신 성녀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제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그녀가, 평생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그녀가 사적으로 남성에 대한 추천장을 올리다니. 흥미롭다고 생각해서 조금 알아보도록 명령했는데…. 그 뒤로는 알다시피. 아주 수상한 정보가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것 아니겠어요?”
“그럼 신탁 얘기는 다 거짓말이었던 겁니까?”
“설마 제가 로 하람의 이름을 빌려서 거짓을 입에 담을 리가. 신탁은 분명 말씀드린 그대로에요. 다만, 신탁의 대상이 구원 교단이라는 이단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에 광명의 이름이 울려 퍼지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렇게 드러나게 활동하는 이단을 교단이 모를 리가 없죠.”
“이런 미-
“미?”
“-련한 일이 있나.”
교수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욕설을 입에 담으려다 꾹 삼켰다. 어쨌든 이쪽은 주교님. 깝치면 죽는다. 천천히, 냉정하게 알아보자고.
그래도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출 수는 없었는지, 세나디스는 교수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상황이 제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죠. 원래 계획이라면 꼼짝없이 이단취급당해서 죽을 위기에 놓인 당신을, 제가 간곡하게 사제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여 구원한 다음, 교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아가트경을 끌어들이는 패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톡톡.
여주교는 손가락으로 교수의 머리를 두드리며, 만개한 꽃밭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막상 대면하고 보니 대단히 영민하고, 재치 있으며, 정치적인 감각을 소유한데다, 심지어 여왕의 정보를 수신한다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있다지 뭐에요? 당신이 이토록 귀중한 존재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교단조차 알아내지 못한 구원 교단의 근거지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주께서 우리를 위해 이자를 내려주셨구나.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도구를 내려주셨구나, 하고.
아가트 경의 편지에 따르면 전략적인 능력도 범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인재를 쓰지 않고 버려두면 그건 인류의 낭비이자, 로-하람의 뜻을 무시하는 행위이지요.”
“쯧!”
교수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손을 쳐냈지만, 세나디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로 하람의 성상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서로를 위해 미리 한 번 더 말해드리겠어요. 교수, 당신은 교단의 뜻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당신은 뮤트와 너무 많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아무리 당신이 스스로를 포장해도, 교단은 당신을 이단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건 잘 알고 계시겠죠?”
“….빌어먹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원래는 당신을 미끼로 하여 아가트 경을 용사로 추대하려 했지만…. 당신이라는 패가 생겼으니 로드릭 왕국과 척져가면서 그들의 기사를 뺏어올 필요가 없어졌지 뭐에요?”
교수는 아까부터 계속 얘기가 겉도는 것을 느꼈다. 내 정체를 알고, 나를 이용해 아가트경을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샬롯이 필요 없어졌고, 대신 나를 끌어들였다. 도대체 무엇을? 무엇을 위해서?
교수는 다소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용사라는 것은, 교단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을 의미하지요. 이제 변죽은 그만 울리고 슬슬 얘기해주시죠? 도대체 얼마나 큰 임무를 맡기려고 이렇게 빙빙 둘러 말하는 겁니까?”
“….라투라, 로-하람. 용서하소서.”
잠시 성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던 세나디스는, 교수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성상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가 대단히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였다.
잠시 망설이던 세나디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
“괴물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고, 로드릭은 벌써 세 개의 도시를 잃었습니다. 광명 교단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신전에서도 앞으로 닥쳐올 어둠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지요.”
“그거야 전장에 한 번이라도 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결사대를 편성할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적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가, 모든 악의 원흉, 여왕의 목을 칠 결사대를.”
세나디스는 그녀의 말에 담긴 무게를 곱씹듯,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를 엄숙하게 입에 담았다.
“교수,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그 결사대를 이끌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패스파인더가 되어, 불길을 여왕의 곁으로 인도해주세요.”
***
‘사형선고다.’
결사대라는 단어를 처음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사실 단어 자체가 이미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 임무는, 뮤트에게 점령된 지역으로 파고들어 가, 모든 일의 원흉인 여왕의 수급을 베어내는 것.
‘무모하다.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임무 성공률이 너무 낮아. 십중팔구는 실패할….’
그 순간, 교수의 머릿속에 어떤 예감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끈적하고, 불쾌한 예감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물론, 성공할 가능성조차 없는 임무로군. 당신들이 그러고도 정말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인가?”
“밝은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잉태하니. 로 하람의 종으로서 그분의 자식 된 그림자조차 숭배함이 마땅하지요. 우리는 광명을 위해 기꺼이 그림자속으로 가라앉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을 이쁘게도 해주시는군….”
‘교단은 임무의 성공에 관심이 없다.’
결사대가 임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미 출발해서 적진에 파고든 시점에서 그들의 임무는 달성되는 것이다. 비록 여왕의 목을 치지는 못했지만, 뮤트에게 소수 정예로 편성된 인간이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을 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수 있으니. 전 세계가 제 세상인 양 활개를 치고 다니는 여왕의 자식들, 말하는 뮤트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여왕의 안위를 챙기는 그들은 그러한 위협에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인류는 그만큼 시간을 더 버는 것이니까. 덤으로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애매한 인사들도 죽게 됐으니 교단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인 것이다.
“대화하면 할수록 당신을 보내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긴 하네요. 그 짧은 순간에 결사대의 목적을 알아내다니. 마음 같아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교단의 사제로 편입시키고 싶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죠?”
“후후훗. 악의 손에 오염되지만 않았다면, 같이 일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결론은 저것이다. 그 자백 주문 속에서 자신을 증명했지만, 어쨌든 뮤트의 손이 닿았으니 믿을 수가 없다. 마침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한 자살 임무가 있는데, 이 녀석을 쓰면 딱 맞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세나디스는 성상 앞에 놓인 제기(祭器) 사이에서 가운데가 뚫린 타원형 금속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들어, 교수의 목에 걸어주었다. 쇄골에서 명치까지 닿을 정도로 커다란 목걸이는 불편했지만, 제법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지는 게 급이 높은 성물 같았다.
“그대, 악에 물들었음에도 인간으로 남기를 서원한 용사여. 나, 로-하람의 종, 빛을 그러모으는 자, 엘 세나디스가 그대를 축복합니다. 앞으로의 험난한 임무에, 부디 이 성물 ‘넬피아의 빛’ 이 길을 밝혀주기를.”
“….죽을 놈에게 축복은 얼어 죽을. 기왕이면 성검 같은걸로 주면 안됩니까?”
“이미 성물을 주는 시점에서 월권인걸요. 대주교님은 결사대가 출발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하셨으니까.”
세나디스는 고개를 숙인채,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듯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제 손으로 임명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교단의 용사입니다. 우리 손으로 사지로 내몰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이 살아돌아오기를 기원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더럽혀진 자’를 위해서 기도를 할 수가 있나?‘
“로 하람 께서도 그정도는 용서해주시겠지요.”
내 목에 성물을 걸어준 세나디스는, 무릎 꿇은 나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당신의 무사 귀환을 기원합니다, 용사, 교수. 밖으로 나가면 제 수행사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제 가십시오, 용사여. 부디, 당신의 앞날에 광명이 함께하기를.”
“……”
교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나디스는 교수가 문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깊게 숙인 그 자세로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교수는 그게, 대단히, 대단히 불편했다.
“….. 그래도 마지막에는 좋은 말을 해줬으니, 나도 딱 한 마디만 해주고 가지.”
교수는 신전의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댁은 주교 같은 거 관두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뭔 사람 하나 사지로 보내는데 그렇게 구구절절 말이 많은지. 어차피 거부 못할 거 알면, 그냥 가서 죽어라, 하면 되는걸.”
“…..”
“다 때려치고 평사제로 돌아가서 빛이나 보고 살라, 이말입니다. 괜히 높으신 분들 말씀에 치여서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있지 말고.”
“….주께서 저를 필요로 하는걸요.”
“내 참. 잘나서 불쌍한 인간은 또 처음보네.”
끼이익-
교수는 신전의 문을 열자 새어 들어오는 화창한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셨다.
“….문 닫고 갑니다.”
콰앙!
교수는 신경질적으로 신전의 문을 닫은 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제의 뒤를 따라 신전을 떠났다.
[울고 있는 여자는 위로해줘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쓰여 있는데?]‘이번에는 아니야. 뭘 해도 위로가 안될 테니까.’
세나디스는 교수를 전송하며 울고 있었다. 차마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죄스러운 듯,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교단의 그림자 속에서 판을 짜는 그녀조차, 누군가의 장기 말에 불과한 것이다. 악한 척, 독한 척 다 해가며 억지로 누군가를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역시 난 이념이니, 사상이니 그런 거 가지고 모여든 놈들이 싫어.”
“예?”
“아,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교수는 수행사제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찝찝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
“어디로 가는 겁니까?”
“신전 뒤뜰에 작은 손님용 숙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용사님의 임무를 함께할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함께할 사람들이라….”
교수는 수행사제의 뒤를 따라 잘 꾸며진 정원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강제로 주어진 임무이지만, 상황만 보면 그렇게 완전히 망한 건 아니야.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갑작스럽게 임명된 결사대지만, 사건의 전체적인 틀만 보면 교수에게, 아니 커뮤니티의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진행 방향이었다.
‘랭킹3위, 천류제가 받은 임무와 완전히 동일한 임무. 똑같은 이벤트다.’
월드 3을 클리어한 랭커와 완전히 동일한 진행. 그동안 천방지축으로 들쭉날쭉하던 교수의 플레이가, 갑자기 정석의 궤도에 안착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천류제는 이 임무를 받기 전에 이미 엄청나게 날뛴 뒤라 히어로 유닛 동료가 빵빵하게 붙어있었고, 동료를 제쳐놓고도 천류제 본인의 컨트롤이 말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거지.’
사실 천류제의 월드 3 클리어 데이터를 보고 ‘가짜’ 내지는 ‘반쪽짜리’ 클리어 데이터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천류제 이 인간은 클리어 이후 다음 월드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본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만 집중한 다음, 이렇게 월드 초기에 결사대 임무를 받아 말도 안 되는 전력 차를 컨트롤 빨로 밀어붙여 기습적으로 여왕의 목을 떨어트려 클리어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 당시의 천류제와 나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
월드 초기라고는 해도, 천류제는 검객 클래스로 검기를 사용해서 일 합에 성문을 베어버릴 정도의 전투력은 손에 넣은 상태였다. 영상 봤는데, 칼 부러지니까 부러진 칼로 소드 오러를 2미터가 넘게 뽑아올리고 급하면 발톱으로도 막 강기를 뽑아내서 발차기로 뮤트를 썰어버리더라고. 나도 전사 플레이 해봤는데 그거 어떻게 하는지 감도 안 오더라. 칼 놀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은 게 현실에서도 한가락 하는 놈 같고.
반면 나는?
뮤트의 피가 없으면 제 힘을 낼 수 없는 몸에, 피가 있어도 천류제 그 인간의 발 끝에 가까스로 따라붙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동료? 지금 옆에 아무도 없지. 유지력 하나 정도는 내가 더 낫겠군. 뮤트 점령지역에서 싸우게 될 테니까.
아무튼 같은 루트를 탔다고는 해도, 천류제 그 인간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 클리어하는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일단 같이 가게 될 동료가 누구인지가 중요한데….’
내가 약하면 동료라도 강해야 하는법. 천류제가 결사대 임무를 떠날 때 함께했던 동료가 작궁(灼弓)이랑 롬 스네이크, 그리고 아르갈레아 프린세스였지 아마?
많이도 안 바란다. 히어로 유닛은 아니어도 좋으니, 최소한 1인분은 하는 녀석들이기를. 보나마나 나처럼 교단에서 쓰기 좋은 껄끄러운 녀석들만 모아놨을텐데, 제발 어떤 식으로든 쓸 수 있는 녀석들이기를!
“다 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게 허락되지 않은 구역이니, 혼자 가셔야 합니다. 임무에 대한 것은 동료분들이 알고 계실겁니다.”
수행사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쌩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 간장게이바 : 오, 이번에도 가챠임? 동료 가챠?
– 노루Drug해요 : ‘교단 선정, 껄끄러운 인사’ 팩. 10연차 개꿀.
– Jokass : 한 명 정도는 네임드가 있겠지. 그래도 여왕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어야 하니까.
‘제발! 네임드가 아니어도 좋다! 힐 법 탱, 아니 탱은 내가 서니까 힐러랑 법사, 딜러 조합만 잘 갖춰뒀으면!’
교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빌며, 그의 결사대 동료들이 모여있는 건물의 문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