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74
Chapter.6 영광의 이름으로(9)
***
노툼은 ‘나쁜 놈’들에게 둘러싸인 인간을 보며, 그들이 자신에게 말을 배달하기 위해 출발한 인간들인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철 인간, 아니다. 작은 큰 인간도 아니다. 그러므로 저 말, 내 것 아니다.’
노툼은 선한 트롤이었고, 숲에서 인간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말을 받는다는 경험을 토대로 거래라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 살려보낸다, 말 받는다. 숲길 정리한다, 말 더 받는다. 그러므로 가느다란 인간을 구하면, 저 말은 내꺼다.’
노툼은 정말 배가 고팠고, 오는 길에 주워 먹은 나쁜 놈들은 끔찍하게 맛이 없는 데다 입에 넣는 순간 혀가 너무 아려서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간을 먹으면 앞으로 더 많은 말을 받지 못할 테니, 저 가느다랗고 풍성한 인간들과 거래하는 것이 그의 주린 배를 채울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워. 노툼 똑똑하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노툼은, 필사적으로 마차를 방어하며 어떻게든 뮤트를 때어놓으려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쿠웅!
“그워.”
“트, 트롤이다! 기사님! 트롤이 저희 앞길을 막았습니다!”
“제기랄! 하필 아가씨를 모시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빌라크! 대런! 너희 둘은 빠져서 마차를 끌고! 나머지는 뮤트를 막아라! 나는 놈을 처리하고 길을 열겠다!”
촤아악!
그렇게 말한 남자는, 피가 묻은 가죽 갑옷을 재빨리 벗어 던진 다음 노툼을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철 인간은 껍데기를 벗으면 그냥 인간이 되는구나.’
노툼은 길가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철 인간의 껍데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나쁜 놈의 피가 묻는걸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분명…. 숲에서 처음으로 나를 알아본 인간이 적이 아니라고 했을 때…. 이렇게?’
노툼은 인간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이해해주기로 했다. 작은 생물들은 원래 죽기 직전에 시끄러운 법이니까. 그래서, 이전에 숲에서 만난 인간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여 그들을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쿠웅.
“이, 이건 또 뭔….”
기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방어구 하나 없이 맨몸으로, 그것도 격전을 거듭해 지칠대로 지친 몸. 그런 상황에서 트롤과 싸우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앞으로 나섰는데, 길을 가로막은 트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마치 항복한다는 것처럼.
“헐벗은 인간. 도와준다. 대신 노툼한테 말을 줘야 한다.”
“마, 말을했어?”
“말을 하는게 아니라 말을 받을거다.”
기사는 너무나도 황당한 상황에 잠시 생각이 멈춰버렸다. 그러니까, 숲에서 나타난 트롤이 갑자기 항복을 하더니, 우릴 지켜주겠다고 하는건가? 죽은 말의 시체를 대가로?
“크아악!”
“이런, 넥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 좋다! 일단 도와준다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기사의 말에 노툼은 흡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저런 약한 나쁜 놈들, 노툼을 둘러싸고 괴롭히지만 않으면 쉽게 죽일 수 있으니까.
노툼은 마차를 등지고 선 다음, 옆에 있던 나무를 뽑아들며 꾹꾹 눌러담았던 흉성을 폭발시켰다.
“그워어어어어!!!”
그 뒤에 선 기사와 병사들이 감탄을 하는 동안, 마차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소녀는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어느새 노툼의 주변에 둘러앉은 마법사들은 무릎을 두드려가며 노툼의 이야기에 맞장구를쳤다.
“그냥 인간들이 아니라 기사들이 맞았을 거야! 뮤트의 피에 감염되는 것을 피하고자 피가 튄 갑옷을 벗어던졌겠지!
“그, 그래서. 그들을 구했나?”
어느새 쪼르르 몰려와 노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법사의 질문에, 노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했다. 그 대가로 나무상자에 묶여있던 말 네 마리의 시체를 모두 받았다. 맛있게 먹었다.”
“나무 상자에 묶여있던 말 네 마리…. 이런! 사두마차로군!”
“대단한 귀족을 구했구먼 그래! 말하는 트롤이 귀족 영애를 구해내다니, 정말 이야기에서나 나오던 일이 아닌가?”
그들 옆에 앉아서 같이 이야기를 듣고있던 교수도 그 얘기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이야기같군. 한편의 동화같아.’
교수는 저들끼리 어떤 귀족의 영애였을지 쑥덕거리는 마법사들을 보며 차분히 생각했다.
정말 동화 속 이야기 같다. 숲에서 나온 트롤이, 위기에 빠진 기사와 귀족 여성의 앞에 뿅 하고 나타나 그들을 구했다. 주점의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영웅시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
– 간장게이바 : 제군들.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 스피드 웨건 : 잡음 넣지마셈. 방송 화면 통째로 녹화뜨고 있으니까.
– 무카바 : 교단에 묶인 몸만 아니었으면 지금부터 노툼 뒤만 졸졸 따라다녔어도 재밌었겠다.
– takealook : 아니지. 애초에 노툼도 교단에 묶여있는 몸인데? 이렇게 따라 들어오는게 맞음.
– Jokass : 그러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본인 고유 스토리 같은데.
히어로 유닛. 히어로. 말 그대로 영웅이다. 영웅이란, 본인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추대되는 것. 모든 히어로 유닛은 그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 겪어나가는 자신만의 서사시를 가지고 있다. GG안의 수많은 히어로 유닛들은, 플레이어가 단순히 거쳐가는 동료가 아니라 그들만의 경험과 역사를 토대로 성장해 나가는 인물들인 것이다.
지금 노툼의 이야기는, 아무리봐도 그런 고유 스토리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얘 뭐 있다. 상당히 중요한 걸로다가.’
황무지 생존자의 촉이 마구 울리고 있었다. 이거 중요한 거라고. 이번에도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거라고!
– professor : 스피드 웨건님? 월드 3에서 고유 스토리 다 드러난 히어로 유닛이 몇 명이나 있음?
– 스피드 웨건 : 어떤 시드로 시작했느냐에 따라 다르지. 교수, 공식으로 시작했음? 레빗 프린세스 2월드 클리어 시드로?
– professor : ㅇㅇ. 옛날에 전사 캐릭터 키울 때 이미 공식 클리어 시드 사놨음. 그땐 여유가 있어서. 레빗 프린세스 공식 2월드 클리어 시드 시작임.
– 스피드 웨건 : 그럼 34명. 어차피 1월드 클리어 시드는 레빗 그 인간이 깨놓은 거 하나만 쓰니까 2월드에 전부 포함되어있고. 그럼 놀랙 라타야, 팜 라타야, 군다르 라타야는 기본에, 계승 가문인 프린세스 가문에서도 열 댓 명 정도 우르르 쏟아져 나올 거고. 저번에 만난 로만 가치아 맨슨은 어디 놔둬도 지 히스토리 알아서 뽑아가니까 얘도 포함시키고. 샬롯도 있고. 캐슬나이트도 건재하니까…. 대충 내가 알고있는 것만 34명임. 이제 35명이겠네. 노툼까지.
– professor : 겨우 35? 2월드는 170명 넘지 않았냐? 월드 3은 왜 이렇게 적어?
– 노루Drug해요 : 응 천류제는 그딴거 없이도 클리어했어~
– Jokass : 그놈이 살릴 수 있는 히어로 유닛 죄다 씹고 그냥 클리어해서 지금 월드4가 존나 디스토피아잖음. 근본이 잘못됐어. 파밍 하나도 안하고 그냥 넘어가니까 월드 4가 그렇게 씹망한거 아님. 교수 니가 지금 너무 잘해주고 있는 거임. 지금 이대로만 해라.
– 간장게이바 : 요즘 4월드가 답이 안보이니까 랭커쪽에서 3월드를 다시 제대로 클리어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거든. 그래서 공략파 랭커들중에 교수 너 방송 보는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 하도 개고생을 해서 일반인들은 고구마가 심하다고 안 보는데, 업적 클 해서 월드 3 제대로 넘기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지금 니가 선구자인 거다.
일단 대화방은 칭찬일색이었다. 그런 화기애애한 대화방 분위기를 보며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참 좋은 소식이긴 한데, 지금 나한테는 그런 게임 외적인 정보보다 게임 내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가 필요하거든? 결국 월드 3에서는 내가 1등이니 맨땅에 헤딩하라는 뜻 아냐?’
방송에 사람 늘면 좋지. 공략파 같은 돈 많은 사람들 늘면 더 좋고. 그런데 나도 이제 제법 먹고살 만 하거든? 나랑 같이 사는 놈이 무려 천만 실링짜리 보안키를 가지고 있단 말이다. 돈은 이제 됐다고. 중요한 건 내가 이 게임을 클리어하고 게드로이츠 컴퍼니를 찾아가, 내 머릿속에 시한폭탄처럼 박혀있는 하이드를 분리할 수 있냐는거다.
[그거 꼭 올클해서 찾아가야만 되는거야? 다른 방법은 없나?]‘사실 생각해둔게 몇 개 있긴 한데, 전부 지금은 어림도 없는 방법이야.’
지금이야 내 수준이 워낙 낮으니 이렇게 허접한 친구들과 같이 구르고 있지만, GG는 배경이 판타지인 만큼 신도 있고, 용도 있고, 온갖 기상천외한 초월적인 존재들이 실존한단 말이지.
일단 용. 드래곤. 이 친구들은 정말 말하는대로~ 이루어져버리는 개사기급 마법, 용언(龍言)이라는걸 쓴다. 사실 원리 자체는 대단히 간단한데, 알다시피 이 세계는 개체의 의지가 모여서 세상의 법칙을 규정하잖아? NPC가 곧 GM이라고. 그런데 드래곤을 부르는 수식어를 보면 ‘세계의 의지를 대변하는자’, ‘세상의 끝을 떠받치는 기둥’ 이런 식이란 말이지. 차지하는 리소스의 차원이 다르다고. 민간인 백만명이 모여도, 드래곤의 의지만큼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용언은 사실상 게임 관리자나 다름없는 드래곤이 자신의 의지를 말로 정의하는 행위를 뜻한다.
예를 들어보자.
‘핀’ 이라는 주민이 있다. 핀의 가족들부터 이웃 사람, 핀이 일하는 곳의 동료들부터 그를 만난 모든 사람이 [핀은 건강하게 살아있어] 라고 믿고있어도, 드래곤이 [핀은 죽었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GG의 세계가 받아들이기로는 ‘핀이 죽어있다는 쪽의 믿음이 훨씬 더 크군’ 이라고 판단해서 실제로 핀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게 드래곤의 가장 대표적인 언령, 파워 워드오브 킬(Power word of kill)의 발동 원리다.
적어도 놈들을 상대하려면 한 국가의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을 정도의 대영웅이 되거나, 정치, 사회적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죽는 순간 그 영향력을 세계에 떨칠 정도의 대 귀족이나 왕이 되거나 해서 드래곤의 영향력과 비빌 정도는 되어야 한다. 드래곤이 ‘죽어라’ 하면 죽는 존재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그런 놈들이니 하이드와 나를 잘 분리해줄 능력도 있겠지. 현실로 치면 시스템 제어패널 같은 놈들이니까.’
하지만 탐욕스럽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드래곤들에게 부탁을 하려면, 그만큼 상응하는 대가를 준비해야 한다. 교단이 ‘죽기 싫으면 죽으러 가라!’ 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지금으로서는 당연히 꿈도 못 꿀 일.
[드래곤이라…. 재밌겠는데? 아까 방법 ‘들’이라고 했지? 다른 것도 있어?]‘나머지도 비슷한 느낌이야. 광명 교단처럼 교세가 큰 교단의 신에게 부탁하는 것. 교황 정도면 주선해줄 수는 있겠지. 드래곤이 홀로 오롯이 세상의 의지를 대변한다면, 신은 그 신도의 숫자만큼의 의지를 대변하니까. 영향력으로 따지면 로-하람이 드래곤보다 조금 더 높을걸? 다른 하나는 여기서 서쪽으로 쭈욱 가다 보면 블루라인 산맥 언저리에 엘프 마을이 있는데, 걔네들 안내 받아서 엘프들의 성지를 찾아가 소원을 비는거야.’
정령마법 계열 궁극주문. `별들에게 소원을(Wish upon a star)’, 일명 소원 주문. 아직 아무도 실제로 써본 적은 없고, 오래된 엘프의 역사서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주문이다. 뭐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시전자의 의지를 세계의 근간에 새겨 넣는다는데, 써본 사람이 없으니 사실인지 그냥 엘프놈들 허풍인지 알게 뭐람. 일단 가능성의 하나로 보고 기억해놓기는 했는데,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게 맞을 거다.
아무튼 드래곤이건, 신이건, 세계수건 죄다 이 게임 끝판왕급이니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조건이고. 불확실하기도 하니 일단 제일 확실한 [올클리어-> GC를 찾아가 멱살 잡고 나를 살려내라고 하기]를 가장 우선시 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올클리어를 생각하려면, 대화방 사람들이 말하는데로 3월드에서 여러 방면으로 움직여 이 세계 자체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툼같이 저런 굵직한 고유 스토리를 가진 히어로 유닛을 최대한 많이 구해야 한다. 동료가 안되도, 일단 살아만 있으면 어딜 가서든 한몫 해 주니까.
“…..그워억. 그렇게 돼서, 여기 잡혀왔다.”
“허어어….”
“그런 일이….”
이런. 딴생각 하는 동안 노툼의 이야기가 다 지나가 버렸군.
– professor : 자, 방송 보고있던 친구들? 노툼의 이야기 세줄 요약좀.
– 스피드 웨건 :
1. 구해준 귀족의 추천으로 킹스랜드 서부 방어선에 합류. 일당 말 사체 2구.
2. 한 달 가까이 나름 유명세를 떨치며 군인으로 살다가, 어린 수인족을 개패듯이 패고있던 귀족을 발견, 그대로 잡아먹음.
3. 그런데 그게 이름있는 후작가 차남이었음. 잡혀가서 사형당하기 직전, 구해준 귀족 영애 가문 + 광명 교단의 적극적 변호로 사형은 면하고 교단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참회권을 받는 것으로 결정.
– professor : 땡큐땡큐.
역시. 들어보니 확실하게 느껴진다. 노툼은 그냥 곁다리 히어로유닛이 아니라는 것이. 내 캐릭터도 나름 서사가 있지만 ‘가문이 멸망하다니, 재건하겠다!’ 수준이잖아? 노툼을 보라고. 스토리의 깊이부터가 차원이 다르잖아.
교수는 스피드 웨건이 써준 노툼의 이야기를 보며 노툼이 어떤 종류의 히어로 유닛일지 추측해보았다.
‘이제 막 문명에 발을 딛은 야인과 같은 존재. 순수하지만 멍청하지는 않고, 나름 선악에 대한 주관이 확고해.’
“노툼. 그 귀족은 왜 죽인 거야?”
“그워? 그거 질문도 아니다. 털 많은 인간의 새끼를, 약하고 쓸모없는 성체 수컷이 공격했다. 그런 놈들은 살아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새끼들이 더 다치기 전에 내가 먹어 치웠다. 가죽은 부드러웠지만, 뼈밖에 없고 맛도 이상했지만, 그런 놈들 시체를 그냥 버려두면 땅에 스며들어 부정이 탄다. 그래서 먹었다.”
‘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어리고 약한 존재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수인을 똑같이 인간으로 대했고. 종족 차별이 만연한 로드릭에 있다가는 마찰이 많이 일어날 거야. 당장 토브룬의 뒷골목에만 가도 오크 노예 정도는 쉽게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의 저 말은…. 트롤 부족 특유의 문화인데? 노툼이 어렸을 때 부족 생활을 한 적이 있나? 그런데 로드릭 근처에는 트롤 부족 서식지가 하나도 없을 텐데?’
이건 무슨 고구마 줄기도 아니고, 파면 팔수록 뭐가 끝없이 튀어나온다. 이 정도로 이야기가 길게 늘어지면 추측이 의미가 없다. 제대로 된 핵심 정보가 없는 추측은 쓸데없이 머리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까.
‘확실한 건 딱 하나 건졌네. 노툼은 로드릭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산다는 것.’
누구인지는 몰라도 고위 귀족의 영애를 구출했는데 받은 보상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권리라니. 참회권을 위해 부여받은 임무도 자살임무에 가깝고. 여기서는 노툼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얘기가 삼천포로 새어버렸다.
‘으음. 이런 문제는 결사대 임무 끝나고 생각해도 되는 거니까. 대충 기억해두고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지금 중요한 건 결사대니까. 리드 플로우학파의 수계 마법사 다섯에, 무장 트롤. 지금까지는….애매해. 균형이 안맞아.’
노툼은 확실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료다. 히어로 유닛이라 벨류도 높을 것이고, 튼튼한 근접 전사라는 단순한 직업인 만큼 무난하게 써먹을 수도 있고. 하지만 마법사는…. 좀 하자가 많은 직업군이라. 강력하긴 한데 이런 침투임무에는 어떻게 써먹을지 모르겠다.
‘나머지가 좀 받쳐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다음. 대머리 수도승과, 노툼의 이야기가 끝나자 매우 호의 어린 시선으로 노툼의 주변에 얼쩡거리는 수인족 남자.
교수는 상당한 근육질 몸에 짙푸른색 짐승같은 털이 수북한 남자를 기대감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수인족이라. 수인하면 또 기대되는 게 하나 있지.
“어이, 거기 털 많은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되나? 어떤 영혼을 따르고 있고?”
교수는 적당히 거리감 있는 말투로,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그를 불렀다.
수인족이랑 대화할 때는 말을 잘 골라야 한다. 광명 교단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비추는 빛이 어쩌고 하는 주제에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을 짐승취급하는 개떡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다. 교세가 넓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종족 차별도 더 격화가 되었고, 그래서 수인족 같은 아인종들은 나 같은 휴먼 종족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뭐만 하면 짐승 새끼가 사람말을 쓰네, 더럽네 냄새나네 하는데 나같아도 눈에 띄는 족족 들이박지.
어떤 영혼을 따르고 있나, 는 어떤 짐승의 형태로 변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너 뭘로 변하냐?’ 하고 물었으면 ‘네놈도 나를 짐승 취급하는 건가!’ 하고 왁왁 거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겠지. 화기애애한 결사대 라이프도 물 건너가는 거고.
그런 내 노력이 어느 정도 먹혔는지, 팔짱을 딱 끼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던 수인족 남자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늑대의 영을 따르고 있다.”
‘오오! 늑대 라이칸스로프! 설마!’
수인족. 늑대인간. 하나만 더 잘 긁으면 1등 당첨이다. 제발, 제발!
“이, 이름은?”
“….보르카. 보르카 달룬.”
‘아흐으으- 아깝다!’
– 스피드 웨건 : 꽝이었네.
– Jokass : 라이칸스로프에, 늑대 폼이면 딱 라타야 애들 각이었는데.
내가 기대한 것도 그거였다. 월드 1에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유구한 역사를 지닌 수인족 영웅 계보. 늑대 수인 라타야 일족. 세상에 나왔다 하면 무조건 히어로 유닛인 녀석들. 노툼도 있으니 혹시나 더 있을까 싶으서 찔러봤는데, 아쉽게도 그냥 평범한 수인 남자였다. 이쪽은 왜 왔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인종차별의 성지 로드릭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수인족이 잡혀 올 만한 이유는 셀 수없이 많으니까.
어차피 북으로 가는 길에 시간 많을 테니, 천천히 물어보는 것으로 하고. 수인족, 그것도 늑대 폼이면 결국 이 친구도 전위인데….
‘근접 셋. 마법사 다섯. 벨런스가 쓰레긴데?’
마지막은 누가 봐도 사제이니, 사실상 후위만 여섯명이다.
‘아니지. 대머리에 법복이면, 혹시 몽크 아냐?’
몽크는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는 전투 사제다. 성기사랑은 좀 많이 다른데, 우선 사제로 시작해서 열심히 성직에 종사하다가, 불현듯 내가 이대로 앉아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낮에는 기도하고 밤에는 무예를 갈고닦아 만들어지는 게 몽크다. 플레이어가 키우면 어렵지 않지만 NPC로 자연발생 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 몽크 정도면 힐도 되고, 전투도 되는 올 라운더다.
“저…. 사제님?”
“….”
대답없음. 성격이 까칠하군. 몽크는 사제들 중에서도 별종이니 그럴 수 있지.
“사제님? 교단의 말씀을 들으셨겠지만, 이번 용사행을 이끌게 된 용사 교수라고 합니다. 저는 이단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니, 사제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빠직!
“이놈이 감히!”
교수가 부드럽게 접근하려 하는데, 돌연 수도승이 눈을 부릅뜨더니 입고 있던 새하얀 법복을 벗어 던지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사제, 사제 하는데 누가 사제라는 말인가! 감히 검은 마나의 깊이를 음미하는 자들에게 저 불나방들의 존칭을 붙이다니!”
엥? 잠깐만. 사제 아니야?
“거, 검은 마나? 그럼, 흑마법사?!”
수계마법사들도 대머리 노인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는지, 그의 말에 기겁을 하는게 보였다.
“그럼 그 법복은 왜 입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그 머리, 가운데만 동그랗게 밀어버린 머리는 누가 봐도 수도원의 사제들이 하는 머리….”
“그 빌어먹을 불나방 놈들이 내 지팡이를 빼앗고! 내 로브를 불태운 다음 악한 마음을 정화한다는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저 옷을 입히고 내 머리를 밀어버렸단 말이다!!!”
길길이 날뛰는 노인이 증명이라도 하듯 검은 마나를 뿜어내는 것을 보니, 진짜 흑마법사가 맞기는 한 것 같았다.
‘그럼…. 마법사6, 전사 3? 이렇게 아홉 명이 점령당한 도시 세 개를 지나서 여왕의 둥지에 상주하는 수많은 뮤트를 뚫고 여왕을 죽여야 한다고? 힐러 하나 없이?’
망했다. 이거 답이 없어. 뮤트 소굴로 기어들어 가는 만큼 전투는 무조건 난전으로 이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마법사 같은 직업군은 첫 한방 날리고 나서 순식간에 짐 덩어리로 전락해버린다. 애초에 마법사는 전장에서 안정적인 후방에서 큰거 한방을 날리거나 전장을 통째로 유리하게 바꾸는 그런 역할군이다. 소수정예 침투임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걸 어떻게 풀어나가야 되냐.’
“으으으 이 옷도, 이 건물도! 너무 밝아. 참을수가, 참을수가 없구나!”
흑마법사 노인이 마침내 속옷마저 벗어 던지며 태초의 모습 그대로 테이블 밑의 그늘진 곳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며, 교수는 결국 정신을 놓아버렸다.
“로그아웃”
띠링-!
[정상적인 로그아웃 위치를 확인 – 다음 접속장소 : 광명 교단 별채.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주변이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몰라 이제. 이런 개떡 같은 게임, 술이나 졸라 퍼먹고 들어올테다. 이안 녀석의 짐에 분명히 술이 있을 거야.
절망한 교수는, 일단 자고 와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