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86
Chapter.7 가면 무도회(1)
***
다음 날 아침.
쉘터에 모여 나갈 준비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교수는 무거운 한숨을 내 쉬었다.
“….미안하다.”
“쯧.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사과를 하는 건 또 무슨 상황이냐. 걱정하지 마라. 내가 벌인 일이니, 죽어도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아니아니,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사과하는 거야. 혼자 산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어. 바빠서 그런가, 너무 당연한 것을 무시하고 있었지 뭐야. 나한테는 익숙한 것들이 너희들에게는 생전 처음 접하는 지식일 수 있는데.”
“어찌 됐건 네가 없는 동안 우리가 한 실수니까. 책임은 우리쪽에, 정확히 말하면 먼저 총을 쏴 놈을 자극한 내게 있지. 저기 테이블 위에 내 피 몇 방울이랑 생체인식 코드, 비밀번호 적어둔 편지 있다. 혹시 이번 일에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 그거. 아침에 보자마자 태워버렸는데.”
“뭐? 왜!”
“왜긴. 뭐하러 가는 줄 알고 유서씩이나 써둔 거냐? 재수없게.”
“어제…. 그 괴물을 자극한 것에 대해서 책임지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잡으러 가는 거 아냐?”
“잡아? 올드 픽처를? 대전차 미사일 한 다스를 맞고도 안 죽는 놈을 무슨 수로? 우린 그거 못 죽이고, 죽일 필요도 없어. 게시판 보니까 돔에서 조치를 취한다고 했으니, 가면 대충 판은 짜놨을거야. 우리는 거기 가서 놈을 진정시키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저…. 햅번? 아무리 생각해도 그 괴물을 진정시키는 게 잡아 죽이기보다 더 어려울 것 같은데…. 무슨 수로 놈을 진정시킨다는 거야?”
교수는 의문이 가득한 벡스와 이안에게, 지난 밤에 쉘터 창고 구석에서 꺼내온 박스를 던져주며 얘기했다.
“어떻게 긴. 놈의 망상에 한바탕 어울려 줘야지 뭐.”
교수가 던진 박스 안에는 먼지 투성이가 된 구시대의 의복이 가득 들어있었다.
***
그렇게 입고 있던 무장을 벗어던지고 구시대 의복을 갈아입는 동안, 벡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교수는 이 일에 자신의 과실도 상당히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두 사람은 교수가 건네준 47구역 생활 주의사항 안내서를 읽었다. 문제는 손바닥만 한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 넣은 교수의 안내서는 가독성이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저건 47구역에 정착할 초기에, 나 혼자 보려고 만들기 시작했던 안내서니까.’
최근 몇 달 사이에 급격하게 사정이 좋아졌지만 원래 교수는 생활에 그리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기억해야 될 내용이 많으니 적을 건 많아지는데, 이 망할 황무지에서는 깨끗한 종이 한 장 구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으니.
해가 더해가고, 황무지에서의 삶이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안내서에 들어갈 내용은 점점 더 많아졌으며, ‘어차피 나만 볼거니까’ 하는 생각에 새로운 종이를 쓰는 대신 큼직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글자들 사이, 빈 공간에 첨언하듯 기록을 추가하게 된 것이다.
‘3형 변종에 대한 지식은 세 번째로 덮어쓸 때 적었던 거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글씨들 사이에 낙서처럼 적혀있는 설명이라니. 그런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억하면 그게 더 이상한거지.’
꽈아악-
“윽, 교수, 미안한데 바지 더 큰 사이즈는 없나?”
“우리 집에 있는 구시대 복장 중에서는 그게 제일 큰 사이즈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입고 가자고. 벡스, 네 쪽은 어때? 잘 맞아?”
“나야 뭐. 그건 그렇고, 정말 미안해, 햅번. 분명 적어준 글을 몇 번이고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마주하고 나서는….”
“사과 안 해도 된다니까. 올드 픽처를 처음 만났으면 충분히 그럴 만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벡스는 그런 낙서같은 메모도 전부 꼼꼼하게 읽어준 모양이었다.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는 녀석이니까. 워낙 성격이 꼼꼼하기도 했으니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겠지.
‘문제는, 3형 변종같은 말도 안돼는 것들에 대한 지식은 글로 배운다고 해서 머리에 들어오는게 아니라는거지. 나야 집에 틀어박혀서 주변이나 파먹고 살던 개인 생존자였으니 커뮤니티를 이용할 일이 잦았지만, 이안은 장사하면서 돌아다니느라 바쁜 녀석이었고 벡스는 아예 접속기가 없는 스케빈저였으니까. 상대적으로 나보다 이런 변종에 대한 지식이 적을 수밖에 없는 녀석들에게 ‘그’ 올드 픽처를 단순히 [자극하지 않으면 안전함, 옛날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라고만 설명했으니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가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아마 안전한 것으로 주변에 소문이 자자한 47구역에 대한 환상도 녀석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웬걸? 얌전한 괴물이 돌아다니는 구역이라고 해서 와봤더니, 사탄도 울면서 도망갈 끔찍한 괴물이 있네?
“….올드 픽처 처음 만났을 때, 뭐 타고 갔냐?”
“음…. 그냥 둘러볼 생각이었으니 기름 덜 먹는 버기 타고 나갔지.”
“그럴 줄 알았다. 놈이 관심을 가질만 했군.”
올드 픽처의 외양은, 간단히 설명하면 코스믹 호러에 나올법한 괴물 그 자체였다.
아기 피부같은 거대한 핑크빛 살점으로 이루어진 몸에 빼곡하게 박힌 각양 각색의 신발이 비늘처럼 물결치고, 꾸물거리면서 걷는 그 신발덩어리 살점의 정면에는 멀리서 보면 진짜 사람처럼 보일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셋이 손발을 휘적거리고 있으며, 그 위로 눈꺼풀 없는 둥근 눈, 입술 없는 입이 희번득 거린다.
그런놈이 쫒아오는데 누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겠냐고. 심지어 올드 픽처는 정신파 비스무리한걸 뿌려서 근처에 있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한번도 와본적 없는 곳에서, 처음보는 괴물을 맞이했는데, 방금 지옥에서 기어나온 것처럼 생긴 놈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네?
벡스와 이안의 입장에서는 올드 픽처가 안전하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안내서에는 분명히 안전하다고 적혀있었지. 그런데 [만약에] 오늘따라 놈의 심기가 영 불편하다면? 그 도박의 저울추 반대편에 올라간게 두 사람의 목숨이라면?
황무지 사람에게 생존은 곧 본능이다. 올드 픽처의 외형은 ‘안전하다’는 단어 하나로 안심하기엔 너무 흉악하게 생겼으니, 세상이 멸망하고 변종을 만나면 일단 머리에 총알부터 박아넣는 게 당연한 수순이였던 두 사람이 올드 픽처를 조우하자마자 생존모드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디보자…. 어때? 좀 구시대 사람 같아 보이냐?”
“넌 괜찮은데, 벡스는 좀 갈아입혀야 겠다.”
“왜? 난 괜찮은데? 너야말로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 죠? 좀 여기저기 불룩한 게 변태 같아 보이는데?”
교수는 꽉 끼는 가죽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이안과 청자켓, 청바지를 입은 벡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합격이다. 이상하긴 해도, 이상한 구시대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익숙한 솜씨로 상자에서 찢어진 청바지와 셔츠, 가죽 재킷을 꺼내 입은 교수는 영 불편해 보이는 두 사람의 어깨를 툭 쳐준 다음 입구 쪽으로 떠밀었다.
“자, 준비됐으면 가자고. 하루 지난 정도면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우리가 모를 변수가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무장도 하면 안되나? 뭔가 이상한 일을 하러 가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총 한 자루 걸치지 않고 밖에 나가려니 영 불안해서….”
“걸치진 말고, 대충 좌석 옆에 쑤셔 넣어둬.”
“차는 뭘로 타고가면 되지?”
이안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교수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튀기며 말했다.
“저 무장 트럭, 판촉용 물건으로 가득 채워놨었지?”
“응? 아, 그렇지. 에젤인가 하는 녀석이 감찰 왔을 때 그대로니까.”
“잘됐네. 저거 타고 가자. 쓸 일이 있을 거야. 나머지는 가면서 가르쳐줄게.”
교수는 가지고 있는 것 중 최대한 작은 마스크를 두 사람에게 나눠준 다음, 어기적거리는 두 사람을 차에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47구역의 생리에 대해 확실히 각인시켜 주겠다고.
***
부아아앙-
“여기서 좌회전. 저기 빨간 깃발 있는 골목 보이지? 그쪽을 들어가서 잠깐 차 좀 세워봐.”
“음? 우리 중앙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
“아직 시간 여유도 있고, 이렇게 입고 온 김에 47구역에 대해서 좀 배우고 가자고.”
끼익-
교수는 차를 세운 다음, 손가락으로 펄럭이는 빨간 깃발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47구역은 이 인근에서 가장 안전한 구역이야. 우리 집 같은 경우 외곽에 있어 그 영향이 적은 편이지만, 중앙으로 갈수록 그 안전함은 돔 내부에 필적할 정도지.”
“그래, 그건 네가 써준 안내서에서 읽었어.”
“좋아, 그럼 생각해보자고. 안전한 지역이니, 47구역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오래 살겠지?”
“그렇지.”
“이 맛탱이가 간 세상에서 오래살면 좋은 꼴을 많이 볼까, 나쁜 꼴을 많이 볼까?”
“어…. 많이 보지 않을까? 나쁜 꼴을? 아무래도?”
뒤에 있던 벡스의 대답에 교수는 딱! 하고 손가락을 튀기며 말했다.
“정답이야. 황무지에서 장수하는 건 그리 축복받을 일이 아니지. 우리처럼 운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하루하루를 외로움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40살이 넘어갈 때쯤에는 대부분 자살하거나, 제대로 미쳐서 사이코 갱이 되어버리지. 덕분에 47구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사이코 갱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건 안전지역과 황무지의 특수성이 맞물려 만들어진, 일종의 부작용이다. 47구역이 안전해지면 안전해질수록, 구역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늘어난다. 그래서 보통 미치기 전에 살해당하는 다른 구역과 달리 47구역에는 미친놈이 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는 사람이 많고, 그러다보니 그런 정신병자의 끝판왕인 사이코 갱이 많이 살게 되는 것이다.
“저 빨간 깃발은, 이 앞에 사이코 갱이 살고 있다는 것을 표시해둔 거야.”
“뭐? 죽이지 않고 표시만 해뒀다고? 혹시 강한 놈인가? 돔이 관리하는 47구역에서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아니, 제법 싸울 줄 안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지금부터 이 앞에 있는 사이코 갱, [인육요리사 셰프 쿡]을 왜 살려두었는지 보여줄 테니까 내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오되,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마. 입도 열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총 놓고 와.”
“권총도 안되나? 들키지 않을 자신 있는데.”
“쏠 생각이 가득하잖아! 당장 놓고와!”
스윽-
“벡스, 칼도 놓고 오라고. 무기는 그냥 다 놓고 와.”
“내, 내가 봤던 사이코 갱은 사람을 고기로 밖에 안보는 녀석들이었는데….”
“얘도 비슷하게 미친놈이긴 한데, 방향이 좀 달라. 지금부터 입 열지 말고, 눈알만 굴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이걸 보여주고.”
교수는 둘에게 작고 반들거리는 녹색 종이 조각을 하나씩 나눠준 뒤, 빨간 깃발이 펄럭이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을씨년스러운 골목의 끝에, 유일하게 전광판이 켜진 건물이 있었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덕분에 멀리서도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보이는, 주변과 동떨어진 분위기의 그런 가게였다.
[셰프 쿡의 피자 하우스]“피자…. 하우스?”
“그래. 우린 지금부터, 황무지 생존자가 아니라 피자를 사러 온 고객이 되는 거야. 올드 픽처의 영역으로 가기 전에, 예행 연습 좀 해보자고.”
“그…. 혹시 은유적인 표현인가? 피자처럼 사람을 조각낸다거나, 토마토 소스처럼 시뻘건 피가 흩날린다거나 하는 그런 느낌의?”
“아니? 저긴 진짜 피잣집인데? 그것도 아주 유우~명한. 돔의 상류층 사람들도 없어서 못 사먹는 그런 피잣집이지. 유별난 점이 있다면, 사이코 갱이 운영하는 집이라는 정도?”
“이 망한 세상에…. 피잣집이 남아있다고? 저런 멀쩡한 꼴로?”
“그러니까 미친놈이지. 자세한 내용은 가서 어떤 곳인지 보고, 그 다음에 얘기해줄게.”
음산한 골목의 분위기에 긴장한 둘을 이끌고, 교수는 반쯤 삐뚤어진 피자 하우스의 문을 경쾌하게 열어젖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