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90
Chapter.7 가면 무도회(5)
***
정오. 1205시 브리핑 시작.
“자자, 소품팀, 무대 팀! 마무리 끝났습니까!”
“소품팀! 이상 없음!”
“무대 팀! 아직 C 구역 탄흔 작업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이 없으니 실탄 사용 허가하겠습니다! 소음기 착용하고 5분 내로 끝내주세요!”
예의 그 잭이라는 놈은 안 보이는 것을 보니 정말 메신저 역할만 하고 빠진 모양.
“아, 거기! 배우님들! 준비가 됐으면 이쪽으로 오시죠!”
소란의 중심에서 사람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는 정말 영화 촬영이라도 온 양 메가폰을 쥐고 소리를 질러대는 지저분한 인상의 남자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 연극의 연출을 맡게 된, 이상국 감독이라고 합니다!”
호들갑을 떨며 악수라도 하듯 손을 내미는 남자. 교수 일행이 굳은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노려보고있자 그는 머쓱한 듯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하하, 이거 실례. 연극이 코앞이라 배우님들이 캐릭터에 몰입할 시간이었는데, 제가 방정맞았군요. 인질 역할의 올드 픽처를 적군에게서 구출하는 소수의 대항군 역할이었죠? 그런 무뚝뚝하고 냉철한 모습, 좋습니다! 역시 프로다워요! 이렇게나 훌륭한 배우님들과 함께 역사에 남을 연극을 기획하다니, 이 아무개,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이 인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잭의 속내를 듣게 된 이후 완전히 적진이라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는데, 감독이라는 사람의 반응을 보니 정말 올드 픽처와 관련된 연극만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톡톡.
[후방 / 셋 / 좌우 / 둘 / 무장]45구역에서 썼던 수신호를 이용해 이안과 내게 주변 정황을 알리는 벡스.
‘후방에 셋, 좌우에 각각 둘. 일곱이라…. 눈에 보이는 것만 확인했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시하는 인원이 그 배는 되겠지. 우리를 감시하는게 아니라 넓게 퍼져서 여기 있는 사람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 감독과 연출팀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겠군.’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올드 픽처의 민감한 눈을 속일만한 무대를 만들려면 보통 실력이 아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집행부에 돔의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여있다고 해도 무대를 꾸미고 연출을 기획하는 종류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저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죠. 역사에 남을 연극이라…. 자세한 사정을 못 듣고 와서 그런데, 혹시 어떤 식으로 역사적인 겁니까?”
“하하하! 외부에서 오신 분이라 소식이 늦으시구나? 이미 돔은 이번 일로 아주 떠들썩합니다. 저 거대한 괴물이, 47구역의 명물이 공식적으로 돔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거니까요! 렙터 그 약탈 살인마들을 밀어내고 구 문명을 재건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요! 저는 항상 말해왔습니다, 언젠가 이 피에 물든 대지에서도 문화의 꽃이 피어나 절망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줄 것이라고! 그 위대한 프로젝트의 첫 삽을 이 이상국이 뜨게 되다니, 이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슬쩍 떠본 말에 단박에 대답하는 감독. 교수는 어느새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감독을 무시하고 상황을 정리하는데 골몰했다.
‘돔에는 저런 식으로 알려졌군.’
돔의 지도자들은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일부만, 보기 좋은 부분만 풀어준 모양이다. 연극에 성공하면, 올드 픽처가 인류의 통제에 따르게 된다. 그러면 돔의 전력이 강화된다! 이런 식이었겠지.
‘하긴, 올드 픽처를 47구역 중앙에 봉인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까. 그때 당시에도 돔에서 총력을 다해 언론을 통제했으니 그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남아있진 않겠지. 아니, 알고있는 사람도 분위기를 보고 돔의 서슬 퍼런 눈길을 피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군.’
돔에서 사용하는 접속기는 게드로이츠 컴퍼니의 접속기를 마이너 카피한 제품이 대부분이니 자체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백도어를 심어놨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진상을 알 만큼 현명한 사람들은 돔이 저렇게 대대적으로 프로파간다를 펼치는 모습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했을테니, 모른척 하고있겠지.
‘잘 통제된 집단에서, 선별된 외부의 정보만 받아들여 황무지의 상식에서 동떨어져버린 사람들. 이게 돔의 현실이지.’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평화’라는 이질적인 생활을 위해 자유와 지성을 바친 사람들.
이게 돔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민간인들의 현실이었다.
결국, 감독을 비롯해 여기 모인 소품, 연출팀은 지금 이곳으로 다가오는 괴물이 사람을 세자리가 넘게 살해한 미친 괴물이라는 것을 모르고있다는 뜻이다.
“랑데뷰 20분 전!”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죄송합니다, 제 오랜 염원이 이뤄지는 터라 저도 모르게 흥분을, 자! 우선 대본부터 받으시고!”
“대본? 시작 20분 전에 받았는데 이걸 다 외우라고?”
“정확히는 대본이 아니라 상황만 설명해둔 겁니다! 상황에 맞춰, 알아서 연기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가능하시죠? 프로니까!”
찡긋!
딴에는 유쾌한 표정으로 윙크를 날리는 감독.
교수는 저 지저분하게 수염이 가득한 입가에 한방 날려줘야 하는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민간인 연출 감독이 아니라 집행부에서 우릴 죽이려고 보낸 첩자인가? 갑자기 끌고와서는 전쟁 연기를 하라고 하면서, 대사 한 줄도 안주고 상황 보고 알아서 애드립으로 때우라고? 이거 감독 맞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눈앞의 이 모라고 하던 감독이 진짜 병신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뭘 하든 올드 픽처 앞에서 시간만 끌면 알아서 상황이 진행될 정도로 준비를 많이 했거나. 돔 친구들이 그렇게 허술한 멍청이는 아니기도 하고, 뒤쪽에 잔뜩 쌓여있는 다 쓴 시멘트 포대나 공구를 보면 아마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저기…. 이감독?”
“예, 배우님?”
“그래도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알아서 한다고는 해도, 그쪽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알아야 하니까.”
“음, 대본에 다 써놓긴 했지만, 뭐, 좋습니다.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배우와 감독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니까요!”
감독, 이상국은 여전히 들뜬 텐션을 유지한 채로, 대본을 펼쳐 들었다.
“자아! 설명 들어갑니다! 1막,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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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우.
등장인물 : 햅번, 벡스, 이안.
(정오. 밝은 조명. 대항군 3인방은 무대 위를 달리고 있다. 적들을 피해 좁은 골목으로 숨어든 그들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피난민을 만나게 된다.)
“후우, 후우! 벡스, 몇 분 남았어!”
“4분! 햅번, 아직 시간 넉넉한데 왜 뛰는 거야 우리?”
“늬들은 나만큼 연기 못하잖아. 괜히 어설프게 힘든 척 하는 것 보다, 살짝 헐떡거리는 게 좋아. 박살 난 편의점 지나서 세 번째 골목, 하나, 둘…. 여기군.”
촤아악!
미리 대본에 표시된 골목에 도착한 셋은 숨을 고르며 저 멀리, 온 몸에 가지각색의 신발을 빼곡하게 붙여 비늘처럼 두른 거대한 살덩이 괴물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설명할게. 우선, 올드 픽처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가장의 기억에서 태어났어. 정확한 사인은 돔에서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쇼크사로 추정. 보이는 것처럼 신발을 수집하는 습성이 있는데, 환상이 깨지기 전에는 괜찮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신발부터 벗어 던져. 가만있으면 발목째로 잘라서 가져가니까. 이안, 너 그때 도망치다 신발 잃어버렸지?”
“음? 아아, 그러고 보니 버기 밖에 막 달라붙는 촉수를 발로 차다가 그 안에 발이 파묻혀서 신발이 벗겨졌지.”
“운이 좋았어. 놈은 새로운 신발을 획득하면 우선 멈춰서서 살펴보는 습성이 있으니까. 폭탄을 던져 건물을 무너트릴 때까지의 시간을 벌 수 있었겠지.”
“만약 그게 안 벗겨졌으면….”
“놈의 저 흐물흐물한 살은 필요할 때 경질화 할 수 있거든? 그대로 네 녀석을 시멘트에 파묻듯 통째로 빨아들이던지, 아니면 딱딱해진 촉수를 휘둘러 다리를 통째로 뭉개버리고 신발만 가져갔겠지.”
처덕, 처덕,
찌이이잉-!
“크으윽! 이건 도대체 뭔데 이렇게 울리는 거지?”
“눈 감고 두통에 집중해봐.”
“해, 햅번! 뭔가, 뭔가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는데!”
“잘 봤어. 올드 픽처가 주기적으로 울려대는 이 정신파는, 숙주의 기억이야.”
[나도 봤어.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편의점 앞을 지나는 남자의 모습. 꼭 방금 현상한 아날로그 사진 같은데?]‘그래. 놈의 이름이 올드 픽처가 된 이유지.’
교수는 따로 집중해서 보진 않았지만 대충 알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가족의 손을 잡고 편의점 앞을 지나던 숙주의 기억이겠지.
처덕, 처덕,
어느새 두 블록 정도 거리까지 다가온 올드 픽처.
“저기, 놈의 본체 앞에 매달린 마네킹 세 개. 보이지?”
“어…. 잠깐만. 저 마네킹, 괴물의 기억에서 본거랑….”
“똑 닮았지. 저건 놈을 이곳에 묶어둘 당시 감찰부 사람들이 놈에게 선물한 거야. 올드 픽처는 숙주의 기억 속에 있는 ‘이 거리를 걷고 있는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 이라는 기억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니까. 저 인형은, 그런 기억의 중심이 되는 숙주와 아내, 아들을 형상화한 의식체야. 물리적으로 놈의 본체는 저 신발 덩어리 살점이지만, 놈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저 세 개의 마네킹이지.”
“잠깐만. 저 마네킹을 돔이 선물했다면…. 그 전에는 뭘 썼는데? 돔이 길들이기 전에도 올드 픽처는 이 지역에 존재했을 거 아냐? 네 말대로라면 이곳을 배회하는 게 놈의 사명이니까.”
“그랬지. 그래서 이 모형 정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엄청 난폭했어. 인형 대신 사람을 썼거든.”
시력도 좋고 눈썰미도 좋은 녀석이라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하군. 제법 거리도 있고, 올드 픽처의 정신파가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처럼 잠깐 보이고 마는데. 그걸 바로 알아차리다니.
“사람?”
“그래. 기억 속의 세 사람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납치, 관절을 다 박살 내고 죽을 때까지 인형처럼 이 거리를 함께 걸었지. 그러다 죽어서 부패하면, 기억 속의 인물들과 닮지 않았으니 버리고 새로운 인형을 찾아다니고. 거의 재난이나 다름없었는데, 다행히 그땐 47구역도 많이 혼란스러운 시기라 조금만 찾아보면 신선한 시체를 많이 찾을 수 있었거든. 돔의 감찰부는 놈이 들고 다니는 시체의 부패 시기에 맞춰 새로운 시체를 던져주는 것으로 놈의 무차별 살인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
47구역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어머니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며 보여준 놈의 구역은 마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무너진 건물의 파편을 살점과 피막이 끌어당겨 이어붙이고, 전쟁의 여파로 반파된 거리를 놈의 육체로 그 기억과 똑같이 수복해놓은 살아 숨 쉬는 거리. 힘줄이 모여 만들어진 [GX 25] 편의점 간판이 놈의 심장 박동에 맞춰 맥동하는 것을 봤을 때는 결국 참지 못하고 토하고 말았다.
관리 되기 전 놈의 모습에 대한 감상을 짤막하게 말해주자,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행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그런 놈 앞에서 광대놀음을 해야 한다, 이 말인 건가?”
“그렇….지?”
“크흐흐흐흐, 그거 끝내주는군. 야, 담배 한 대만 피워도 되냐?”
“될걸? 이안 너는 전쟁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담배를 피우는 쪽이 더 어울리겠군. 담배도 피우고, 맨날 쓰고 다니는 그 선글라스도 껴.”
“패주하는 군인을 연기하라며? 어색하지 않겠어?”
“어차피 올드 픽처의 숙주는 민간인이었는데 뭘. 영화에 나올법한 그런 모습에 더 익숙할 거야. 명심할 것은, 놈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고 막 대할 것. 놈의 인형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난폭하게 행동해도 좋아. 전쟁터에서 멍청하게 산책이나 다니던 민간인을 만난 군인처럼.”
비록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올드 픽처의 기억 속에서 놈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가장에 불과하므로 겁을 먹거나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놈의 환상이 깨지고, 폭주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놈이 숙주의 기억에 따라 움직인다면, 본적도 없는 우리는 기억에 없는 존재이니 바로 폭주하게 되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다른 47구역 사람들이 중앙 구역을 지나다닌 걸 보니 그렇게 칼같이 정확한 기억은 아닌 모양이야. 원래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좀 편집되는 경향이 있거든. 심지어 죽은 사람의 몽롱한 기억이니까. 어느 정도 이치에 맞으면 이해해주는 것 같아.”
“평생 겪어본 적도 없는 전쟁 상황도?”
“….그래서 이해해주는 것 ‘같다’ 라고 했잖아. 확실하진 않다고.”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도 이 부분이었다. 가족들이랑 손잡고 가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지나간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총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하겠지.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잘 설득하면 이것도 어떻게 넘어가긴 한다. 커뮤니티에 보니까 황무지 복장 그대로 들어가서 코스프레라고 하니까 넘어간 적이 있다고 하니까. 이안과 벡스의 버기에 놈이 관심을 가졌을 때, 총을 쏘는 대신 입을 털었으면 무난하게 넘어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근원이 되는 거리를 무너트리는 전쟁 상황이라. 이걸 놈의 의식이 이해해주고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놈의 기억은 자세할래야 자세할 수가 없으니까. 아니, 의식적으로 직접 했던 행동을 제외하고는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지난번 연극의 마지막 봤던 기억, 그게 사실이라면….’
찌이이잉-
“크으윽! 어이 교수! 나도 봤다! 세 사람이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어!”
“시작이다! 기억해! 진짜 군인처럼 막 대하면서, 절대 인형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처덕- 처덕-
타각 타각 타각 타각.
거대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몸을 옮기는 소리와 보도블록을 울리는 가벼운 발소리. 놈의 인형이 평소 기억에 따라 편의점으로 향하는 지점.
이곳이 무대의 시작 부분이었다.
꿀꺽.
“야, 나 들어가니까, 엄호하는 척 잘해라!”
“맡겨둬!”
“제기랄. 공포탄만 잔뜩 든 총 들고 이렇게 긴장하는 것도 처음이군!”
타다닥!
긴장한 표정으로 골목에서 뛰쳐나간 교수는, 민첩하게 주위를 살피다 올드 픽처의 마네킹을 보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수가…. 민간인? 이봐!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찌이잉- 치이이이잉-!
“끄윽!”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올드픽처의 정신파. 편의점으로 가던 세 가족의 모습 위로 덧씌워지는 군복 입은 남자의 모습! 여기서 버티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저거 터진다!
[누구….시죠? 혹시 훈련 같은 겁니까?]상황을 파악하듯 두리번거리며 입을 달칵거리는 중년 남자 마네킹.
‘좋아, 일단 놈이 상황으로 들어왔어!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놈의 머릿속에 [말도 안돼]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교수 혼자 입으로 떠드는 것으론 부족하다.
교수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눈짓하자, 재빨리 골목에서 손목시계를 들어 보여주는 벡스.
치직- 치지직-
갑자기, 어디선가 시작되어 골목 전역에 울려퍼지는 방송.
[국민 여러분. 여기는 국민안전처, 민방위 경보 통제소입니다.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현재 시각, 우리나라 전역에,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에에에에에엥-! 에에에에엥-!
평소에 듣던 경찰차의 사이렌이 아니라, 낡은 라디오에서 들리는 듯한, 재난 대피 훈련 때 들어봤던 것 같은 사이렌 소리가 현실성을 더해주고, 거리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경고 방송에 올드 픽처의 본체도, 그 마네킹도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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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시.
#2 전쟁의 한 가운데에 고립된 민간인과 대항군
(귓가에 날카롭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선명하게 들리는 박격포 소리.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르고 거리를 걷고 있던 민간인 가족을 덮쳐, 포화 밖으로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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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억을 심어주는 건 불가능해. 기억 자체가 놈의 본체니까. 기억의 틈, 그 몽롱한 기억 사이에 사소한 디테일을 채워 넣어 상황을 만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본이 되는 놈의 기억에서 벗어나서는 안돼!’
사이렌. 군복. 잘 만들어진 상황이지만 놈의 기억에는 없는 것. 우선 놈을 평소의 궤도에 다시 올려놓아야 했다.
– 피유우우!
[극장, 운동장, 터미널, 백화점 등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영업을 중단하고, 손님을 대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콰아앙!
‘나이스 타이밍!’
시기적절하게 옆에 있던 건물에 박격포가 떨어지며 파편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거기 민간인들! 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파편에 맞는다!”
교수는 여자 마네킹과 키가 작은 마네킹의 팔을 거칠게 잡아 테이블 아래로 잡아당겼다.
“뭐해! 당신도 빨리 들어오지 않고!”
파앙!
두 마네킹을 테이블 아래에 밀어 넣은 뒤, 파라솔을 펼치는 교수의 모습.
[어, 어….]주춤거리던 남자의 마네킹이 테이블 아래에 와서 앉더니, 이내 다른 두 마네킹을 감싸 안는 모습을 보이며 그와 동시에 눈에 띄게 부글거리던 올드 픽처의 본체가 잠잠해졌다.
‘일단 한 고비 넘겼군. 놈의 기억은 가족과 함께 기억 속 거리를 걷는다. 정도만 남아있으니, 평소 기억대로 하던 행동을 유지해주며 그럴듯한 상황을 주입한다.’
우선 첫 번째 기점.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가족들과 쉰다.’, 클리어.
교수가 골목에 대기하고 있던 이안과 벡스에게 신호를 보내자, 둘은 특수부대 출신답게 절도 있는 모습으로 약진하더니, 편의점 근처 화단에 엄폐하고 사주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갑자기 공습경보라니, 전쟁이라도 난 겁니까?] [여, 여보!] [으아앙! 아빠! 나 무서워어!]올드 픽처의 입에서 나오는, 각기 다른 성인 남자, 여자, 아이의 목소리. 놈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여, 기억의 사이사이에 빈 공백을 채우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제기랄. 멍청한 민간인들 같으니라고. 어디 섬에서 살다 왔나? 뉴스 못 봤어?”
[뉴….스?]“그래 뉴스! 어제부터 난리였잖아! 북한 놈들이 핵을 쐈다고! 전쟁이 일어났단 말이다!”
교수의 말에, 올드 픽처의 거대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병이 퍼지고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숙주의 기억이군. 상황을 끼워 맞추고 있어.’
“대장! 시간이 없어! 탈출 지점까지 시간 내로 가지 못하면 놈들에게 포위되어서 고립되고 말 거야!”
“알고 있어! 어이, 민간인들, 저 말 들었지? 미안하지만 사정 봐줄 여유가 없군. 살고 싶으면, 우리 뒤를 따라와라.”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올드 픽처의 말에, 교수는 손가락으로 쭉 뻗은 대로를 가리켰다. 놈이 항상 다니던 그 길을.
“저기로 간다. 엄호는 우리가 할 테니까, 당신은 가족들이나 잘 챙겨. 잃어버리지 않게 손을 꼭 잡고 있으라고.”
(주인공, 민간인 가장과 악수를 나눈다. 가장의 머릿속에 군인에 대한 약간의 신뢰와 가족을 지켜야 겠다는 강한 의지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교수는 대본에 쓰여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햅번, 대한민국 육군 중사요.”
[대한민국 육군 중사…. 햅번?]교수의 말에 갑자기 뚝! 하고 굳어버리는 올드 픽처.
‘이크! 설정 충돌이다! 그냥 박교수라고 할걸!’
교수는 일단 허벅지에 힘부터 주고 봤다. 놈의 입에서 [말도 안돼]라는 소리가 나오면 뛴다, 죽어라 도망간다, 지금이라도 뒤돌아….
잠시 마네킹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부글거리던 올드 픽처는, 알아서 이해했는지 잠잠해지며 교수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하긴, 국내 거주민의 70%가 시민권을 소유한 외국인이니, 군에도 변화가 있었겠죠. 저는 김도진, 이쪽은 제 와이프와 아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교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겉으로는 믿음직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로 도와야 할 겁니다. 살아남고 싶으면.”
연극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지만, 교수는 벌써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