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91
Chapter.7 가면 무도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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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계획은 간단했다.
일단 시나리오에 따라 올드 픽처를 마지막 무대까지 끌고 간다.
그 과정에서, 정말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연출했다고 해도 내용의 특성상 올드 픽처는 어떤 지점에서 무조건 폭주하게 될 것이다.
교수 일행은 그 전에 적당히 간을 보고 빠져나와서 초토화되는 모형정원과, 그에 따라 떡락하며 집행부를 성토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구경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위험한 점이라고는 올드 픽처를 그 지점까지 끌고 가던 도중에 연극이 허술해서 놈의 타겟이 우리가 되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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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융!
“이라고 생각했는데!
“교수! 어떻게 된 거야! 이것도 미리 얘기가 된 거였어?!”
“그럴 리가 있겠냐! 염병할 새끼들! 연극의 리얼리티를 위해서라곤 해도 이건 좀 많이 과하지!”
별 탈 없이 엄폐와 약진을 반복하며 거대한 괴물과 그의 인형들을 데리고 거리를 가로지른 일행은, 갑자기 급변한 상황에 진행을 멈추고 근처 골목에 숨어들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공포탄만 쏴대며 훌륭하게 연극을 진행하던 상대가, 갑자기 실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햅번! 아까 집행부 쪽 사람이랑 좀 안 좋게 끝났는데, 그래서 그냥 죽여버리려는 게 아닐까! 그 사람 말하는 거 보니까 네가 살아있는 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래 맞아! 나 같아도 아군에 큰 원한이 있는 버린 패를 살려두고 써먹느니!”
콰아앙!
후두두둑!
“씨부럴! 그냥 죽여버리는 게 속 편하겠다! 심지어 우린 죽이면 가져갈 것도 많잖아! 무기도 많고! 그 열쇠도 있고!”
“그럼 연극은! 집행부의 정치 생명이 달린 일인데 위험 요소 몇 명 제거하자고 망쳐버리는 것도 이상하잖아! 봐! 이렇게 탄환이 빗발치는데 3층 주택만한 올드 픽처 근처에는 한발도 가지 않는 것 보니까, 아직 연극을 끝낼 생각은 없는 거야! 좀 과하게 리얼한 상황 연출이겠지! 지금은 엄폐물에 갈기고 있지만, 막상 우리가 몸을 내밀면 알아서 조준을 피해줄….
핏-슈웅!
탱! 탱그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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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연극이라고? 어!! 이 정도면 시모 하이하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쳐주겠다! 200% 확실하게 조준사격이야! 놈들이 우리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한가하게 앉아서 연극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
이안이 총구 끝에 걸어 조심스럽게 방탄모를 내밀자마자 탄환에 관통당하는 것을 보고 교수는 할 말을 잃었다.
‘명백하게 우리를 죽이려 들고 있다. 심지어 상당히 잘 훈련된 상대. 사격은 핀포인트로 갈기면서 박격포가 근처 건물만 박살 내는 이유는, 혹시나 올드 픽처를 건드리게 될까봐 그러는 것이겠지.’
연극을 깰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 연극의 주연배우를 죽이려 든다.
“아.”
별안간 어떤 생각이 번뜩인 교수는 곧바로 품 안에서 예의 그 ‘대본’을 꺼내 들었다.
팔락, 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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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몸을 날려 민간인 가족을 구한 주인공 일행. 세 가족의 가장은 그런 군인의 모습이 신뢰감을 느낀다.
#3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탈출 지점으로 향해는 일행.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불안해하는 가족을 다독이며 무사히 탈출 지점에 도착한다.
#4 연극 종료. 상황에 맞게 행동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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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에 대한 지침은 이게 전부. 나머지는 박격포가 떨어져 파편이 튀는 지점, 엄폐물 위치, 올드 픽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 뿐이다.
‘악수를 한다. 몸을 날려 구한다. 다독인다….. 역시 연극의 방향 전체가 세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군인의 모습을 담고 있어. 헌신적인 모습에 호감을 느끼게 한 다음, 그 대상을 눈앞에서 죽게 만든다? 그런 단순하고 멍청한 방법으로 놈이 호감을 느끼고 말을 따를 리가 없잖아?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계획이 실패하리라는 것 정도는 알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도대체 어떻게 올드 픽처를 길들이겠다는….’
덜컥.
순간, 뭔가 싸늘한 감각이 뇌리에 스친다.
눈앞에 있는 하나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면,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단서를 놓쳤을 테니. 하지만 그 사건을 포함한 거대한 맥락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전제 조건 자체가 잘못됐을 테니까.
‘살아있는 생물이고, 상황을 인식하는 게 가능하며,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면…. 놈을 교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이미 돔은 이번 일로 아주 떠들썩합니다. 저 거대한 괴물이, 47구역의 명물이 공식적으로 돔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거니까요!’
“하, 하하하하하….”
놈들의 말을 떠올리자,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쌓아 올린 가정을 무너트리고, 내 눈으로 확인한 정보만 추려낸다.
‘집행부는 아군에 적대적이고, 이용하거나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
‘놈들은 올드 픽처를 이용해 뭔가를 하려고 하고 있다.’
‘집행부는 돔의 핵심 세력 중 하나. 멍청한 놈들이면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누가 봐도 멍청한 계획, 멍청한 감독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단순하고 실패할 계획이라 판단한 아군은, 놈들의 인도에 따라 10m만 더 가면 폭주할 올드 픽처의 앞에 서서, 무기 하나 없이 놈들의 실탄 사격을 받고 있다.’
왜 이걸 몰랐을까. 그렇게까지 우리를 적대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으면서. 왜 적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기반으로 상황을 판단했을까.
“씨발. 속았네.”
“왜. 뭔가 알아냈냐?”
“어. 대충. 이 새끼들이 진짜. 어쩐지 너무 허술하다 싶더라니.”
확실하다 믿고 있던 정보들이 사르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거기에 가려있던 진실이 드러난다. 올드 픽처 길들이기라는 멍청하지만, 커다란 계획이 단순히 부품에 지나지 않는 진짜 거대한 계획이.
자기 이름조차 숨기는 녀석의 말을 일부라도 믿다니. 내 실수다.
“하아아-”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차린 걸 다행이라 여기자. 멍청하게 제 발로 칼끝에 목을 내밀었지만, 아직 칼날이 파고들지는 않았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
우선은, 새로 만든 가정이 사실인지 확인부터 해야지.
침을 탁, 뱉은 교수는 날카로운 얼굴로 이안과 벡스에게 물었다.
“혹시 너희 중에 바깥 상황 살필만한 것 가지고 있는 사람 있냐? 분위기로 봐선 대가리 내미는 순간 날아갈 것 같은데.”
“없지.”
“나도. 대검도 비반사 처리된 거라 그런 식으로는 못써.”
“으음…. 어쩔수 없지. 잠깐만 기다려봐.”
“또 뭘 하려고….! 야! 어디가!”
말리는 이안의 손을 피해 골목 밖으로 나온 교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앞으로 굴렀다.
피융!
파바바박!
몸을 밖으로 내밀자마자 주변에 흙먼지를 튀기며 박히는 탄환들. 하지만 금방이라도 교수의 몸을 꿰뚫을 듯하던 사격은 교수가 대로를 절반 정도 가로지르자 뚝 하고 끊어졌다.
“역시. 연극을 더 할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니라, 주인공의 죽음 그 자체가 연극 일부였다, 이거지.”
촉수로 마네킹 셋은 골목에 숨겨둔 체, 거대한 본체는 대로 한가운데 노출시켜놓은 올드 픽처. 그 본체 앞에 서서 몸을 훤히 드러낸 교수는 저 멀리 건물 옥상, 창문 같은 곳에 아주 대놓고 봐달라는 듯 줄지어 서있는 적을 눈에 담았다. 어째서인지, 돔의 군복을 입고 있는 적들의 모습. 시가전에 하등 쓸대없는 커다란 돔의 마크가 새겨진 깃발까지 들고 와서 흔들어대는 그들 사이로 은빛 엑소슈트 비슷한 것도 보였다. 안에 사람이 타고있지 않은 걸 보니 모형 비슷한 물건 같았다.
‘오층 짜리 상가 건물이 있는 삼거리. 정확히 놈의 산책 루트 끝자락,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군.’
저들이 자리 잡은 위치가 제법 낯이 익었다. 과거, 내 실수로 처음 연극에 참여했을 당시 연극을 진두지휘하러 나왔던 감찰부 사람이 지도에 크게 빨간선으로 그어놓은, 임계지점.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까지 놈을 끌어들이면 안됩니다.’
‘왜요?’
‘여기서 놈의 기억이 끊어지니까요.’
‘기억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몽유병 환자가 잠에서 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을 뜨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곳에 뚝 떨어져 있는 스스로를 보게 되겠지.”
평상시라면, 저 경계선까지 움직인 올드 픽처는 갑자기 매우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기억속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현실의 거리를 보고 진정하며 자신의 은신처, 숙주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으로 되돌아가 잠들게 된다. 하지만 경계선에 도달해 깨어난 순간 거리의 모습이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면 폭주하며 놈의 구역, 모형 정원 전체를 킬존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저 종착점은 숙주가 가진 과거의 기억과, 올드 픽처로서 얻은 현재의 기억이 교차하는 곳이니까. 3형 변종은 살아있는 생물이니, 숙주의 기억과는 별개로 어딘가에 올드 픽처로서 받아들인 기억이 쌓일 수밖에 없거든.’
엉성한 계획이라는 판단은 정정해야겠다. 제법 정교하다. 올드 픽처의 삶은 아이를 사산하고 망가져 버린 여인과 비슷하다. 죽은 아이의 시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며, 이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돼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현실을 부정하는, 비탄에 빠진 삶.
적들의 계획은 어두침침한 기억을 헤매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올드 픽처에게 새로운 목표를 주는 것이었다.
기억이 끊어졌다는 것은, 여기서 숙주의 삶이 마감됐다는 것. 함께 있던 가족들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였을 테니 가족들이 죽어버린 상황과 유사한, 유대감을 가진 대상이 눈앞에서 죽는 상황을 오버랩 시켜 기억 속 상황과 현실을 연결시키고, 애도를 분노로 바꿔 그 분노를 쏟아낼 대상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다.
‘정치적 패배가 확정된 무력 집단 집행부의 수장. 실각하는 순간 그 자신이 해왔던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발버둥 치듯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도 있지만, 더 쉽고, 확실하고, 본인의 배를 불리는 방법도 있지.’
어느새 빗발치듯 쏟아지던 적들의 사격이 멈춰있었다. 놈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종일 죽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가면 놈들의 사격에 노출되지만, 나가지 않고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이 거리의 끝까지 가야만 하는 올드 픽처의 기억과 상충하여 놈이 폭주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되면 어차피 엄폐물에서 나와 적들이 사방에서 십자 포화를 퍼부어 대는 거리로 뛰쳐나와야 하는 것이다.
타닥!
“이 미친 새끼야! 뭔 깡으로 엄호도 없이 개활지에 튀어 나간 거야!”
“멀뚱멀뚱 서 있기나 하고! 심지어 나가서 대놓고! 나는 네가 패닉이 와서 죽으러 나간 줄 알았다고! 병신 같은 놈! 병신!”
다시 일행이 있는 화단으로 돌아오자 두 친구가 그를 따듯하게 맞아주었다.
“아냐, 안 쏴. 놈들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좀 극적으로 죽을 필요가 있거든. 혼란스러워하는 올드 픽처 앞에서 픽! 하고 머리에 빵꾸가 난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연극 내용이 달라졌다거나, 뭐 그런 뜻인가?”
“아니, 훠얼~씬 복잡하고 간단한 상황이라는 거지.”
교수는 반대편, 그들을 조준하고있는 돔의 군복을 입은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들, 렙터에서 온 애들 같아.”
“뭐? 갑자기 렙터가 왜 나오는데?”
“올드 픽처 길들이기라는 말도 안 되는 광대놀음이, 처음부터 거대한 연극 일부였다는 소리지.”
교수는 어딘가 허탈한 듯, 킬킬 웃으며 말했다.
“아주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이거, 단순히 선거 표좀 뽑아먹으려고 하는 행사가 아니었던 거야. 집행부가 돔을 배신하고, 렙터랑 손을 잡고 올드 픽처를 이용해 47구역을 통째로 엎어버리려고 했던 거라고!”
거대한 급류에 휘말린 자갈이 된 기분이다.
최근들어 렙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이유는 볼 것도 없이 45구역에 새로 생긴 지하벙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키의 주인이 확정되면, 45구역은 새로운 돔의 도시로 거듭나게 될 테니. 그렇게 되면 렙터는 45구역 인근 지역까지 포함에서 47구역부터 45, 43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벽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끝없이 약탈을 다녀야 하는 렙터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돔의 세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이 생기는 순간 크게 빙 돌아가야 하는데, 기름값이 금값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에서 이동 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은 웬만큼 잘 털어도 손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생산 기반 없이 약탈로 집단의 몸집을 유지하는 렙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손해. 결국 이대로라면 렙터가 30번대 구역으로 밀려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렙터 소사이어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돔이 45구역을 먹는 것을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죽게 생긴 집행부장과, 이대로 있다가는 방사능 안개가 주기적으로 몰아치는 30번대 구역으로 밀려나게 생긴 렙터. 절박한 놈들끼리 쿵짝이 잘 맞았겠지.”
“하지만…. 우리가 저 괴물을 자극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의 결과잖아?”
“잊었어? 돔은 47구역 전체를 관리하고 있다고. 그때 너희들, 딱히 어디를 목표로 하고 나온 건 아니었잖아?”
“으음. 그렇지. 그냥 드라이브하는 셈 치고 적당히 둘러보고 돌아오려고 했으니까….”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스쳤다. 갈림길에서 한쪽 골목에 불을 피워둔 녹슨 드럼통 주변에 둘러앉아 언성을 높이던 스캐빈저 무리. 한쪽 벽이 무너져 막힌 길. 수상하게 조명이 어두워 위험해 보이던 골목. 굳이 이 지역에 대해서 잘 모르던 그로서, 피해 가야겠다 싶던 길들.
“….유도 당했다고? 이 내가?”
“말했잖아. 돔에서 나온 애들은 시가전의 스페셜리스트라고. 심지어 여긴 놈들의 홈 그라운드야. 집행부의 위력부대에게 자연스럽게 차 한 대 유도하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겠지.”
내 일정은 방송을 조금만 봐도 확인할 수 있으니, 내가 없이 둘만 밖으로 나올 때를 노렸겠지. 열쇠를 가진 BDSM을 끌어들여, 올드 픽처를 자극한다. 자연스럽게 책임을 지러 나온 우리를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에 협박을 동원해 강제로 처넣는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니 뒤를 생각할 필요 없이 강한 협박을 동원할 수 있었겠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연극의 끝에서 ‘친근한 존재가 눈앞에서 죽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지인, 소중한 존재를 죽인 것이 돔의 군복을 입은 존재라고 각인 시킨다. 그때부터는 총을 쏘든, 수류탄을 던지든 해서 올드 픽처를 완전히 빡돌게 만든 다음 돔이 있는 방향으로 도망치면, 뭔 일인가 하고 튀어나온 돔의 군인들을 올드 픽처가 덮치게 되는 것이다.
‘그 혼란을 틈타 내부에서는 집행부가, 외부에서는 렙터의 특수부대가 공격을 들어오겠지.’
말 그대로 모조리 다 연극이었다. 47구역 전체를 무대로 한 거대한 연극. 올드 픽처를 길들인다는 계획조차 연극의 일부로 사용하여 놈들은 적대관계에 있는 HIV, 돔의 감찰부와 민간인들까지 모조리 속여넘긴 것이다.
“이상국씨도, 잭이라고 하던 그놈도 죄다 배우였다는 소리지.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크게 한 바퀴 돌려친 거야.”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하나.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할 방법이 없는, 외통수에 가까운 작전.
찌이이잉!
시간이 됐다. 올드 픽처의 본체가 부글거리는 것이,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숙주의 기억과 맞지 않는 상황에 놈이 폭주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가 숨어있는 화단으로 박격포가 우박처럼 쏟아지겠지.
“염병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더니. 이럴줄 알았으면 47구역으로 오는 게 아닌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어찌 보면 45구역에서 우리가 그 고래 등짝에 칼침을 박아넣고 왔잖아.”
“일단 상황은 알아들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직 괴물이 상황에 빠져있을 때, 전력으로 도망치면….”
“이렇게까지 커다란 판을 짜놓고 놈들이 그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움직이는 순간 벌집이 될 거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있는 건, 올드 픽처가 저 임계 지점에 도달한 다음 우리가 죽는걸 봐야 했기 때문이야.”
“그럼 어쩌자고! 이대로 앞으로 끌려가면 놈들의 시나리오대로 죽게 될 거라면서!”
“어떻게 하긴.”
교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올드 픽처의 눈에 잘 보이도록 나아가며 말했다.
“결국 연극은, 배우가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이번 사건의 열쇠는 이 녀석이잖아? 아직 연극이 끝난 건 아니고, 각본에도 마지막은 니 알아서 하라고 적혀있으니.”
그러고보니 그 잭이라는 녀석, 나한테 뭐 올드 픽처를 이용해 테러행위를 벌일수도 어쩌고 했는데, 그 얘기를 하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정작 그들이 그런 계획을 짜놓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내가 얼마나 우스웠겠어.
엿같아서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무보수로 한바탕 놀아줬으니, 피날레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줘야겠다.
“집행부랑 렙터 친구들이 나름 치밀하게 기획을 해주셨는데, 남들이 몇 년 동안 목숨 걸어가면서 진행한 프로젝트를 글로만 배우고 홀랑 처먹으려고 해서 그런가, 인물에 대한 이해가 좀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
올드 픽처의 모든 행동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진 계획. 하지만 놈에 대한 보고서에는 들어가있지 않은 사실이 있다.
왜.
왜 죽었나. 어떻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는가. 하필 숙주가 마지막의 순간에 남긴 기억이, 가족의 손을 잡고 거리를 배회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남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수는 그 원인을 일부나마 알고있었다. 몇 년 전, 정상적인 ‘연극’이 끝날 무렵, 울부짖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괴물의 정신파가 남긴 작은 기억.
교수는 군복 안에 입은 반팔 셔츠를 살짝 찢어, 두 사람에게 나눠줬다.
“침 묻혀서 귀에 틀어막아. 진짜 고막까지 닿겠다 싶을 정도로 깊숙이 넣어야 해. 지금부터 내가 틈을 만들건대, 아마 나는 기절하게 될 거야. 그러니 어떻게든 정신 부여잡고 있다가 나 좀 업고 우리 차로 데려가 줘.”
“저격수들은?”
“절대 조준 못 해. 글로만 배운 놈들은 그거 맞고 못 버텨. 그래도 혹시 모르니, 벡스 너는 1시 방향 골목 좀 확보해줘라.”
“….최대한 정리해 놓을게.”
장난스러운 듯 얘기하는 말투 속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멀어지는 벡스를 바라보던 이안은, 조용히 젖은 천조각을 귀에 말아 넣으며 교수의 어깨를 붙들었다.
“몇 퍼센트냐.”
“….6할 정도.”
“너까지 살아남는 가능성은.”
“….3할.”
“개새끼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속에 걱정이 잔뜩 묻어있었지만, 이안은 잡고 있던 어깨를 놓아주었다. 물어본다고 해서 교수가 그 방법을 알려주지도, 그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난 너 죽으면 벡스 말릴 자신 없다.”
“다리라도 부러뜨려봐.”
“말릴 생각도 없고.”
“…..”
툭.
더 할 얘기가 없다는 듯, 이안은 교수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가봐, 갬블러. 지난번 코인토스에 붙어있던 여신님이 아직까지 머물러있길 기도하지.”
“그거 든든하군.”
묘한 기분이다. 3할. 열 중 일곱은 자신이 죽는다는 뜻. 그런데 저 뒤에서 콧물을 훔치며 담배에 불을 붙이려 애쓰는 덩치나, 뭉툭한 대검을 들고 올빼미처럼 골목 안쪽과 그가 있는 곳을 살피는 얼굴만 늙은 꼬맹이를 보니 저도 모르게 ‘나쁘지 않아.’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절대로 죽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정말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이! 도진씨!”
대로 한 가운데로 걸어가 괴물에게 소리치는 교수의 목소리에 묘한 자신감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리라.
가족들의 손을 꽉 쥐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남자의 마네킹과, 그것을 조종하는 살덩어리들.
교수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총구를 자신의 턱에 가져 댔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도진씨. 이제 풀어줄 테니까, 길 헤매지 말고 잘 가라고!”
따각… 따가각…
[그게 무슨….]타앙-!
순간, 거리낌없이 당겨진 방아쇠에 총구가 불을 뿜고,
당황한 인형의 말끝을 날카로운 총성이 관통했다.
풀썩.
마네킹의 앞에서, 인형처럼 무너져 내리는 교수의 몸.
[어….아? 죽었어? 어디로갔…. 아…. 어.. 어어어어어어-!]부글부글부글부글-
그 모습을 목격한 인형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살덩어리가 마구 끓어오르더니,
철퍽-!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며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교수는 놈의 본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엎드린 자세 그대로 슬며시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공포탄이라고는 해도 지근거리에서 화약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것. 슬쩍 군복의 목카라를 올려 막아뒀다고는 해도, 머리가 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찌이이잉-
그 두통 사이를 파고드는, 땅속에서부터 퍼져나오는 정신파.
‘연극의 스케일을 키워보고 싶었나본데…. 어디 진짜 감당이 안될 만큼 커져도…. 웃고있을지 보자고….’
신발 무더기와 마네킹 셋만 남겨두고 땅속으로 스며든 올드 픽처.
놈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구구구구구구-
콰앙!
뒤쪽에 있던 편의점이 터져나가며, 안에 숨어있던 검은 잿더미 같은 것이 드러난다.
이곳, 생전의 김도진이 사망한 자리를 제외한 모든 거리가 터져나가며, 껍질을 깨고 나오듯 그 아래 숨어있던 올드 픽처의 거대한 육신이 세상을 향해 손을 뻗고있었다.
‘빌어먹을…. 몇 년 사이에 훨씬 더 커졌군….’
처음 감찰부에서 이 모형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놈을 자극했을 때 한 번. 몇 년 전 멍청한 ‘배우’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가족 얘기를 꼬치꼬치 캐물었다가 완전히 놈을 깨워버렸을 때 한번.
그리고, 지금.
태어나 세 번째로 그 본모습을 보인 올드 픽처의 모습은, 반쯤 불에 타 녹아내린, 상반신 밖에 남지 않은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었다.
‘놈의 아킬레스건은 단순히 친인을 잃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야. 트리거는,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과, 그것을 말릴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
“끄어어어어어어어-어아아아아아아!!!!”
쿠화악!
중앙의 모형정원 전체만한 괴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정신파가 47구역 전체를 덮쳤다.
‘내가…. 자살한 것이…. 됐으니! 으극! 놈의 분노에 방향 같은건…. 없겠….’
털썩!
이빨이 부셔져라 악물고 견디던 교수는, 지근거리에서 터져 나온 정신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의식을 놓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