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93
Chapter.7 가면 무도회(8)
***
“아, 안돼. 안돼!!!”
탱그랑!
피범벅이 되어 골목에서 나온 벡스. 다리에 힘이 없는지 손에 쥔 짤막한 대검에 의지해 몸을 끌어당기던 녀석은 이안과 그 등에 업힌 교수를 보자,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기어와 이안의 바지에 매달렸다.
“내가 잘못 본 거라 여겼는데, 내 정신병이 만들어낸 환상이어야만 했는데! 햅번이, 햅번이!!!”
‘이 녀석, 완전히 깬건 아닌 것 같은데? 반쯤 환각을 보고있군.’
이안은 벡스의 상태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괴물의 비명은 사람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자신의 경우에는 잃어버린 아내와 아이의 기억을, 벡스의 경우에는….
‘교수가 죽는 모습이라도 본 모양이지.’
일단 녀석을 깨워야 했다. 이런 골목에서는 화력전에 능한 그보다 근접전에 숙달된 벡스가 더 쓸모있을테니까.
“또 잃어버렸어. 또, 또 그렇게! 6년 전이랑 변함없이!!!”
철썩!
“아윽?!”
“미안. 급해서. 벡스, 손좀 빌린다.”
이안은 정신이 나가 허우적거리는 벡스의 뺨을 한대 갈겨준다음, 손을 잡아당겨 교수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슈욱. 후욱.
피딱지가 잔뜩 눌어붙은 손에 와 닿는, 가벼운 숨결.
“어때. 숨 쉬고 있지?”
“어, 어?”
백마디 말보다 효과있는, 피부에 와 닿는 생의 증거.
흐리멍텅한 벡스의 눈에 순식간에 총기가 돌아온다. 누구는 벌써 흙으로 돌아간 마누라 잔소리까지 들어가며 깼는데, 이 녀석은 단순해서 좋겠군.
“살아있어. 충격파를 직격으로 맞아서 기절한 것뿐이야.”
“살아….있어?”
“그래 임마. 나 좀 섭섭하다, 그 환상에 교수 죽는 건 나오고, 나 죽는 건 안 나오디? 어째 나오자마자 찾는게 교수 뿐이냐?”
“어….어? 죠? 살아있네? 분명 전차에 깔려 죽은 게….”
“더럽게 구체적으로도 죽었군. 빨리 일어나. 너 잠꼬대 들어줄 시간-”
[오오오오오오-으아아아아아아!!!!!]찌이이잉-!
“크으으으! 없으니까!”
거대한 소사체처럼 생긴 상반신만 남은 거인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처음 그것처럼 엄청난 위력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속을 진탕 시키고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위력.
나름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지만, 이게 몇 번 더 반복되면 그도 두 발로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환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벡스도 정신파를 얻어맞자 바로 교수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날카로운 얼굴이 되어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서둘러! 저것 때문에 교수가 정신을 잃었다면, 여기 있게 둬서는 안 돼!”
“드디어 말이 통하는군. 그나저나 어느 정도나 정리해뒀냐? 내가 지금 상태가 안좋아서 그렇게 큰 전력이 되어줄수가….”
벡스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온 이안은 그 안에 벌어져있는 참상에 할 말을 잃었다. 골목 바로 안쪽에 엄폐하고 있던 놈이 둘. 벽면 위, 1.5층 정도 되는 계단의 창문에 널려있는 시체가 좌, 우 합쳐서 넷. 골목 안쪽으로 한 블록 건너 사거리에 살짝 삐져나와 있는, 피 웅덩이 속에 잠긴 다리.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불보듯 뻔했다. 저 골목에서 피투성이로 기어나온 사람은, 눈앞에 있는 키작은 애늙은이 한명이었으니까.
“이걸…. 네가 다? 그 뭉뚝한 대검으로?”
“칼이 아니라 무딘 송곳이라 생각하고 썼지. 눈알 안쪽을 힘껏 찌르면 두개골의 얇은 부분을 뚫을 수 있어. 암습으로 여섯, 노획한 총으로 넷.”
벡스는 미리 챙겨둔 것인지, 골목 안쪽에 기대어놓은 적의 총기를 이안에게 던져주며 안쪽을 가리켰다.
“이쪽을 지키고 있던 소대는 전멸시켰어. 빠져나가자. 이 골목만 빠져나가면 우리 트럭까지는 금방이야.”
약간 어지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재촉하는 벡스의 모습에, 이안은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골목의 모든 벽, 창문, 파이프에 찍힌 붉은 군화자국과 손자국이 녀석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말하고 있었으니까.
“교수도 참 재주가 좋아서는, 어디서 저런걸 주워와가지고···.”
“응? 뭐라고?”
“크흐흐흐, 혼잣말이다. 앞장서라고!”
뭐가 됐든 좋은 일이었다. 이 골목에서 빠져나가 트럭까지만 갈 수 있다면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않은 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돔? 렙터? 선거? 47구역을 통째로 엎어버릴 수 있는 괴물?
‘내 알바냐. 이대로 교수가 깨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쉘터에 들러서 식량과 물만 챙겨서 47구역을 벗어난다.’
황무지에 산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 상실의 경험을 쌓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만 있어라 교수야, 살아만! 금방 의사한테 데려다줄 테니!”
그렇기에, 이안은 이런 순간에 뭐가 가장 중요한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덜컹- 콰앙!
“야! 살살 닫아! 머리 다친 사람한테 충격은 독인거 몰라!! 천천히 눕히려고 같이 들었더니!”
“해, 햅번이 머리를 다쳤어? 심각해? 상태는! 깨어날 수는 있어?!”
“아우, 좀! 달라붙지마! 나라고 어떻게 아냐! 내가 우진 영감님도 아니고!”
“기절할 때 어떻게 된 건데! 머리를 세게 부딪혔어? 괴물이 교수한테 뭘 하기라도….”
털털털털- 부르릉!
이안은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시동을 걸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연극의 무대가 되는 골목 바깥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피도, 화약도, 시체도, 사람도 없는 텅 빈 구시대의 거리에 붉은 군홧자국을 남기며 가로지른 그들은 무사히 그들의 무장트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약 교수가 안 깨어나면 어떻게 하지?”
“쉘터로 가서, 일주일 치 식량만 가지고 빠져나간다. 45구역으로 가자. 지하 벙커 주변은 혼잡하지만, 그 인근 지역은 오히려 스캐빈저의 숫자가 줄어서 한산할 테니까. 너, 거기 살았었지? 그쪽 지리는 잘 알테니까 네게 맡긴다.”
“만약, 도망가서도 안 깨어나면 어떻게 하지? 나도 봤잖아. 놈의 환상을. 그건…. 가장 안 좋은 기억을 보여주는 거였어. 정신을 잃었다는 건, 그걸 견디지 못했다는 거잖아. 어쩌면 교수는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
“이런 씨팔! 야! 재수 없는 소리 할래? 그러면, 뭐 교수가 영영 일어나지 못하면 뭐! 버리고 가자고?!”
“그런소리! 내가! 뜻으로 한게 아니잖아!!”
“저…..”
콰아악!
이안은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벡스의 멱살을 잡았다가, 제 스스로도 당황해 놓아버렸다.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전투의 흥분, 올드 픽처의 정신파에 휘말려 한껏 외부에 드러난 감정. 거기에, 한시가 급한 순간에 계획도 없이 노출된 그들의 상황. 집행부의 계획이 완성되기 직전 괴물을 한 발 앞서 폭주시킨 것은 교수의 계획이었다. 분명 교수의 머릿속에는 저렇게 일어난 괴물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을 터.
하지만 교수는 지금 잠들어 있었고, 냉철한 척하고 있었지만 이안 그 자신도 벡스와 마찬가지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고 있었다.
“저기…..”
“제기랄. 나는 장사꾼에 전투원이지, 책략가가 아니라고. 이대로 도망치게 되면 이번 사건을 전부 우리가 뒤집어쓰게 될 거라는 건 알지만, 저 괴물과 돔, 렙터 사이에 끼어들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건….”
“저기!”
“아 뭐! 아까부터 왜 자꾸 불러대는….?”
이안은 계속해서 부르는 소리에 짜증을 버럭내며 고개를 돌리려고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잠깐만. 벡스는 내 바로 앞에 마주보고 있잖아. 그럼…. 누가?’
이안의 얼굴이 뒷좌석을 향해 돌아갔다.
지금 벡스는 그의 눈앞에서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마리아 같은 얼굴을 하고있었으니, 남은건….
“오. 메탈죠. 벡스. 상쾌….하진 않은 바깥 공기. 다들 만나서 반가워!”
교수. 언제 일어났는지 손등으로 코피를 슥 훔쳐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짓는 교수가 있었다.
***
“교, 교수야아아!!”
이안은 꾹꾹 눌러 담아놓은 감정이 북받쳐 교수에게 달려들었다.
와락!
“빌어먹을, 빌어먹을!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녀석 같으니라고! 기어코 제비뽑기에서 승리했구나!”
“와! 이렇게 반갑게 맞아줄 줄이야! 고마워! 나도 네가 참 마음에 들어!”
어딘가 맹한 교수의 목을 끌어안고 코를 훌쩍이던 이안은 뭔가 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으악 징그러! 더러워! 떨어져 이 덩어리들아!’ 같은 소리를 해야 했을 교수가, 그의 품에 안겨 꼬옥 안아주는 것도 모자라 수염이 잔뜩 난 그의 얼굴에 볼을 부비기까지 하고 있다니!
“박….교수?”
“흐흐흐흐. 둔한거야? 아니면 인정하기 싫은거야? 메탈 죠, 이안?”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쫘악 돋아서 뒤로 물러난 이안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에서 순식간에 사색이 된 벡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녀석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게, 교수가 아니라는 것을.
“너, 너너너…. 너 누구야?”
“그을쎄에? 질문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기위해 하는 행위로 알고 있는데. 표정을보니까…. 지금 하고있는건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염병할…. 교수는, 교수는 어떻게 됐지?”
“고객님께서 부재중이라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니 삐 소리가 들리면- 하이드한테 얘기해주세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두 사람 사이에 얼굴을 들이민 하이드는,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삐이이-”
.
.
.
.
“이….썩을 놈이….!”
그 장난스러운 모습에, 이안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콰아악!
이안은 앞으로 쭉 내민 교수의, 아니 하이드의 목에 팔을 걸어 그대로 단단히 조였다.
“케에엑! 으아으, 이게 그 우애 관계에 있는 개체들 사이의 과격한 스킨십을 동반한 교감행위, ‘장난’인가? 제법 충격적인…. 콜록! 야, 놔봐. 놓으라고. 케헥!”
탁탁탁탁!
“커어어, 기억에서는 팔을 두드리면···. 텝치면 놓아주는 게 규칙이라고….”
“너. 그거지. 교수 머릿속에 들어있다던 그 정신병 기생충.”
“케엑, 놔, 놔봐! 이러다 죽겠-”
이안은 팔뚝에 더욱 힘을 주며 생각했다. 만약 교수가 의식을 잃어서 이 녀석이 튀어나왔다면, 반대로 이 녀석의 의식을 날려버리면 다시 교수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는 벡스와 이안 사이에서, 숨이 막힌 듯 답답한 소리를 내던 하이드가 별안간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케헥, 키히힉…. 메탈죠, 뭔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알겠는데…. 이러다 나까지 정신을 잃으면, 껍데기 진짜 죽는다?”
“….제기랄.”
결국, 이안은 놈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이드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거기 걸려있는 게 교수의 목숨이었으니.
“켈록, 켈록! 아이고 목이야. 질식이라니. 생각하던 거랑 좀 다른걸? 껍데기는 이거 환장하면서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니지. 물 들어가는 것도 처음에는 싫어했나? 나도 하다 보면 좋아지나? 어이 메탈죠. 한 번만 더 해줄래?”
“헛소리 하지 말고,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 교수는 어떻게 됐지? 네가 의식을 잃으면 죽는다니, 그건 무슨 소리지?”
키득키득!
하이드는 벡스와 이안의 적대적인 눈빛을 받으면서도, 그게 즐거워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분명 둘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지금 그의 안에서 자고있는 껍데기를 향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결과적으로 하이드는 그들의 애정과 분노를 동시에 받고있는 샘이었다.
‘아아아, 즐거워라!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니! 어이 껍데기! 이런 자리를 준비해주다니! 이건 너무 호사스럽잖아!’
“정말, 미워할 수가 없어서는….”
“뭐야?”
“도와준다고. 껍데기한테 부탁받은 것도 있고, 밖에서의 삶이 힘들어지면 즐거운 일이 줄어들 것 같기도 하니 말이야. 자, 운전수! 출발!”
“출발? 미안한데, 우린 네 말을 따를 이유가 없어, 기생충.”
“푸훗!”
“웃어?”
으르렁거리는 이안의 말에 하이드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 미안해. 비웃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해놓고 결국 따르게 된다고 생각하니 좀 웃겨…. 아, 미안. 그럼 비웃은 게 맞네.”
“말. 똑바로. 알아듣게 하지 않으면. 교수가 나올 때까지 널 고문할 거야. 몸에 큰 상처를 주지 않고 고문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선,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하이드의 손톱 밑을 지그시 누르는 벡스. 저 얼음장 같은 얼굴을 보니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더 거슬렸다간 그대로 자신의 손톱 밑에 저 뭉툭한 엄지손가락이 박힐 게 분명했다. 아플까? 아프겠지. 저 녀석 이런 쪽 전문가로 보였으니까.
“쯧쯧쯧. 바깥사람들은 이게 문제야. 다들 생각하기 전에 움직인다니까. 껍데기는 한순간에 두 번, 세 번이 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음, 내가 사람을 잘 골랐지.”
벡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스레를 떤 하이드는 마침내 두 사람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기로 했다.
까딱 까딱.
하이드의 손가락이, 저 멀리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올드 픽처를 가리켰다.
“껍데기랑 나는 기억을 공유하니까. 녀석이 정신을 잃기 전에 생각해놓은 ‘그 다음’ 계획을 나도 봤다는 거지.”
“그 다음…. 계획?”
“그래. 저 커다란 울보를 잠재우고, 일이 틀어진 걸 알고 죽자고 날뛸 집행부와 타이어가 닳도록 달려오고 있을 렙터를 막을 계획. 그러니까,”
팡팡!
“오라이! 친구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히죽 웃으며 유쾌하게 둘의 등을 두드리는 그 행동에, 이안과 벡스의 표정은 한층 더 구겨졌다.
“염병. 진짜 별 지랄 같은 일이 다 생겨서는….”
“와하하하하! 나는 태생부터가 말도 안 되는 놈이라, 얽히는 일이 죄다 그런 일 뿐인가 봐!”
“…..”
“작은 친구도 얼굴 좀 풀어! 곱게 쓰고 돌려준다고 약속할 테니까! 나도 천년만년 붙들고 있지는 못하거든! 껍데기가 깨어나면, 자연스럽게 바톤터치가 이루어질 거야!”
부르릉-!
결국, 하이드의 말대로 이안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에 머리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탈출한, 올드 픽처를 향해서.
불안한 표정의 벡스, 불만 가득한 이안의 표정과 달리,
“What a Day! What a Lovely DAY!!!”
뭐가 그리 좋은지 하이드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담겨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