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97
Chapter.7 가면 무도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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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집행부의 무력행사.
감찰부가 예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 상위권에 항상 올라와 있었고, 그만큼 나름의 대비도 해놓은 만큼 그렇게까지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 렙터가 끼면 얘기가 다르다. 카테고리 자체가 ‘내부 서열 다툼’과 ‘전쟁’으로 완전히 다르니까.
견원지간처럼 툭탁거리던 감찰, 집행, 행정 3부도 렙터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그 순간부터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고, 지금껏 한 번도 어겨진 적 없었는데.
[집행부가…. 렙터와 손을 잡고 47구역 돔의 전복을 노리고 있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 총장급은 몰라도 부장급은 죄다 물갈이될 거 아닙니까? 이미 그럴 준비도 해놨을 것이고. 저들도 살고 싶으니 알아서 살길을 찾은 거겠죠. 이미 집행부 총장은 협력 중이거나, 협력 당하는 중이겠죠. 아니면 벌써 죽였거나. 시체로도 생체코드 인식은 가능하니까. 같이 일하던 사이니 성문(聲紋) 따서 통신 위조하는 정도야 발로도 할 수 있을 거고.] [증거는?] [음….정황증거?] [야, 박교수! 이게 얼마나 큰일인 줄 알-] [무수히 많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정황증거.]교수의 입에서 그가 지금까지 확인한 상황에 대한 얘기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시발점이 된 45구역 벙커를 중심으로, 당장 돔을 치지 않으면 밀려나게 될 렙터의 상황.
그리고 마찬가지로 뭔가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죄다 죽게 생긴 집행부의 간부들.
무슨 이유에선지 큰 손해를 봐가면서 실패할 것이 뻔한, 허술한 연극계획을 어거지로 가져온 집행부.
연극에 직접 참여한 입장에서 본 그들의 기이한 행동.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집행부가 렙터와 손을 잡고 돔의 전복을 노린다’라고 가정하면 모든 것이 퍼즐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 그 정황들이 통신기를 통해 감찰부 사람들에게 낱낱이 드러났다.
[….미쳤군. 결국 돔이 황폐화되면 살아남은 집행부 녀석들이 있을 곳도-] [하나 생겼잖아요. 45구역에.]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시겠다?] [렙터 녀석들도 배신자한테 머리씩이나 시켜줄 것 같지는 않고…. 가축을 치는 사육사 정도는 되겠네요.]역시 감찰부장. 대충 설명했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듣는군.
설명은 길었지만, 판단은 짧았다.
[1소대. 지금 어디까지 왔지?] [녹색 지붕 위에 서 있는데 부장님인 건 보입니다만.] [나머지는?] [2소대. 3 지점 인근. 모형 정원 외곽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3소대, 보급용 배터리팩 운송 중이라 아직 격납고에서 그리 멀리 오지 않았습니다!]통신기 너머로, 빠르지만 명확한 명령이 속사포처럼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좋아. 3소대는 그거 그냥 놓고 바로 돔 내부로 투입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 발전기는 사수해야 해! 집행부가 이 일의 중심이라면 놈들이 벌써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어!] [출발하겠습니다!] [2소대는 즉시 복귀. 가는 길에 3소대가 놓고 간 배터리팩을 챙겨서 전투준비에 들어간다. 델마르, 가장 최근에 렙터의 네스트가 목격된 구역은?] [어…. 정확한 위치는 전파 방해 때문에 추산이 어렵지만, 네스트가 통째로 이동한 궤도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43구역 인근입니다.] [그럼 2소대는 배터리 챙겨서 43구역 방향에 방어 준비 들어가고. 1소대는 나랑 같이 복귀한-] [아아, 잠깐 잠깐. 다른 친구들은 급하면 빨리 가보고, 형님은 좀 남으셔야겠는데.] [또 뭐 임마! 자꾸 통신 끊을래?!] [마음 급한 건 알겠는데, 할 일은 마무리하고 가셔야지. 지금 모형 정원을 보라고.]교수의 말에 몽클라르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치솟고, 박격포에 무너진 거리에, 올드 픽처가 난동을 피우며 박살을 내버린 건물들.
[얘 이 정도로 안 죽는 거 랄프 형님이 제일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전에 직접 상대해봤으니까. 좀 있으면 깨어날 텐데, 이번에는 전처럼 한번 작살냈다고 해서 곱게 진정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을걸요? 눈뜨자마자 보이는 중앙구역이 이 꼴인데. 몸을 다 날려 먹으면서 리셋된 기억이 다시 폭주해서 또다시 날뛰기 시작하겠지.] [….그래. 그래서 전에 놈을 제압할 때는 몸통을 날려버리고, 거리의 복구가 끝날 때까지 30시간이 넘게 배터리로 지져버렸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네 말대로 렙터의 주력부대가 돔으로 진격하고 있고, 내부에서 집행부 놈들의 테러까지 막아야 해! 이 초토화된 거리를 복구하는데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데 저놈을 붙잡고 있을 병력은 없어! 지금으로선 폭주한 놈이 돔을 향하지 않기를 빌며 적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다고!]교수는 오래전, 집행부의 온갖 더러운 일을 맡은 데다가 아픈 어머니 때문에 항상 우울하고 음침하던 그에게 먼저 다가온 랄프를 떠올렸다. 그땐 생긴 것답지 않게 참 사람 순수하고 호쾌한, 선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는데.
‘몇 년 사이 형님도 많이 변하셨네. 부장 달아서 그런가. 이 급한 상황에 계산도 하시고.’
조금 씁쓸한 마음이긴 하지만, 형님도 사람인데. 넓은 관점에서 봐야 했으니 그럴 수 있으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가 없긴 왜 없습니까. 형님도, 나도 올드 픽처의 연극을 끝까지 진행해본 사람인데. 녀석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거, 알 고 있잖아요?] […..]교수의 말을 끝으로 잠시 통신이 멈추더니,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몽클라르의 목소리가 한결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몽클라르와 에젤의 통신명에 들어온 노란 불. 개인 통신이라는 뜻이다.
[왜. 부끄러우십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계산을 해야 하는 게?] [교수, 저 올드 픽처를 이 구역에 정착시키고 유지하는데 들어간 생목숨이 세 자리를 훌쩍 넘어간다는 거 알고 있나? 포기하는 순간, 그 목숨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오호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그럼 복잡한 문제로 생각은 해봤다는 소리군? 하긴. 이 난리가 났는데 저울질 한번 안 해봤을 리가 없지.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적당히 통제 가능한 괴물에서, 적들이 통제할 가능성이 있는 괴물이 됐으니. 올드 픽처 계획은 이미 실패한 계획이에요. 게다가 지금 이 녀석을 냅두고 다른 곳으로 가길 기도하겠다고요? 장담하는데 거의 90%는 돔 한가운데로 기어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의 방어시설 없이 렙터와 전투를 해야 하는데, 엑소슈트 그거, 날개 안정 철갑탄 같은 거 막을 수 있어요? 막 전차탄도 한 손으로 쳐내고 그러나?] […..]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겁니다. 제거할 정도의 화력은 도시 단위 병기밖에 없는데 지금 쓸 수는 없고. 가만 내버려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상복구 한 다음 폭주해서 돔의 멸망에 일조할 거고.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거. 가져왔잖아요?] [….가서 얘기하지.]치직!
몽클라르의 고뇌에 가득 찬 대답을 끝으로, 개인 통신이 끊겼다.
“교수야. 이게 다 무슨 소리냐? 렙터? 전쟁? 집행부가 배신을 해?”
“아, 맞다. 통신 잘 썼다, 에젤. 나머지는 랄프 형님 오시면 얘기하자고. 같은 얘기 두 번 하기 싫으니까. 형님 금방 도착하실 테니까 그동안 이동할 준비나 할까?. 벡스! 남은 무장 있으면 전부 챙겨서 이쪽으로 와! 마지막 정리만 하고 바로 이거 타고 이동할 거야!”
“자리는 있어? 우리 넷이 타고 갈 만큼? 전부 다?”
“원래 배터리팩 들어가는 자리가 부상병 후송용이야. 운전석에 두 명 낑겨앉고, 이안은 거기 넣고, 벡스 네가 프레임 사이에 잘 매달리면 얼추 될 것 같긴 하네.”
교수는 운전석에서 내린 뒤, 어느새 자력으로 결박을 풀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트럭이 터지며 날아온 화기들 중 멀쩡한 것을 찾고 있는 이안에게 다가갔다.
“어이, 얘기 들었지?”
“말 걸지 마 개자식아. 그 트럭은, 내 전우였다고.”
“알지 그럼. 하이드가 한 짓이지만, 결국 녀석을 풀어버린 건 나니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일부러 너한테까지 들리게 크게 얘기했잖아.”
“….퉤!”
“그러니까 너도 발광을 멈추고 이동할 준비를 하는 거고. 들었지? 렙터가 오고 있어. 평소의 펙 단위로 움직이는 약탈 조가 아니라, 주력부대가 올 거라고. 전투 차량은 물론 무장 트럭도 잔뜩에, 네스트를 구성하는 전차, 장갑차도 우르르 몰려올 텐데…. 캬! 군침 돌지 않냐? 올드 픽처 계획이 실패하면, 돔의 우주방어에 그냥 들이받는 그 멍청이들을 상대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새 차 뽑으러 가자고!”
“크, 크흠! 하긴. 원래 쓰던 무장 트럭도 여기저기 성한 구석이 없어서 갈 때가 되긴 했었지.”
역시. 그렇게 악을 쓰던 녀석이 군말 없이 움직일 때 알아봤다. 렙터가 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뭐부터 노획할지 생각하고 있었군.
파사삭, 파사사삭!
그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이동할 준비를 하는 동안, 미동도 없이 언덕에 매달려있던 올드 픽처가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어, 교수야. 박교수! 저거 움직인다! 머리가 없는데 움직여!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어!”
“아, 걱정할 필요 없어. 본체를 보존하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외부의 쓸모없는 육체를 털어내는 과정이니까.”
에젤의 비명 같은 부름에 교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거대한 거인의 상반신이 부서져 내리며 조금씩 위로 기어 올라온다.
[꺼어어…. 어어어어어….]폭주 초기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하진 놈의 울림. 전과 같은 충격은 없지만,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파장.
부서져 가는 몸으로 필사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면서도, 올드 픽처는 끝없이 기억을 전달하고 있었다.
“이녀석은…. 왜 이렇게까지 정신파를 뿜어내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미운 건가?”
“생각이 잘못됐어, 에젤. 놈은 3형 변종이잖아. 1, 2형처럼 인간을 공격해 그 소재를 몸에 채워 넣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고. 애초에 공격 의사 같은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찌이이잉-
마침내 전망대 위에 가슴을 얹고, 무너져내리는 거인.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신발이 잔뜩 붙은 살더미와 이 와중에도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마네킹 세 개. 그리고, 이어지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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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에에에에엥!
[국민 여러분. 여기는 국민안전처, 민방위 경보 통제소입니다.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현재 시각….]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 어디에 그렇게 많이 숨어있었는지, 순식간에 상가 건물, 주택가에서 뛰쳐나와 마구 뛰어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잔뜩 겁에 질려 그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아들.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내의 우울증 약이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녀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아이가 심심하다고, 과자가 먹고 싶다고 칭얼거릴 때면 저도 모르게 벌컥 화를 내다가 죄책감에 더 우울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딱 하루만. 하루만 예전처럼, 일요일마다 하던 가족 산책을 하면 어떨까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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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아픈 사람 없지?”
“어. 그냥…. 실감 나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군.”
“당연하지. 원래 녀석이 정신파를 발하는 이유가 그거니까.”
3형 변종. 숙주의 마지막 기억에 따라 그 형태를 이루는 괴물. 녀석에게는 처음부터 공격 의사가 없었다. 그저 감정이 격해지면 통제가 안 되는 그 출력 덕분에 그 영상과 우울감이 너무 깊게 전달된 나머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더러는 우울증에 걸리던 것일 뿐. 녀석의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평소의 얌전한 상태에서는 조용히. 속삭이듯.
달라진 거리의 모습에 당황했을 때는 겁에 질린 사람이 근처에 있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말하듯.
폭주했을 때는, 비명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고, 울부짖으며 애원하듯.
목소리의 크기가 다르듯 출력만 달랐을 뿐, 애초에 올드 픽처는 ‘자신의 기억’이라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 지난 몇 년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교수 너는…. 어떻게 그걸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봤거든. 사실 이렇게 제압하지 않아도, 그냥 일반적인 연극을 잘 끝내고 나면, 녀석은 본체로 돌아가 지금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듯 숙주의 마지막 기억을 전달했으니까.”
주르륵-
거인의 몸에서 나온 신발 무더기가 위태롭게 떨리더니, 다시 한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깊숙한 기억을 따라 하나 둘, 껍질을 벗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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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이 미국을 향해 핵을 쐈다!”
“꺄아아아악!”
아수라장(阿修羅場). 그 의미 그대로,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
선전포고도 없이 발발해버린 전쟁이다. 지금까지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소문만으로 이미 인근 마트에 생필품이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공습경보라니.
순식간에 겁먹은 사람들이 뛰쳐나와, 거리에는 온갖 차들과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서울을, 서울을 벗어나야 해!”
“비켜! 얼쩡거리지 마!”
“이것 놔! 이건 내 짐이야! 당장 손 떼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어머니! 어머니가 안 보여!”
사람은 위기 앞에서 이기적으로 변한다. 물밀듯 쏟아지는 사람의 홍수 속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 그 물건을 지키기 위해 난폭해진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갈라지고, 섞이는 연약한 사람들.
“여, 여보!”
“으아아앙! 아빠!”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은 도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심신이 미약한 아내와 아직 어린 아들. 지켜야 한다. 내가,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슈우우우-
“저, 저게 뭐지?”
우우우우-
“뭔가, 점 같은 게 날아오는데···.”
우우우우우-!
“미, 미사일이다! 포격이다!”
“으아아아악!”
“꺄아아악!”
“아빠! 아빠아아아!”
“아빠 손 꽉 잡아! 당신도 빨리 이쪽으로! 골목 안으-”
쐐에에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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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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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컹-
쿠웅!
“랄프 형님.”
“….박교수. 정말 살아있었군.”
“그럼 바로 전에 통신했던 건 뭐, 귀신입니까?”
“오는 동안 내가 정신파에 당해서 환청 같은 걸 들은 게 아닌가 했지.”
에젤의 엑소슈트 옆에 나란히 자신의 기체를 세우는 몽클라르.
“정말 강제로 저 상태로 만들었군. 어떻게 했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그거 가져왔죠? 올드 픽처가 저렇게 폭주하는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까.”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놈을 이대로 포기하는 건….”
“이미 한번 적의 손에 이용된 괴물입니다. 포기가 아니라, 폐기하는 거죠. 적의 손에 놀아난 프로젝트를.”
“….제길. 올드 픽처를 풀어줬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시말서 몇 장으론 안 끝날 텐데. 당분간 방탄복 입고 다녀야겠군.”
“이번 일 끝나면 집행부 놈들 다 정리될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총장님이 사격을 좀 하시거든. 24시간 장전된 리볼버를 품고 다니시지.”
그렇게 말하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 몽클라르는, 엑소슈트 뒤쪽에서 단단히 밀봉된 상자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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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워.
차에 치였어. 트럭 같은 건가 봐.
아니, 차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잖아. 길이 막혀서.
나는. 살아있나?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흐릿한 정신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아프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명료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마지막에는 분명….
‘아들!’
몸에 힘이 없다. 고개를 돌리기가 힘들어. 하지만 가슴속에 뭔가 따듯한 것이 차올랐다. 뜨겁고 따끔거리는 손이지만, 분명히 잡고 있으니까. 내 손아귀에, 작은 손이 있으니까.
‘많이 겁먹었겠지. 달래주자.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조금만 쉴 테니 엄마랑 먼저…. 할머니 댁. 할머니 댁에 가 있으라고….’
목에 돌을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천천히, 입안 가득 고인 비릿한 피맛을 느끼며 천천히 아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눈물인지, 눈이 타버린 건지 우글우글한 시야 한쪽 구석에 작고 파란 운동화가 들어왔다. 아들의 신발이다. 생일에 사준, 너무 좋아해서 평소에는 신지도 않고 같이 밖에 놀러나갈 때만 신는, 로봇이 그려진 운동화.
“어어어어어, 아하아아아아. 아아. 아하아아아….”
입을 열자 불을 뱉어내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폐를 다쳤나 봐. 말을 해줘야 하는데. 말을….
조금씩. 천천히. 시곗바늘이 돌아가듯, 아들을 향해 돌아가는 시선.
신발이 있다. 분명 아들의 신발이다. 분명히 내가 사준 아들의 신발인데. 그 위에 작은 복사뼈도, 펭귄이 그려진 대일밴드도 분명히 아들의 것이 맞는데! 내 아들의 발이 틀림없을진대!!
왜.
왜 그 위에 내 아들이 보이지 않는 걸까.
“아아아아, 어아아아, 아아아아아.”
그럴 리 없다. 분명히 이 손에 잡았다. 그 아수라장에서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아플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지금도! 이 손에 분명히….!
마침내, 도진의 고개가 완전히 돌아갔다. 그의 감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조금이라도 폭발의 피해를 줄이고자 온 힘을 다해 골목을 향해 뛰어들었건만.
그와 함께 들어온 것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아들의 작은 손과 왼발뿐. 미쳐 골목에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부분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어아아아아, 아아, 아데에에에, 아데에에에!!”
열기에 녹아내린 살점으로 발목까지만 남은 아들의 몸을 그러안는다.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야! 내가 눈이 잘 안 보여서, 헛것을 보고 있구나! 성진이가 신발을 잃어버렸네. 그래! 신발을 잃어버렸어! 아내는 신발을 찾으러 벌써 나갔구나! 그렇게 좋아하던 신발이니, 성진이도 엄마 따라 나간 거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서지이이이…. 시브아아아아이으어어… 아아아아아….”
촛농처럼 녹아내린 남자의 몸이 움직였다. 찾아야 한다. 잃어버린 나머지 한 짝을.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리라. 신발을 찾으면, 아들과 아내가 돌아오겠지. 그리고 이 모든 악몽이 끝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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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의 흔한 비극에서 발생한, 흔치 않은 괴물이라 이거지.”
달칵.
교수는 몽클라르로부터 건네받은 상자를 열었다.
작고 파란, 로봇이 그려진 운동화.
모조품이었지만, 기억 속 올드 픽처, 김도진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잃어버린 아들의 운동화, 그 나머지 반쪽과 한치의 틀림 없이 제작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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