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00
그의 ‘월공’은 자신의 ‘은성군’에게 순순히 밟혀줄 것인지.
“감정잡게 전체 씬 안 끊고 한 번 테이크할게요. 그 뒤에 백승효씨 바스트와 클로즈업들만 쭈욱 따겠습니다.”
“네-”
은성군과 월공.
드라마 내의 극중극 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다.
는 가상역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으로, 왕숙이며 검신으로 불리는 무인 은성군과 그 시대 최고의 재사로 불리는 문인 월공의 암투를 다루는 대하드라마이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인접국의 침입에 은성군은 전력을 다해서 싸울 것을, 월공은 대국의 중재를 요청할 것을 주장하며 팽팽하게 대치하는 장면…이지만,
전혀 팽팽하지 않고, 권도준이 탁규민을 압살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장소는 대전, 도열한 신하들.
섭외되어 온 아역배우가 조막만한 곤룡포를 차려입고 옥좌에 앉아있다.
왼쪽 가장 앞에 대충 복색을 걸쳐만 입은 유명이, 오른쪽의 가장 앞에는 백승효가 자리한다.
각각 문인과 무인의 수장.
“갈게요- 3,2,1 슛!”
“전하- 수명국과의 국경으로 출전을 명해주십시오. 일각이 늦어질수록 무고한 백성들이 더욱 큰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저 은성군이 직접 나가서 자국의 위엄을 천하에 드높이고 오겠습니다!”
대전의 공기를 흔들 것 처럼 우렁-하고 토해지는 끓는 목소리.
피디가 손에 말아쥔 대본을 힘껏 쥐었다. 오늘 백승효의 컨디션은 최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하. 본국은 유월에 끝난 건척국과의 전쟁의 후유증을 겨우겨우 이겨내는 중입니다. 추수가 얼마 남지 않은 아름다운 본국의 영토가 다시 핏빛으로 물들 것입니다. 지금은 전쟁놀이를 할 때가 아닙니다. 현군이신 전하의 현명한 판단을 주청합니다!”
어?
옥좌에 앉아있던 어린 배우가 눈을 껌뻑인다.
백승효가 움찔 놀란 표정을 수습하고 대사를 이었다.
“수명국은 예전에도 그러했소. 형제국이라며 세상 웃는 낯을 하다가 자국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등에 칼을 꽂았지. 월공은 그런 간교한 자들과 화친을 하자는 말이 감히 나오는가? 심지어 이번에 그들이 침공한 부휼 지역은 광산이 밀집한 곳이다. 그들이 화친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 그대는 정녕 모르는가?”
은성군이 옥좌가 아닌, 대전 반대편의 호적수를 노려본다.
뿜어져나오는 은성군의 표효가 월공을 정면으로 덮친다.
그에 대응하여 월공이 하는 말.
“백성들은 주린 배를 틀어쥐고 군역에 나갔다가 쉽게 칼을 맞을 것이며,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는 국경무역이 최소 일이 년 간은 자취를 감추겠지요. 거듭되는 환란으로 백성들의 상 위엔 쌀 대신 나무껍질이 올라오고,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수명국에 대한 분노야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전쟁에는 시의적절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공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제국에 화해 주선 요청을! 제가 사신으로 가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을 주선하도록 제국을 설득하겠습니다.”
“정신이 나갔는가! 지금도 제국의 조공 요청으로 백성들의 등허리가 펴질 날이 없거늘!”
“등허리가 굽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컷-! 은성군과 월공이 팽팽해야 하는데…월공 좀더 분발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지적을 한 사람은 방학 피디가 아니다.
연예학개론 내의 의 감독.
그리고 유명이 ‘월공’에서 ‘탁규민’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걸 이해한 백승효의 살갗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왜 월공을 저렇게 연기하나 했더니···’
월공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한 발짝 물러서서 전체의 그림을 보는, 탁월한 이성을 가진 재사.
백승효의 판단에는, 은성군은 엎드려있는 범처럼 위협적으로, 월공은 땅을 뒤덮는 뱀처럼 차가우면서도 예리하게 대치하는 것이 맞았다.
처음에는 대역일 뿐이라 캐릭터 파악을 못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명은 처음부터 과할 정도로 목소리를 키우고 온몸을 던지듯이 대사를 읽었다. 문제는 톤이 유약하여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어린 아이가 떼를 쓰느라 울음을 키워도 시끄럽기만 할 뿐 위협적이지 않듯이,
심지가 흐늘거리는 고성高聲.
그 유약함이 어디서 온 것인가 했더니, 탁규민 배역으로 돌아왔을 때의 목소리에 똑같은 울림이 있었다.
초식동물같이 부드러운 말투.
‘그래, 지금까지 이규성의 탁규민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처음 대본을 봤을 때 탁규민은 저런 느낌이었던 것 같군. 대역으로 잠시 하는 연기에도 저정도의 해석을 집어 넣는다는 말인가···’
“좋아요. 지금 느낌 그대로 권도준 첫 번째 바스트부터 따겠습니다. 유명씨 상대편 대사 받아주세요.”
그냥 못하는 연기가 아닌, 못하는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데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연기.
피디 역시 유명의 의도를 알아보고 단숨에 만족한 싸인을 냈고,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막 촬영장에 도착한 육미영 작가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피디님.”
“어, 작가님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시죠.”
탁규민 등장 씬들을 다 찍고 잠시 쉬는시간에 육작가가 피디에게 인사를 했고, 그가 조용한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민감한 이야기들이 오고갈 예정이므로.
“신유명씨는 볼수록 대단하네요.”
“아, 보셨어요? 아직 젊은 친구가 연기에 대한 감이 엄청나요.”
“볼수록…다음 장면이 떠오르게 하는 배우에요.”
육미영이 손이 근질근질한지 손가락을 풀었다.
“피디님, 제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대안이 있는데 꼭 참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요? 피디님은 안그러세요?”
“…사실 저도요.”
1~5화의 방영을 보고, 자꾸 보형의 대사를 더 넣고 싶어지는 육작가였다.
그럼에도 이규성의 면을 생각해서, TW엔터와 방송국의 관계를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서브남주의 비중을 올리고 있는 판이었는데,
이렇게 판이 깔리면…참기가 힘들어진단 말이지.
“그냥 서브남주를 갈아치워 버릴까요?”
방학 피디도 성질이 만만한 인간은 아니다.
싱글싱글 웃으며 인간관계를 능숙히 조율하는 성격이었지만, 한 번 아니라고 생각한 일엔 끝까지 갈 수 있는 깡이 있기에 피디파업에서 1년이나 버틴 것.
“저야 프리랜서라 크게 상관없는데, 피디님 괜찮으시겠어요? TW 압박이 만만찮을텐데.”
“…이번작품을 메가히트시키면 뭐 어쩌겠어요. 저희도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규성이 빌미를 주긴 했죠.”
“그러니까요.”
둘은 장난을 계획하는 악동들처럼 눈을 빛냈다.
*
규성의 대역을 끝내고, 보형의 촬영이 이어졌다.
유명은 유약한 남자의 영혼을 재빨리 벗어던지고 보형으로 돌아왔다.
오늘 보형의 촬영분은 그를 보좌하는 실장과의 대화.
보형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씬이기도 하다.
“갈게요- 3,2,1 슛!”
“실장님, 얘기했던 건은요?”
“준비해 두었습니다. 영화사 틔움에서 진행하는 오디션 후보 명단에 프로필이 들어가게 조치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저…외람된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실장님답지 않으시네요…뭘까요?”
실장이라고 칭해진 묵직한 중년남자가 살짝 뜸을 들이다 말을 잇는다.
“밀어주고 싶으신 거라면 스타로 만들겠습니다. 너무 급작스러운 걸 염려하시는 거면 자연스럽게 할 수도 있고요. 이렇게 ‘우연한 기회’를 세팅하는 것보다 띄우는 게 일이 편한 걸 아시면서…굳이 수고를 들이시는 이유가 뭔지···”
그 말에 보형이 조용히 웃는다.
“그런 짓은 이때까지 노력해온 하나 인생을 부정하는 거예요.”
“…”
“제가 왜 도망쳤는지 아세요?”
“왜입니까.”
“사람들의 탐욕이, 저의가, 제 앞에서 웃는 아첨이, 그 모든 의도가 신물날 정도로 잘 보여서요.”
실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모시는 혁성그룹의 도련님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현명했다.
사람의 의중을 귀신같이 파악하고, 입맛대로 쉽게 조율해낸다. 그의 앞에선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것이 자신의 신조가 될 정도로, 천재적인 통찰력.
한 번씩 그는 한숨쉬듯이 ‘굳이 알고싶지 않은 것도 너무 쉽게 보이네요.’라는 말을 흘렸다.
“하나는 욕심이 많은데 그 욕심이 깨끗해요. 하고싶은 게 많아도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잊지않죠. 정직하게 부딪히고, 깨지면 한 번 땅을 친 후 다시 벌떡 일어나 달리더라구요…숨이 차게 달리는 도중에도 주변 사람을 살피는 걸 잊지 않는 품성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아요.”
“…”
“제가 하나를 도와주는 것 같겠지만, 오히려 치료받고 있는 건 저에요. 하나와 할머니 옆에 있으면 제 찌든 마음이 좀 되살아나는 것 같거든요.”
“그러…셨습니까.”
보형이 그의 팔뚝을 톡톡 치면서 개구지게 웃는다.
“그런 표정하지 마세요. 실장님, 아니 아저씨도 제 마음을 치유해주는 분 중 하나니까요. 어쨌든 저는 하나의 욕심을 존중하고 싶어요. 갖지못한 자에겐 기회조차 쉽게 오지 않지만, 하나같이 살아온 사람에게 기회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제 친구 하나는 기회만 있다면 훌륭하게 잡아낼 사람일 거라 믿어요.”
귀여운 하나의 집사도, 오만한 재벌의 후계자도 아닌,
인간 윤보형이 담담히 토로하는 자신의 민낯.
그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묘하게 울렸다.
“커트- 오-케이! 유명씨 오늘 수고 많았어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피디님.”
그리고 한 쪽 의자에서 일어난 육미영이 다가왔다.
“티비로 볼 때도 좋았는데 촬영장에서 보니까 더 좋네요.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유명씨 이후에 스케줄 있어요?”
“…아니요?”
“그럼 저랑 얘기 좀 할까요?”
조용한 장소로 옮긴 후, 육미영이 말을 꺼냈다.
“보형이 분량,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면, 신유명씨는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인과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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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형이 분량,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면, 신유명씨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찔러오는 육작가의 질문.
유명은 잠시 그녀의 진의를 생각했다.
‘훨씬, 이라면…서브남주가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보네. 감당, 이라는 건 연기 얘기는 아닌 것 같고···’
대사 외울 수 있겠냐.
부담감을 감당할 수 있겠냐.
이런 ‘감당’은 당연히 가능하다. 육작가도 그의 연기를 봐온 이상은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감당’은···
“문실장님이 감당해 주시지 않을까요.”
“…참 똑똑한 친구야.”
정답인 듯 육미영이 싱긋 웃었다.
사이가 틀어진다 한들 TW에서 인기작가와 스타피디를 어찌하기는 힘들겠지만, 신인배우에게는 태클을 걸 수도 있다. 갑자기 뜬 신인배우가 타 엔터에 찍힐 수 있다는 리스크, 육작가는 그 부담을 말한 것이었다.
“러브라인을 다시 잡아야 해요. 지금 유명씨가 연기하는 보형이는 하나에 대한 이성적인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어요?”
“작가님이 하나와 보형은 ‘그런 관계’로 설정하신 것 같지 않아서 없는 것으로 연기했습니다.”
“그랬죠? 그럼 역시 계기를 넣어야겠네···”
“그런데 작가님.”
“왜요?”
유명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보형이 ‘조연’인 것의 의미가 있었을텐데, 그게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육미영이 조금 놀랐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린 친구가 배려심이 과하다.
자신도 고민한 부분이었다. 보형이 조연이고 하나에게 딸린 캐릭터이기에 ‘하나의 버프’로 인식되는 것이지, 러브라인이 들어가버리면 자칫 ‘남주에게 구원받는 여주’로 돌아와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아까워하는 것은 작가의 몫. 그녀는 짐짓 정색을 했다.
“신유명씨, 그건 내가 걱정할 부분이고, 유명씨는 본인 분량을 아득바득 늘려나가야죠. 신인배우가 욕심이 없으면 못 커요.”
“네. 죄송합니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아요. 그 부분은 내가 고민할 테니까, 매력적인 보형이만 만들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본에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