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06
“네, 선배님.”
“저녁 먹을래?”
연초 배우 모임 때 백승효는 유명에게 말을 놓았다.
그는 무뚝뚝하고 남자답지만, 얘기하다보면 서글서글한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유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주변의 내실이 있는 식당에 그와 마주앉았다.
메뉴는 부대찌개. 거기에 소주 한 병을 시킨 그들은 조금씩 오가는 얘기에 반주를 곁들였다.
“그 뒤로 이규성은 별 말 없었어?”
“네. 신경쓰일 정도로 눈총을 주긴 했는데, 따로 말을 붙이진 않았어요.”
“실장님이 잘 처리하셨나보네.”
백승효도 문실장의 수완을 잘 알고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참 이런 저런 촬영 뒷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조금 뜸을 들인다.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유명아.”
“네, 선배님.”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은성군과 월공의 대치 장면, ‘제대로’ 한 번 연기해봐 줄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부탁.
하지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 월공’이 계속 신경이 쓰였나보구나.
“탁규민의 월공이 아닌, 제 월공 말입니까.”
“어. 신유명의 월공으로.”
“알겠습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2층 연습실이 목적지였다.
“여긴 처음이야?”
“네.”
굿엔터 연습실은 시설이 좋았다. 체력단련실과 연기연습실이 각각 분리된 공간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고, 연습복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오늘은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지 텅빈 연습실에서 백승효가 가방을 뒤졌다.
“여기 대본. 준비되면 알려줘.”
백승효가 A4 두 장짜리 대본을 내민다.
은성군과 월공의 대사만을 짜집기한, 의 대본.
유명은 한 쪽 의자에 앉아 월공의 대사를 머리에 넣었다. 주어진 정보는 몇 쪽 안 되는 대사 뿐. 이걸로 흐릿한 월공의 뼈대를 세우고, 유명의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야 한다.
30분 후,
“준비됐습니다.”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 더욱 날을 세운 두 배우가, 마주했다.
이걸 다 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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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할까?”
백승효의 질문에 유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승효는 하나, 둘, 셋 주문처럼 숫자를 세며 몰입에 들어갔다.
시대를 한탄하는 왕족이자 무인, 은성군에게로.
“전하- 수명국과의 국경으로 출전을 명해주십시오. 일각이 늦어질수록 무고한 백성들이 더욱 큰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저 은성군이 직접 나가서 자국의 위엄을 천하에 드높이고 오겠습니다!”
백승효는 고민했다.
자신의 방식이 틀린 것인지.
그는 권도준을 최선을 다해 연기했고, 은성군도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어차피 백승효라는 자신의 색깔이 깔린 것은 같았기에, 권도준 위에 은성군을 다시 입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날, 신유명의 연기를 보고 초조해졌다.
월공의 연기만 따지자면, 못한 연기가 맞았다. 그런데 너무나 확고하게 탁규민의 색깔이 입혀져 있어서, ‘어떻게 저렇게 연기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신유명의 월공’을 주문했다. 과연 얼마나 다를 것인지를 의심하면서.
그리고 유명이 초장부터 한껏 힘이 실린 그의 대사를, 나긋하게 맞잡았다.
“전하. 본국은 유월에 끝난 건척국과의 전쟁의 후유증을 겨우겨우 이겨내는 중입니다. 추수가 얼마 남지 않은 아름다운 본국의 영토가 다시 핏빛으로 물들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눌러 담은, 나즉하지만 통렬한 비판.
그리고, 문장 사이에 잠시 내뱉어지는 작은 한숨.
그 한숨을 사이에 두고, 대사의 톤이 바뀐다.
“지금은 전쟁놀이를 할 때가 아닙니다. 현군이신 전하의 현명한 판단을 주청합니다.”
‘전쟁놀이’에 얕은 비웃음이 깔려있다.
이것은 분명히 은성군을 자극하려는 말투이다. 상대의 열의를 얕잡아 폄하하며, 어린 주상의 마음을 흔들어 제게 가져가는 교묘한 화술.
도발하는 걸 알면서도, 분노가 끓어오른다.
아주 쉽게 은성군의 감정에 빠져든다.
“수명국은 예전에도 그러했소. 형제국이라며 세상 웃는 낯을 하다가 자국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등에 칼을 꽂았지. 월공은 그런 간교한 자들과 화친을 하자는 말이 감히 나오는가? 심지어 이번에 그들이 침공한 부휼 지역은 광산이 밀집한 곳이다. 그들이 화친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 그대는 정녕 모르는가?”
결국 그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옥좌가 아닌 반대편을 향해 다그치고 만다.
대전에서의 경솔한 행동에 노신들이 혀를 쯧쯧 찰 것이다.
팽팽한 대치에서 조금의 실수도 무게중심을 기울게 하고 마는 걸 알면서도, 협에 불타는 무인인 은성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왜. 저렇게 명석한 그라면 빤히 보일 것인데. 잠시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잃을 것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될 것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인데.
도대체 왜.
“백성들은 주린 배를 틀어쥐고 군역에 나갔다가 쉽게 칼을 맞을 것이며,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는 국경무역이 최소 일이 년 간은 자취를 감추겠지요. 거듭되는 환란으로 백성들의 상 위엔 쌀 대신 나무껍질이 올라오고,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최고의 재사답게, 기름을 바른 듯이 혀를 매끄럽게 움직인다.
그의 웅변은 하나하나의 심상을 그려내듯 채도가 높아서, 듣는 사람들은 귀로 들려진 상황을 머리로 상상하고 만다.
뱃가죽이 들러붙어 방어벽을 쌓을 돌을 옮기다, 멀리서 날아온 화살에 꿰뚫려 성벽을 피로 적시는 해골같은 장정의 모습과,
홀쭉해진 뺨을 오물거리며 나무껍질에서 쓴물을 빨아먹은 후, 다음날을 위해 다시 물에 불려두는 노파,
그리고 하루 아침에 부모를 잃고 몇날 며칠을 빽빽 울다 굶어죽는 어린 아기의 모습을.
“수명국에 대한 분노야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전쟁에는 시의적절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회한에 절은 말.
월공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진다.
그의 설득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은성군의 시각에서는 그조차 계산된 가증스러운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충절이 가득 배인 눈물이었다.
저것이 신유명의 월공.
현명한 두뇌를 매끄럽기 그지 없는 혀로 감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모략가.
그 월공에는 지난 번 ‘탁규민의 월공’은 전혀 묻어있지 않아, 백승효는 초조해졌다.
잠시 대사를 멈춘 그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월아.”
아명으로 그를 불렀다.
대본에 없는, 애드립이었다.
*
“네, 왕숙공.”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유명이 그의 애드립을 받았다.
완전히 몰입에 들어가 있는 듯 잔잔한 말투. 거기에는 비밀스런 대담을 나눌 때의 은근함과 서로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거리감이 함께 표현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가. 그대도 그것이 자국에 멸화를 입힐 것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는가.”
“벗하며 지내던 어린 시절 이후로, 왕숙공에게 이리 솔직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겠군요. 죄인의 몸이 되어서야.”
월공의 말에, 흠칫 놀란 것은 은성군이 아닌 백승효였다.
그는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옮겨, 이 장소를 세월이 흐른 후의 감옥으로 끌고 왔다.
당황하여 상황을 깨뜨릴 뻔 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백승효가 말을 받았다.
“그래.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그대의 심계를 알고 싶구나. 똑똑한 그대가 어찌하여···”
“자국은 망해야 했습니다.”
“…뭣이?”
한 치의 망설임없이 떨어진 그의 단언에, 은성군이 된 승효는 실제로 놀랐다.
“나라는 민民을 위해 있습니다.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잃습니다. 이미 이 나라는 진작부터 망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무슨 역적같은 망언인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끓어오른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적, 맞습니다. 어차피 죄목도 그것이지 않습니까.”
“…월공.”
“그래도, 나라에는 역적일지라도 이 땅에는 역적이 아닙니다. 저는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를 들어, 백성을 지킬 수 있는 나라에 바쳤을 뿐입니다. 나라가 무엇입니까. 백성을 지키기 위한 체제일 뿐입니다.”
처음으로 그의 언성이 높아진다.
기름을 칠한 듯이 매끄러운 어투가 아닌, 칼칼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하는 진심.
열 살 적 함께 뛰어놀던 시절 이래로 그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솔직한 음성.
“평생 목적을 위해서 계산된 말만 하다가, 뱉어지는 대로 이야기하니 속이 시원하군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반역가가 후련하게 웃는다.
“공에게는 한번 쯤 터놓고 싶었습니다. 공은 제 유일한 벗이 아닙니까.”
쿵-
어디선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깨어지듯이, 승효는 현실로 돌아왔다.
손이 떨렸다.
“그 월공은…어떻게 나온 거야?”
“어떻게라면···”
“어떻게 상황이, 대사가, 그런 애드립이 바로 나왔냐고. 오래 대본 분석을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건 극중극이라 몇 페이지의 쪽대본밖에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라면 여러 번 생각해봤어요. 이 극의 시작이 어떠했고 끝은 어떨 것인가. 이런 마무리가 좋을 것 같았습니다.”
“…왜?”
관계도 없는 배역을,
그 배역이 연기하는 극중의 작품을,
극중에 나오지도 않은 그 작품의 시초와 결말까지,
왜 그가 생각한단 말인가.
“그야…재미있으니까요. 은성군도 월공도 매력있어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당연한 어조로 답하는 유명의 말에 그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연기는 자신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일은 일…이지 않나? 그 촉박하던 일정에 그저 ‘재미’로 남의 배역까지 구상해 보았다고?
백승효는 더 질문할 의욕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
연습실과 체력단련실 사이의 열려있던 사이문으로 고개가 하나 빼꼼 내밀었다.
‘저 사람이 문실장님이 데려왔다는 배우.’
체력단련실에 가득한 기구에 몸을 숨기고 졸고 있었던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손에 든 빵을 부스럭- 베어물었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
“수고했어요.”
드라마 종방연이 끝난 다음주, 유명은 문유석의 부름을 받고 실장실에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