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08
한성은 여전히 부처님 웃음을 짓고있는 감독님을 바라보았다.
손치욱 감독.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거장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며, 저 인자한 웃음과는 달리 촬영에 들어가면 타협이 없는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제자 격인 한성을 이번 작품에 불러들였고, 다른 배우들을 섭외하기 전에 그와 미리 의논해보고 있었다.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축이 될 젊은 배우, 거기에 한성은 ‘그 녀석’을 추천했다.
아직 그 녀석과 합의된 바는 아니었다.
‘벌써 다음 작품 안 정했어야 할텐데···’
*
“네, 선배님. 요즘 쉬는 중입니다.”
[어, 그래. 나 이번에 영화 한 편 들어갈건데, 감독님과 캐스팅 얘기를 같이 하다가 신배우 얘기를 좀 했거든. 재밌는 역인데 관심있어?]“할게요.”
유명이 덥석 대답을 했다.
[응? 작품이 뭔지 배역이 뭔지는 듣고 얘기해야지.]“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선배님이 부르시면 합니다!”
[이 친구 보게…나를 뭘 믿고.]“믿습니다. 선배님과 같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할게요.”
한성이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신배우 이런 성격이었어? 안 어울리게.]유명이 이렇게 적극적이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대본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러고도 대본 해금령(?)이 3주나 남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심각한 연기중독임을 실감한 시점이었다.
또 한 가지는···
전생과 현생에서 윤한성에게 입은 은혜.
그는 스타의 자리에서, 한 무명 엑스트라배우에게 ‘작지만 불꽃같은 연기를 하네요, 언젠가는 빛 볼 겁니다.’라는 소중한 희망을 남겼고,
현생에서는 유명을 오디우스에 끌어들이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디우스는 유명에게 무척 소중한 집단이 되었기에, 유명은 그것을 그의 ‘은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윤한성이라는 배우와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당연히 있었고.
[손치욱 감독님이야.]“네? 손치욱 감독님요?!”
유명도 번쩍 놀랄 정도로 커다란 이름이다.
영화사에 획을 긋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거장.
흥행을 보장하는 트렌디하고 인기있는 감독은 아니지만, 커다란 메세지를 전달하는 굵직한 작품을 선보이기에 배우들이 한 번쯤은 함께 작업해 보고싶어하는 감독이다.
[작품은 라고, 고려 후반에서 조선 개국 전까지의 난세를 그린 사극인데, 주연은 정몽주, 준주연이 이방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돼. 너를 추천한 역할은 이방원이고.]“우와. 안들어보고 덥석 문 게 대박이었네요.”
[그러게. 먹을 복이 있나보네. 하하.]“선배님 배역은 뭔가요?”
[정몽주.]“그렇군요.”
정몽주와 이방원이라니, 특이하다.
보통 조선개국사는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등을 중심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정몽주도 요주의 인물이긴 하지만 주연 급으로 다뤄지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스토리일까.
[정확히는 조선건국사라기 보다는, 정몽주와 이방원이라는 인물을 다룬 이야기지. 둘한텐 클라이막스가 있잖아.]“아…하여가랑 단심가요.”
“그런데, 얘기하시는 걸 보면 이방원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것 같은데, 제가 거기 들어갈 급이 될까요? 아직 신인이라···”
[솔직히 감독님도 그걸 걱정하고 계시긴 해.]“…”
[설득시켜봐. 보는 눈은 정확하신 분이라, 기대를 충족하면, 아니 기대를 충족할 싹수만 보인다고 해도 제작사랑 싸워서라도 자리 만들어주실 분이니까.]“선배님이 무척 존경하시는 분인가 보네요.”
[마음 속으로는 은사님이라고 여기고 있어.]“그러시군요.”
[대본 보는 정식 오디션은 아니고, 편하게 얼굴 보고 얘기나 한 번 해보자고 하시네. 시간 언제 돼?]그렇게 손치욱 감독과 한성과의 약속이 잡혔다.
그리고 미팅 날,
제작사 영화마루의 회의실.
“안녕하세요 허허. 티비보다 훨씬 미남이시구만.”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신인배우 신유명이라고 합니다.”
유명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앉아요 앉아. 나 어려운 사람 아니야.”
너털웃음을 짓지만, 온화한 눈매에 자리잡은 눈동자가 예리하다.
악수를 하면서도 유명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순식간에 훑어낸다.
“드라마랑 영화 잘 봤어요.”
“네, 감사합니다.”
유명은 괜히 쑥쓰러워져서 시선을 조금 내렸다.
“카메라 너머와 실물의 느낌이 상당히 다른 배우군요. 그냥 봐서는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느낌이 전혀 안나는데요, 하하.”
“이 친구가 원래 연기스위치가 켜졌을 때와 꺼졌을 때가 좀 다릅니다 감독님.”
“그러게요.”
감독이 앞에 놓인 김이나는 국화차를 홀짝홀짝 마시더니 유명에게 말한다.
“사실 나는 영화쟁이라 연기는 잘 모른답니다. 허허. 연기는 연기자의 전문분야고, 그걸 총괄한 작품은 감독의 전문분야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감독이 일부러인 게 뻔한 겸손을 부린다.
영화와 연기를 어떻게 떼어서 생각할 수 있나.
게다가 윤한성이 무려 마음속의 은사라고 표현하는 사람, 연기에 조예가 없을 리 없다.
예고된 반전처럼, 그가 말을 뒤집는다.
“그래도, 카메라 너머의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은 할 줄 안답니다. 만들어내는 세상이지만 유리 하나를 넘어가면 진짜 저런 세계가 있을 것도 같은 현실감과 몰입감을 주는 게 우리 일 아니겠어요?”
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명씨 배역들이 상당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캐릭터였음에도 ‘있을 법한’ 느낌을 주는 걸 상당히 인상적으로 봤지요. 그런데 내가 늙어서 그런가, 거기서 배우와 카메라의 지분율이 얼마나 되는지 대번에 파악이 안되더라고.”
쌓아온 작품들이 있기에 괜한 겸손임을 잘 알 수 있는, 조금은 악취미인 화법.
감독이 인자한 웃음속에 조금 짓궂음을 드러내고 주문한다.
“테스트는 아니고 그저 나이 든 사람의 주책맞은 호기심인데, 신유명씨가 ‘어떤 배우’인지 간단하게 연기로 보여줄 수 있겠어요?”
편한 자리라는 말은 역시 함정이었다.
말리지도 못하고 조금 당황한 윤한성의 모습을 보고 그는 몰랐던 일임을 직감했지만, 유명은 당황하지 않았다.
배우라는 일은 언제나 시험의 연속이다.
배역을 따내기 위한 시험.
오케이를 받기 위한 시험.
그리고, 가장 무서운 관객이라는 시험.
유명은 조용히 생각하더니, 옆에 있던 펜과 종이를 끌어당겨 짧은 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감독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5분만에 완성된 즉흥 대본을 유명은 몇 번 더 읽어가며 이미지를 잡았고,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당황하지 않은 반듯한 눈빛.
“이 대본을 지금부터 세 번 연기하겠습니다. 차이점을 생각하시면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흐음.”
감독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고, 윤한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작은 회의실이 긴장으로 가득 찼다.
존재감
————– 73/74 ————–
감독은 메모지를 끌어당겨 눈으로 훑었다.
‘호오···’
5분만에 휘갈겨쓴 대사가 의외로 폼이 살아있다. 극작을 공부했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 대사는, 광인狂人의 대사.
우는 연기, 화내는 연기, 미친 연기는 오디션의 3대 자유주제라고 할 만큼 단골메뉴이다.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발산하는 종류의 연기이기 때문.
그런데 같은 대사를 3번 하겠다니, 미침의 종류를 3가지로 다르게 하겠다는 것인지…
흥미가 생긴 손감독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등을 의자에 기댔다.
“시작하겠습니다.”
유명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
하얀 벽지,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테이블. 맞은 편에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 눈썹을 늘어뜨린 의사 선생님.
그가 그려낸 이미지에 의해 이 장소는 잠시, 정신과 입원병동 내에 있는 상담실로 변할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숨을 멈추고 30초가 넘어가자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푸핫-
그는 터질듯한 숨을 내쉬며 눈을 번쩍 떴다.
잠시의 호흡정지로 압력이 오른 눈이 삽시간에 충혈되어 있다.
“선생님···!”
날카로운 부름.
10세 정도일까. 어린아이같은 말투로 새된 소리를 내지른 그가 빠르게 몸을 앞뒤로 흔든다. 그리고 꺽꺽거리며 말을 주워섬긴다.
“지…집에 보내주세요. 오늘 엄마가 아빠를 줒..죽일! 거에요. 엄마가 몰래 적는 일기장을 내가, 내가 봤어! 옛날부터 계획한 거였어요!”
아- 아-
눈동자가 흔들흔들 허공을 맴돈다.
잠깐 감독에게 내려앉은 시선이 물체를 보듯이 의미없이 지나쳐 문으로, 천장으로, 발밑으로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말의 중간중간 신음소리처럼 음- 음-하는 잡음이 섞인다.
그러다 뚝- 동작이 정지하더니,
기계처럼 빠르게 말을 재생한다.
“아들의 방에 작은 녹음기를 숨겨 밤마다 쿵-쿵- 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게 만든다. 환청을 사유로 아들을 정신질환으로 몰아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목격자를 없앤다. 그리고 2005년 2월 11일 바로 오늘, 회사에서 돌아온 아이아빠의 저녁상에 갈아둔 하얀 가루를 탄다.”
손가락은 빠르게 테이블을 도독도독 짚고 있다. 그걸 신호로 기억을 재생하기라도 하듯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빠른 음성이 감정없이 흘러나온다.
“이불에 그를 둘둘 말아 끌린 흔적 없이 그를 베란다로 이동시킨 후, 툭- 밀어 떨어뜨리는 동시에, 아악————-!”
보고서를 읽는 듯한 빠르고 감정없는 단어의 나열 뒤에, 갑자기 펄쩍 뛰는 비명.
관객이 된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란다.
그 비명이 제 귀로 다시 들어가자 소스라치듯 몸을 흔든 배우는 제 머리를 손으로 퍽- 퍽- 친다.
그리고 감독에게 시선으로 매달린다.
“정말…정말이에요 선생님. 보내주세요. 아…안그러면 아빠가 죽고 엄마가 벌…벌받을거에요. 제발, 제발, 선생님···”
마지막에는 기이익 늘어지는 말투.
시선을 마주하고 있지만 상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매달리듯이 집착하는 발화법.
그건 발달지연에 정신분열증을 동반한 환자의 모습이었다.
탓-
모든 동작이 한 번에 거두어지고,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윤한성은 몰아치는 연기에 잠시 멈췄던 숨을 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전 김영도를 연기했을 때처럼, 발화자의 뒤틀린 정신상태에 순식간에 빨려들어가 보는 사람을 허기지게 만드는 연기.
순식간에 빠져들어가는 연기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래, 아까 대사를 읽어보고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연기를 잘 하는 녀석인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남은 두 가지는 무엇일까.
그가 소름을 달래며 탁자 건너편을 주시할 때, 얇은 눈꺼풀이 스르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