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09
조금 전과 달리 동공이 차분한 색으로 가라앉아 있다.
과도할 정도로 차분하게.
*
감독은 유명을 보고 상당히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성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이 바닥에서 오랜 세월을 굴러왔다. 수많은 난다긴다하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고, 소위 ‘천재’들도 꽤나 여럿 보았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3년차라고 한성씨가 그랬던가···’
확실히 천재적인 면모를 갖춘 어린 배우다.
갑작스레 던져진 시험에서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는 두둑한 배짱도 그렇고,
10여분만에 즉흥적인 대사를 써내고 세 가지나 배리에이션을 치는 창의성도 그렇다.
그리고, 낯선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순식간에 빠져들어가는 훌륭한 몰입력.
하지만, 그런 배우들이 없지는 않았다.
이 다음은 뭘까.
껌뻑-
다시 뜨인 눈이 온도를 잃은 듯이 차분하다.
그리고, 달싹이며 입술이 열린다.
“선생님. 집에 보내주십시오. 오늘 엄마가 아빠를 죽일 겁니다.”
음?
감독이 눈썹을 움찔했다.
아까보다 10살 이상 나이를 먹은 어른의 말투.
진심을 다해 한음절 한음절 힘을 주는 말투에 진심이 담뿍 배어있다.
이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된 ‘정상인’의 연기인 건가?
“엄마가 몰래 적는 일기장을 제가 엿보고 말았어요.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구상한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토로하듯이, 고백하듯이, 비밀을 알려주듯이 속삭이는 말.
“아들의 방에 작은 녹음기를 숨겨 밤마다 쿵-쿵- 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게 만든다. 환청을 사유로 아들을 정신질환으로 몰아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목격자를 없앤다. 그리고 2005년 2월 11일 바로 오늘, 회사에서 돌아온 아이아빠의 저녁상에 갈아둔 하얀 가루를 듬뿍 탄다. 그가 잠에 취해 고꾸라진다. 이불에 그를 둘둘 말아 끌린 흔적 없이 그를 베란다로 이동시킨 후, 툭- 밀어 떨어뜨리는 동시에 아악하고 비명을 지른다.”
대사를 끊는 지점이 다르다.
대사를 전달하는 속도도, 어조도 아주 평이하다.
아악- 이라는 의성어까지도 조용한 묘사로 끝날 뿐, 과장없이 담백하게.
엄마의 일기장을 조용히 들려주는 말투에 자신까지 무대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자신이 의사가 되어 흰 가운을 입고, 커다란 책상을 두고 그와 마주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헷갈리기 시작한다.
입원환자들의 ‘집에 가겠다’는 집념은 매우 강렬하다. 그 목적을 위해 온갖 말을 지어내기도 하고, 지어낸 말을 실제로 믿기도 한다. 거짓이나 환각일 가능성이 99%.
그런데, 진짜이면 어쩌지···?
진짜라면, 한 가족의 미래가 뒤집힐 일인데, 내가 그것을 방조하게 되면···
그런 불안함이 밀려와 고개를 들었을 때,
희번득,
그의 눈이 한 번 뒤집혔다 돌아간다.
울렁-
속이 출렁거린다.
“정말입니다 선생님. 지금 저를 보내주시지 않으면 한 구의 시체와 한 명의 죄인이 생길 겁니다. 제발, 오늘 하루만이라도 좋습니다. 제발, 선생님···”
교양있는 단어를 골라쓴 정갈한 문장.
누가 봐도 억울하게 강제입원된 정상인이 아닐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말투.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이 자는,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아주 정교한 대본을, 많은 연습을, 의사를 현혹할 상황을 준비해 온, 아주 똑똑한, 그러나 틀림없는 ‘환자’라는 것을.
넘어갈 뻔 했던 자신에게 놀라 숨이 깊이 넘어간다.
그의 눈이 집요하게 의사의 반응을 좇는 여운을 남기고, 다시 감긴다.
감독은 이제서야 몸이 조금 더워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시, 눈이 떠졌다.
“선생님!”
또다.
데자뷰를 보는 듯이 세 번째 맞이하는 똑같은 대사이지만,
일어나는 것은 기시감이 아닌, 또다른 놀라움을 향한 기대.
“집에…집에 오늘! 엄마가…아빠, 를 죽 일, 주…죽는 거 무서워요! 몰 래 적는 일기장, 엄마 거… 제가 엿봤어…봤는데 그건 아-주 오래, 하하, 오-래전부터 구상한 치밀한 계 획. 엄마…하아 엄마아 안돼애…”
말투가 이상하다.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비빔(*word salad: 정신분열증 등에서 나타나는, 조리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진짜 언어와 새로 만든 언어의 잡탕으로 이루어진다.) 현상인가···?’
예전 시나리오에서 정신과 환자 캐릭터를 만들어보면서, 손감독도 어느 정도는 정신과적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환자라기에는, 그의 대사는 말비빔의 증상과 차이가 있었다.
일견 막 얘기하는 것 같지만,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는 논리 구조. 저렇게 상태가 심한 환자에게서 나오기 힘든 ‘구상한’ ‘치밀한’ 따위의 정교한 어휘들.
잘 몰라서 저렇게 연기하는 건가?
혹은···
또 하나의 가능성에 감독이 무릎을 꽉 쥐었다.
“선생님. 집에 갈래, 집. 집. 집. 제발…”
그리고 마지막 대사에 다다르자 감독의 의심은 현실로 드러났고, 그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 이 인물은 앞의 두 인물보다 말투나 행동은 훨씬 심각한데, 자세히 보면….
잠깐씩, 눈치를 본다.
그 때 섞이는 ‘눈치를 볼 때의 눈빛’은, 환자의 것이 아니다.
“저희 아빠, 죽어, 응, 죽어···”
흉내다.
저 사람은 지극히 정상.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신분열증의 행태를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다.
목적은?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의 중얼거림이 뚝- 끊기고, 한번 더 눈을 깜빡, 감았다 뜬 배우는 순식간에 눈빛을 가라앉히고 감독을 직시했다.
소름이 쭈뼛 돋는다.
‘과연···’
윤한성이 보면 아실거라, 라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30년간 감독생활을 해오면서 저런 재능이 한 번도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천재들은 기복이 심하기 마련인데, 저 정도로 대본에 대한 계산과 배역에 대한 몰입을 능숙하게 컨트롤하는 배우가 저 나이대에 있었냐고 묻는다면···
‘흠···’
감독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짝짝짝–
한성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손치욱 감독은 연기에 관해서라면 쉽게 오케이를 내주지 않는 인물이었고, 그에게 무려 박수를 받아낸 것은 자신도 부러울 정도의 일이었다.
“첫 번째는 진짜 환자이고, 두 번째는 정상을 가장한 환자, 세 번째는 환자를 가장한 정상인.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디테일이 대단하네요. 의도한 바를 설명하지 않고 연기로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손감독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가 제일 좋았습니다. 첫 번째는 임팩트가 있었고, 세 번째는 아이디어가 좋았지만, 두 번째 건 중간까지 깜빡 속을 뻔 했거든요. 속을 뻔 했는데 속지 않도록 계산된 눈빛을 살짝 흘려넣은 부분이 아주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배우가 되겠어요. 그 나이대 배우들 중 과연 탁월한 연기력이군요. 한 10년 정도 이대로 매진하면 독보적인 원탑이 될 수 있겠어. 허허.”
분명 극찬인데, 뉘앙스가 조금 불길하다.
“그런데 ‘아직은’ 내 대본의 이방원과는 조금 맞지 않네요.”
감독의 선고에, 오히려 놀란 것은 윤한성이었다.
“어째서입니까.”
한성이 다급히 물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 저에게 저 연기를 해보라고 해도 저만큼 할 자신이 없을 정도인데요. 감독님은 어떤 부분을 보시고 그렇게 판단하시는 건지···”
공손한 말투이지만, 조금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감독은 한 번 허허- 하고 난감하게 웃더니, 의자를 당겨앉았다.
“연기실력으로 따진다면, 지금보다 10년 이상의 연차들과 대 놓아도 좋을 실력인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구상하는 이방원이라는 캐릭터에 필요한 건…”
“…”
“대사와 대사 사이에도 좌중을 압도할 만한 ‘존재감’이거든요.”
존재감, 이라는 단어에 유명이 흠칫 놀랐다.
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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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조금 이야기를 해볼까요. 대본 얘기를.”
감독이 손짓했고, 유명이 가까이 다가 앉았다. 열정적인 연기로 목이 탔을 배우에게 그는 차 한잔을 따라주었다.
국화차 향기가 향긋했다.
“우리 신배우는, 태종 이방원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상이 어떻습니까?”
그래도 한 가지 바뀐 것은, 신’배우’라는 호칭. 그가 장래가 유망한 젊은 배우를 푸근하게 내려다보며 질문한다.
유명은 잠시 려말선초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지만, 관심분야가 아닌지라 희미했다. 그냥 제가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짧은 답을 내놓았다.
“강력한 통치자이며, 제 형제를 죽이고 옥좌에 오른 비정한 정치인. 그리고 세종대왕의 아버지 정도입니다.”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좀더 자세히 부연하자면,”
홀짝-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일단 제가 보는 이방원은, 문무를 겸하여 우수한 자질을 가진 인재이자 정치감각에 있어서는 이 땅의 역사 전체로 봐서도 손에 꼽히는 천재입니다.
17세에 과거에 최연소로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하다가, 22세가 된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개경에 억류된 가족들을 피신시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성계의 가문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죠.”
“26세, 신배우와 비슷한 나이에 이방원은 친모상으로 여묘살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누운 틈을 타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측근들을 제거하려 하자, 형제들 중 혼자 시묘를 박차고 나와 이성계를 데리고 개경으로 옵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과 대담함.
“그리고 동방이학의 시조라 불리던, 모든 학자들의 존경을 받던 거인 정몽주를 노상에서 처참하게 죽이도록 명령하죠. 그것도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인물이 한 일이라기에 더욱 오싹한 기분이 든다.
“이성계는 끝까지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원은 아버지의 오랜 벗이자 본인에게는 학문적 스승이기도 한 고려말 최고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을, ‘본인과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망설임없이 제거합니다.”
“…”
“왜 암살이 아니라 훤한 노상에서 그를 살해할까요?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정몽주의 살해가 쉬쉬될 경우 본인의 공은 묻히고 아버지의 미움만 살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 죽였다는 해석을 나는 지지합니다.”
업적으로든, 악명으로든 역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인물.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종이 집권하기까지의 역사는 피로 얼룩져 있어요. 필요하다면 형제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옥좌를 뺏고, 외척을 몰살시킬 수 있는 인물.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성품이 원래 잔인해서라고 생각지 않아요. 자신에게 반발하는 신하들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관대하거든요.”
원래 잔인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그의 야심이 나라를 뒤덮을 정도로 강렬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하며, 그 목적까지 가는 길을 지나치게 잘 알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는, ‘강력한 자아’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감독이 긴 설명 끝에 결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