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18
{성인이 된 후에는 수호력이 점점 약해져서 죽어야 마땅했을 인간이었지. 그런데 연기를 시작했구나. 그리고 일반인들보다 더욱 진한 배우들이 뿜어내는 생기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어.}
{네.}
{그 때, 뭔가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아주 여리고 작은 기운이 거대한 기운을 극복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다른 기운의 흔적을 조금 제 몸에 흡수하게 되었어.}
혜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데···
{믿기 어렵군요…하지만 그런 거라면 그 능력이 왜 이제야 발현된 겁니까.}
{원생에서도 그 능력이 있었을 거다. 기운이 워낙 미약했었고,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 네가 인지하지 못했던 거겠지. 그리고 돌아온 생에서는 그때만큼 절박하지는 않아서 조금씩만 흡수되고 있다가, 이번에 ‘원생과 비슷한 종류의 노력’을 하면서 다시 크게 발
휘된 모양이구나.}
유명이 ‘원생에서처럼 존재감을 펼치려는 노력’을 해보겠다고 다짐하던 것을, 혜호는 떠올렸다.
{그런 일이 정녕…가능한 겁니까.}
화호는 한 번 한숨을 쉬더니, 아들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인간의 의지란 참으로 대단하구나. 혜호야,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이 가니. 개미가 사람의 발에 밟혀서는 그걸 이겨내보겠다고 몸에 힘을 잔뜩 주고 버티는 거야. 심지어 도망갈 수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도대체 왜.}
{그래, 그 개미한테 왜 도망가지 않니? 라고 물었단다. 개미가 뭐라고 하는지 아니.}
{……}
{연기를 좋아해서요, 라고 대답했단다.}
알고 있었다.
유명의 삶을 플래시백으로 돌려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하루하루를 극복하며 15년간을 버텨왔을 줄은.
{모르는 게 당연하단다. 어미도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기도 가지지 못한, 그저 시름시름 앓다 죽어갔어야 마땅할 인간이, 가장 기운이 강한 인간들 사이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텨왔다니…대단한 건지 미련한 건지.}
그리고 그녀가 충격적인 한 가지 사실을 더 밝혔다.
{그런데 말이다, 재밌는 것은···}
{…?}
{그의 어리석은 고집이 그를 살려왔다는 것이지. 원생에서 그가 병에 걸려 있었던 걸로 알고 있지?}
{네. 간암이라고···}
{그게 아니야. 생기로 채워져야 하는 장부인 간肝. 생기가 부족하기에 텅텅 비어있는 부분들이, 그가 연기하며 조금씩 흡수한 생기들로 얼기설기 보수된 거지. 그 비정상적인 형태를 보고 오진한 것 같구나. 아마, 일반적인 암과는 형태가 다르다고 했을 것 같은
데.}
혜호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살짝 비틀거렸다.
{그럼, 그는 그 때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겁니까.}
{계속 괴로움을 참으며 연기를 했다면, 연기를 하는 동안은 살아있었겠지. 실로 대단한 의지이고, 가엾은 아이로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귀는 머리속에 맴도는 마지막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그렇다치고, 저는 왜 가엾다고 하신 겁니까.}
{…내 아들.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세상 다정한 내 아들.}
화호는 말없이 혜호의 옆으로 다가와 그를 감싸안았다.
{윽, 갑자기···}
{어미는 생각보다 자식을 잘 아는 법이란다. 나는 네가 걸어갈 방향을 알 것 같구나.}
{…그게 무슨.}
{그게 우리 모두에게 너무 슬픈 결말이 되지 않도록…기도하마.}
그리고 그녀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돌아가렴.}
{…?}
{선계, 그 개자식들이 흉계를 꾸미겠구나. 이미 감추기에는 일이 너무 커지지 않았니. 적어도 결정은 그놈들이 아닌, 너나 그 아이가 해야지.}
화호의 언질에, 앗차한 혜호가 다급히 일어섰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는 빛이 되어 다시 동쪽으로 몸을 쏘았다.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끝
ⓒ 글술술
유명은 오늘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이 녀석은 어디갔지···’
엊그제 야간 촬영을 마치고 들어오면서부터 미호가 보이지 않더니, 어제도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원체 신출귀몰한 녀석이지만 잠은 보통 유명의 곁에서 자는 편이었던지라 괜히 허전하다.
그는 기지개를 쭉- 켠 후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호텔방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낯선 도심의 오전풍경이 내려다 보인다. 이름만 호텔이지 모텔에 가까운 숙소의 침대는 한 쪽이 꺼져 있어, 결코 편한 잠자리였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컨디션이 좋다.
에너지드링크에 목욕을 한 느낌이라고 할까.
똑똑-
노크가 들린다. 옆 방을 쓰는 한성인가 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형.”
“잘 못잤어. 으으, 여기 침대 엄청 삐걱거린다. 너는 잘 잤어?”
“네! 엄청 푹 잤습니다!”
“나이에 장사 없구나.”
그들은 근처의 아침식사가 되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든든히 했다.
“네 장면 촬영 들어가는 것도 얼마 안 남았네?”
“넵. 이틀 남았어요.”
“엑스트라로 참가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네. 하루는 쉬면서 캐릭터 다시 정리하고 대사 쭉 훑어보려구요. 형 컨디션 요즘 최상이던데, 대치 장면에서 안 밀려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유명의 말에 한성이 실실 웃었다.
“됐거든? 맨날 같이 연습해서 다 아는데 엄살은.”
“정말이에요. 본촬영 들어가니까 더 잘하시는 것 같아요.”
유명은 진심으로, 한성의 연기가 물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사한 이후로 얼굴의 그늘이 많이 걷힌 한성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빠르게 극복해냈다.
소탈하고 털털한 동네 형 같은 배우는, 정몽주의 탈을 쓰고 나면 지극히 세련되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당대 정점의 외교관이라는 타이틀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오늘은 어디 투입돼?”
“종친회요.”
“아, 그러게. 그게 오늘 군중씬이겠네.”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전주에 존재하는 이씨 문중에 들른다.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황산대첩에 참여한 정몽주는 그를 따라 들른 이씨 종친회에서 이성계의 속내를 읽고 만다.
이성계가 종친들을 앞에 두고 한고조 유방의 「 대풍가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망해가는 고려왕조를 의식한 것임을 눈치챈 것.
정몽주는 이 때 처음으로 이성계가 야심만만한 인물임을 눈치채고,
말을 달려 고덕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쓰러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를 읊는 것까지가 오늘의 예정된 촬영.
“오늘 승마 하셔야겠네요.”
“음…아직 말 다루는 게 익숙치 않아서 걱정이야.”
“화이팅입니다!”
공기가 상쾌하다. 컨디션 또한 너무 좋다.
왠지 오늘은 모든 촬영이 잘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유명은 촬영 중 첫 NG를 내게 된다.
*
“종친회 씬 리허설 하겠습니다. 준비 다 되신 분들은 이 쪽으로 모이세요~”
오늘도 열일하고 있는 분장팀은 수십 명의 분장을 한꺼번에 치루어내고 있었다. 유명도 이제 제법 친해진 분장팀 막내에게 잠시 얼굴을 맡긴 후 조연출이 지정한 장소를 향했다.
그 곳엔 오목대라는 현판이 걸린 커다란 누각이 있고, 양옆으로 날개처럼 벌린 자리배치 사이에 거대한 상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이성계의 주안상이었다.
누각 아래에는 새하얀 백저포(*白紵袍: 고려시대에 입었던 흰색의 포), 머리에는 문라건(*고려 시대 남자들이 머리에 착용하던 유건 형태의 쓰개)을 쓴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다. 세를 형성하고 있는 문중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상당수의 인원이 동원된 것.
유명은 그들 사이에 스르륵 몸을 섞었다.
“문중 어른과 이성계가 대담을 나눌 동안, 나머지 분들은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잡힐 겁니다. 처음 이성계가 도착했을 때 다들 부복하여 인사하는 부분부터 연습해 보겠습니다-”
“네-”
그들은 누각 위로 올라가 지정된 위치에 앉았다. 그리고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감독은 엑스트라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교정해 준 후, 문중 어른 역의 단역배우와 배거형(*이성계역)의 대화까지를 자세히 코칭했다.
유명은 한쪽 구석, 카메라 구도상으로는 등만 보이는 위치에 앉아 고요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몸에 대한 집중도가 높은 것 같았다.
“촬영 시작할게요- 모두 움직이지 말고 대기!”
조연출이 마지막으로 지시를 내리고 옆으로 빠졌고, 감독은 모니터를 들여다 보다가 쉰 듯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3,2,1. 액션!”
손감독은 피곤에 절은 눈빛으로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다가도 다음날 대본의 대사가 머리속에 아른거리면 벌떡 일어나 대사를 고치기가 여러 번이었다.
그가 무리하는 이유라면 역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욕심 때문.
모니터 안에서 그의 배우들이 노닌다. 이제 몇 달 후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성계가 새하얀 백저포를 입은 무리를 앞에 두고 호방한 시조를 읊는다. 한고조의 이다.
“큰 바람이 불어오니 구름이 날리네. 大風起兮雲飛揚
천하에 위세를 떨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도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어찌하면 용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 것인가. 安得猛士兮守四方”
배거형은 정말로 이성계에 안성맞춤인 배우다. 그 듬직한 덩치도, 공기를 진동시키는 낮은 목소리도, 기개와 우직함이 가득하면서도 눈썹이 살짝 쳐져 정에 약한 느낌을 주는 부분마저도.
그의 호방한 목소리에 감화된 감독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화면의 무게중심이 기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
지금 화면의 구도는 이성계가 좌상단, 고개숙인 문중 집단이 우하단에 놓여있었다.
비스듬한 사선으로 잡힌 구도는 좌측이 반역의 메타포를, 상단이 즉위의 메타포를 상징한다. 따라서 ‘1인 대 집단’의 구도라 해도, 무게중심은 이성계쪽으로 완연히 쏠려있었다.
그런데, 구석에 엎드린 하나의 등이 신경쓰인다.
뭔가가 뿜어져 나오는, 지금 당장 마루바닥을 딛고 몸을 날려 이성계의 가슴에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흉흉한 기세.
‘의도한 적 없는 그림인데…저건 누구지···?’
“NG! 잠시만요.”
NG가 나자 엑스트라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씬에서 NG가 반복되는 것은 흔한 일이기에 다들 별 생각없는 표정들.
그리고, 감독이 지켜보던 등이 고개를 들어올리고,
‘아니···!’
감독은 그 얼굴에 경악하고 만다.
그것은, ‘존재감 발산 연습’을 부탁했고, 자신이 기특히 보아 허락했던,
하지만 달라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신인배우의 얼굴이었다.
*
“한 번 더 갑시다-”
“한 번만 더요-”
감독은 그 장면을 두 번 더 NG를 낸 후, 잠시 쉬는시간을 갖자고 공지했다.
그리고 촬영감독을 불러 그 부분을 다시 돌려 보여주었다.
“뭐가 마음에 안드세요?”
“이 부분, 화면 무게중심이 기울지 않아?”
“음…묘하게 그러네요. 리허설때 괜찮았는데 왜 본촬영 들어가니까 느낌이 바뀌지···? 화면 설계 다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