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0
*
“미호야.”
그의 목소리에 연귀가 동작을 멈췄다.
인간화된 자신의 모습이 낯설 텐데도 조용히 부르는 저 목소리는, 다 알아버린 느낌.
어떻게···? 자신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그는 들을 수 없을텐데···?
{신유명, 내 목소리 들려?}
“응, 들려. 저분들 목소리도…들려. 모습도 보이고.”
생기를 흡수할 수 있게 되면서, 감지능력까지 개화한 모양이다.
잠시 머리 속이 복잡해 말문이 막힌 연귀는, 곧 생각을 툴툴 털어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당사자가 결정하는 게 맞겠지.
{그래. 어디부터 들었는데?}
“네가 도착해서 저 분들이 나가 떨어졌을 때…그 때 큰 소리가 나서 깼어.”
{차라리 잘 됐네. 상황은 대충 이해했겠고…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유명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대답을 하지 않자, 연귀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저 놈들을 돌려보내고, 너는 그대로 생기를 흡수하다가 우화등선한다. 이게 가장 크게 엿을 먹이는 방법이지. 이걸 선택한다면 다른 놈들이 또 저지하러 오겠지만, 내가 최대한 막아주겠다.
아니면 그냥 바로 천계에 고발하는 방법도 있다. 너한테 별로 떨어지는 건 없을 거고, 증인으로 불려갈 수 있어 귀찮겠지만, 그래도 정의구현은 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듣고 한 쪽 구석에 찌그러져 입을 닥치고 있던 도깨비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러면, 연기는 계속할 수 있어?”
유명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그것이었다.
연귀는 그의 질문에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 얘기하면서도 그가 이 방법들에 찬성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신선이 되든, 천계에 증인으로 소환되든, 연기를 할 수 없을 테니까.
천계와 선계의 시간의 흐름은 이곳과 다르다.
그 역시, 반半선계에 잠시 머물렀는데도 벌써 이틀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가.
“그리고 너는?”
{…나?}
“그런 방식을 택하면 우리의 계약은 어떻게 되는데?”
{…소멸되겠지. 둘은 별개의 문제라 따로 보상해 주진 않을거다. 내 꼬리는 간단히 보상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뭐, 어쩔 수 없지.}
“왜?”
{…?}
“왜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유명은 조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2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온 꼬마 미호의 인간화한 모습은 친근한 듯 낯설었다.
그를 경계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차라리 목숨을 수십 년 달라고 했으면, 팔 한 쪽을 잘라달라고 했으면, 이 생이 끝난 후 영혼을 달라고 했으면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 수가 없으니까, 당장이라도 연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을 모두 뺏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자신을 지켜주었다.
뻔한 이득을 앞에 두고도,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계약이 수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말해주었다.
…애초에, 가망 없었던 제 인생에 손을 내민 것도 미호 뿐이었다.
“그쪽 분들, 지금 제 생기가 몇입니까?”
유명이 자신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질문하자, 놀란 도깨비가 허겁지겁 죽간을 확인했다.
==발현된 이능과 이능으로 인해 습득된 생기(15)==
{어어…이능으로 습득된 생기 15에 본연의 생기 29, 연귀와의 계약으로 취득한 생기가 30. 총 74입니…이노라.}
그들은 저도 모르게 뱉으려던 존대말을 겨우 삼키고 어설픈 어미를 덧붙였다.
’70대 중반이라, 류신 선배와 비슷한 정도···아주 말도 안되는 값은 아니군.’
유명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흡수한 생기는 건드리지 않고, 흡수하는 능력은 거둬가는 걸로 정리하시죠. 여기서 더 생기를 흡수해서 신선이 되는 건 저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아니, 왜···}
{그건 좀···}
연귀가 마음에 차지 않는 듯 반박하려고 했고, 도깨비들도 곤란하다는 듯 말꼬리를 늘였다.
“이것도 많이 양보한 겁니다. 원래 부족했던 생기를 제외하고도, 15년간 그렇게 발버둥을 쳤으면 원래 쌓였어야 하는 생기도 15 정도 될테니, 그 정도는 받을 자격이 되고도 남겠군요. 그쪽 상관에게 전하십시오. 마음같아선 뒤집어놓고 싶지만, 지금 내게 정말
중요한 걸 잃을까봐 타협하는 거라고.”
도깨비들이 수군거리더니 통신구를 꺼냈다. 책임자에게 연락하는 모양이었다.
연귀는 이를 악물며 유명에게 속삭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미호. 넌 내 몸을 가져서 직접 연기를 하고 싶은거지?”
훅 들어오는 어퍼컷에 연귀가 움찔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깨비들은 통신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부지런히 죽간의 내용을 수정하더니, 유명에게 말했다.
{거래…받아들이겠다고 하신다. 여기 서명하면 된다.}
“흡수한 존재감이 내게 완전히 귀속되는 것은 당연할테고, 앞으로도 보통 사람들처럼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존재감을 키울 수도 있는 거겠죠?”
{물론이노라. 1년에 1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너의 성취에 따라.}
“그 쪽은 못 믿겠고, 미호가 확인해줘.”
여전히 말이 없는 연귀가 죽간을 받아들고 슥슥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신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유명이 빨간 가루를 묻혀 지장을 쾅- 찍었고, 그들은 죽간을 챙겨 허겁지겁 떠났다.
*
“너, 이렇게 생겼었구나.”
유명은 냉장고에 들어있던 맥주를 따서 은발의 미남자 앞에 놓아주었다. 그는 목이 탄 듯이 그것을 꿀꺽꿀꺽 비웠다.
“엄청 아름답게 생겼네.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야.”
{도대체…무슨 의도냐.}
“어?”
{신선이 되기 싫고, 선계의 일에 얽히기 싫다는 건 이해하겠다만, 생기를 더 달라고 해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을 거다. 내가 준 30은 이미 네게 귀속되어 있으니, 네 생기를 50 이상으로 만들어달라고 하면 나와의 계약문제도 해결되었을텐데.}
“아…역시, 네가 준 존재감이 내 것보다 많아지면 몸이 넘어가는 거였나 보네.”
연귀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입으로 자백해버린 셈이 되었다.
“미호야, 너도 나만큼 연기를 하고 싶은 거지···”
유명의 목소리가 나즉하게 울렸다. 추궁하는 톤은 조금도 없는, 다정한 음성으로.
“너같이 대단한 존재가 나에게 원하는 게 뭘까 했는데 이제야 깨달았네. 타고난 생기가 부족해서 네가 주는 생기가 더 많아질 수 있는 인간, 연기에 목마른 나머지 너와의 거래를 받아들일 인간, 그게 나였구나.”
연귀는 대답없이 애꿎은 맥주캔만 우그러뜨렸다.
“비난하는 게 아니야. 너에게도 엄청난 희생이라는 그 금빛꼬리, 그것까지 사용해서 나를 과거로 돌려보냈잖아. 네겐 하찮았을 인간의 껍데기를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려고 한 걸 보면, 너는 얼마나 연기를 갈구했던 걸까…”
‘연기를 갈구하는 심정’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그였다.
“그리고, 어쨌든 너는 내 은인이야. 결국은 네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원래도 그랬는데, 오늘은 더 큰 빚을 졌네.”
{설마…일부러 네 존재감이 50을 넘지 않도록만 받은 거냐?}
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내 몸을 네게 줄 생각이야.”
{이 바보같은-}
“그런데 미호야. 부탁이 있어.”
간절한 눈빛.
목이 마른 듯한, 매달리는 듯한 눈빛으로 그가 말한다.
“네가 내게 준 15년의 시간 중 절반, 내가 서른이 될 때까지만…연기하게 해 주면 안 될까?”
*
유명이 내놓은 말을 듣고, 연귀가 눈을 흡떴다.
“그리고 몸을 가져간 이후에도 내 의식은 보전해 줬으면 좋겠는데.”
{너 지금…네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 얘기냐?}
“응. 네 안에서라도 연기하는 걸 보고싶어. 에서 그르누이 연기할 때 정말 잘하더라.”
{그거, 감옥을 의미하는 거다. 나와 달리 너는 그 몸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알아. 그렇더라도···”
연귀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2년간 같이 살아와서 안다.
신유명은 기본적으로 선량하긴 하지만, 제게 이득이 없는 상황에선 단호히 거절하기도 하고, 불합리한 상황에선 직설적으로 맞붙기도 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연기 한 가지에 있어서만은 맹목적일 정도의 집착.
그 집착을 버리는 제안과,
그 집착이 여전한 부탁을 들으니 머리가 띵해지려 한다.
{…대체 알고는 있냐. 지금 네가 100% 유리한 상황인 거.}
“어?”
{네 존재감은 방금 44가 됐지. 내가 너한테 준 건 아직 30이고. 즉, 앞으로 나와 거래하지만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연기할만큼 하다가, 나이들어서 죽음에 이르면 어차피 우리 계약은 해지야. 네가 인人의 껍질을 벗는 날부터 그 계약서는 효
력을 잃으니까.}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그런 미련한 제안을 ‘부탁’이랍시고 하는 거냐.}
“네가 내 은인이니까.”
여태 의도를 가지고 그를 작업해온 것이 민망할 정도로, 맑고 곧은 시선.
연귀는 망설이더니 한 가지의 얘기를 더 꺼냈다.
{너, 간암이 아니었다.}
“…뭐?”
차분하던 유명의 표정이 그 말에 처음으로 흔들렸다.
{지금 발현된 생기를 흡수하는 능력, 원생에도 있었다더라. 그게 영향을 미쳐서 간이 그렇게 된 거였다고 하더군. 나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걸 알았으면 네 결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따라서 이건 공정계약이 아닐지도 모른다···}
연귀는 엄마에게 들었던 유명의 특이한 상태를 주욱 설명했다.
그 얘기를 모두 듣고 유명은 조용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렇다해도 내 선택은 같았을 거야.”
{…과연 그랬을까.}
“응, 어차피 그대로 살았으면 연기를 제대로 못했을 거라는 거잖아. 그 때도 거의 한계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어. 아마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연기를 포기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겠지. 그러니…알았다 해도 나에겐 이 선택밖에 없었을 거야.”
{……}
작은 창문으로 달빛이 한 점 들어왔다.
가늘고 풍성한 은발에 달빛이 흘러내리는 것을 감상하며, 유명이 다시 말했다.
“너는 너한테 이득이 되는 상황들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충실히 나를 도와줬어. 지금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솔직하게 알려줬고.
{…그건-}
“고마워, 진심으로. 네 의도가 어떠했던 나는 네게 구원받았어.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지금 빚을 받아가겠다고 해도, 나는 거부하지 않을 거야.”
연귀가 그림같이 아름다운 입술을 꼬옥 물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고,
그는 겨우 대답을 꺼냈다.
{…5년 후에 생각하자.}
“…?”
{나도 너무 오래 기다려왔던 거라, 그냥 포기하겠다는 말이 도저히 안 나오네. 네 부탁을 받아들여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다시 생각해 보겠다. 그 때까지 좀 더 나를 재밌게 해봐라. 그럼 또 모르지.}
그의 말을 해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이해한 유명이 조금 울컥하여 그를 바라보았고,
쉬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