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1
은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미남자는 순식간에 미호의 모습으로 변했다.
{뭐…지금까지 재미없었다는 건 아니당. 흠흠. 비켜랑 잘거당.}
쑥쓰러운지 벽에 바짝 붙어 꼬리를 마는 미호를 보고, 유명의 시선이 따스해졌다.
“인간형도 멋있었는데, 역시 이 모습이 귀엽네.”
{시끄럽당. 잠이나 자랑.}
“…고마워.”
유명은 이불 자락을 끌어올려 귀퉁이로 미호를 덮어주었다.
달빛이 덧이불처럼 그들을 한번 더 포근히 덮었다.
끝
ⓒ 글술술
다음날, 유명은 늦잠을 잤다.
전날 새벽까지 불청객을 치루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영화팀과 계약이 되어 있는 밥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온 유명은, 5월 말의 햇살을 받으며 공원 벤치에 앉았다.
내일, 이방원으로서의 첫 촬영을 위한 대본 연습이었다.
아쉽게도 한성이 없다.
상대역을 상상하며 대사를 쳐볼 수도 있지만, 오고가는 리액션이 있는 것보단 실전감이 덜하다. 눈으로 주욱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유명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미호.’
{왱?}
‘나, 대사 연습 좀 도와줄래?’
{연습? 글쎙···}
새침하게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커다란 귀가 팔랑팔랑거린다. 녀석이 틱틱거릴 때는 귀를 보면 된다. 희한하게 귀가 본심을 얘기해주는 녀석이니까.
‘부탁해. 혼자 하려니까 몰입이 잘 안 돼서 그래.’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야.}
미호가 벤치로 휙- 다가와 옆자리에 착지한다. 유명은 미호에게 대본을 보여주었다.
‘여기, 씬 30부터.’
{방원과 몽주의 다담(*茶談: 차를 마시며 대화함)} 씬이냥?}
‘응.’
시나리오는 현재와 회상이 반복되는 구조를 띤다.
뼈대가 되는 것은 정몽주와 이방원의 다담.
이성계의 병문안을 온 정몽주는 ‘제자’ 이방원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고 다담에 초대받는다.
초대하지 않았다면 일부러라도 이방원을 불러낼 계획이었던 정몽주는, 얼씨구나 하고 방원의 초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후원의 별채에서 그들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와 대화 사이에 과거가 삽입되는 구조로 이 영화는 진행된다.
‘다담 파트가 제일 어려워. 클라이막스기도 하고…스승님에 대한 존경, 정적에 대한 견제, 인재에 대한 욕심, 모든 상황을 궤뚫고 있는 장악력, 그 모든 걸 서서히 드러내주어야 하니까.’
{내일 이 파트 찍냥?}
‘아니, 이 파트는 가장 마지막이야. 촬영은 연대순으로 진행되거든.’
손감독은 촬영을 연대순으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명나라 황실처럼 해외 로케가 필요해서 한 번에 모든 촬영을 끝내야 하는 경우나, 까메오 배우가 출연해서 한꺼번에 촬영해야 하는 피치못할 경우를 제외하고.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촬영하는 것이, 변화하는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그런데 왜 여기를 연습하려공?}
‘다담 씬들이 이방원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니까. 이쪽을 잘 벼려두고 가야 어린 시절을 연기할 때도 느낌이 살 것 같아서 그러는데…왜, 잘못됐어?’
유명이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며, 그의 의견을 구한다.
연기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눈 앞에 있다.
{아닝, 좋은 생각이당. 대사 시작해랑.}
‘그래.’
“스승님을 처음 만난 곳이 이 방이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왜 나지 않겠나.}
“그 때 스승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목적은 확고하게, 시선은 흔들림없이, 행동은 단호하게. 목표를 위한 수단이 결벽하지 않더라도 취하는 것이 현실 정치다.”
{……}
“실제로도 그러셨지요. 왜에 다녀온 후에는 마음이라도 정리하신 듯이, 경멸하는 자들과도 술잔을 나누셨으니.”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을 나는 후회한다네.}
미호가 대사를 읽을 때는,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공간에서 울려나오듯이 공기가 진동하여 소리를 낸다. 그것은 미호의 목소리톤을 띠면서도, 황홀할 정도로 정몽주라는 인물이 전해져 오는 음성이었기에, 유명은 음미하듯 그것을 귀에 담았다.
그는 ‘허락해 준’것 치고는 제 일처럼 아주 열심히, 유명의 상대를 해주었다.
*
배거형, 민경국, 김진범.
세 명의 배우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 그들은 일찍 촬영이 끝났다. 한성만 아직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거형의 호텔방에 모여 소주를 깠다. 한달이 넘게 진행된 강행군에, 가끔 이런 낙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감독님, 이번엔 더 예민하신 거 같아요···”
정도전 분의 민경국이 지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은퇴 생각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지. 민배우 그래도 엄살 부리는 거 치곤 잘하던데?”
배거형이 그를 도닥이듯 말했고,
“형님은 쪼면 쫄 수록 좋아지니까 자꾸 쪼시는 겁니다. 저 보세요. 쪼아도 변하는 게 없으니까 이제 안…쪼는 건 아니구나, 덜 쪼시잖습니까.”
김진범이 웃으며 농을 쳤다.
그들은 모두 10년 넘게 알아온 사이였다.
작품을 함께 하기도 했고, 배우들의 소소한 친목 모임에 공통으로 발을 걸치고 있는 곳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치욱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다. 그 이름은 그들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극한의 압박을 견뎌냈다는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
“와…오늘은 진짜, 20년 전에 감독님 작품으로 데뷔했을 때만큼 쪼였다니까요. 정신력 게이지가 바닥을 쳤네요.”
“마셔. 그런 날은 술이 최고지.”
배거형이 그에게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그것을 단숨에 마신 민경국이 언뜻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우리팀 막내의 데뷔일이네요. 울지는 않으려나···”
“안 울걸. 나이는 어리지만 강단이 보통이 아니야. 그 때 리딩할 때 눈빛 봤어?”
김진범이 실실 웃으며 거든다.
“울지는 않아도…한 번 쯤은 튄다에 한 표. 감독님 스타일 처음 당하면 장난 아니잖아요.”
“튄다는 거 네 얘기지? 손감독님이랑 처음 일할 때, 촬영 중에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어본 거 같은데.”
“아, 형님!! 그런 헛소문…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흐흐. 와, 진짜 그때 죽을 뻔 했어요.”
배거형은 마흔다섯, 민경국은 마흔둘, 김진범은 윤한성과 동갑인 마흔이다.
번듯한 중견배우이지만, 여기에서는 막내뻘인 김진범이 능글거리며 동의했다.
“근데, 어린 친구가 참 대단해. 결국 엑스트라 몇 번 한 거지? 마지막에 쫑난 거 빼고 15번?”
“그 쯤 될걸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마지막에 감독님이 칭찬하셨다는 말이 있던데, 하필 그 때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못봤네.”
“감독님이야 당근도 채찍도 잘 주시니까요.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아주 그냥···”
“큭큭.”
진범이 눈을 반짝이며 내기를 제안했다.
“내일 막내의 첫 테이크, 몇 번만에 오케이 나나 내기 한 번 어떻습니까.”
“에이- 무슨 그런···”
“난, 8번!”
오늘 같은 장면을 평균 6회씩 다시 찍었던 민경국이 냉큼 답했고,
“저는 5번요, 잘하는 친구기도 하고, 첫날이니까 감독님도 좀 살살하시지 않을까요?”
이건 김진범의 말.
그리고 난 됐어- 하고 손을 휘젓던 배거형이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다.
“난 10번···”
“……”
“흠흠. 아니 이방원에 기대가 워낙 크시더라고.”
손감독의 스타일상 신인배우가 겪을 고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너도 당해보면 우리맘 알거라는 약간의 심통이 교차한 내기.
그들은 제시한 숫자에서 가장 먼 사람이 다음 술자리 때 소주를 사기로 하는 소박한 내기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물론 세 숫자 중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
첫 촬영일, 날씨는 맑음.
성균관 학당으로 나올 건물 앞에 촬영 인원들이 가득 몰려있었다.
한성은 그 무리 중, 유명을 아주 쉽게 발견했다.
‘음···?’
이상할 정도로, 요즘 유명의 모습이 눈에 잘 띈다. 굳이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쏙쏙 들어왔다.
그는 이미 분장을 마친 상태였다. 새하얀 백저포에 머리에 두건을 쓰고, 두건 양 옆에는 깃을 꽂았다. 열여섯 살의 이방원. 기골은 이미 성인이지만 얼굴에 드러난 기색은 아직 치기만만한, 앳된 기색이 잘 반영된 분장이다.
이제까지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탁으로 이방원의 나이가 12세에서 14세에 이르는 동안 그를 가르친다. 그의 명민함, 자신과 닮은 우수하면서도 유연한 자질에 흥분하여, 그를 수제자로 길러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1380년,
황산대첩에 종사관으로 참전했다가 이성계가 방문한 고향 전주의 종친회에서 그의 야심을 눈치챈 정몽주는, 이방원의 개인과외를 핑계를 대고 그만둔다.
이방원을 키우는 것이, 곧 이성계를 돕는 일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영문을 모르고 그와의 사제관계에서 내쳐졌던 소년 방원은, 1382년,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소한다.
그리고 어린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그의 스승이 성균관에 특강을 나왔을 때, 2년만에 그들이 조우하는 씬38이 오늘의 첫 촬영장면이다.
“정몽주 강의 장면부터 가겠습니다. 배우들 자기 위치로 가주세요~”
유명과 같은 백저포에 두건 차림의 배우들이 우르르 자리에 앉는다.
현재의 학교와는 달리,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이 섞여있는 유생들의 집단. 그 중에서도 방원은 가장 어린 축이지만,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기백과 여유는 누구못지 않아야 한다.
한성이 관복 차림으로 학생들의 앞쪽에 앉았다.
손감독이 다가와 한성에게 이런저런 디렉팅을 했고, 곧 유명의 앞에도 다가왔다.
“방원 입장에선, 가장 믿고 존경하던 스승이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을 버렸던 겁니다. 지난 2년간 수많은 생각을 했겠죠. 무슨 일이 있으신가, 찾아가 볼까, 내가 뭘 잘못했나…상대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설득시키는 시도를 계속해오면서, 그의 성격이 성립되었
어요. 상황을 조감하듯이 바라보는 시야와, 정에 미련두지 않는 냉혹한 성품이.”
“네, 감독님.”
유명이 귀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배우가 처음 등장하는 이 성균관 씬은,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들끓는, 하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는 않는 자질 높은 어린 정치가의 면모가 잘 드러나야 합니다. 나와 처음 맞춰보니까 일단 합의된 동선만 지키면서 신배우가 준비한 걸
보여주고, 거기 맞춰서 디렉팅하며 수정하는 방향으로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자- 갑시다! 모두 스탠바이.”
웅성거리던 촬영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액션!”
특강이 벌어지는 곳은 나른한 햇살이 내려쬐는 누각,
앞에 선 것은 동방리학(*理學: 성리학)의 시조라 불리우는 대단한 학문적인 성취와, 명과 왜까지 드리운 외교의 업적이 빛나는 걸출한 인물.
그를 우상화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나는 가운데, 오직 한 명의 시선만이 앞의 상대를 가늠하듯이 냉담하다.
푸른 도포를 입은 정몽주는, 햇살과 그림자가 빗겨 지는 누각의 마루를 한 장 한 장 밟으며, 능숙하고 세련되게 『대학연의』에 관한 강독을 진행한다.
“군주가 ‘천도’를 대변하기는 하나 ‘군주이기에’ 혹은 ‘군주만이’ 그러한 하늘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군주 역시 하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부단히 수양과 노력을 해야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파악된다. 즉, 군주가 수양이 부족하거나 홀로 정치를 펴나
가기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재상과 신료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안정된 체제가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
왕 한 명의 변덕으로 인해 정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