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2
행정관들이 국가를 운영하며, 그들의 잘못은 간관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왕은 최종승인자로서만 존재하는 체제.
정몽주와 정도전이 꿈꾸어온 이상 세계를, 그는 강독(*講讀: 글을 읽고 그 뜻을 밝힘)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 나라의 미래들에게 강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이 유심히 내려앉는 것은 하나의 머리.
아니나다를까,
그 곳에서 스윽 손이 올라온다.
“질문하시게.”
정갈한 자세로 일어나, 스승에 대한 예의로 살짝 목례를 한 학생이, 반론한다.
“그러나, 신료들 위주로만 체제가 돌아간다면, 좋은 정책이 다수결이라는 미명 하에 사장되거나, 결론없이 논의만 지속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급변하는 정세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능력있는 지도자’와 ‘안정적인 행정체계’가 병행되는 체제
가 더욱 이상적이지 않겠습니까.”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 반론하는 거침없는 목소리.
방원과 몽주의 시선이 쩡- 하고 맞붙었다.
끝
ⓒ 글술술
유명은 시나리오 상에서 관찰되는 이방원이란 인물의 내면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나이 7세,
유난히 똘똘했던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개경에서 들려온 소문.
마치 동화같은 영웅담.
-개경에 정몽주라는 분이 계시단다.
그 분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오는 길에, 태풍으로 배가 난파를 당했다고 해. 정사를 포함해 12인이 죽고, 그는 바위섬에서 13일동안 굶주리며 사경을 헤멨지.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 분은 명나라 태조 폐하의 서신을 물에 젖지
않게 품 속에 간직하고 있었단다.
-우와, 정말이요?
-대단하시지? 태조 폐하가 이 소식을 듣고 그분을 구하기 위해 배를 보내셨지. 그분은 오랜 굶주림으로 피골이 상접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법도에 맞추어 하례를 드렸다고 해. 그것을 보고 명의 태조 폐하가 고려인의 충정을 극찬하셨다고 한단다.
동북면 화령.
고려인과 여진족이 함께 사는, 힘과 세勢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토착지에서 자란 똑똑한 아이에게, 소문으로만 듣는 화려한 수도 개경의 소식과, 걸출한 인물의 영웅담은 얼마나 짜릿하게 다가왔을까.
그 뿐이 아니었다.
방원의 나이 12세, 정몽주는 또 한번의 화려한 외교담을 추가했다.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비판하던 그는 파직된 후 귀양에 처해졌고,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지는 못했다.
그는 풀려난 해 9월, 사신을 자원하여 보빙사의 자격으로 왜에 건너간다.
당시 왜는 그야말로 야만인들의 소굴이란 인상으로, 사신들이 가는 족족 포로로 잡히고 처형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한 험지였다. 그의 정적들은 그가 사신을 자원했을 때 쌍수들어 환영한다. 아예 돌아오지 못할 것을 기대하며.
그러나 그는 이듬해,
포로와 노예로 실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돌아온다.
온 나라에 그의 영웅담이 흘러넘쳤다.
그가 규슈의 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로슌과 마주앉아, 두 나라 사이의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했을 때, 이마가와가 정몽주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탄복하였다는 소문,
일본인 승려들이 매일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의 시를 청했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이 사건이 그가 명망을 얻고, 중앙정치계에서 다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학식도 처세도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당대 최고의 인물.
방원은 그런 인물에 대한 수년 간의 동경을 혼자 갈무리하지 못했다.
10대 초반에 수도 개경으로 이사온 방원은, 아름답고 교양 넘치는 작은어머니 강씨에게, 정몽주에게 사사받고 싶다는 소망을 흘리고 만다.
-방원이에게 그런 소망이 있더군요.
-아무리 그가 선덕랑일 시절부터 나와 인연이 있다 해도, 어려운 부탁인데···
-지금 아이들을 맡고 있는 선생이 말하길, 방원이의 영특함이 가히 월등하다고 합니다. 좋은 스승을 모시면 성취가 남다르지 않을까요?
-허어, 우리 집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처음으로 나오려는가. 부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내 한 번 청을 넣어 보지요.
그녀의 도움과, 이성계의 요청으로 성사된 스승 정몽주와의 만남.
당대 최고의 학자와의 첫 만남에서 소년 이방원은 얼마나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을까.
그리고 그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개경의 가장 뛰어난 문관의 정곡을 찌르는 논리와 화술.
어리지만 영민하기 그지없었던 방원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기대와 지도.
저런 학자가, 저런 정치가가, 저런 인간이 되고 싶다고 그를 자신의 귀감으로 삼아갈 무렵,
어느날 그의 발길이 뚝 끊긴다.
작별인사 한 번 없이.
원망하는 마음이 치솟는 것을 꾹꾹 누르고, 14세의 소년은 스승이 가르친대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지.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스승과 자신의 관계마저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그 냉혹한 논리를 깨달았겠지.
오늘은, 이방원과 그의 인생에 커다란 발자국을 찍고 떠나버린 정몽주가 2년만에 조우하는 날이다.
원망도, 그리움도, 기대도, 실망도 모두 가슴 속에만 고이 묻어두고,
얼굴에는 외교관의 미소를,
혀에는 정치가의 논리를.
스승이 가르친대로.
*
정몽주가 이방원의 주장에 반박했다.
“『대학연의』에서는 능력있는 지도자가 안정적으로 배출되기 힘들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네. 실제로 송과 원의 황실을 보면, 몇 대에 한번씩은 ‘우군’ 혹은 ‘폭군’으로 기록되는 황제들이 등장하지. 황제의 능력과 품성이 미치지 못할 경우 만민이 고초를 겪게
되는 위험성을 논함일세.”
진덕수의 『대학연의』나 호안국의 『춘추해석』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해석에 따라서 자칫 불온한 사상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정몽주는 오직 강독일 뿐이라는 듯, ‘타국의 사례’와 ‘저자의 논조’라는 방패를 빌려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이미 접했던 이방원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장자세습제가 아니라 ‘검증된 왕의 재목’을 선발하는 장치를 두고, 선발된 왕세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책의 결정을 오직 합의에 맡긴다면, 당대의 신료들의 능력이 부족할 경우는, 혹은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울 경우는
어찌합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제도적 장치로 보완해야 할 것이네.”
“왕의 재목을 양성함에도 그런 제도적 장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계승권이 있는 왕족은 불과 몇이고, 벼슬에 오르기 위해 갈고닦는 선비는 수천 수만이지. 대체재가 있다는 점에서 후자가 더욱 안전하지 않겠···”
정몽주는 물 흐르듯이 반박하다,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한 번의 호흡 후, 다시 이었다.
“안전할 것이라는…주장이지.”
“저자의 주장입니까?”
나른한 햇살이 놀라 비껴설 듯,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했다.
“저자의…주장일세.”
“그렇습니까.”
방원이 다시 공손히 눈을 내려떴다.
“시비(*옳고 그름)를 가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강독중일세. 구절마다 토론을 하는 것은 유생들끼리 모여있을 때 하고, 우선 진도를 나가는 것이 좋겠네만.”
“예, ‘스승님’.”
여봐란 듯이 입에 담는 스승님이란 호칭에 조금 당혹한 표정을 지은 정몽주가 다시 한 번 방원에게 시선을 두었고, 그는 그 시선을 당돌할 정도로 피함없이 삼켰다.
그것이, 이번 씬의 마지막이었다.
“컷-”
손감독은 컷을 외친 후, 촬영감독을 불러 그 테이크를 다시 한 번 돌려보더니···
“오케이!”
감격한 음성으로 오케이를 외쳤고,
촬영장은 놀라움으로 뒤덮였다.
*
‘생각하던대로의…아니 그 이상의 이방원…!’
손감독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파들거렸다.
젊은 패기와 야욕이 가득한 인간.
하지만 그것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껍질로 슬쩍 감싼 인물.
너무나 타고난 기세가 강렬하여, 이미 정치 9단의 정몽주와 맞붙어도 파워가 밀리지 않는, 시퍼런 젊음이 눈 앞에 있다.
손감독은 살짝 저려오는 손을 풀며 유명에게 다가갔다.
“잘 했어…잘 했어요.”
“네 감독님. 감사합니다.”
“한달 내내 고생하더니 이렇게 완성시켜 올 줄이야. 나도 아직 멀었군요, 세상사가 대충은 내 통박 안에서 굴러갈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예상을 넘어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허허.”
“…아닙니다.”
유명은 조금 쑥쓰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생기를 추가로 득하게 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이방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그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하필 이 시점에 생기가 늘어날 것을 감독이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엔 놀라운 일이 아직 많군요.”
“……”
“그런데, 이방원의 캐릭터에 대해 함께 계속 논의해오긴 했지만, 이런 느낌으로 빠질 줄은 몰랐네요. 아, 물론 좋은 의미에서에요. 어떤 컨셉으로 연기한 건가요?”
“어…매끈하게 포장된 시한폭탄…이랄까요?”
감독이 좀 더 설명해달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난생 처음으로 동경하고 흠모했던, 하지만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인물을 마주하고, 뿜어나오는 수많은 터질 듯한 감정들에, 얇지만 견고한 포장을 하나 씌웠습니다.”
“어떤 포장이요?”
“…’사회적 태도’라는 포장입니다.”
사회적인 태도.
사교적인 웃음.
정치가는 절대로 ‘진심’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
진심을 내보이는 것이, 목표를 향한 수단이 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그의 스승이 그에게 가르친 것.
그래서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성장하여, 스승의 앞에 적으로 선다.
감독은, 매번 자신의 예상 이상으로 깊이 파고드는 젊은 배우를 보며, 자신의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설레기 시작했다.
*
“방금, 오케이라고…하셨지?”
“네···”
“와…저 좀 소름돋았어요.”
어제의 소주 3인방은, 모두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분장을 받던 중 신입의 첫 촬영을 구경하러 나온 배거형과, 오늘 촬영이 없는 민경국, 김진범.
첫 촬영인데도 차분히 등장한 신입은,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공손히 인사하였기에 등을 두드려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며.
그런데 본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첫 촬영을 원테이크로 끝내 버렸다.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웨이스트컷 딸게요!”
해당 씬의 다른 사이즈를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의 위치가 조정되는 동안, 손감독이 신유명에게 다가가 기쁜 얼굴로 어깨를 두드리며 뭐라뭐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은 그 장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민배우 손감독님과 첫 촬영 첫 씬때 몇 테이크였어?”
“어어…노코멘트입니다.”
“김배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