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6
일부러 말이 헛나온 듯이 집어삼키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힌다.
작은 체구, 고운 선, 자신의 반이나 될까 싶은 작은 여인.
그녀가 이씨 집안을 개경의 명문가로 만들기 위해 뒷바라지 해온 일들을 떠올리며, 내려다보는 이성계의 얼굴에 기꺼움과 애틋함이 가득 찬다.
“우리의 아들이지요! 내 부인이 얼마나 성심으로 방원이를 아끼고 뒷바라지 해왔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부인이 아니었으면 방원이가 개경에 온지 겨우 다섯 해만에 진사시와 과거급제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 부인의 공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저도 서방님께 아첨을 당했사옵니다.”
여전히 보드랍고 순한 음성이지만, 흘기는 눈 끝에 살짜기 색기가 묻는다.
받아치는 농 속에, 아양이 살짝 섞인 서방님이라는 호칭.
이성계는 흥이 한껏 고취되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긴다.
그녀가 모른척 살짝 뒤로 빼며 말한다.
“우리 방번이도 방원이처럼 똑똑하게 자라주면 좋을텐데···”
“부인이 이토록 현명하니 방번이는 더 우수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일엔 대비가 있는 것이 좋은 법인데···”
“대비요?”
후측면을 찍고 있기에 겨우 보이는 한쪽 눈커풀이 순진하게 깜빡깜빡거린다.
“지금 하나 더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민망하게 어찌 그런 말씀을···”
발갛게 달아오르는 볼과 덮쳐오는 거대한 형체.
그렇게 씬이 끝났다.
이방원의 성취를 칭찬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막판엔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교묘한 화술.
지아비를 짐짓 우러러보는 척 하며, 제 손 위에서 가지고 놀고 있는 요부의 대사.
그것이 이선하와 만나, ‘저런 천사의 분위기를 가진 요부라면 넘어갈 수 밖에 없겠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과연, 국내 최고의 극단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연극배우.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자신의 연기는···
유명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몸이 근질근질해져 왔다.
*
“아주 좋아요!”
씬41은 대사 타이밍과 동작 디테일을 한 번씩 교정한 후, 세 번째만에 바로 오케이가 떴다.
감정선은 교정이 없었다. 그만큼 두 배우가 좋은 연기를 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사이즈가 다른 컷들까지, 빠른 시간 내에 순조롭게 촬영이 끝났다.
“다음 씬 준비합시다-”
이선하는 바로 바깥으로 빠져 의상교체와 분장 수정을 서둘렀다.
씬 41과 씬 58 사이에는 5년의 갭이 있다.
과거를 급제한 이방원은 관직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어나가고, 강씨 부인은 이성계의 애총을 공고히 하며 개성 이씨가문의 실질적인 실력자로 암약한다.
그리고 1388년에 벌어지는 역사적인 사건.
‘위화도 회군’
명나라에서 고려의 땅이 된 철령위를 명나라에 복속시키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것을 외교로 풀려는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의 외교파와, 명에 맞써 싸우기를 주장하는 최영의 입장이 갈린다.
그리고 우왕은 최영의 편을 들어, 요동정벌을 명한다.
하지만, 전군을 통솔하여 북으로 향하던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수도를 공격한다.
이 반역에 가까운 작전을 수행하면서, 이성계의 걱정은 개경에 남아 있는 가족이었다. 가족들이 볼모로 잡히면 상황이 유리할 수만은 없게 된다.
그리고 방원은 비상한 머리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한 후, 때맞춰 개경의 식솔들을 이성계의 근거지인 동북면으로 빼돌렸다.
위화도 회군의 성공.
그리고 이제는 바야흐로 이성계의 시대
최영은 귀양을 갔다 참수당하고,
우왕은 허수아비 왕이 되었다가, 한 번의 발악 후 결국 폐위당한다.
그러나 아직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남아있다.
요동정벌군의 좌군 도통사였던 조민수와 명망높은 관료였던 이색이 손을 잡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위에 올린다.
명분.
이성계는 언제나 명분에 집착하였다.
그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아닌 보기좋게 양위받고 싶은 욕심이 있기에, 대업을 한 발짝 미룬다.
그 때, 이성계의 마음은 꽤나 부글부글 끓었으리라.
그리고, 이색은 창왕의 즉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명 황제에게 왕의 정통성을 승인받으러 명으로 떠난다.
이 때, 고려에 남은 이성계가 딴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동행을 요청하지만, 이성계는 본인 대신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라며 방원을 서장관으로 동행시킨다.
이번 사절에서 이방원은 사실상 인질.
씬 58은 이방원이 명나라 사신행을 떠나기 전, 강씨부인에게 인사를 드리며 벌어지는 씬이다.
“준비됐습니다.”
“신유명씨도 이리 오세요.”
“네, 감독님!”
이선하가 준비를 마치자 감독은 다음 장면의 디렉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나보다 내 시나리오 속 인물들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많은 요구는 안하겠습니다.
준비해온대로 보여주면 되는데 유의할 것은, 선하씨는 돌아서는 타이밍.
처음에는 옆모습을 보여주다가, 정체가 드러난 순간 드라마틱하게 돌아서서 얼굴 정면을 보이는데, 그 때 가면이 확실히 깨져야 해요.”
“네, 감독님.”
이선하가 조금 긴장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유명씨는 강씨부인을 옥죄는 느낌. 대등하게 맞붙는다기 보다는, 맹수를 상대로 덫을 치고 한 발 한 발 조여가는 느낌으로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켜야 합니다.”
“네, 감독님.”
유명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깊숙이 끄덕였다.
“그리고, 뒤쪽으로 갈 수록 서로의 대사와 대사 끝이 거의 물고 들어가야 해요. 파바박! 보는 사람들이 숨을 잠시 멈췄다가 씬이 끝나고 하아- 하고 몰아쉴 정도로.”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을 침을 한 번 삼키고 마주보았다.
조선개국 이후, 다음 왕위계승권을 두고 숙적이 될 두 인물의 첫 대치.
씬 58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
“레디- 액션!”
지잉-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이 곳은 강씨 부인의 내실.
22세, 늠름한 청년이 된 방원이 작은 어머니의 거처를 찾는 것은, 문안을 핑계삼아 분명히 해둬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방원이구나.”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웃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름답다.
한 때는 고려 최고의 가인이라 생각하던 젊은 어머니.
그녀의 속을 알게 된 지금, 방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밀랍같은 미소를 띤다.
“금일 명으로 출발합니다.”
“오가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내 아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경로인데 고생이랄 것 까지야 있겠습니까.”
“명은 엄청난 대국이라니 똑똑한 너라면 많은 것을 배우고 올 수 있을 게야. 함께 가는 목은 대감도 대단한 분이시니 한층 더 성장해서 돌아오려무나.”
포근하다.
머리로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속아 버릴 것 같다.
연기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바짝 피부가 수축한다.
너무나 안온하기에, ‘긴장을 늦추면 당한다’라는 이방원의 감정에 절로 몰입이 된다.
유명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것이 배우 이선하의 힘.
상황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액션과 리액션.
‘함께 연기하기 편한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유명은 자신이 만들어낸 몰입과, 이선하가 튕겨준 몰입을 모두 갈무리하여, 다음 대사에 실었다.
“아아, 그런 교육적인 이유로 저를 서장관으로 ‘만드신’ 것이군요.”
비꼬는 티가 역력한 말투에, 강씨의 눈이 커졌다.
끝
ⓒ 글술술
“뭐라고?”
“어차피 어머니께서 꾸민 일이 아닙니까.”
“그게…그게 무슨 소리냐···”
유명이 선하에게 감탄하고 있을 때, 선하는 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워낙에 잘 하는 후배라고는 생각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선하는 연예학개론을 무척 열심히 챙겨 보았다.
보형이가 등장할 때마다 함께 몰입하여 웃고 울기도 하고, 다채롭고도 시선을 휘어잡는 연기에 감탄을 거듭하며 본방을 사수하곤 했다.
하지만···
‘코 앞에서 보니까 어마어마하네···!’
연기를 볼 때 가장 특등석을 매기면 어디일까.
연극이라면 배우의 호흡까지 느껴지는 1열 중앙?
영화라면 스크린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프리미엄 시트로 여겨지는 중앙 뒤쪽의 좌석?
아니, 아니다.
선하는 연기를 관람함에 있어 가장 특등석을 차지하는 것은 상대역의 배우라고 생각했다.
호흡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입김까지 얼굴에 와닿는다.
좋은 배우와 연기할 때, 자신이 건네 준 텐션을 기가 막히게 휘어잡아 되돌려 주는 것을 코 앞에서 관람할 때의 짜릿함이란,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넘치는 생동감과 몰입감을 1미터 앞에서 관람하는 사치.
그녀는 오늘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대사를 받을 때의 호흡,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살아 움직이는 듯 모습을 바꾸는 얼굴 근육.
밀려드는 기세를 그녀가 제대로 받아 치지 않으면 이 장면이 죽어 버린다는 긴장감.’
하지만 아직은 이 칼을 받아야 할 때가 아니다.
조금, 조금 더. 긴장을 쌓아야 한다.
그녀는 벨 듯한 기세를 슬쩍 흘려내며 모른 척한다.
“방원아…도대체.”
스윽-
강씨 부인이 방원을 향해 정면으로 돌아서지만, 그에 맞추어 카메라가 고개를 돌린다. 방향을 바꾼 카메라는 여전히 그녀의 옆모습을 잡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고운 눈망울에 눈물이 한 방울 어린다.
“목은(*이색의 호) 대감께서, 자신이 명에 다녀올 동안 아버님이 창왕마저 폐할 것을 경계하여 동행을 요청하셨죠. 어머니께선 ‘방원이를 대신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하고 아버지를 종용하셨을테구요.”
“내가 왜 그런 일을···!”
“위화도 회군에서 제가 너무 큰 공을 세워서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장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부쩍 총애하시는 걸 보니 점점 눈에 거슬리시던가요.”
“그게 무슨···”
위화도 회군에서 이성계의 행동을 예측한 방원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기민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식솔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지령을 띄우지만, 그 지령이 당도했을 땐 이미 방원이 가솔들을 끌고 동북면으로 떠난 후였다.
여러 아들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똑똑한 아들이 상황판단 또한 이렇게 빠른 것을 보고 이성계는 무척 기꺼워했다. 그 뒤로 이씨 집안에서 방원의 입지는 훌쩍 높아졌고, 그것은 강씨 부인에게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자신의 소생을 왕좌에 앉히고 싶은 그녀로서는.
“명나라 사신단에 저를 끼워넣으면, 다녀올 동안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아 관심이 줄어들테고.”
“……”
“혹시나 목은(*이색의 호) 대감이 제게 뭔가 위해를 가하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계산이셨습니까.”
“방원아!!”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다.
그 압력으로 고여있던 눈물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려 턱 끝에서 뚝-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