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7
“내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 생각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키운 공을 생색내자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네게 어떻게 했는데··· 어찌 이리 모진 오해를 할 수 있느냐.”
“저야말로 서운합니다. 회군 당시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피신시킨 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지 못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 배고픈 동생들을 위해 네가 민가에서 밥까지 얻어먹이지 않았니. 그런 너를 두고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그렇지요. 그게 참 금수만도 못한 짓입니다만···”
“……”
“어머니는 그러실 수 있는 분이지요.”
추측이 아닌 단정.
당연하다는듯한 그 말투의 억측이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비웃음이 가득 실린 그의 말이 날아들자,
그녀는 긴 소매를 들어 그렁한 눈물을 훔쳐낸다.
그리고, 소매에 가렸던 얼굴이 다시 드러났을 때,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안면이 싹 바뀌었다.
순하고 고운 낯은 여전한데,
눈빛만은 뱀을 연상시킬 정도로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
카메라가 드디어 그녀의 정면을 잡았다.
유리알같은 시선으로 방원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
속을 들키고도 치심(*恥心:부끄러운 마음)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 무표정이 소름끼칠 정도이다.
“밤말을 듣는 쥐가, 아버님께 저를 대신 보내라 하시는 어머니의 말을 전해주었죠.”
간자(*비밀리에 적을 탐지하여 보고하는 자)가 있었다는 방원의 고백.
“경악했습니다. 여태 당신에게 이렇게나 속아왔다니…”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니. 대감께선 네 말을 믿지 않을 거란다.”
갸웃-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녀는 이미 방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명나라 사행길에서 그를 제거하거나, 혹은 이성계에게 이방원의 인상을 바닥에 쳐 박을 어떤 상황을 조작하거나…
하지만 의외로, 방원의 반응이 차분하다.
“처음에는 서운했습니다.제가 아는 어머니를 누가 바꿔친게 아닌가 하는 망상까지 해보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아버님께 고할까 생각도 해보았지요.”
그의 분하고 서운한 말투에도, 그녀는 아무 반응없이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한참 생각해보니, 무엇이 현명한 일인지 자명하더군요. 저희의 목표는 어차피 동일하지 않습니까. 대업의 완수.”
“대업의 완수···”
따라서 입 속에 담아 본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의 의도를.
오월동주(*吳越同舟)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서로의 이해가 맞으면 손을 잡을 수 있다.
즉, 지금 그는 전략적 제휴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형들은 멍청하고, 어머니 소생의 자식들은 아직 어립니다. 아버님은 용맹하시지만, 지략가 유형은 아니신데다 세간의 시선에 너무 신경을 쓰시고요. 판단력을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어머니 뿐입니다.”
“……”
“동맹을 받아들이신다면, 이번 일은 넘어가드리죠.”
새 왕조의 주인이 된다는 거대한 목표.
그 자리의 다음 주인을 겨루는 것은 나중 문제다.
아직은 안팎으로 적이 창궐하는 위태로운 이 때, 가장 강력한 적 중의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일단 목표를 달성해 놓고, 과실을 누가 차지할지는 그 후에 생각하자고.
‘사실, 나도 판단력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방원이밖에 없긴 하지.’
내실에 거주해, 이성계를 꼬드기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방원의 제안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과도하게 똑똑한 녀석이라 불안하긴 하지만, 아직은 풋내기. 대업을 이룬 후 제거해도 늦지 않다.’
그렇게 빠른 계산을 마치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잘 지내보자, 내 아들.”
“네, 어머니.”
위선적인 호칭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으며, 그들의 동맹이 성립되었다.
*
“컷-”
“수고하셨어요.”
“후아–”
유명은 대단히 감탄하고 있었다.
연기에서 리액션이 중요하다는 말이야 누누히 들어온 것이지만, 그녀와 연기해보니 그것이 무슨 말인지 피부에 와닿았다.
자신이 던지는 대사 하나하나를 귀기울여 듣고 진심으로 반응하는, 그래서 장면을 훌쩍 진실로 느끼게 하는 리액션의 힘.
그는 그런 그녀의 연기에 감탄을 표하려 했다.
“선-”
“유명아!!”
그런데 선수를 빼앗겼다.
“네?”
“와…너 진짜 장난 아니다. 후아…관객을 숨넘어가게 해야하는데 내가 숨넘어갈 뻔 했어.”
“…?”
“너 ‘말하기’도 ‘듣기’도 엄청 잘하는구나. 너랑 연기하니까 진짜 강씨부인이 된 것 같았어.”
“어···”
“역시. 내가 워크샵 때 알아봤지. 신유명 최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이선하가 다 해버렸다.
“그거 제가 하려던 말인데···”
“아…그래? 평소에 극단 동료들이 나한테 ‘같이 연기하기 편하다’고 하는게 이런 느낌인가? 엄청 집중이 잘 되는데···”
“저도 그랬어요.”
“진짜? 우리 둘 다 굉장한데?”
진심으로 놀라는 그녀의 표정에 유명이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감독이 다가왔다.
“이선하씨, 아주 좋아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연극하다 온 사람들이 처음 카메라앞에 서면 과장돼 보이기가 쉬운데, 그런 게 전혀 없네요.”
“무대에서도 좀 담백하게 연기하는 편이에요. 연습도 많이 했구요.”
“그러시군. 알고보면 무대보다 카메라 체질 아닌가요?”
“그런 걸까요? 아 진작에 카메라 마사지 좀 많이 받을걸!”
감독의 칭찬에 이선하가 해맑게 농담을 쳤고,
“유명씨도 지겹겠지만···”
“네??”
“칭찬 지겹겠지만, 정말 좋습니다.”
“하하하- 감독님도 참···”
유명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지금 이대로도 오케이인데, 뭔가 한 번만 더 찍으면 더 좋은 게 나올 삘인데요···잠시 쉬었다 갈까요?”
“바로 가시죠!”
“부담 없습니다.”
첨예한 대립 씬.
기가 빨릴만 한데도, 상대역과 호흡이 잘 맞으니 연기가 즐겁다.
유명과 선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콜을 외쳤다.
*
선하와의 촬영이 끝났지만, 유명에게는 한 씬이 더 남아있었다.
이방원은 강씨 부인과의 동맹을 위해 온전히 속내를 드러낸 듯 했지만, 그것조차 포장이었다.
절반의 진심.
그녀를 속이기 위해 진심과 거짓을 교묘히 섞은.
강씨 부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그는, 자신의 수행무사를 부른다. 이성계가 아니라, 방원을 주인으로 섬기는 가신.
자신의 속내를 가장 많이 내보이는 가신이다. 그마저도 완전히 믿진 않지만.
“시헌아.”
“네, 도련님.”
“사절행에 갈 채비를 하여라.”
“결국 가시는 것입니까.”
방원이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
“명明에 가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의지이다. 어차피 갈 마당이니 어머니의 간계에 걸려드린 척 한 것일 뿐.”
명목상 서장관이긴 하지만 그의 입장은 인질.
주인이 위험한 길에 동행하게 된 것이 강씨부인의 간계 때문인 줄 알았던 시헌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반문한다.
“명明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심입니까.”
“홍무제(*당시 명의 황제), 그 괴팍한 늙은이의 의사를 알아봐야지.”
“어떤···”
“창왕을 진심으로 인정하려 하는지. 고려의 정세에 간섭할 의지가 얼마나 되는지. 대업이 벌어질 경우, 명이 우리의 적이 되지는 않겠는지.”
항상 주인이 보는 시야는 남달랐다.
한 수 앞이 아닌, 몇 수나 한참 앞을 내다보고 변수에 따라 대비를 해둔다.
“당장의 적은 세족들과 고려의 남은 충신들로 보이겠지만, 나중의 더 큰 적은 명明이 될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적은 관심에서 벗어나거나 그늘로 들어가야 하는 법.”
방원이 눈을 빛냈다.
“목은 대감, 음흉한 그 노인네만 간다면 뭐라고 입을 놀려 홍무제를 꼬드길지 모른다. 그러니 이 사절단에 아버지의 사람은 꼭 필요해. 홍무제의 속내를 읽기 위해서도, 목은 대감의 암수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그런 뜻이…있으셨군요.”
“그래. 그걸 해낼 수 있는 인물이 또 누가 있겠느냐. 있기야 있겠지만, 이 진영 내에서는 나밖에 더 있겠더냐.”
‘있기야 있겠지만’의 주인공은 스승 정몽주.
그와 견줄만한 능력을 가진 자는 자신 뿐이라는, 거만함으로는 들리지 않는 자신감.
“물론입니다. 도련님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그래. 가는 김에 어머니에게 빚을 하나 지워드린 것일 뿐이다. 그리고 작은 오해도 심어드리고.”
간자는 없었다.
사신단에 이성계가 방원을 추천한 것이 강씨부인의 책략이었다는 것은, 온전히 이방원의 통찰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그리고 강씨부인은 그것에 훌륭하게 넘어가, ‘간자만 아니었어도 방원은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는 오해를 해버린다.
오해하지 않았다면, 제 아들의 앞길에 누구보다 큰 장애물이 될 방원을 먼저 해치우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꼬는 말투도,
서운해하는 표정도,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치기어린 자세도, 모두 계산된 연기.
방원은 모든 것이 제 손바닥 위에서 굴러가는 것에 만족하며 옅은 미소를 띄었다.
“오케이- 좋습니다!”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었다.
“촬영종료- 다들 철수 준비합시다!”
팀은 이번 씬을 끝으로 문경에서 철수한다.
모레부터는 중국로케가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한동안 국내 다른 로케이션에서의 촬영들이 이어진 후, 가장 중요한 ‘다담 씬’의 촬영은 용인에 짓고 있는 전용 세트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루 푹 쉬시고, 모레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눈 밑이 푹 꺼진 조연출이 소리지른다.
푹 쉬시라는 것은 배우들이나 해당되는 얘기, 스탭들은 내일 바로 출발해서 촬영 준비를 할 것이다. 해외 로케는 하루하루가 돈이므로 빡센 촬영일정이 지속되겠지.
하지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