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34
시작은, 변중량의 밀고에서였다.
이성계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은, 이씨 집안과 혈연의 관계였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했다.
‘정몽주를 제거해야 한다.’
이씨 집안에서 그런 목소리가 자꾸 나오는 것을 들은 변중량은, 그냥 들어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정몽주에게 가서 몸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역으로 이성계를 암살할 생각을 한다.
이미 정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수였던, ‘이성계의 수족을 자르기.’
그것은 이성계의 부상이라는 호재를 만나, 성공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방원이 이성계를 설득해 일이 마무리되기 전 개경으로 돌아와버렸고, 오히려 역습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최후의 수라면 하나 더 있었다.
부상이 낫지 않은 틈을 타 이성계를 제거하는 것.
쉽지 않겠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하지만 이번에도 변수는 이방원이었다.
그의 눈치와 사고력이라면, 이상한 낌새를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할 것이다. 위화도 회군 때와, 이성계 부상 때의 판단력과 행동력을 보면, 그라는 변수를 통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정몽주는 ‘이성계가 정말로 다쳤는지’를 정찰하고,
암살조가 투입되는 동안 ‘이방원의 발을 묶는’ 미끼역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미 시작부터 들켜 있었을 줄이야.
콰당-
닫힌 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고, 방원이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자신이 보낸 자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 꿇려져 있었다.
끝
ⓒ 글술술
“언제 눈치챈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입니다.”
수려한 용모, 제 아비와 달리 새파란 도포 속에 하얀 피부가 귀공자같은 사내는,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수십겹으로 덧입혀져 있어, 본래의 의도를 읽을 수 없는 불투명한 빛.
‘저렇게…자랐는가.’
정몽주는 한탄했다.
위화도 회군때는 총명히 컸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이성계를 벽란도에서 데려온 것을 보고 그의 존재를 방심한 것에 아차 싶었다.
스물 여섯 치고 놀라울 정도의 지략과 행동력을 가졌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충분히 경계를 거듭했다. 심지어 이번 작전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를 전담하기로 한 터였다.
그런데, 그조차도 충분히 경계한 것이 아니었다니···
“어떻게 알았는가. 간자라도 있었는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스승님의 사고방식을 배우고 자랐으니까요. 저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니 명확하더군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면서, 다 식은 차를 마신다.
무슨 명을 내려놓았는지, 후원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고, 적막한 가운데 무릎꿇린 자객들의 앓는 소리만이 간간히 공기를 울릴 뿐이었다.
벌어진 상황이 피부로 와닿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저녁.
“아버님은 아직 모르십니다.”
그 말에 정몽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드디어 이성계가 결심한 것인가 했더니, 방원의 독단적인 작전이라…실로 무모하다.
“어째서?”
“아까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스승님이 탐이 난다고.”
그가 눈을 마주하더니 깊이, 아주 깊이 들여다본다.
그 눈빛에 정몽주가 아닌, 윤한성이 흠칫한다.
유명과 연기하다보면, 자신이 아닌 것처럼 극중 인물에 푸욱 빠져들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선, 내부의 자신이 확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런, 깊이를 알 수 없는 연기를 볼 때마다, 배우로서의 그가 자극받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자신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일부러 함정을 팠다는 것인가.”
“지금 저와 손을 잡겠다, 한 마디만 하시면 이 모든 일은 비밀에 붙이는 것은 물론, 저들도 깔끔하게 모두 돌려보내겠습니다.”
“거절하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빠른 대답.
방원이 지그시 이를 악문다. ‘다시 한 번’ 거절이다.
후우-
잠시 올라오는 분노를 꾹꾹 누른 그가, 밖을 향해 명령했다.
“베어라.”
촤악-
명령과 동시에, 네 개의 목이 날아간다.
아니, 아직 특수효과는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에, 시늉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상자의 목과 머리가 분리되어 뒹구는 모습이 한성과 유명의 눈에는 보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둘은 이 상황에 몰입해 있었다.
네 구의 시체가 정원에 널부러졌다.
뿜어져 나온 붉은 피는 연초록의 정원을 집어삼켜, 배경마저도 붉디붉게 물들일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평온해진, 하지만 보고 있으면 기가 질릴 것 같이 강한 눈빛으로 방원이 한 번 더 물었다.
“혹여 마음이 변하시진 않았습니까.”
*
그 광경을 보고서도, 이미 제 길을 정한 정몽주는 안색 하나 변함이 없다.
“변하지 않을 걸세.”
“군왕의 힘이 가장 약해져 있을 때야말로, 신료 중심의 체제로 변화시키기 적절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죠.”
“그랬네.”
“그 말의 결국, 스승님도 사실 종묘와 사직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 아니십니까.”
“이런들 저런들 상관없다면, 바꾸어야 할 이유도 없다네.”
“어째서입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스승님이 아니셨습니까. ‘다음 국가’를, 그리고 ‘저’를 수단으로 삼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방원아.”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몽주의 음성에 방원이 흠칫했다.
오랜만에 듣는 ‘스승’의 음성이었다.
“…네, ‘스승’님.”
“마지막 강론을 하겠다.”
평온한 눈빛.
스승이 담담히 ‘마지막 가르침’을 입에 담는다.
방원은 순간 마음이 덜컹하여, 12세의 방원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그의 입술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목표’와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디까지 ‘정도’를 벗어날 수 있는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 그리고 내 경우는 그 기준이 상당히 유연한 편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너도 그러하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호한 음성에 기개가 서린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죽음을 개의치 않고 쏟아내는 마지막 강론.
이 자리에서 심장을 찔러도 웃으며 쓰러질 것 같은, 인간의 격.
유명은 유명으로서도, 방원으로서도 그 모습을 눈이 부시게 쳐다보았다.
확실히 윤한성은, 배우로서의 커다란 경계선을 오늘 뛰어넘었다.
“내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강압으로 기준도 목표도 모두 바꾸어버린다면 그것은 ‘수단’이 아니라 ‘야합’인 것이다. 야합을 저지르는 순간부터 그것이 바른 길인지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타협하다 보면 목표
는 흐려지고 남는 것은 찌꺼기 뿐이지.”
낮았던 음성이 점점 부풀어가고, 이내 쩡- 하고 방원을 뚫고 맞은 편의 벽에 부딪힌다.
“그 때부터는 정치가가 아닌, 필부에 불과한 것이다.”
“……”
“수만의 목숨을 가지고 놀이를 하려거든, 최소한 목표와 기준을 네 멋대로 비트는 일은 없도록 해라. 그것이 너를 따르는 자들과, 너에게 매달린 목숨에 대한 예의인즉슨.”
그것이 그들의 졸업식이었다.
방원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바깥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느덧 석양이 지며, 피로 얼룩진 후원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의 입에서, 애타는 듯이 나즉하게, 시조가 한 수 흘러나왔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원래 손감독이 생각한 이 장면은, 방원이 야심과 기백 넘치게 이 시조를 읊는 것이었다.
야심의 화신인 듯한 이방원에게 어울리는 클라이막스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명은,
마지막으로 매달리듯이 애타게 이 시조를 읊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내게 와달라는,
이별을 알고 있음에도 한 번 매달려보는 정인처럼.
그 어조가, 오히려 정몽주라는 재원을 지독하게 탐냈던 그의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듯하여, 감독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춰 들어오는 석양에 얼굴이 붉게 젖은 정몽주가, 답가를 읊는다.
주원장의 앞에서 굶주리고 지친 상태로 시조를 읊었을 때만큼이나 의연하고 굳센 태도로.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오히려 정몽주의 답가는,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답지 않게 평온하였다.
그리하여 둘의 분위기는 마치 승리자가 패배자이고, 패배자가 승리자인 듯 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방원이, 드디어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한다.
“‘님’이라는 것은 이 왕조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와 기준, 그리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대의입니까.”
“시는 읽는 사람의 것이니, 네게 그렇게 들린다면 그러하겠지.”
한숨을 한 번 내쉰 방원이 늘어진 미련을 싹- 거둔다.
다시 단단한 포장이 덮이고, 그는 정치가의 얼굴로 말한다.
“나는 ‘당신’이 무척 탐났습니다. 당신은 나와 비슷합니다. 당신은 치세의 마지막에 태어난 능신이고 나는 난세의 초입에 태어난 간웅일 뿐.
삼봉 선생도 우수한 인재이지만, 그는 아버지의 사람인데다 너무 반골 기질이 강해 제 취향과는 맞지 않았죠. 아버지의 시대가 가고 언젠가 올 ‘내 시대’에 당신이 있어주었으면 했는데…”
‘스승’에서 ‘당신’으로 변한 호칭.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는군. 귀로 들어간 많은 이야기가 입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는 날인가, 하하.”
“살펴 가십시오.”
정몽주가 일어나, 피가 흥건한 후원을 밟으며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이 이 씬의 끝.
꼿꼿한 걸음걸이 아래 핏빛 발자국이 찍히는 것이 눈에 보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남은 방원이,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명령한다.
“따라가서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