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45
그런 그녀를 연산이 한 품에 감싸안는다.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변고가 있겠느냐? 하지만 만약 변고가 있으면 너희는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그의 메말랐지만 아름다운 얼굴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마마,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옵니다.”
“녹수야, 녹수야.”
흐린 물감이 번지듯이 울리는, 한계에 달한 남자의 공허한 목소리.
“왜, 융(*연산군의 아명)아.”
그것을 그녀가 꽉찬 목소리로 맞잡아 부른다.
주변의 사람들은 기겁한다.
반말을 하며 왕의 아명을 부르는 기생이라니. 당장 능지처참에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일.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연산의 메마른 얼굴이 조금 풀어진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너밖에 없구나. 무슨 변고가 있더라도, 너만은 구해 주겠다. 내게는 너만이 찬란하도다.”
“전하께서도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제 최고의 관객이었음을. 저는 주상을 모신 것을 후회해 본 일이 없습니다.”
“오냐, 또 한 곡 뽑아보아라. 오늘 어디 밤새 한 번 흐드러지게 놀아보자꾸나.”
장녹수를 연기하고 있는 성연은 상대역의 눈빛에 흠칫했다.
정상과 광증의 중간 단계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한 서류신의 연기.
연산의 외로움이, 불안이, 집착과 해갈이 피아노줄을 긁듯이 바싹바싹하게 공기를 집어삼킨다.
는 장녹수의 ‘예인’으로서의 인생을 그린 시나리오.
올해 서른하나, 탑여배우 중 하나인 천성연은 여주원탑이라는 이유로 이 시나리오를 선뜻 받아들였으나, 연산역의 배우를 조금 걱정했었다.
준주연이라 해도 ‘장녹수’를 다룬 영화에서 ‘연산군’의 비중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18세에 즉위하여, 역사에 남길 악명을 떨치고 30세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사사된 ‘연산’이라는 인물.
20대에 그의 왕위로서의 카리스마와 인간으로서의 컴플렉스를 제대로 연기해낼 배우가 있겠나 싶었는데···
아역으로 필모그래피를 중단하고, 이번에 재데뷔한다는 경력이 새파란 배우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는 칼을 갈고 닦듯이 하루하루 예리해졌다.
그 예리함은 함께 촬영하는 수개월동안 점점 첨예해져, 이제 잘못 건들면 자신을 숭덩 베고도 남을 기세였다.
이제 촬영은 중종 반정 당일, 한 씬을 찍으면 마무리될 예정임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트- 수고하셨습니다.”
*
의 인터뷰 하나를 마치고,
크루드의 지면촬영을 몇 컷 찍었으며,
수연을 만나 두세 시간의 연습을 하고 회사 숙소로 돌아온, 바빴던 하루.
RRR-
그 날 유명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랜만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 하나가 핸드폰 바깥 액정에 떠올랐다.
[서류신]“여보세요.”
“잘 지냈어요?”
피곤한 듯 가라앉은 어조,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목소리.
“안녕하세요, 형.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이상하게 엇갈렸네요. 둘 다 열심히 살았나 봐요.”
가끔 오디우스 모임이 있었고 류신도 유명도 종종 참석했었지만, 서로를 만난 적은 없었다. 유명이 쉴 틈없는 활동으로 워낙 바빴기도 했고.
“영화 찍고 계신다면서요?”
“오늘 끝났어요. 혹시 지금 바빠요?”
“아니요. 숙소에 막 들어왔어요.”
“맥주 한 잔 할래요?”
주소를 알려주자, 30분 이내에 집 앞이라는 연락이 왔다.
유명은 집에서 입는 편한 트레이닝 복에 모자를 하나 깊이 눌러쓰고 집 앞으로 나갔다. 그가 편의점 봉투를 흔들었다.
그들은 집 주변 한적한 공원에 앉아 맥주캔을 땄다. 오면서 흔들렸는지 치익- 거품이 나며 솟아오로는 액체를 입에 바로 머금었다. 맥주의 톡 쏘는 맛이 피곤하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옆에 앉은, 익숙하고도 낯선 사람도 그랬다.
“오늘 촬영 끝났다면서 피곤하지 않으세요?”
“피곤하네요.”
그가 옅게 웃었다.
근 2년만에 만난 서류신은 기억보다 좀더 말라 있었다. 이번 작에서 연산군을 맡았다고 하니 그럴만도 했다. 연산의 말년은 상당히 피폐했을 테니까.
하지만 언제나 선명하게 앞을 직시하는 시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좀 변했네요.”
“제가요?”
“네. 예전에는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연기에 들어가면 대단해진다’라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누가 봐도 ‘배우’라는 느낌이네요.”
“하하···”
‘존재감’이 변한 것을 그는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유명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인데, 또 오랜만으로 느껴지지는 않네. 자주 생각해서 그런가.”
“…저를요?”
“연기에서 막힐 때마다, 생각했거든요. 신유명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려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정말 최선인가. 그런 생각이 좀 짜증나긴 한데, 도움은 되더라고.”
“…”
“그러고보면, 지킬박사와 하이드 때가 재밌었어요. 힘들긴 해도 이기고 싶은 상대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매일매일 이를 갈았지. 얼마 안 됐는데 그립네.”
그 말은 직접적이진 않아도, 그가 유명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히 고백하는 말이었다.
사실 유명도 그랬다. 많은 화제가 되었던 연예학개론도, 자신의 한계에 부딪혔던 려말선초도 모두 재미있었지만,
역시, 연습하고 공연하는 순간순간 가장 재미있었던 때는,
함께 하는 동료들이 만족스럽고,
경쟁하는 라이벌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던,
그리고 관객의 반응이 직접적으로 와 닿았던, ‘첫 주연 공연’.
류신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이 피식 웃었고, 그 표정을 본 유명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입을 열었다.
“형, 저랑 ‘공연’ 한 번 하실래요?”
끝
ⓒ 글술술
“형, 혹시 저랑 ‘공연’ 한 번 하실래요?”
“공연요?”
류신은 유명의 말에 의아하면서도, 단숨에 혹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는데, 유명이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놀란듯이 바로 취소했다.
“앗, 아니에요…죄송합니다. 기획사도 있으시고 다음 작도 하셔야 할 텐데,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유명씨는 다음작 안해요?”
“아…저는 빨리 신작 들어가고 싶은데, 사장님이 너무 일 많이 한다고 내년 초까진 무조건 쉬라고 하셔서…요즘 배우 지망생 한 명이랑 연습실 빌려서 연습하고 있어요.”
유명은 대략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고나자 류신은 단숨에,
“같이 하죠.”
“네??”
“아니, 꼭 나도 끼워줘요. 연습만도 좋고, 공연을 올릴 수 있으면 더 좋고.”
직구를 던졌다.
어차피, 유명을 따라잡기 위해서 1년은 거의 작품을 하지 않았다. 오늘 촬영을 끝낸 사극도 유명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려고 도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좋다.
생각해보면 그 어떤 스승에게 사사받고, 어떤 작품을 했을 때보다, 유명과 함께했을 때 연기가 많이 늘었었다. 이건 오히려 자신이 부탁하고 싶은 기회였다.
“형 기획사랑 협의하셔야 하지 않아요? 공연은 돈이 안 되니 안 좋아하실텐데.”
“친인척이 하는 기획사라 괜찮아요. 작품에 관한 건 무조건 제 의사대로 할 수 있습니다.”
“앗, 정말요?”
그의 말에 유명의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일단 내일부터 당분간 같이 연습하면서, 공연을 올리는 게 가능할지 의논해보죠. 기획사들끼리 협의도 있어야 할 거고…음, 극단을 하나 끼면 일이 더 스무스하게 풀릴 것 같은데···”
류신이 척척 계획을 내어놓자 유명이 당황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형 오늘 촬영 끝나셨다면서요···”
“네, 그런데요?”
“쉬셔야죠, 당분간은.”
“괜찮아요. 연습하는 게 쉬는 겁니다.”
“안 돼요. 지금 엄청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최소한 일주일은 쉬고 나오세요.”
“괜찮다니까요.”
‘아…이런 느낌이구나…’
유명은 처음으로 유석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남은 맥주를 가지고 돌아와 미호에게 그 소식을 전하자, 미호가 신이 나 꼬리를 뱅글뱅글 돌렸다.
{그 놈이랑 같이 공연한다공? 잘 했당, 재밌겠당, 캬하항.}
‘그나저나…수연씨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미호 넌 뭔가 감이 안 와?’
{흐음···}
맥주를 빨아먹던 미호가 주둥이에 거품을 묻힌 채로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문제인지는 대충 알겠당. 해결책으로 써 볼만한 방법도 있긴 한데···}
‘진짜? 그런데?’
{좀 더…뜸이 들어야 한당. 일단 그 녀석이 너한테 마음을 더 열어야 한당.}
‘흠···’
미호는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해 주지 않았고,
유명은 계속 수연을 도와줄 방법을 고민하다, 늦게야 잠이 들었다.
*
“저 사람인가요?”
“네.”
“흠···”
며칠 후 유명은 류신과 함께 마로니에 공원에 와 있었다.
수연은 유명과 연습을 함께 하기로 한 후에도, 그와 함께 연습하지 않는 시간이면 공원에 나와 연기하는 연습을 지속하고 있었다. ‘시선’이 닿으면 몰입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을 고쳐보겠다며.
유명은 류신에게 그녀의 상황을 대충 설명했고, 함께 데리고 가고 싶은 팀원이라는 의사 또한 밝혔다.
-형도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보기엔 가능성있는 배우거든요.
-흠…끼어든 건 나인 셈이니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어떤 연기를 하는 배우이고 유명씨가 뭘 본건지 궁금하네요.
그래서 수연이 연기 연습을 하고 있는 곳으로 함께 와보게 된 것이었다.
“문제가 많네요. 일단 기초가 약하고···”
“제대로 된 커리큘럼을 밟아본 적이 없을 거에요.”
“시선을 끄는 타입이긴 하지만 ‘연기’ 쪽은 아예 안 되고 있는데…유명씨는 뭘 본 건가요?”
그의 냉정한 비판에 유명이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
지금의 그녀의 연기는 애매한 것이 맞다. 원생의 설수연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도 ‘가능성’을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미래의 그녀를 보았다고 점치듯이 얘기할 순 없으니···
“저랑 로코코 화보 촬영할 때, 우연히 저 친구가 진짜로 ‘몰입’하는 순간을 보았어요. 발동이 잘 안되어서 그렇지, 한 번 몰입에 빠지면 굉장한 연기를 하는 친구에요.”
“그래요? 지금 모습으론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제 생각엔 몰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뭔가 있는 것 같아요. 같이 연습한지 2주 쯤 됐는데 아직 잘 모르겠네요. 좀더 마음을 열어야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