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57
하지만, 주변 배우들의 대단함이, 최고의 환경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듯한 자신에 대한 초조함이 한 번 등을 떠밀었고,
언제나 한결같이 곧은 시선으로 걸어가는 든든한 사람이 함께 걸어보자고 내민 손이, 한 번 손을 잡아끌었다.
유명은 그녀가 뭔가 결심한 것을 알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가 열어온 마음을 최대한 마주봐 주기 위해서.
“좋아. 분명한 해석이 있다면 그것도 좋지. 그럼 웬디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볼까?”
“네.”
유명이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서두를 던진다.
“안녕 웬디, 나는 닥터야. 선생님은 네 얘기를 듣고 싶은데.”
진실게임.
배역을 맡을 사람이 그 캐릭터가 되어 질의응답을 나누는 것.
지금, 웬디의 진실게임이 시작되었다.
끝
ⓒ 글술술
“안녕 웬디, 나는 닥터야. 선생님은 네 얘기를 듣고 싶은데.”
“선생님, 웬디는 착한 아이에요.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웬디가 나쁜 아이라서가 아니야. 마음이 아파서 치료하러 들어온 거야.”
“아픈 데가 없는데…저는 양치도 꼭꼭하고, 존처럼 더러운 걸 손으로 만지거나, 마이클처럼 당근을 골라내고 먹지도 않는걸요.”
“그런데 왜…웬디는 ‘가출’한거지?”
수연이 흠칫 놀랐다.
유명은 정확하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짚었다. 그 설정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네버랜드로 떠난 웬디, 그것이 단순히 피터팬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가출한 것이라는 자신의 설정을 그는 읽은 듯이 부추긴다.
아아, 이 사람은 뭐든 읽고 있어.
신뢰.
그녀의 목소리가 한 단계 아래로 가라앉는다.
“엄마가 나를 싫어해요.”
“엄마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못 나가게 해요, 집 밖에.”
유명은 수연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순간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CINE24의 인터뷰가 떠오른 탓이다.
[어머니가 엄하셨어요. 인스턴트, 탄산, 만화영화, 그런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건 모조리 금지였어요. 방과후에 친구와 놀다오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엄청 곱게 자라셨네요.]
그녀가 상당히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것은 알고 있었다. 스물 두 살에 콜라를 처음 마셔봤다니, 확실히 일반적인 환경은 아니지.
그런데, 단순히 ‘곱게 자란’ 게 아니었단 말인가.
“존과 마이클은 나가서 놀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딱 한 번 치마를 더럽힌 이후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여자아이가 칠칠맞으면 못써- 네가 누나니까 모범을 보여야지-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엄마는 말을 잘 들을 때만 웃어줬으니까요.”
엄마는 말을 잘 들을 때만 웃어줬다-
“왜? 웬디는 착한 아인데? 존도 마이클도 어질러놓기만 했는데 저는 엄마가 힘들까봐 같이 침대보를 정리했어요. 나나의 사료도 채워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저는 엄마가 시키는대로 했는데…”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사랑받지 못했다.
“나 때문일 거에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엄마가 끝내는 칭찬해줄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가 되려고 마음먹었어요.”
어린 아이에게 엄마는 세계.
엄마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세계 전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것과 같다.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왜곡된 방식으로.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
사랑을 갈구하다 못해 구걸하는데도 외면받은 자의 자존감은 바닥에 처박힌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한다.
“엄마의 증상은 점점 심해졌어요. 처음에는 엄마가 네가 걱정돼서 못 나가게 하는 거라고 했죠. 귀가가 30분이라도 늦어지면 난리가 났어요. 소풍? 수학여행? 그게 뭔가요. 저는 하루의 태반을 제 방에서 보냈어요. 친구라고는 티비와 책 뿐이었죠.”
깊어지는 이야기는 점차, 웬디의 탈을 벗고 수연 자신의 과거를 드러낸다.
“니가 예쁘다고 생각해?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웃지마, 흉해.”
엄마가 딸을 질투한다. 강박적으로 단속하고 깎아내린다.
있어서는 안 되지만, 어디에선가는 일어나고 있는 비극들. 그 한 조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야말로 잔혹한 동화.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이 점점 심해졌죠. 그럴 때면 방문을 꼭 잠그고 상상을 했어요. 여기는 동화 속이야, 영화 속이야, 프랑스야, 뉴욕이야. 아아,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알게 되었죠. 엄마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제 정신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엄마는 제가 열아홉살 때,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오랜 망상장애에, 정신분열증이 병발했다더군요.”
유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듣는 사람조차 몸이 떨리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독하게 담담한 어조가 서글펐다.
*
결국 수연 자신의 진실게임이 되어 버렸다.
이 웬디를 구상하면서, 이미 자신에게 털어놓을 각오를 하고 왔겠지.
그 신뢰의 무게에 휘청이지 않으려, 유명이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위로해주기보다, 최대한 단서들을 끌어모아 그녀를 도울 방법을 찾을 때이다.
“아버지는 모르셨어?”
“글쎄요.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개입하지 않았어요. 엄마의 투사와 강박이 심해질 무렵 이혼했거든요. 엄마는 차라리 병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가 가능하지만, 저를 그 환경에 버려두고 혼자 도망친 아빠는 더 이해가 안 가요.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는 덤덤했다.
그것이 지난 비극에서 그녀를 지켜온 방어막이면서, 지금 그녀의 몰입을 방해하는 원흉이었다.
{저 배우 지금은 몰입력이 단점이지만, 극복하고 나면 장점이 될 거당.}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귓가에서 미호가 속삭였다.
‘그래?’
{오랜 시간 혼자 지냈고, 그 때마다 도피한 곳이 영화 속이고 책 속이었당. 그 안에서 무수한 주인공이 되어서 상상의 세계를 떠돌았징. 그 상상력과 몰입력이 얼마나 강할 것 같냥.}
유명은 자신도 팬이었던 그녀의 연기를 떠올렸다.
관객을 그 곳으로 끌고 가는 듯한 강한 몰입력. 그것의 원천이 ‘도피’였다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인터뷰의 대목이 떠오른다.
[남는 시간 동안 많은 상상을 하며 보냈죠. 연기자가 되니 그 상상들이 현실이 되더라구요. 그게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고 몰입했던 것 같아요.]
아아, 그랬구나.
생각해보면 원생에 그녀는 20대 극후반에야 얼굴이 알려졌다.
그렇다면 자신을 만나지 않은 지난 생의 그녀는, 무려 10년 가까이 헤메면서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것밖에 없어서, 막다른 인생에 오직 연기만이 유일한 돌파구여서···
그것은 마치 자신과 같은 집념이었다.
유명은 왜 자신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는지 그제서야 이해했다.
{문제는…상처를 최대한 적게 받으려는 기제로 감정이 단단히 굳어 있다는 것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내내 평가절하를 당해서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는 건뎅···}
‘응. 사연을 알았다고는 해도, 막막하네. 너무 방어기제가 단단해 보여.’
{써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당.}
그 말에 유명이 다급히 물었다.
‘뭔데?!’
{사이코 드라마(*psyco drama:치료적 연기법).}
‘정신과 의사가 사용한다는 그거?’
유명은 다시 한 번 미호에게 혀를 내둘렀다.
연기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
{엉. 웬만한 전문가보다 내가 나을 거당. 그리고 이 친구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딱 좋은 방법으로 변형도 시켰당.}
‘어떻게?’
{그건 바로···}
수연은 침묵하고 있는 그를 조금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동정받기 위해 꺼낸 얘기가 아니었다. 유명이라면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못하더라도,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방법을 함께 찾아봐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무거운 얘기가 부담스러워서 그가 등을 돌린다면···?
와락 겁이 난 그녀의 긴장이 무색하게, 유명이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시도해 볼 방법이 떠올랐는데.”
*
“이게 좀 어렵고 힘들 수 있는 방법이라···”
4년째 어떻게 발버둥쳐도 답이 보이지 않던 문제를 풀 방법이 있다고?
“할게요. 힘든 건 상관없어요.”
“많은 기억을 들추게 될 거야. 과정은 어려운 데 비해, 이 방법을 쓴다고 너의 마음의 상처가 싹 치유되냐면 그렇지는 않을 거야.”
“……”
“다만, ‘배우’로서의 설수연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일 거라고 생각해.”
수연이 유명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젖었다.
어렵게 열어보인 마음은 처음으로 거부당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사람은, 자신의 말에 누구보다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심으로 되돌려주었다.
그런 그를 믿는다.
“오빠, 저는 제가 엄청난 행운을 잡은 걸 알아요.”
“……”
“쟤는 무슨 자격으로 저 사이에 있는 걸까- 그런 시선을 매일같이 느끼지만…이 곳에서 제 문제의 답을 찾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어떻게든 붙어 있겠다고 결심했어요. 저 생각보다 뻔뻔하죠?”
별로 뻔뻔하지 않은 말을 부끄럽게 꺼내며, 그녀가 미소짓는다.
“최대한 버텨보다, 결국 여기서 쫓겨나도 혼자라도 이 길을 갈 거라고 결심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원생의 그녀가 그렇게 10년을 발버둥쳤고, 결국 극복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무려 최고의 배우가, 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고 하잖아요. 어차피 오빠가 손을 놓으면 저는 기약없이 어둠 속을 헤멜 예정이었는데요.”
아직 촉촉한 눈에 눈물을 머금고,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제가 뭘 따질 계제인가요. 이게 저한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모르시겠어요?”
아아 역시, 그녀는 자신을 닮았다.
미호의 제안에 구원받은 자신과.
유명은 진심으로, 그녀의 극복을 간절히 돕고 싶어졌다.
“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류신선배도 함께 동참했으면 좋겠어. 둘만 진행할 경우 안전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나도 처음 써보는 방법이라 연기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거든.”
“괜찮아요. 뭐든 할게요.”
그렇게 다음 날부터 ‘그 방법’이 시작되었다.
*
사이코 드라마(*psyco drama)
루마니아 태생인 정신과 의사 J.L.모레노가 창시한 심리요법.
등장인물인 환자에게 어떤 역과 상황을 주어 그의 억압된 감정과 갈등을 표출하게 함으로써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는 방법이다.
다음날, 수연의 입으로 그녀의 과거를 들은 류신은 놀란 눈빛을 티나지 않게 가라앉히고 그녀의 어깨를 격려하듯이 살짝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