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95
전반적인 속도는 훨씬 빨라졌지만 전체대사가 다 빨라진 것은 아니다. ‘명예’, ‘같은 귀족’같은 포인트가 되는 단어들에서는 살짝 느려지거나 높아진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명예, 긍지, 귀족이기에 가지고 있는 사명감인 것이다. 같은 귀족이라 해도 옳지 않은 짓을 했다면, 내 살을 도려내는 마음으로 잘라내는 것.]놀라운 것은, 그 리드미컬한 대사가 ‘귀족’이란 인물의 귀족적임을 더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페이스 자신이 잡은 귀족의 캐릭터와는 성격이 다르다.
고상하고 우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귀족적인 도도함은 더욱 강조하면서도 본질은 비열한 인물. 상인의 저열함을 비난하지만 그 속은 상인보다 더욱 저열한 인물.
그리고 그녀는 깨달아버린다.
그는 맡은 배역이 아닌데도, 귀족역을 맡은 자신보다 배역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표현력의 수준은 어른과 아이만큼이나 차이난다고.
유명의 연기가 끝났을 때, 카이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짝짝 치다가 페이스의 눈치를 보고 황급히 손을 내렸고,
페이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역시…다른 세상 사람···’
그녀의 의기소침한 표정을 보고 , 유명이 다시 불을 지른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생계를 접고 오셨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페이스는 ‘연기를 생계로 삼을’ 정도의 연기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 [안 되는 걸 요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연출로서 페이스가 제대로 노력한다면 해낼 수 있을 정도까지는 계속 요구할 겁니다. 그 정도 각오는 보여주시겠죠?]그녀가 숙여진 고개에서 어떤 결심이 빛났다.
*
[괜찮아요, 페이스?] [괜찮진…않아요. 상당히 아프네요, 이거.]유명과 카이가 나간 연습실, 제프리가 페이스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페이스는 조금 지친 얼굴로 살짝 웃었다.
[신유명씨…좀 너무한 거 같아요.] [……] [사실 같은 배우고 참가자면서, 본인이 진짜 연출인 것처럼…오늘 페이스를 몰아붙이는 건 너무 심했어요. 심지어 이미 페이스가 맡은 배역을 본인이 연기하다니, 그건 좀···] [제프리. 내가 요구한 일이에요. 후회할 거라고 했는데도 내가 후회하지 않겠다고 해보라고 요구했고요.]그녀는 웃음을 싹 지우더니 표정을 굳혔다.
[아…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에게 몇 가지 불만을 표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그로 인해 혜택을 받는 입장이잖아요?]그녀의 비판적인 어조에 제프리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팀전이라고 하지만, 이번 스테이지에서 신유명씨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에요. 1,2차에서 그 정도 활약을 한 인물을 방송사가 떨어뜨릴 리가 없죠. 결국 그는 프리패스나 다름없는 단계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끌고 가겠다고 등에 업은 거에요.] [어어…음···] [왤까요? 그게 물론 초면인 우리를 위해서는 아니겠죠. 좋은 극을 만들어서 자신의 연출력과 리더십을 어필하려고?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겠군요. 혹은 그냥 연기에 미친 연기바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어쨌든간에…우리가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그게 다음 단계에 진출할 가능성이 됐건, 연기적인 훈련이 됐건 나는 그에게…고마운 입장이에요.] [네에…사실, 저도 그래요.]제프리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냥 페이스를 위로해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렇게 스스로를 냉철하게 판단하는 사람인지 모르고 괜한 참견을 했네요.]그 말에 페이스도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내가 너무 오버해서 얘기했군요. 꼭 제프리한테 한 말은 아니고…내 자신에게 다짐하는 의미가 더 컸어요. 그에게 고마운 입장이라는 걸 잊지 말자고.] […?] [사실, 그의 ‘귀족’ 버전을 보고 좀 충격받기는 했거든요···]그녀가 씁쓸히 웃는다.
[‘귀족’이라는 것에 얽매여서 너무 캐릭터를 단편적으로 생각했어요. 대사치는 속도도 속도지만, 캐릭터도 다시 한 번 빌드업해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큰일이네.] [제가 돕죠. 어차피 대사 치고 받는 연습도 해야하니까. 오늘 나머지 연습할까요?] [좋아요, 제프리.]연습실을 나가다 아무래도 페이스가 마음에 걸려서 다시 돌아왔던 유명은, 연습실 문 앞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슬쩍 웃었다.
제프리가 페이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낙심한 틈을 타서 그녀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보려다 된통 깨진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녀, 강하구나.
무던한 성격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성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오늘 유명과의 대치가 그녀에겐 독이 아닌 약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제프리 레인.
그는 무던해 보이지만 눈치가 빠르고 욕심이 분명한 인간이다. 카이와 페이스가 집중하는만큼, 자신만 평균 이하로 처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전 멤버의 장악과 동기부여가 끝났다.
이제, 달리면 된다.
*
시간이 지나며, 배우들의 연기는 착착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페이스와 제프리의 합은 놀랍게 좋아졌다.
한껏 고상을 떨면서도 꾸욱 누른 비열함이 조금씩 비집고 나오는 페이스의 연기와, 능글맞게 귀족을 약올리며 대놓고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는 상인의 캐릭터 조합이 무척 좋았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귀족과 상인만 맞붙으면 대사가 숨 쉴틈 없이 속사포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느긋하게 끼어들어 딴 소리를 하는 왕. 왕족 특유의 아우라가 넘치는 왕은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는 대사들을 툭툭 내뱉어 웃긴 장면도, 속터지는 장면도 만들어냈다.
어느새 그들은, 유명을 같은 참가자가 아닌 이 극의 ‘연출’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본선 3일전,
유명이 어울리지 않게도 연습장에 지각을 했다.
[안녕, 유명씨?] [웬일로 10분 늦었네요? 늘 제일 먼저 나오던 사람이…이런 인간적인 부분도 있었네.] [형, 제프리형도 방금 전에 왔대요~] [야, 카이!]그런데 뛰어들어온 유명이 그들 앞에 대본을 들이대며 숨을 몰아쉰다.
[자..잘못..] [에이, 괜찮다니까요 형.]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대본 해석요. 완전히 잘못…해석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그 말은, 모두의 동공에 지진을 불러 일으켰다.
157 네 장의 그림
[대본 해석이…잘못 돼요?] [처음 대본을 볼 때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았나요?]팀원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문을 담는다.
너는? 글쎄 나는 잘··· 너도?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들이 오고 가고,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시선은 유명에게로 모인다.
[저는 계속 위화감이 있었거든요. 괜한 느낌인가 싶어서 얘기는 안했지만, 계속 대본을 살펴보다가 오늘 깨달았어요.] [어떤 위화감요?] [첫 번째로, 왜 캐릭터에게 이름이 없을까요?]그 말에 카이가 대답한다.
[그야, 다 각 계급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 굳이 이름 없이 표현한 게 아닐까요?] [그쵸. 상징성. 그렇다면 그 상징적인 인물들이 모여있는 이 장면은 과연 현실적인 장면일까요, 상징적인 장면일까요?]그 말에 페이스가 어?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보니, 이 장면 자체가 좀 있을 법 하지 않은 장면이긴 하네요. 왕과 귀족 대표와 상인 대표와 노예 대표가 한 자리에서 대담을 나누다니, 가능한 장면인가요?] [그쵸? 심지어 재판정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네 명이 모여있는 장면 자체가 상당히 모순적인 느낌이에요.]조금씩 모두의 표정이 야릇해진다.
[두 번째, 왕이 너무 담담해요. 무려 왕자가 죽은 상황이면, 굉장히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어떤 감정적인 변화가 있을 법도 한데, 왕의 대사들이 하나같이 무심하지 않아요? 내 아들이라는 표현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요.]그 말에 카이가 흠칫했다.
[그러고보니···] [왕으로서 귀족과 상인 양쪽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제삼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네요. 이걸 왜 이제 깨달았지?] [하지만 이 왕은 허수아비 왕이니까, 왕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한 발 떨어져 있다고 본다면요?] [정치적으로는 그렇다고 해도, 왕과 왕자는 혈연 관계가 있을 텐데요. 죽은 왕자가 왕의 아들이건 동생이건 가까운 친인척이건, 심정적인 동요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본인이 거주하는 궁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인데요.]그 때, 카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음…사실 저도 그런 위화감은 느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해보다 만 적이 있는데…] [어떤?] [혹시 ‘왕이 왕자를 죽인 배후’가 아닐까 하고요…] [그건 기발한 해석이네. 다만 그 얘기를 우리 앞에서 안 꺼낸 이유도 있었지?] [네…대본에 그런 음모를 가정할만한 다른 단서가 안 보여서…]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예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지만, 자의적인 해석인 느낌이 좀 강하지? 기본적으로 배우는 대본에 근거한 해석을 해야 하니까.]유명은 카이에게 살짝 웃어준 후, 모두를 향해 한 가지를 더 부연했다.
[또 하나 마음에 걸렸던 것은, 상인의 태도입니다.] [어…상인은 어떤 부분이···?] [아리자데 왕국에서 아마도 상인은 귀족만큼의 실권을 갖고 있겠죠. 하지만 너무…경솔하지 않은가요? 귀족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다음 왕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진 로슈 왕자를 대놓고 지목하는 것도.]상인인 제프리가 동의한다.
[그 점은 저도 좀 그랬어요. 왕과 귀족과 맞대면할 정도의 상인이라면 보통 수완가가 아닐텐데, 증거도 없이 유력한 황위계승권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모습이 조금 언밸런스하기는 했습니다.] [네. 이런 부분들이 다 조금씩 마음에 걸렸었는데, 오늘 아침에 대본을 다시 보다가 놓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뭔가요, 그게?]모두의 궁금함이 극에 달했을 때, 유명은 그들의 앞에 놓았던 대본의 첫 장을 펼친다.
[여기요.]-네 장의 그림이 걸린 왕궁의 거대한 홀의 정중앙에서 1왕자, 키신이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유명이 짚은 것은 ‘네 장의 그림’이라는 단어였다.
*
[이게 왜···?] [전혀 필요가 없는 수식어잖아요. 홀 안에 어떤 샹들리에가 있는지, 어떤 카펫이 깔려있는지 그런 묘사는 하나도 없으면서, 단 한 가지 주어져있는 정보가 ‘네 장의 그림’이에요.]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유명씨 생각은 뭐에요? 네 장의 그림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희가 연기하는 왕, 귀족, 상인, 노예···]유명이 각각의 배역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친다.
[그림 속의 인물, 아닐까요?]그리고 내놓는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뜬다.
유명이 모두의 눈을 감도록 부탁한 후,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머리속에 떠올려보도록 한다.
[왕궁의 거대한 홀. 한밤중에 약을 먹은 왕자는 비틀비틀 걸어 들어와 홀의 한가운데서 절명합니다.] [……] [다음 날 아침, 왕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궁전은 발칵 뒤집어졌겠죠. 시체가 치워진 후에도 그 자리엔 많은 사람이 다녀 갔을 거에요. 바쁘게 오가는 조사관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홀 바깥을 서성이는 귀족들, 왕자가 죽은 자리에 찾아와 울음을 터뜨리는 모후와 공주들. 왕자를 자신이 죽였다는 나르바의 자백이 이 홀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요.]낮은 목소리가 모두의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며칠동안이나 시끌벅적했던 왕궁의 홀로.
[그리고, 밤이 찾아옵니다. 왕궁의 홀에 걸려있는 네 장의 그림에는 아리자데 왕국을 구성하는 네 가지 신분이 담겨 있습니다. 왕, 귀족, 상인, 노예.]세 개의 어깨가 움찔 떤다.
[그것이 실존했던 인물의 초상화인지, 혹은 그저 각 신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 상징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 밤에 슬그머니 그림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각자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이 나라에서 언제나 그러해왔듯이, 가장 목소리가 큰 것은 귀족과 상인.
그들은 낮에 주워들은 왕궁안의 소문을 토대로, 각자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허수아비에 불과한 왕은 그들의 말에 이랬다 저랬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드디어 나온 노예의 바른 증언에, 귀족과 상인은 담합하여 그 입을 막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장면은 아리자데 왕국의 상황을 축소판으로 보여주고 있죠.하지만 이 모든 일은 그림 속에서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해가 밝아오면 인물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림 속으로 사라집니다.]
유명의 말이 끝나자, 그들은 말없이 각자의 대본을 꺼내더니 맹렬히 읽기 시작했다.
드문 드문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가장 먼저 덮은 제프리가 유명에게 물었다.
[맞는 것…같군요. 그럼 전체 극에서 이 장면의 용도는 뭐였을까요?]마지막 부분을 읽던 카이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오오- 하고 소리친다.
[형! 여기 노예의 증언 파트에서, ‘저는 왕자 전하의 발치에서 그 분을 늘 지켜보았습니다’ 이 부분요. 혹시 왕자의 방에도 노예의 그림이 걸려 있었던 것 아닐까요?]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왕이 될 사람으로서, 가장 낮은 이들을 생각하라, 그런 교훈의 일환으로 노예의 그림이 걸려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가 방에서 스스로 약을 먹는 왕자를 본 목격담을 풀어놓은 거고.] [그럼 노예의 증언은…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겠군요?] [네. 결국 귀족이나 상인의 뜻대로 죽음이 무마되었을 공산이 크죠.]모든 퍼즐이 맞추어진 듯, 다들 시원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저희는…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아···] [처음엔 놀라서 당황했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무리할 필요는 없겠다 싶네요. 어차피 저희가 받은 것은 조각 대본이고, 이 대본에만 충실하게 연기해도 충분히 좋은 평을 받을 테니까요.] […왜 그런 장치들을 깔아놨을까요?] [음…숨은그림찾기? 이거 꽤 의도가…뭐랄까, 심술궂어 보여요. 여기까지 알아낼 사람은 없겠지만- 알아내도 연기하긴 어려울테지만- 이라는 느낌으로 집어넣어 놓은 설정 같달까요.]유명의 그 말에, 페이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다.
[그건 좀 열받네요···] [뭐 실제로도 감쪽같이 모를 뻔 했으니까요. 이걸 몰랐다고 감점 요소는 아닐 거니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인즉슨, 이거까지 파악한다면 가점이 있을 거라는 얘기겠죠?] [‘제대로’ 연기해낸다면요.]남은 시간은 이틀.
[저는…해봤으면 좋겠는데요. 유명씨라면 이미 떠오른 연출 방향이 있을 테죠?] […있긴 하지만, 그러려면 거의 잠잘 시간도 없을 겁니다. ‘정물’로서의 특성을 연기에 녹이려면 상당히 힘들 거에요.] [저도 모험에 한 표 던집니다. 물론 저희가 상당히 열심히 하긴 했지만, 다른 팀에도 대단한 인물들이 많을 거에요. 50팀 중 최고의 평가를 받으려면, 확실히 차별화가 될 만한 부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형…저도요. 남은 시간동안 한숨도 안 자고 연습해도 좋아요.]2주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들의 눈빛.
열의와 신뢰를 가득 담고 고생을 자처하는 그들의 표정에 유명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해 봅시다. 잘만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재밌는 그림이 나올 것 같군요.]그들은 남은 이틀간 합숙에 돌입했다.
*
캐스팅보트 1화가 한국어 자막을 입힌 채로 인터넷에 풀리기 시작한 것은, 1화가 방영되고 불과 하루 후. 과연 인터넷 강국이라 할 만한 속도였다.
그리고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유명, 한국에서는 극찬받던 연기력, 헐리웃 수준에는 못 미쳤나. 1차 가까스로 통과.] [캐스팅보트 1차 예선, 신유명의 선택은 ‘트루먼쇼’. 큰 반향은 없었다.] [신유명 연기력 거품 설. 순발력과 즉흥성이 필요한 오디션에선 맥을 못 추나.]그리고 유명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주목받은 것은, ‘도효준’이라는 새로운 얼굴이었다.
[한국 무명배우 도효준, 캐스팅보트 1화의 엔딩 차지해.]개중에는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는 신유명씨 연기 너무 좋았는데요. 한국과 미국의 갬성이 다른 걸까요?
-나탈리 카센도 상당히 감동받은 표정…아니었어요?
-제작팀 쪽에 찍히기라도 했나…왜 저런 연기가 별 비중 없이 다뤄졌을까···
하지만 편집의 힘이란 엄청난 것이다.
시청자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을 보고, 카메라가 의도한 것을 믿게 된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악마의 편집과 띄워주기식 편집에서 증명되어온 사실.
사실 결과는 1차 합격인데도, 놀라 자빠지는 주변인들의 표정이나 나탈리 카센의 칭찬 멘트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초라하게 느껴진다.
유독 화려하게 조명된 도효준이라는 인물 때문에, 그 초라한 느낌은 가중되었다.
스타를 밀어올리는 것 만큼이나,
올라간 스타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여론은,
바짝 신이 나서 유명의 성과를 난도질해댔다.
그럼에도 갓네임드의 팬들은 동요하지 않고, 과도한 폄하에 조용히 반박 댓글을 남기거나 유명의 클립을 따서 해외 팬사이트에 올리며,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는, 한 쌍의 남녀가 캐스팅 보트 1화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고마워. 내가 이런 걸 잘 못해서 당신 올 때까지 기다렸네.”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게 말야.”
유명이 떠나기 직전, 그들은 소수의 지인들만 불러 식을 올렸고, 선하가 한성의 집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작품의 지방 로케로 며칠 집을 비웠던 선하는, 돌아오자마자 한성의 재촉에 캐스팅보트 1화를 다운받았고, 함께 보기 시작했다.
유명의 파트가 지난 후 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이 자식은 가면 갈수록···”
“그러게. 이 정도인데 왜 캐스팅보트에서는 조명을 안 했을까?”
“아무리 국적에 따른 취향이 갈린다고 해도 이걸 못 알아봤을 리는 없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그런데…아무리 편집을 그렇게 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어떻게 이걸 몰라보지?”
“그러게 말야. 나중에 반전될 때 볼 만하겠네.”
“오랜만에 트루먼쇼 보고 싶네. 같이 볼까?”
그들은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트루먼쇼를 찾기 시작했다.
“어우, 근데 진짜…어떻게 저 정신없는 환경에서 저런 연기를 하냐.”
“진짜 얄미워.”
VOD를 결제하고, 그들은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걱정은 눈꼽만치도 않는 표정이었다.
*
[됐어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