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
{喜(즐기다)演에 好(좋아하다)演이라···
저런 밍밍한 삶에 엄청난 자극이었을 만은 하지.}
연귀는 팝콘 한 줌을 더 털어넣으며 뇌까렸다.
그 뒤로는 그가 맡은 역들이 휙휙 지나간다.
주연은 한 번도 없다. 조연도 손에 꼽을 정도. 그러므로 물량은 주조연급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십여명의 준조연, 백여명의 단역, 천여명의 엑스트라를 섭렵하며 15년을 단역배우로 살아온 인간의 일생.
그 대략의 일생을 플래시백으로 넘겨본 연귀는 아공간에서 사이다를 꺼내어 원샷했다.
{으으…목이 막힌다. 사이다! 사이다가 필요해!}
*
치익- 딱-
꿀꺽꿀꺽-
유명이 사이다를 마신다.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쓰지만 멍한 표정.
그는 다시 한 번 손에 든 검사결과를 들여다보았다.
-간암 말기입니다. 이미 다른 장기로도 암세포 전이가 진행됐습니다. 당장이라도 입원하셔야 합니다.
-네? 어…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러게요. 보통 황달이나 심한 피로감 등 때문에 그 전에 병원에 오시는데···
-그런 증상은 없었는데요.
어릴 때부터 골골하긴 했었다.
이상하게도 연기를 시작하면, 무거운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바르작거리면, 서서히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던 건 그냥 기분이었나 보다.
아니면 술.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한치 앞이 안 보이는 미래를 생각에서 지우기 위해 너무 자주 술을 마셨던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는 극단 캐스팅이 있다.
15년간 몸담은 극단의 정기공연. 1년에 2번씩 있는 이 정기공연을 유명은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
만성 적자의 중소 극단에서는 페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후배들 밥값, 술값으로 돈이 더 들게 되어 살림이 빠듯해지지만,
그런 극단이기 때문에, 한 줄이라도 대사가 더 있는 배역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번엔, 조연이라도 도전해보려고 했는데···’
오전의 그 느낌. 연기가 손에 단단히 잡힐 듯한 느낌.
그 때 유명은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이 느낌대로 연기한다면 조금 더 비중있는 역할을 욕심내보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나가리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미 연습을 버틸 수 있는 몸이 아니니까.
유명은 한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두 글자를 찍고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천천히 지운다.
[ㅅ][ㅈ][ㅇ]다시 세 음절을 찍고 뜨는 하나의 이름을 누른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어? 오빠? 오빠야?”
“어…지연아.”
“웬일이야. 그렇게 전화를 해도 안받더니. 집에 전화도 좀 드려. 엄마아빠가 오빠 밥은 제대로 챙겨먹나 모르겠다고 얼마나 걱정하시는데.”
다다다다- 쉼없이 흘러나오는 잔소리.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비전이 없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며 뛰쳐나간 후, 죄송한 마음에 집에는 자주 얼굴을 내비치지도 못했다. 뜬금없이 찾아가서 아들은 몇 개월 후에 죽는다는 말을 전해드려야 하나.
울컥-하고 목이 메이려는 것을 겨우 참아삼킨다.
“오빠. 왜 말이 없어. 무슨일 있어? 어디 아파?”
“아니야. 곧 집에 한번 들를게. 너한텐 늘 미안하다.”
“어우 징그럽게 왜그래. 미안하면 집에 연락이나 자주 좀 드려.”
“그래.”
겨우겨우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혼신의 연기였다.
목소리만 들려서 다행이다. 표정 연기까지는 불가능했으니까.
유명은 수화기를 놓고, 결국,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
유명은 술에 만취해 밤길을 걷고 있었다.
“포텐은 개뿔···”
극단 캐스팅에 지원해버렸다.
공연에 서지 못할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도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간암이 낫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오늘 오전처럼만 연기하면 좋은 역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하지만, 똑. 떨어졌다.
‘오전만 해도, 금방이라도 연기가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하지만 오후에 극단 무대에 서자, 그 느낌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다시 있는듯 없는 듯 존재감없는 물같은 배우, 신유명 그 자신이었다.
이번엔 단역 하나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병신.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도 고작 그 정도였다니.”
입 밖으로 쓴 대사를 뱉고 나자, 마음이 더욱 울적해졌다.
삐걱-
유명은 한 손에 편의점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비틀비틀 원룸의 문을 열었다.
홀애비 혼자 사는 누추한 단칸방이다.
낡은 매트리스, 많지 않은 옷가지들, 싱크대 안의 그릇 몇 개.
방안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수백 권의 대본들만이 황량한 풍경의 주인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덤덤한 성격의 유명이었지만,
오늘따라 살풍경한 방이 마음에 유독 꽂혀온다.
‘참, 재능도 없는 놈이 꿈만 꾸느라 본데없이 살았구나..’
유명은 널린 대본을 발로 슥슥 헤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방금 사 온 맥주 한 캔을 깠다.
치익-
“나도 하나만.”
그 때 옆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고, 돌아본 유명은
“으악-!”
비명을 질렀다.
웬 여우 한 마리가 사람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옆에 앉아 있었다.
*
“뭐…뭐야 이건.”
“뭐야라니, 실례라고.”
여우는 유명 앞에 놓여있는 맥주캔을 낼름 집어들었다.
“난 연귀라고 해.”
“연귀?”
“연기의 귀신이란 뜻이지.”
놀란 것도 잠시,
의외로 쉽게, 유명은 평정을 되찾았다.
‘취해서 헛것이 보이나 보다.’
아직 술이 덜 깼고, 그는 취하면 경계심이 무뎌지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해롭지 않게 생겼다. 귀신이라고 하지만 생김새는 은빛 털이 반질반질한 여우다.
등 뒤로는 여러 개의 꼬리가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구미호네? 생간이라도 필요해? 나 간암이라는데 썩은 간이라도 주랴?”
여우는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구미호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그거구나. 생간 빼먹었다가 까딱하면 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여우가 사람처럼 목젖을 꿀떡이며 맥주를 넘겼다.
“간암이라…이상할 것도 없지. 생기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장부가 간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생기가 없다고. 인간 수준이 아니야, 생령급?”
“뭐?”
“사실 진작에 죽었어야 하는데 여태 버틴 게 이상할 정도거든?”
유명은 여우를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야 말이 심하잖아.”
“너 이름이 뭐야?”
“신유명.”
“有名이라. 허허 참. 이름 누가 지었어?”
“돌아가신 할아버지라던데.”
“조부가 살렸네.”